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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윈 올라프 전 / 그림 속의 사진을 꺼내다

이선영

그림 속의 사진을 꺼내다

  

이선영(미술평론가)


  

1. 지속하는 삶, 그리고 예술적 순간


[완전한 순간-불완전한 세계 Perfect Moment-Incomplete World]라는 부제로 열리는 어윈 올라프(Erwin Olaf) 전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품들이 대거 선보인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지속하는 현실에서 포착된 순간적 비전이 담겨 있다. 지속과 순간 사이에는 현실과 관련된 예술적 자의식이 깔려있다. 전시 키워드에 속한 ‘불완전한 세계’는 ‘완전한 순간’에 의해 정화 혹은 승화되어야 한다. 세계가 지속이라면, 순간은 예술인 것이다. 순간은 번개처럼 내리치는 영감의 순간일 수도 있고, 작가가 주요 매체로 삼고 있는 사진이 순간의 미학이라는 점과도 관련된다. 물론 그것은 그가 아름다운 순간만 골라서 찍는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현실도 흐름의 정점에 해당되는 단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순간의 미학]에서 순간의 현실을 유일한 하나의 현실로 인정한다. 그에 의하면 ‘시간은 순간 안에 꽉 조여 있고 두 개의 허무 사이에 매달려 있는 현실’이다. 그것은 시간을 연속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순간과 그렇지 않은 지속으로 나누는 사고이다. 




 Erwin Olaf,  Berlin_Portrait 1, 2012, Chromogenic print, 120x90 cm, Erwin Olaf

(사진 출전; 수원아이파크미술관)



바슐라르는 지속을 강조했던 베르그송과 자신을 비교한다. [순간의 미학]에 의하면, 베르그송에게 시간의 참된 현실은 지속이고 순간은 어떤 현실성을 갖지 않는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의 운동은 순수한 이질성에 해당한다’(베르그송)는 관점과 ‘시간의 참된 현실은 순간’(바슐라르)이라는 사고는 차이가 있다. 새로움 또한 입장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바슐라르의 경우에 새로움은 순간적인 것이다. 모더니즘에 지배적이었던 순수한 순간에 대한 이상적 관념은 혼란스럽게만 다가왔던 모더니티에 대응한 미적 태도였다. 그것은 각종 ‘포스트-’ 국면에서 지속(흐름)에게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불확실한 현대적 삶은 순수한 순간에 대한 욕망을 간직하게 한다. 비록 그것이 허구적일 수 있어도 말이다. 사진은 그러한 순간을 실현하는 매체로, 근대의 한가운데서 유력한 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전통사회와 달리, 더이상 미래에의 약속이 확실하지 않은 모더니즘 또한 영원한 현재라는 이상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이미 사진이라는 근대적 매체를 움켜쥔 어윈 올라프는 고전주의에 내재 된 근대적 요소를 주목한다. 


지속하는 삶 가운데 빛나는 순간이 있으며, 예술은 이러한 순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순간에는 지속되는 삶에 빈번한 우연이 자리할 수 없다. 어윈 올라프의 작품은 작가에 의해 엄격하게 조율된 필연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러한 태도는 스튜디오 촬영과 포토샵은 물론, 최근 작품에서 기하학적으로 분장한 자화상까지 관통한다. 심지어 2010년대에 새로이 시도한 도시 시리즈 또한 예외가 아니다. 지나가는 여행자의 입장에서 본 타국의 도시는 생각지 못한 변수에 노출되고 그것이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도시적 현실보다는 그에 대한 기대치로 접근한다. 그러한 기대치는 대개 구조화되어 있다. 오리엔탈리즘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는 찍혀진 사진의 의도치 않은 구석들이 발신하는 요소를 통해 출렁거리면서 우연과 필연이 함께 짜나가는 작품의 묘미를 낳는다. 스투디움/푼크툼이라는 용어로 사진론을 명쾌하게 전개한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은 그것이 왜 찍혀졌는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놀라운 무언가가 된다’고 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벗어난 잔여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작가가 발견한 최고의 순간들은 도시보다는 미(美)의 전당인 미술관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봐왔던 미술관의 명화들은 최고의 순간에 멈춘 영원한 아름다움의 세계이며, 작가는 근대의 산물인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대가들과 견준다. 인물, 자연 풍경, 도시, 예술 등 다양한 소재에 걸쳐있는 그의 사진은 영화나 무대 디자인 등을 포함하여 여러 분야를 두루 활용한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세계의 이모저모를 담을 수 있는데, 그것은 어윈 올라프에게 더욱 그렇다. 그에게 사진은 총체적 예술로 간주 된다. 특히 미술작품과의 진지한 대화가 인상적이다. 고전적 균형감각이 두드러진 그의 사진을 통해 네덜란드의 명화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은 물론, 자유분방해 보이는 현대사회의 구조적 측면(부정적으로는 경직된 측면)을 드러낸다. 어릿광대 분장을 한 최근 작품들처럼 인간은 시스템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 세계가 동시에 겪고 있는 총체적인 재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COVID 19를 상징하는 작품에서 어릿광대 분장조차 엄격하게 구성되어 있다. 세상을 세모, 네모의 기하학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경향은 고전주의는 물론 근대에서도 발견되는데, 세잔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흐름은 입체파의 일부를 거쳐 기하 추상의 세계로 흘러갔던 것이다. 


가면같은 분장과 고깔모자는 구나 원뿔로 구조화된 세계를 연상시키는데, 그것은 재난을 관리하는 시스템과 상호작용하는 개인의 모습을 상징한다. 재난 상황에서 개인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전체주의는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사진은 19세기에 등장했지만, 사진의 원리는 더 오래전으로 소급될 수 있고, 회화와 사진은 시각 이미지의 역사를 함께 구성/해체해 왔다. 사진의 기원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원리는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사진의 역사는 어두운 방 한쪽에 구멍을 내서 빛을 통과시키면 반대쪽 벽에 바깥 풍경이 거꾸로 나타나는 원리를 기록한다. 어윈 올라프의 작품에도 작은 구멍(pinhole)을 연상시키는 작품--[keyhole](2012)--이 있지만,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하는 카메라 옵스큐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됐다. 기원전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기록하고 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또한 그 원리를 통해 원근법을 연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북구의 바로크 고전주의 또한 렌즈의 오묘한 시각상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고려해 본다면, 근대 시대에 사진과 회화는 겉으로만 경쟁했을 따름이다. 당시에 회화는 신화, 종교, 역사를 포괄하는 이미지의 역사 속에서 자신만의 자율성을 쟁취하기 위해 애썼으며, 신생 매체인 사진은 더 오래된 매체인 회화의 어법을 공유하고자 했다. 하지만 서로를 주시하던 사진과 회화의 태도는 역전됐다. 사진은 코드에 기반하는 기계의 발전과 함께하면서 회화는 물론 인간의 시각 자체를 변화시키게 된 것이다. 오늘날 화가 또한 사진적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초에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이후 상업사진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제 독자적인 예술 세계로 인정받은 작가가 자주 찾았던 미술관의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도 함께한다. 미술관 속의 고전적 그림에 이미 내재된 사진적 원리는 이제 누구나 활용하는 사진의 언어로 현실화, 예술화 되었다. 어윈 올라프는 그림 속에 잠재된 사진을 꺼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미술관의 그림을 열심히 봤던 이가 모두 사진가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소간 평범한 출발을 색다르게 하는 작가만의 장치가 중요하다. 나는 그러한 장치 중의 하나를 그의 많은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수직의 구도에서 발견한다. 대개 문틀 같은 건축적, 인테리어적 구조를 활용한다. 수평이 흐름을 말한다면 그와 대조되는 수직은 흐름의 단절, 즉 시작이나 끝을 표시한다. 순간은 시작과 끝을 합친다. 수평이 시간이라면 수직은 공간이다. 이러한 수직선은 몬드리안부터 바넷 뉴먼에 이르는 현대회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평이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al)이라면, 수직은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이다. 공시성은 구조주의를 비롯한 현대철학에서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시간의 단면은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는 통시적 시각을 해체한다. 하지만 이러한 단면이 그저 단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어윈 올라프는 단편의 우연성을 극복하기 위해 고전적 회화의 문법을 참고한다, 


그것은 순간이긴 하지만, 우연적 순간이 아니라 영원한 순간이다. 전과 후를 포괄하는 밀도 높은 순간의 포착은 한 장으로 표현하기 힘든 서사를 포함한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에 걸쳐있는 양식과 대화했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그리고 사실주의는 역사적으로 등장했지만, 하나의 이념형(ideal type)으로, 문예사조사에서 반복됐다. 인덱스와 밀접한 사진은 일단 사실주의를 바탕에 깐다. 사진에 대한 기대치는 사실주의에 있다. 그 위에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적 어법이 등장한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는 자연을 무한으로 보는가 아닌가의 차이에 있다. 낭만주의는 제한된 형식으로 포착할 수 없는 자연의 숭고함(sulime)을 중시했고, 고전주의는 숭고함과 비교되었던 아름다움(美)을 유한한 형식에 담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낭만/고전주의는 구체적 현실 보다는 아닌 영원한 세계에 이르려는 공통된 관념이 있었다. 작가가 선택한 순간에 선택된 모든 대상들을 조화롭게 배치함으로서 순간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2.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들; 인물과 도시, 자연, 그리고 예술


잘 조율된 배경 속에 조형 요소의 하나로 존재하는 작품 속 인간들은 외로워 보인다. 그것은 어느 때보다도 인간들끼리 밀접하게 붙어사는 현대라서 더욱 역설적이다. 작품 [Grief](2007)는 문틀을 반향하는 두터운 커튼 등이 만들어내는 수직선들을 배경으로 오렌지색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창가에서 밖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작품 제목은 인물을 지배하는 정서가 비탄임을 알려준다. 흐트러진 현실을 잘 정돈하는 예술은 비탄조차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작품 [The Keyhole](2012)은 보고 보이는 구조 속에 갇힌 인간의 상황을 표현한다. 무대 양편에 설치한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영상이 상영된다. 외부에 설치된 영상의 스틸사진은 시선의 순환 구조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암시한다. 벽의 무늬는 미로같이 보이며, 인간이 인간에게 도달하는 길이 쉽지 않음을 알려준다. 낡은 책걸상이 있는 교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Hope](2005)에서 희망찬 미래를 준비할 교실치고는 거기에 서 있는 인물들이 너무 의기소침하다.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두 인물은 서로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환경과 무관해 보인다. 현대의 대부분의 관계들이 그러하듯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킨다. 작품 [Rain](2004)에서 단정한 제복을 입은 소년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고, 옆의 강아지 마저도 얌전히 앉아 관객을 응시한다. 무르팍이 깨지고 양말도 한 짝 내려간 아이의 활동 전후의 모습은 생략되어 있다. 녹여야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과 함께 뛰어놀 강아지를 상상하게 하는 순간 멈춤이 세계다. 하교길의 신나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그린 톤의 질서정연한 세계이다. 그러나 무엇이 모든 생명체를 얼어붙은 듯이 고정시켰는가는 언제라도 평범한 일상이 멈출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관련된다, 그것은 위험이 상시화된 현대사회를 떠올린다. 펜데믹은 911테러만큼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펜데믹 시기에 제작된 작품 [April Fool](2020)은 가면을 쓴 듯이 둥글게 분칠한 얼굴 분장에 고깔모자의 자화상이다. 만우절에 어울리는 분장이지만 인물은 질서정연하고 엄격한 환경에 곧게 서 있다. 




 Erwin Olaf, 만우절_오전 930, April Fool_9:30 AM, 2020, Chromogenic print,100x150 cm, Erwin Olaf

(사진 출전; 수원아이파크미술관)



수직적 배경을 반향하는 수직의 옷자락은 순간 멈춤에 중심과 절도를 부여한다. 시끌벅적한 축제의 주인공이었던 광대는 시스템화된 현대사회에서 시민의 일원이 된다. 반대로 모든 시민은 어릿광대처럼 자아를 속이고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존재다. 예술가와 어릿광대가 동일시되던 문화적 전통이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 같은 분장으로 쇼핑 등, 생활하는 모습도 보인다. 광대 같은 모습은 상업주의를 통해 일상의 거의 축제같은 양상이 된 현대와 걸맞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팬데믹 기간에 만들어진 이 시리즈는 일상이 멈춘 상황과 관련된다. 부정적 의미의 순간 멈춤의 세계이다. 일상과의 진정한 단절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것은 전통 시대의 축제에 해당된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서 인간의 삶에서 축제는 삶의 격앙된 순간, 진정 삶이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광대로 분장한 작가는 축제의 마차 대신에 카트를 끌고 소비자의 조바심으로 다 털린 텅 빈 쇼핑몰로 향하곤 한다. 


미하엘 바흐친에 따르면 축제는 총체적인 혼융을 지향하며 궁극적으로는 개체의 고유한 한계를 넘어 우주적 합일에 이르고, 인간 본성을 살아 있는, 나눌 수 없는 전체로 복원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스스로 내려간 낮은 곳을 새로운 시작의 자리로 만든다고 본다. 하지만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대량적 희생은 끝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선구자인 예술가/광대 조차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에서 여전히 예술가/광대는 부조리의 주인공이다. 현대의 일상은 각종 마케팅으로 채워진 가짜 축제로 채워졌지만, 예상치 못한 총체적 재난은 인간을 본래적 존재, 즉 고독한 개인으로 복귀시킨다. 부정적인 상황의 결과지만 사회적 분업에 기초한 현대는 변화가 불가피하고 펜데믹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Annoyed](2005) 시리즈는 행위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홀린 듯이 정지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에서 행위 중의 인간은 그다지 활기차 보이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뭔가 귀찮고 성가신 일에 휘말린 상태다. 인물들은 각자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대응하는 사람들이 일상의 재난에 대처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윈 올라프가 여행했던 세계 각지의 도시풍경을 담은 사진에서도 인물은 중심에 놓인다. 베를린 여행을 자주했던 작가가 건진 풍경은 엄격한 고전주의다. 작품 [Berlin](2012)은 아이임에도 정장에 장갑까지 착용한 모습으로 고상한 색감과 절제감 있는 형태, 그리고 균형 등 많은 요소들이 고전주의 초상화의 요건을 갖추었다. 인물 배경 인테리어에 수직선들이 발견된다. 작가는 2010년대부터 스튜디오를 벗어나 역동적인 도시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지만, 열린 장소 또한 완벽한 형식적 제어가 특징적이다. 미국의 한 도시를 담은 [Palm Springs](2018)는 풍력발전 기구들이 원경에 가득 서 있고 전경에 소풍 온 듯한 인물들이 풍경을 바라본다. 육중한 기계보다는 아이의 분홍 원피스가 에너지가 되어줄 바람의 존재를 알려준다. 풍요 속에서 계층의 격차가 심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두 인물의 피부색 차이는 이 화창한 풍경에 긴장감을 주는 요소다.


작품 [Shanghai](2017)는 유럽인인 작가가 여행의 관점에서 동양을 본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식당의 모습이다. 여기에서도 장식적 패턴들로 채워진 수직선 형태의 배경들 돋보인다. 여행 자체가 이국에 대한 환타지로부터 비롯된다. 식사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다소간 부자연스러운 장면은 다른 인종의 표정 읽기가 익숙할 수 없음을 반영하는 듯하다. 자연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인물의 비중은 축소된다. 밀림 속 폭포수가 있는 흑백 작품 [Im Wald_Am Wasserfall](2020)은 잘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무한한 자연을 암시한다. 자연을 숭고하게 표현하는 태도는 낭만주의적이다. 대자연 앞에서 헤드폰을 끼거나 셀카 찍는 사람들에게 자연은 경외보다는 (가상적)소유의 대상이며, 사진은 그 역할을 해왔다. 배 타고 물을 건너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작품 [Im Wald_Auf dem See](2020)는 폭발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 풍경에 비한다면 정적이다. 노 젓는 남자와 수의처럼 보이는 검은 의상을 입은 이들이 미세하게 조율된 흑백 톤의 풍경 속에서 신비한 항해를 한다. 


고전주의에 흐르는 정적은 신비와 형이상학으로 기울곤 한다. 아직도 낭만주의적 풍경이 남아있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산이 배경이다. 자신이 피사체로 나오는 작품 [Im Wald_Portrat XI A](2020)는 숲속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있는 초월적인 모습이다. 문명인으로서 자연은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꿈을 꾸거나 자거나 죽는 것은 같은 모습일 수 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투명 호수는 폐 질환이 있는 작가의 몸 상태를 암시하지만, 대자연 속 촬영의 현장은 자신의 한계를 실험하는 장임을 말한다. 예술, 특히 이미 후대의 평가를 마쳐 공적 기관에 안치된 고전적 예술작품은 삶에서 건져진 순간 중의 순간이다. 이미 어윈 올라프의 작품과 고전적 회화 예술과의 대면은 성사된 적이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 선보인 것은 17세기의 정물화, 인물화와의 비교다. 라익스 뮤지엄의 소장작(레플리카로 제작)들과의 비교는 회화와 사진의 공통언어를 알려준다. 


중성적 배경에 인물을 부각시킨 고전적 인물화와 같이 배치된 어윈 올라프의 작품은 그림 속에 내재한 사진적 시각을 사진이라는 매체로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메타적 차원에 있다. 화면을 수직으로 나누는 선들에 대한 애호가 보이는 노랑 원피스의 미인은 거장(요하네스 코르넬리스 베르스프론크, Johannes Cornelisz Verspronck)의 그림 속 [푸른 드레스를 입은 소녀](1641)처럼 잘 조율된 명암과 색채, 질감, 배경을 가진다. 이러한 교감은 바로크 시대 인물화의 대가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그림보다는 사진을 찍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게 한다. 한스 볼론기르(Hans Bollongier)의 정물화(1639)는 불완전한 자연적 질서를 인간의 규칙으로 완전하게 한다. 이 작품과 대화적 관계를 가지는 어윈 올라프의 작품은 방사형으로 꽃이 꽂혀있는 흑백 꽃병 이미지다. 그것은 대칭으로 배열된 자연으로, 질서에 대한 감각을 보여주며, 일상 적 현실 속에서 영원한 아름다움을 건져내려 했던 네덜란드 바로크의 거장과 같은 미학적 목표를 가진다 

 

출전; 수원아이파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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