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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MIOON) / 우리에 관한 상상

이선영

우리에 관한 상상

  

이선영(미술평론가)

 

뮌(MIOON)의 ‘미완의 릴레이’전은 거대한 거울의 방과 동굴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느낌을 준다. 2개 층으로 나뉜 두 전시장을 냉탕과 온탕처럼 활용했다고나 할까. 눈만 아니라 오감이 활성화되는 설치, 즉 연극적 성격을 띄는 작품에서 온도 차이 또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아카이브를 포함해 다양한 요소가 동원되는 경우, 강약 조절이 중요하다. 여러 상황을 표현하는 등장인물들, 이동식 놀이동산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들은 자칫 각자 재미있는 요소들로 흩어질 수 있다. 그동안 군중이나 도시를 표현해온 뮌의 작품 또한 그 소재와 주제가 그렇듯이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조율해 왔는데, 이번 전시 역시 관계들에 초점을 맞춘다. 내용적으로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가, 형식적으로는 빛과 어둠의 관계가 그렇다. 사람(들) 및 사람살이에 대한 은유는 재현의 두 가지 대표적인 방식인 거울과 그림자를 통해 전달된다.




UNFINISHED RELAY_MIOON_arko(사진 출처; 아르코 미술관)



 [바리케이트 모뉴먼트] 중에서



작품 [바리케이트 모뉴먼트]는 ‘보류된 간격’, ‘측정되는 공동’, ‘익명적 수렴’, ‘쌓이는 소리’ 등 4개의 소제목을 단 영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연결하면 더 증폭되는 ‘따로 또 같이’ 시스템이다. 뮌의 다른 작품들처럼. 다각형 스크린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간 내부로 들어간  관객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는 타자들의 얼굴과 몸짓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 빼고, 평범한 이들의 얼굴을 그렇게 크게 마주하기는 힘들다. 관객은 단지 스크린들을 보는 것을 넘어서 스크린 속 인물들에 에워싸인다. 5명의 연극배우가 출연한 그 작품은 6채널의 영상으로 다양하게 편집되어 있다. 구음과 악기소리까지 가세한 일종의 조형적 영화이다. [바리케이트 모뉴먼트]는 한 화면에 각자 존재하는 익명적 개인으로부터 점차 이런저런 관계를 맺어가는 상징적 행위로 이루어진다. 맨 마지막에 붉은 화면을 배경으로 한 긴박한 분위기의 작품에서, 죽음(또는 위험)이 공동체를 호명하는 원동력임을 암시한다. 


희생은 집단을 만든다. 그래서 종교학자나 인류학자들은 인간 사회의 시초에 희생이 있었다고 말한다. 다른 동물보다 약하게 태어나는 인간에게 공동체나 협동의 의미는 막강하다. 약함이 강함을 만들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극히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공동체의 존재는 뮌의 작품에서 타자들의 얼굴과 (어떤 행위에 따른)소리를 통해 감각화 된다. [바리케이트 모뉴먼트]는 즉각적인 자기 반사를 행하는 전자거울의 매체적 속성을 따른다. 또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역사상의 선례에서 찾아서 작업한 것이라는 점에서 반영에 충실하다. 어떠한 직접적인 자료나 문자, 언어적 요소가 부재하는 무언극, 또는 무용같이 보이는 그 작품들은 원래 말이 없는 조형적 언어의 장단점을 동시에 가진다. 단점은 빨리 메시지를 읽으려는 관객의 요구에 일정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면 쉽게 답하는 않는다는 점이며, 장점은 어차피 상세히 재현할 수 없는 역사를 상징적 방식으로 과감하게 압축한다는 점이다. 작가의 의도가 만영된 소제목들로 유추해 본다면, 흩어져 있던 개인이 이런저런 상황과 함께 집단화되는 모습이다. 사건의 단면을 보여주는 회화나 조각과 달리, 영상에서의 서사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재해 있다.  




 이동식 놀이동산, 메탈구조물, MDF, EVA, 모터, LED라이트, 가변크기, 2017



 이동식 놀이동산, 메탈구조물, MDF, EVA, 모터, LED라이트, 가변크기, 2017



뮌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압축적이지만 단정적이지는 않다. 통상적으로 역사를 다루는 작품에서 단정적인 것도 폭력적이지만 압축되지 않음--일명 ‘아카이브 스타일’--은 난감함을 준다. 혼란을 혼란으로 제시하는 것이 예술은 아니다. 잘 정리되어 있던 것을 해체하거나, 동 떨어져 있던 사건들을 상상으로 연결해 보든 등의 변형이 요구된다. 그것이 작가의 능력이다. 작품 [바리케이트 모뉴먼트]는 한국의 5.18부터 유럽의 1968년까지의 역사가 참조된다. 타자를 지배하려는 힘과 지배자에 저항하려는 힘이 맞부딪혔던 역사들은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약간의 상징적인 색채가 가미된 중성적 배경 아래 추상화될 수 있었다. 그 역사적 사건들의 공통점은 그 사건을 계기로 근대는 또 다른 국면으로 돌입했다는 점이다. ‘미디어 아티스트’로 불리워지는 뮌의 주된 ‘미디어’는 1980년대에서 그 이후로 넘어가는 탈근대의 국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동갑내기 작가는 일어난지도 모르게 우리를 지나갔던 문화혁명을 겪었을 것이다.  


설치작품 처럼 표현한 작가 아카이브가 포함된 2층 전시장이 거시 역사를 다룬다면, 오래된 놀이동산으로부터 영감 받은 1층은 도시의 일상과 여가라는 미시 역사를 표현한다. 스펙터클의 사회, 재미난 구경거리를 찾아다니는 군중, 권태로운 소비자들을 한 때 열광시켰을 놀이터는 텅 비어있다.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 기계들의 움직임은 부재 감을 더 확장한다. 뮌의 작품에는 오랫동안 안 썼던 기계가 다시 작동될 때의 기괴함이 있다. 살아있는 것이 기계적일 때, 또는 기계가 살아 있는 듯 할 때 기괴하다. 기괴함은 그로테스크처럼 경계선 상에서 야기되는 감성이다. 자본주의의 생산/소비주기가 점차 가속화되면서 금 새 뜨거워지고 금 새 식는 소비자의 취향은 짧은 시간 동안에도 적지 않은 유물과 유적지를 낳았다. 시간의 층위들이 다른 것들이 한 공간에 혼재하며, 그것들이 드리우는 그림자들은 움직이는 조명과 함께 실시간으로 편집된다. 2층의 아카이브에는 뮌이 버려진 유원지나 놀이터 등에서 많은 자료를 수집해왔음이 드러나 있다. 




1층 전시전경, [이동식 놀이동산]






뮌은 물신처럼 그 일부에 주목한다. 그들이 (재)방문한 을씨년스러운 유원지나 놀이터에서 자료를 수집하는 도구였을 사진은 단편화를 가속시켰을 것이다. 맥락이 단절된 곳이 폐허이다. 사진 또한 맥락을 단절시킨다. 그러나 단편들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연결되기 위해 단편화되어야 한다. 서랍을 열었을 때 발견된 오래된 물건에서 어떤 감흥이 밀려오듯, 우리 유년기의 로망들이 차가운 시체처럼 서 있는 모습은 기괴하다. 뮌은 그것들을 다시 작동시켰다. 처음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이것저것을 브리콜라주 식으로 연결하였다. [이동식 놀이동산]은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출발한 도시들이 디스토피아나 헤테로피아로 변해버린 과정을 담았던 이전의 도시풍경에서의 고고도 시점이 지상화 된 듯하다. 어느 시절 멀리서 보이던 것이 다른 시절에서는 가까이 보인다.  ‘미완의 릴레이’라는 전시부제는 이것저것이 연결되어 가까스로 작동되는 우주를 연상시킨다. 작동, 또는 오작동 되면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기능을 다한 물건이 수수께끼의 사물이 되고 예술이 되듯이, 놀이 기계들은 예술 기계로 변화되었다. 또한 대부분 서있는 모습으로 구현된 예술 기계에서 인간 기계의 모습 또한 중첩된다. 기계적인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이라는 설정에는 비극과 희극의 요소가 병존한다. 누군가의 언명처럼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그 역도 가능할 수 있다.  들릴듯말듯한 내레이션 역시 기계적이다. 유의미하게 작업을 이어온 이들에게 주어지는 ‘중진작가 전’이라는 영광스러운 전시를 하게 된 것을 포함한 여러 감사 인사를 하는 내용이다. 그것이 진실한 감사인사인가 의례껏 하는 감사인사 인가와 무관하게, 전시장이라는 공적 공간에서 극히 사적인 내용들이고, 무엇인가 성취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조력자가 있어야하겠구나 한다는 사실을 뺀다면 관객이 관심 있게 들어야할 내용은 없다. 어떤 대목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수상한 미녀가 단골 미용실 원장님을 비롯한 시시콜콜한 호명이 연상될 정도이다. 




[이동식 놀이동산] 중에서





 바리케이드 모뉴먼트, 6채널 영상, 11분, 사운드, 2017



진짜인지 가짜인지 애매한 역설적 측면은 뮌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시장 입구에 서있는 조형물에 새겨진 ‘우리는 당신편입니다’라는 훈훈한 내용의 깃발 구조물은 벌레 잡는 기계이기도 하다. 인간을 위해 다른 동물들을 죽이는 잔인한 일들이 분업화에 의해 일반의 시선에서 비켜난 이후, 현대인들은 꽤나 순화되었지만,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한 벌레 정도는 죽여 마땅하다는 것에는 사적영역에 대한 민감한 기준이 있다. 동일성을 교란할지 모를 이 이질적 타자는 벌레부터 시작해서 낯선 이방인에까지 이를 수 있다. 공동체는 막연히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자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가 가지는 최소한의 기능은 위험과 관련된 것이다. 즉 동일자는 타자로부터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지키기 위해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이때 공동체는 자아의 연장이 될 것이다. 근대에는 민족, 민중, 대중, 심지어는 시민까지 집단적 주체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계층화가 더욱 심화되는 가운데 자아의 연장으로서의 공동체는 긍정적이지 만은 않다. 


피상적인 민주주의 아래,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대로 공동체에 대한 필요성을 가진다. 공동체에 대한 호명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그 범위는 공중 방역부터 대테러 전쟁까지 광범위 하다. 전시장에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감사 인사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중첩시킬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이들일 것이다. 그러한 성취를 가능하게 해준 이들, 즉 수혜자의 조력자는 일종의 공동체다. 그러나 그러한 공동체가 진정 보편적인 공동체인가는 다른 문제다. 시스템이 완벽하지도 그렇다고 인간적이지도 않은 애매한 한국, ‘우리가 남이가~’하는 식으로 지역주의를 조장함으로서 억압을 지속시킨 피폐한 정치적 역사가 있다. 북한이라는 타자 또한 마찬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미술계의 경우도 학교 간 파벌은 심각했고, 그 질서를 내면화하지 않는 이들에게 여전히 가혹한 곳이다. 어쨌든 ‘뒤늦게’ 큰상을 받은 격인 작가의 전시장에 울려 펴지는 ‘감사 인사’는 풍자적인 요소 또한 포함된다. 




[ 바리케이드 모뉴먼트] 중에서







얼마 전에 웹아트로 구현한 한국 미술계의 권력지도가 아름다운 별자리처럼도 보였듯이, 뮌의 작품 메시지는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애매한 지점은 예술작품으로서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동식 놀이동산 내부는 많은 층을 가지는 형태들과 일정 간격으로 점멸하는 조명으로 인해 그림자 연극이 펼쳐지는 장이 된다. 이전의 ‘기억 극장’전(2014)에서도 그림자를 이용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이번에 훨씬 업그레이드됐다. 조형적으로 만들어진 스크린에 연출된 사물의 그림자가 비춰지는 것을 넘어서, 사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관객 또한 그림자 연극의 한 요소이다. 보다 열린 체계 속에서 상상은 더 활성화된다. 이 작품은 그림자에 기원을 둔 재현에 분명한 타자의 현존을 느끼게 해준다. 타자의 개입은 공공성이나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는 이 전시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2층의 영상작품이 타자의 얼굴을 가득 확대한다. 거기에는 타인의 얼굴들이 있다. 마지막에서는 타자의 육성들도 메아리친다. 


철학자 레비나스처럼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그리고 소리를 통해 공공의 윤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같은 상황에서 비춰지는 타자의 실루엣은 뉴턴의 우주처럼 입력된 방식에 의해 운동하는 고요한 세계에서 사건화 된다. 재현주의의 기원이 되었던 플라톤주의는 동굴 밖 세계라는 진짜의 차원을 전제한다. 언젠가는 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다. 그전까지는 광명의 세계를 흐릿하게 반영하는 그림자가 세계라고 믿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미디어의 세계가 안팎으로 확장되면서 세상은 다시금 어두운 동굴과 유사하게 되었다. 작품 [이동식 놀이동산]은 바깥 세계를 비추는 동굴 밖도 동굴임을 보여준다. 동굴 밖이 아니라, 동굴 속에 또 다른 동굴이 있을 뿐이다. 지도가 실제의 땅을 다 덮어버릴 정도의 형국에서 그 밖의 세계가 가능할 것인가. 불과 얼마 전 현실이 기억이 되고, 기억은 현실로부터인지 또 다른 환상으로부터인지 가물가물해지는 순간 원본과 재현을 나누는 이원적 방식은 해체된다. 




아카이브







어디에 원뿌리를 두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뮬라크르들이 뿌리줄기처럼 이어져 있는 세계, 빛과 중력만이 작동하며 예정된 궤도를 따라가는 기계적 우주에 가세하는 타자는 동일자의 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작품 [이동식 놀이동산]은 이전의 [기억극장]처럼 버려진 사물이나 지나긴 시간이 야기하는 멜랑콜리가 깔려있지만, 타자의 현존을 끌어들이면서 보다 개방적이고 희망적인 작품으로 다가온다. 관객들은 스크린 뿐 아니라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함께 보게 되며, 전시 공간은 이중 삼중으로 울리는 시각적 메아리들로 가득하다. 소리 또한 이질적 요소들의 공존에 한 몫 한다. 거기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상념을 자아내는 내레이션 뿐 아니라, 삐그덕 거리며 작동되는 기계들이 내는 소리 또한 들려온다. 독특힌 시각 효과를 내기 위해 어두워져야 하는 전시장에는 청각이라는 또 다른 감각이 가세함으로서 중심을 보다 효과적으로 흩어지게 한다. 여기에서 흩어짐은 부정적이지 않다. 진정한 공동체를 위해서 사이비 공동체는 해체되어야 하며, 전정한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중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출전; 2017 아르코미술관 중진작가전. 작가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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