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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미영 /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놀이

이선영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놀이

  

이선영(미술평론가)

  

놀 유(遊)와 산수(山水)가 결합된 [유산수] 시리즈는 변미영이 해온 산수 시리즈 중 최근 10여년 동안의 작품들이다. 이 시리즈의 작품에는 산과 물을 배경으로 모란과 봉황이 등장한다. 모란은 산을 표시하는 능선 안을 채우고, 화면 상단에서도 내려오며. 그사이에 마주하거나 홀로 있는 봉황을 위한 무대를 마련해 준다. 봉황은 그자체가 화려한 의상을 입은 듯한 동물인데, 작가는 거기에다 왕관까지 씌워서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배우 역할을 맡겼다. 마주 보는 구도가 많고, 둘이 속삭이거나 말하고, 때로 노래는 부르는 듯한 부리 모양새가 의인화의 단면이다. 위아래로 쇄도하는 모란들은 왕관을 쓴 공작에 어울리는 배경이 된다. 화면 위아래의 꽃들은 비율이나 위치로 볼 때 모란은 재현된 것이 아니라 단지 배치되었을 뿐이다. 모란의 율동감 있는 배치는 장식과 조형의 일치를 향한다. 모란은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해왔는데, 땅과 하늘을 가득 채운 모란에는 좋은 것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 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은유하는 화면에는 노는 분위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다양한 색이 있는 작품은 활기찬, 단색조의 작품은 차분한 분위기이다. 봉황은 태평성대의 길조지만 한 번도 안 나타났다고 하며, 작가는 그것을 작품으로 불러 내려 한다. 인간의 상상 속에 있는 이 허구적 존재는 상상/허구적인 예술작품 속에서만 온전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유(遊)산수 시리즈 전까지는 락(樂)산수, 화(花)산수, 휴(休)산수 등을 이어왔다, 유(遊)산수 시리즈 다음에 어떤 산수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있지만,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기까지는 시간을 요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주도하긴 하지만, 나중에야 그 필연성이 꿰어지는 방식은 작업의 스타일에도 작품의 제작과정에도 관철된다. 씨앗은 조건이 성숙 되면 발아하고 꽃이 필 것이다. 그러나 조건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가능성을 접어놓고 펼쳐질 시간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변미영의 작품 속 시간은 선형적이지는 않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화면에는 각각의 시간이 흐르는데, 작품 표면은 각 시간들이 만나는 불확정적인 지점들일 따름이다. 이러한 시공간의 장에서 고대와 현대가 갑자기 조우할 수도 있고, 무의식과 의식이 충돌하기도 하고, 잊혀진 상처가 드러나거나 흐릿해질 수 있다.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 분명해지며, 관계 속에서 애매해진다. 변미영에게는 (재)발견된 것만이 가치가 있다. 근대사회가 고무해온 거짓된 새로움조차도 (재)발견될 때 그 가치가 인정될 것이다. 니이체가 회귀하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고 믿었을 때, 그는 탈(post)근대의 기수가 되었다. 물론 자신의 사상에 니이체를 주요 몸통으로 삼은 현대의 철학자 들뢰즈가 말했듯이, 회귀가 완전한 반복은 아니다. 반복에는 차이가 깃들어 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10층 남짓의 밑 색을 깔고 시작하는 작품에서 반복과 차이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작업은 자연과 전통이라는 원형이 있지만 변주가 두드러진다. 작가는 그림이라는 인공적 조건을 잊지 않는다. 







자연의 문명의 원형이 되었지만, 문명도 오래되면 자연을 닮아간다. 예술 또한 자연 못지않은 실재감을 주는 방식이다. 변미영의 작품은 오래된 벽처럼, 그것이 만들어진 이래의 모든 흔적을 담고 있다. 작업은 누가 언제 만든 지 알 수 없는 유적같은 기억의 장소에서 미지의 것을 발굴하는 심정으로 이루어진다. 매끈한 종이에 매끈한 필기구로 쓱 그었을 법한 선들로 이뤄진 형태들은 산수와 더불어 노는 분위기와 어울릴법하다. 출퇴근하듯 작업실에 와서 하는 작업의 신체적 부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즈음, ‘이제 좀 쉬어가자’는 뜻으로 정한 휴산수 시리즈에서 작가는 진짜 쉴 수 있었을까. 민화와 만화의 중간처럼 보이는 형태는 그어졌다기 보다는 파인 것이다. 휘지 않게 잘 건조한 나무 패널 위에 수차례 색을 얹은 후에 그려지는 형태는 각(刻)에 가깝다. 작업실에는 작품 속 새를 목조로 만든 것도 있다. 재료를 더 깊이 판다면 입체가 나올 수 있다.  


변미영의 작업은 한번에 쓱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화면 속 선들은 미끄러질 듯 유려하지만, 딱딱한 표면의 강한 저항을 이겨낸 결과물이다. 파내듯이 그려지는 과정 외에 갈아내기, 닦아내기 등의 작업이 반복적으로 실행된다. 자신이 이전에 묻어 놓은 것들이 그렇게 한 겹 두 겹 드러나다 보면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색/질감이 만들어진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색만 진짜 색이라던 누군가의 말은 변미영의 작품에 해당된다. 작업에서 노동의 분량은 상당하다. 그러나 노동이 전부는 아니다. 노동은 자유로운 놀이를 위한 전초작업일 따름이다. 작가의 ‘놀이’는 레고나 도미노 게임처럼 오랜 시간과 체력 그리고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유산수라는 다소간 느슨해 보이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표현하는 것에 가깝다. 이전의 시리즈에 있었던 즐거움이나 휴식, 그리고 개화라는 개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현실이기 보다는 이상이다. 









작가는 이전 시대의 부적처럼 자신의(그러나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희망을 담는다. 이때 예술은 주술이나 종교처럼 어떤 기능을 가진다. 근대 시대에 예술이 기원과 장식을 비롯한 기능을 떨궈내려고 했을 때 무의미는 의미화되긴 했지만, 그러한 메시지는 그것이 배제하려고 한 전통만큼의 유효기한도 가질 수 없었다. 예술을 빙자한 무념무상과 무위의 놀이가 무절제 하게 이어지자 대중은 예술에 피로감을 느꼈으며 사기라고 생각했고, 결국은 예술로부터 멀어졌다. 최소한 변미영은 ‘(현대)예술은 원래 그래’라고 쉽게 단정짓지 않는다. 자기만의 기법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고서 대중을 설득시킬 수는 없다. 민화풍의 도상에 만화적인 생략법이 두드러진 형태도 재미있지만, 더욱 눈여겨 봐야 하는 것 화사하면서도 바랜듯한 중간색조이다. 단색조의 작품 또한 모든 색이 다 들어있다는 먹처럼 깊은 맛이 있다. 오묘한 색감은 수직적, 수평적 차원의 관계망에서 온다. 그것은 밑색과의 관련 속에서, 그리고 주변색과의 관련 속에서 빛을 발하고 의미를 가진다. 


화면 속 글자는 그러한 관계를 부연한다. 화면에는 조(鳥, 봉황을 의미한다고 함), 가(歌), 유(遊), 화(花, 모란, 해당을 뜻한다고 함) 등을 글자가 삐뚤빼뚤 새겨져 있어서, 원래 있는 한자숙어 외에도 읽는 순서나 조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바탕색과의 관계 속에 새겨지는 글자들은 바탕으로 떠오르는 것이지 그 밑으로 가라앉는 것이지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10겹 내외로 칠해진 밑색 또한 화면에 자기 차례를 드러낼 순서를 정해놓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의 색감을 ‘여러 번 덧칠한 단청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밑 색과의 관계 속에서 깊이감 있는 표현을 하는 것은 고려 불화나 전통 채색화의 방식에서도 찾아진다. 그러나 작가는 전통을 참조하지 재현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작품을 통해 자기를 찾아내려 하지, 자명한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다. 5-7mm 두께의 표면에 깔린 1-10번의 밑 색들은 이후의 처리 과정을 통해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면서 환원할 수 없는 어떤 색, 볼 때마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는 색을 만든다. 






대구의 작업실 전경



색은 먼저 칠해지지만, 최종적인 산물은 몇 번째에 칠한지 알 수 없는 색이 나타나게끔 작업한다. 가령 1번부터 10번까지의 밑색이 얼마만큼 드러나서 서로와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긁고 닦아내고 갈아내고 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색도 있지만, 결국 최종 화면은 사라짐을 통해 나타나는 색으로 이루어진다. 종종 물감을 직접 짜서 즉석에서 마블링을 하거나 금박과 은박을 한 것까지 포함하면, 화면은 만들어진 색이 칠해지는 것이 아니라, 색 자체가 만들어지는 장이 된다. 어느 것도 완전히 자기를 주장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관계망 속에서 작동된다. 화면은 이를 통해 시간성과 역사성을 설득력 있게 담는다. 주체 또한 그러한 과정의 산물이다. 지우기를 통해 나타나는 색처럼 주체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를 비움으로서 그때그때에 걸맞는 작품으로 충만하게 재탄생할 수 있다. 그것은 온통 자아의 의도와 취향과 전략으로 가득 찬 억지스러운 결과물이 아니라, 비우고 지워서 드러난 미지의 것이다. 

 

출전; 대구문화예술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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