이선영
표면의 가장자리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성인키보다 큰 둥근 캔버스들은 작가가 작업을 하면서 누렸을 ‘몰입의 즐거움(finding flow)’(전시부제)을 준다. 몰입이란 단순히 대상과의 밋밋한 대면을 넘어서,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어지는 질적 전화의 단계이며, 예술적 산물 중 최상의 선물일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전념만으로 가능하다. 종교나 향정신성 약물도 그런 것을 가능케 하겠지만, 예술은 새로이 창조된 감각적인 대상을 매개체로 한다는 차이가 있다. 몰입적인 작품에는 파편화된 노동과 다른 총체적 작업, 일상적 문화와 다른 예술, 소소한 쾌락(pleasure)과 다른 열락(jouissance), 그리고 피상적 소통과 다른 전염이 있다. 밀도가 강할수록 전염력은 커지며, 주어진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문수만의 작품에서는 그것은 일단 규모의 차원에서 관철되지만, 작은 작품들 역시 그 밀도감에 의해 비슷한 효과를 준다.
Coherence-01_Ø210cm_Oil & Acrylic on Canvas_2016
한눈에 들어오는 규모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 세밀함에 빠져 관객이 머무는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작품 속에 간혹 등장하는 실제 크기의 나비에 감정을 이입시킨다면, 둥글거나 사각형의 평면은 더욱 광활하게 다가올 것이다. 큰 작품 역시 작품 제작 단계에서부터 관철된 강도가 느껴진다. 사진으로만 보면 이런저런 청자백자 접시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작품은 작은 접시를 사람 키 크기로 확대시킨 것이 아니라, 작은 접시를 채운 무늬의 밀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큰 화면으로 관객의 눈앞에 펼쳐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도자기를 완상할 때의 그런 아기자기한 느낌을 넘어선다.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도자기의 한 요소를 전면화함으로서 새로운 심미적 차원을 여는 것이다. 가령 도자기에 묘사된 푸른 하늘을 나는 학의 모습은 그릇의 한계를 벗어나 더 넓은 평면 위로 날아다닌다. 그 또한 착시이고 상상이지만, 규모가 달라짐으로서 색다른 체험이 야기된다.
그것이 가능한 우선적 이유는 최초 참조대상의 밀도를 유지, 확장하는 변형의 기술에 있다. 통상적으로 몰입을 지향하는 작품은 특정한 대상보다는 전체적인 환경의 연출에 더 주력하지만, 문수만의 경우 개별적 작품에 주목한다는 점이 다르다. 연극적 효과를 지향하는 몰입적인 작품은 시각성 외에 다른 감각들이 총 동원되곤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다른 감각들은 작품 [調香]에 나타나 있듯, 대상 내부로 접혀 들어가 있다. 물론 전시장에서는 여러 작품들이 어우러져 총체적인 효과를 자아내지만, 작품 하나하나의 국면 또한 몰입적이다. 그것은 냉정한 거리감을 두고 하나하나 파악해 나갈 수 있는 심미적 체험을 야기하면서도, 지금 여기와 다른 별천지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직면한 대상 안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정신적 여행(trip)이 가능한 작품들에서 최종적 산물과 과정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은 무너진다.
Coherence-02_Ø210cm_Oil & Acrylic on Canvas_2016
Finding Flow-07_Ø180cm_Oil & Acrylic on Canvas_2016
그의 작업실에는 둥근 캔버스가 제일 작은 것(지름 36.5cm)에서 제일 큰 것(210cm)까지 켜켜이 겹쳐져 16개가 하나의 세트로 보관되어 있다. 마치 인형 속에 작은 인형들이 겹겹이 들어차있는 러시아의 목각 인형 마트로시카 같은 방식으로, 운송 및 보관의 용이 점 외에, 우주 속에 또 다른 우주들이 이어져있다는 세계관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대우주와 소우주는 상응(相應) 관계에 있고, 무한한 계열을 이루면서 서로를 비춘다. 그러나 작업과정이 공개되지 않는 한, 그의 작품이 캔버스에 그려진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다. 둥글거나 길쭉한 형태들은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청자나 백자, 금속공예품과 같은 사물의 표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전시장은 작품을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만져보고 두들겨 보는 관객들 때문에 난감하다. 그의 작품은 도자기나 금속공예에서 불가능한 규모의 표면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공예도 그림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놓인다.
고려시대 청자상감 운학매병 같은 국보급 도자기의 도상을 참조하였으며, 그 산물 역시 고풍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문수만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한 사물로 다가온다. 이러한 애매함이 현대미술을 궁지로 몰았지만, 동시에 자기 정체성이 되기도 했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반대되어 보이는 것이 하나가되는 역설은 꼬리를 물며 도는 원형 캔버스에 예시되는 듯하다. 원본이 된 도자기들은 3차원적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이를 2차원으로 펼치면서 변형이 일어난다. 여러 형태의 도자기 위에 그려지거나 새겨진 무늬가 원에 맞게 재배치되는 차원의 변주 속에서 없던 무늬가 들어가기도 한다. 그는 도상과 도상 사이의 연결부위에 요구되는 형태를 새로 만들어 마치 원래 있었던 무늬처럼 배치한다. 김홍도의 화성행궁 행차도를 참조한 작품 [with mother]에서도 나타나듯, 넓은 공간은 줄이고, 좁은 공간을 넓히는 식의 변주도 일어난다.
Finding Flow-03_Ø160cm_Oil & Acrylic on Canvas_2016
Finding Flow-04_Ø160cm_Oil & Acrylic on Canvas_2016
이 복잡한 재편집의 과정에서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다. 미술을 전공하기 전에 기계공학과에서 기계 설계를 전공한 작가에게 미술과 과학은 자연스럽게 융합된다. 그림에만 매몰되어 있는 화가가 흔히 가질법한 기계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작업실에는 작은 형상들을 재현하는데 필요한 돋보기부터 재배치한 도상들을 정교하게 재현하기 위해 중간과정에서 필요한 시트 커팅기 등 다양한 도구들이 캔버스와 물감들 사이에 놓여있다. 그가 가진 기술적 역량은 2차원을 넘어 3차원으로 확장해 가려는 앞으로의 전망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3차원 사물에서 2차원 그림으로 변주는 물감을 이용한 상감기법을 통해 가능했다. 바탕 작업부터 문양, 바니시 처리까지 60번을 넘게 칠하는 작업공정은 작품의 표면이 그림이 아니라, 자기 같은 느낌을 주게 한다. 겹겹이 쌓인 물감을 갈아냄으로서 절묘한 무늬부터 자잘한 크랙에 이르는 선들이 단층처럼 드러난다.
대구 수성아트피아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새로이 시도된 것은 청자 뿐 아니라, 청동 분위기를 상감기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청자 표면 위에 분신처럼 사뿐하게 앉아있던 나비가 빠진 작품, 무늬는 없고 크랙만 있는 백자 같은 평면도 보인다. 눈으로 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백자 표면 형태의 작품은 원형 캔버스 틀 바깥으로 이미지들을 다 밀어낸 듯하다. 백자 표면 형태의 작품에 거미줄처럼 새겨있는 미세한 크랙은, 오래된 사물을 연출할 때 흔히 하듯 재료나 시간성 같은 우연적 요소에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상당부분 관철된 것이라는 점이 놀랍다. 재료와 조건에 대한 오랜 실험 끝에 크랙은 자유자재로, 즉 넓게도 쪼개고 좁게도 쪼개고, 이중으로도 쪼개진다. 이렇게 깨진(또는 깨트린) 틈새로 미세한 물감을 침투시키고 물감을 갈아내면 일종의 ‘크랙 상감’이 된다. 섬세한 무늬처럼 보이는 크랙은 일일이 그린 것도 아니며, 그대로 방치한 것도 아니다.
Finding Flow-05_Ø180cm_Oil & Acrylic on Canvas_2016
Finding Flow-06_180x180cm_Oil & Acrylic on Canvas_2016
구상적인 형태 대신에 크랙이 상감되어 있는 작품들은 마치 모더니즘 말미에 귀결된 텅 빈 캔버스를 떠오르게 한다. 청자 같은 표면을 가진 작품들은 청자를 명품이게 했던 미묘한 색조를 재현하는데 방점을 찍는다. ‘김장철 배춧잎 얼어터진 듯한’ 그런 짙은 푸름부터 ‘녹색이 들어간 우윳빛 나는 청록’까지 작가가 구현하고 또 모델로 삼는 청의 계열은 무한하다. 그에 의하면 청자색에는 빨강, 검정, 파랑 등 모든 색이 다 들어간다. 단지 비율만 틀릴 뿐이다. 이렇게 미묘하게 만들어진 색조 위에서 만이 학도, 용도 날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작품에는 팔랑거리는 나비 또한 가세한다. 나비의 그의 초창기 작업에서 정밀한 눈속임 기법으로 재현된 바 있는데, 여기에서 사각 캔버스는 일종의 수집장이 된다. 한 마리 한 마리 수집하여 날개의 무늬를 관찰하기 쉽게 펼쳐 바늘로 꽂고 학명까지 붙이면, 하얀 상자 안에 안치되어 그림자까지 떨구는 나비 컬렉션이 완성되는 것이다.
문수만의 초기 작업은 재현이라는 방식이 알고 지배하고 소유한다는 방식에 기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최근 작업에서 작가는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유한 나비들의 핀을 제거하고 청자 빛 표면 위에 풀어놓았다. 큰 수술을 이겨낸 작가에게 나비는 재현 대상만은 아니었다. 문수만에게 나비는 주체이기도 했다. 작품 싸인이 나비에 새겨져 있을 만큼 자신의 분신이다. 나비 한 마리를 정교하게 재현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해야 그려진다고 한다. 청자 표면 위에 풀어놓은 나비는 육체적으로 보다 자유로운 상태를 꿈꾸지만, 배경만 바뀌었을 뿐 그 밀도가 약해지지는 않았다. 나비는 다른 도상들과는 달리 실제 크기이며, 한 평면에 하나씩만 있다. 그것들은 보여 지기 위한 것이 아닌 날기 위한 날개를 강조하면서 그 아래로 그림자까지 떨군다. 바탕이나 나비나 똑같은 환영이지만, 차원을 달리한 환영이 공존하는 것이다.
調香-01_Ø160cm_Oil & Acrylic on Canvas_2016
To Father_Ø210cm_Oil & Acrylic on Canvas_2016
서양의 정물화에서 꽃과 함께 그려진 곤충은 인생무상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했지만, 동양적 배경을 자연 삼아 날아다니는 그의 나비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떠올린다. 작가는 나비가 되어서 청자나 백자를 만들었을 도공의 솜씨를 감탄하면서 감상한다. 관객 또한 나비가 되어서 이 작품 저 작품을 둘러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단계로 변태하면서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성체로 자라나는 나비는 모더니즘의 신조가 된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 아니라, 이미 씨앗 속에 내재된 잠재력을 차츰차츰 펼쳐나가는 차이와 반복을 실행한다. 그것은 모더니즘 이전의 문화와 예술이 자연의 법칙을 따라 수행해온 규칙이었다. 나비는 수집장이기도 한 이전의 사각 프레임을 벗어나 무한을 상징하는 평면 위에 날아다니며 그 너머를 본다. [Coherence], [Finding Flow] 등으로 붙여진 청동 상감작품은 대칭적 문양을 새긴 청동 표면 같은 모습이다.
녹슨 청동기 같은 푸르스름한 녹과 거뭇거뭇한 얼룩이 오래된 물건의 느낌이 살아있으며, 가장자리로 갈수록 표면은 울룩불룩하다. 또 하나의 작품군은 나비가 없는 청동 도자기 표면 형태의 작품들인데, 마치 우주를 담은(또는 닮은) 동공 형상의 [調香] 시리즈는 향수제조자가 향수를 만들 듯이 섬세하게 제작되었고, 다른 감각과의 조응(照應) 또한 꾀한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진해지는 그라데이션은 마치 써클 렌즈처럼 입체감을 준다. [poter's wing]이라 붙여진 청자 표면 위에 나비가 있는 작품들은 초기작품에 등장하는 정교한 나비 외에, 다른 작품에도 나타나는 초충도의 나방 등이 청자를 하늘로 삼아 떠다니는 시리즈다. 나비가 단독으로 등장하는 이전의 작품이 정교하게 재현된 나비 안에서 소우주를 발견했다면, 둥근 청자 표면과 결합된 나비는 우주 속의 또 다른 우주라 할만하다. 나비든 자기든 그 형태는 너무 완벽하여 허무해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작가는 때로 화면에 ‘인간적인 부분’도 남겨둔다.
(참고도판) Le papillon-37_Oil & Acrylic on Canvas_2008
전시에는 원형 캔버스 외에 스마트 폰처럼 네 모퉁이를 굴린 사각 캔버스도 등장한다. 거기에는 신사임당의 초충도와 김홍도의 행차도 등을 변주한 도상들이 원이나 직사각형 구도에 맞춰 재배치된다. 10개의 직사각형 패널을 연결시킨 대작이 나오긴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독특한 인상을 주는 것은 둥근 캔버스이다. 사각형 작품에는 원형이 들어가기도 하고, 원형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둥근 틀은 사각 틀 보다 더 응집력 있고 자족적인 소우주를 이룬다. 그의 작품 [조향]에 나타나듯 둥근 형태는 최초의 폭발 이후에 팽창해 나가는 우주나 그 우주를 보는 눈의 형태를 떠올린다. A. 야페는 [미술과 상징]에서 원은 모든 각도에서 보는 영혼의 총체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정신으로 비유’(플라톤)되었다고 말한다. 꼬리를 무는 선인 원은 유한하면서도 무한하고 정적이면서도 동적이다. 이러한 양면성을 포괄하는 원은 동서고금을 통해 완전함을 상징해왔다.
그 안쪽은 신성하고 바깥은 그렇지 않은 경계가 되어, 자아, 집, 사원, 요새, 도시 등을 구축하는 모델이 되기도 했다. 종교에서 원형과 관계된 도상은 성인 머리 뒤의 후광이나 만다라 같은 것에서 발견된다. 문수만이 애용하는 원형 캔버스는 의미 깊은 상징을 담은 또 다른 상징이다. 그것은 세속적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안에서 경계를 치고 대안의 세계를 구축하는 예술의 방식이다. 예술이란 예술 외부에 있는 것들과 달리, 그 안에서 만큼은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신성한 터전이다. 성(聖)은 당기면서 밀쳐내고 유용한 동시에 위험하고 죽음을 줄 뿐 아니라, 영생불멸도 준다.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원형에서 신성한 공간이라는 개념을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주변의 세속적 공간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서 이 공간을 축성했던 원초의 성현을 반복하려 한다. 둥근 원의 중심에는 우주의 중심이 투영되어 있기에, 작품은 세계 창조의 반복이며 우주의 복제이기도 하다.
poter's wing-02_Ø210cm_Oil & Acrylic on Canvas_2015
Poter's wing-20_Ø101cm_Oil & Acrylic on Canvas_2015
엘리아데는 원형의 실현이 끊임없는 인간의 욕구라고 하며, 신성한 공간이나 낙원으로 나타나는 초월적 형태에 대한 향수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인간이 항상 세계와 실재와 신성성의 중심에 있고 싶은 바람, 요컨대 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여 신의 조건을 회복하려는 바람이다. 엘리아데는 [이미지와 상징]에서도, 안과 밖 사이를 성/속의 이분법으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경계로 둘러쳐진 폐쇄된 이 세계를 벗어나면 미지의 영역, 미형성의 영역이 시작된다. 한편으로는 우주화 된 공간이 있고 다른 한편 이 친숙한 공간의 바깥쪽으로 악마, 원귀, 사자, 낯선 존재들이 두려움을 주는 미지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확립된 질서의 파괴, 원형적 이미지의 소멸은 혼돈으로의, 우주발생 이전의 미분화된 상태로의 퇴행이다. 엘리아데는 인간존재라면 모두 총체적 실재, 신성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중심, 스스로의 중심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지향한다고 말한다.
즉 실재의 한가운데에 천상계와의 교신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중심에 있으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욕망이다. 그러한 욕망은 세계의 중심이 그토록 과도하게 활용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낙원에의 향수란 항상,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세계의 중심, 실재의 한가운데에 있고자 하는 욕망을 뜻한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주술적 원의 첫째 목적은 이질적인 두 공간 사이에 칸막이를 세우는데 있다고 보았다. 한편 문수만의 원형은 전래의 상징주의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가장자리로 갈수록 울툭불툭한 형태를 부여하여 중심보다는 바깥으로 향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중심에 자리 잡은 성화된 공간 향유를 넘어, 바깥을 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열린 태도는 전통적 소재를 애용하는 작가로 하여금 고답적인 상징주의를 벗어나게 한다. 상징주의는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중심은 현대의 해체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자유로운 놀이를 방해한다.
Poter's wing-17_77cm_Oil & Acrylic on Canvas_2015
일단 원형 캔버스는 완전한 중심모델을 구현하는데 이상적인 매체로 다가온다. 그리고 문수만은 눈, 또는 자아의 상징으로 여겨질 법 한 원형의 상징주의를 충분히 구사하고 있지만, 그 상징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한 머무름이 거부되어야 하는 이유는, 상징이라는 중심을 가정할 경우, 그 역시 재현주의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상만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관념도 재현된다. 재현주의는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갇혀있다. 객체가 아닌 주체에 방점을 찍는 ‘표현’도 오십보백보다. 문수만의 작품에는 재현만큼이나 생성과 변형이 있고, 앞으로 후자의 몫은 더욱 커질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작품은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국보급 대상을 소재로 하지만, 결국은 음으로 양으로 많은 변형을 거친다. 도자기의 외양이지만 도자기로서는 불가능한 규모의 실현, 차원의 변주에 따른 공간의 적극적 편집과 연결 부분의 창안, 도상과 도상의 병치, 크랙 처럼 배경에 머무는 이미지를 전경화 하는 등의 방식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문수만의 작품이 상징적이라면, 그것은 광의의 개념, 즉 에른스트 카시러가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에서 말하듯이, 감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연결, 즉 외부대상을 고정시키는 수단일 뿐 아니라, 이것을 통해 다시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매개로서의 상징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언어, 신화, 예술, 기술, 과학과 마찬가지로 상징 형식을 가진다. 가령 작가가 상감 청자 등에서 차용하고 있는 여러 도상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그 도상들에는 고고학자나 역사가, 미술사가들이 ‘객관적으로’ 읽어낸 신화적 내러티브가 깔려 있을지 모르지만, 신화에서 저자는 특정되지 않는다. 신화들엔 저자가 없다. 당대의 상징적 우주를 물질로 표현한 도공들의 이름도 익명이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탐구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한 중심, 한 주제, 한 특권적 참조, 한 기원, 또는 절대적 근원에 있어서의 모든 참조에 대한 선언된 포기라고 말한다.
Poter's wing-05_49x123cm_Oil & Acrylic on Canvas_2015
즉 신화의 통일이나 절대적인 원천은 없다. 신화의 발상지나 원천은 언제나 포착불가능하고 실현 불가능하다. 데리다는 신화라는 무(無) 중심적인 구조에 관한 담론은 그 자체가 절대적인 주제도 중심도 가질 수 없음을 강조한다. 신화의 통일은 단지 경향적이고 투영적인 것일 뿐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신화의 통일은 해석의 노력에 의해 일어난 상상적 현상일 뿐이다. 중심의 부재는 여기서 주제의, 저자의 부재를 말한다. 데리다는 우리가 중심을 규정할 수 없고 총체화 작업을 완전히 철저히 할 수 없는 것은 중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기호가, 중심의 대리가 되는 기호가, 중심이 없을 때 중심의 역할을 하는 기호가 덤으로 보충물로 추가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요컨대 중심은 비어있다. 중심을 해체하면 원형의 반영이라는 사고는 사라진다. 반영이 아니라 변형을 위해서, 그렇게도 작가는 원본이라 가정되는 자료들에 충실해왔던 것은 아닌가. 차이를 가늠하기 위해 동일성이 전제되듯이 말이다.
매 전시마다 미묘하게 달라지고 문수만의 작품들은 아직도 진화 중에 있다. 그는 만다라와도 같은 대칭을 각 작품에서 구현하지만, 정작 많은 공력을 쏟는 부분은 중심이 아니라 테두리, 또는 표면이다. 어떤 작품은 그라데이션을 통해 바깥의 밀도를 강화한다. 작가는 중심 부분과 달리 구불구불한 테두리를 도자기의 굽으로 본다. 그는 이 부분을 일본 무사의 검을 끄트머리의 용암처럼 그대로 남겨둔 부분과 비교한다. 이 부분은 캔버스 가장자리를 비롯하여 그 바깥까지 그 파장을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자신의 작품이 궁극적으로 세부적인 묘사를 넘어서, ‘표면을 통해서 그 물질의 본질을 볼 수 있을까’를 묻는다. 캔버스 작업은 도자기 표면과의 유사를 낳을 뿐, 도자 재질과는 거리가 있다. 작품 옆이나 뒷면이 적나라하게 알려주듯이, 작가는 중심이나 내부 보다는 주변과 표면에 집중한다. ‘본질과 외양 또는 원형과 복제라’(들뢰즈)는 이원 항은 하나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With Mother_122x244cmx10pcs_Oil & Acrylic on Canvas_2016
이러한 하나의 차원이 몰입을 가능케 한다. 궁극적으로 문수만의 작품은 재현이 아니라 시뮬라크르를 향한다. 질 들뢰즈가 [시뮬라크룸과 고대철학]에서 재현 대신에 강조한 것은 시뮬라크르다. 그에 의하면 시뮬라크르는 퇴락한 복제가 아니다. 시뮬라크르는 원본과 복제, 원형과 재생산을 부정하는 긍정적인 힘을 품고 있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도, ‘이마주가 모델에 비해 이차적인 존재이기를 그치고, 속임수가 진리를 내세우고, 원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우주, 단지 돌아감과 되돌아옴의 운동 속에서 본래적인 부재가 분산되며 영원한 명멸만이 존재하는 그러한 우주’를 주장한 블랑쇼를 인용하면서, 모든 정초들을 삼켜버리는 시뮬라크르의 성질을 설명한다. 시뮬라크르는 모든 정초들을 삼켜버림으로서 보편적인 와해를 가져오지만, 그것은 부정적 재난이 아니라 긍정적 사건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문수만의 작품은 원본(이라고 가정된)을 모사하는 2차적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미술보다 먼저 전공했던 과학 기술 공학이 ‘시뮬라크라, 즉 원본 없는 복제의 기술적인 바탕’(도나 헤러웨이)이 되고 있는 새로운 실재를 반영하고 있는 것과 같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원본과 복제 등을 가르는 이분법은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의 실재가 된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긴 포르투나스투스의 주머니의 예를 든다. 그 주머니는 엉뚱하게 꿰매어진 수건들로 만들어져, 그 안과 바깥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그 주머니는 세계를 감싸고 있는 셈이며, 안의 것이 바깥의 것이 되고 바깥의 것이 안의 것이 되게 만든다. 이러한 이행은 언제나 표면을, 가장자리를 늘임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의 힘에 의해 표면/가장자리의 다른 쪽을 따라간다. 안과 바깥의 연속성은 심층의 모든 층위를 대체한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고요한 중심과 달리 출렁이는 듯한 가장자리는 구조를 변형시키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시공간을 가리킨다. 작가는 화면의 옆 공간 역시 화면으로 보며, 바깥의 기운을 안쪽으로 들여오려 애쓴다. 이러한 원형의 가장자리에는 ‘표면으로 거슬러 올라감, 그릇된 심층의 거부, 모든 것이 가장자리에서 발생한다’(들뢰즈)는 깨달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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