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푸른 별 지구에 켜진 경고등
이선영(미술평론가)
100년 만에 파리에서 다시 열린 올림픽에서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에어컨을 끄고 채식 위주의 식단이 제공되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됐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탄소 저감 노력에 논리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 이러한 사회적 실험에서 유발될 수 밖에 없는 사실, 요컨대 당장의 일상생활에 닥치는 조그만 불편을 감내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남아있다. 대량생산/소비에 맞춰진 시스템은 현대인의 일상을 규정하기에,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심적 물적 에너지가 투입돼야 한다.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축인 첨단 과학기술은 리튬이나 코발트 등 많은 희귀 금속을 필요로 하고, 이러한 채굴이 그 지역의 종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진단(7.29, 파이낸셜뉴스)도 나와 있다. 이러한 역설은 환경문제가 사회적 캠페인을 넘어선 차원의 필요를 말한다. 최만식이 첫 개인전부터 올해까지 20여 년 넘게 지속하는 생태 미학이 그렇다. 예술의 영향력은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에 깊이 스며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들의 환경 181.8x227.3cm 캔버스에 오일 2023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풀풀 나오는 이미지가 발전의 상징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미리 당겨쓴 공공재라는 사실은 자연의 역습이 시작되고 나서다. 역사는 생산력의 진보를 향해 나아갔지만, 진보가 발전주의로 귀결된 것이 문제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세계는 한 종류의 과학과 기술에 기초한 한 가지 개발 모델만을 경험해 왔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경향은 세계 곳곳에서 사회적, 생태적 균형을 깨뜨렸다. 자연을 배제한 진보의 문제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연은 전 지구에 걸쳐 긴밀하게 연동된다. 환경에 대한 예술적 주제는 자연스럽게 지역과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성을 가진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지구는 우리의 조국]에서 진보의 개념 속에는 산업발달이 가져오는 노동력의 해방, 종교로부터 분리된 가치체계, 진선미 가치의 차별화 등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보사상의 위기가 포스트모더니즘을 탄생시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다 나은 미래’라는 개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진보는 과거의 문제들을 해결했지만, 그 대신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한 것이다. 에드가 모랭은 지금까지의 진보는 결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고,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진보로 거듭나야 함을 주장한다.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진보는 하나의 모델을 극복해야 한다. 최만식은 일방적인 발전주의에 의해 사라지려 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자연에서 종(種)이 사라지는 것만큼 종족의 언어도 사라진다. 하나의 언어와 가치 기준이 지배한다. 이는 매우 거시적인 문제인 듯하지만, 종 다양성을 위협하는 단선적인 흐름이 다양성에 기초하는 예술 또한 주변화시킨다. 그 점에서 예술은 이러한 지배적 흐름에 대응해야 한다. 최만식은 2003년 첫 개인전인 [자연, 문명, 그리고 인간의 묵시록]부터 환경과 생태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올해 열리는 [그들의 환경] 전은 시각적으로는 화려하지만, 묵시록은 계속된다.
그들의 환경 97x145.5cm 캔버스에 오일 2023
[자연, 문명, 그리고 인간의 묵시록] 전 이후 20여 년 동안 환경은 더 악화되었고, 푸른 별 지구에 켜진 경고등은 더욱 강하게 깜빡거린다. 이번 전시 작품들의 주된 배경을 이루는 주황색은 생태적 경고를 상징한다. 주황은 단색으로 칠해져서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얼마 전 ‘대기 중으로 뿜어져 나오는 이산화탄소의 모습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영상으로 제작해 공개했다’는 뉴스(7.29, 서울신문)를 보면, 각 대륙마다 주황색 기체들이 뿜어져 나와 기후의 변화와 연동될 흐름에 섞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구 뒤덮은 이산화탄소를 영상지도로 만든 것은 과학기술의 힘이지만, 예술가는 직관적으로 예견한다. 주황색은 논리적으로는 알고는 있지만, 체감되지 않은 사실을 인상 깊게 부각시킨다. 주황색은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항시적으로 벌어지는 대형 산불을 떠올린다. 산불은 온난화의 결과이며 다시 온난화를 부추기는 악순환을 일으킨다.
지구촌 한켠에서는 사막화가 다른 한켠에서 홍수가 빈발하는데 그 모두 주황색이라는 코드에 포함될 수 있다. 푸른 별 지구는 뜨거워지면서 붉은 계열로 변화한다. 황사나 홍수 같은 뿌연 시계(視界) 안에 여러 방식으로 배치된 낯선 종들은 관객을 향해 소리 없이 외친다. 한 장소에 같이 있기 힘든 동식물을 모아 놓은 방식은 일견 낙원을 떠올린다. 살벌한 먹이사슬로 엮인 현실의 자연과 달리, 낙원의 생명체들은 우호적이다. 하지만 주황빛 배경색은 낙원을 불길하게 물들인다. 주황색에 대응할 수 있는 초록 식물로 대세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절박함이 있다. 온난화에 대한 경고라는 그의 작품 맥락상, 블루나 화이트 등 한색 계열의 색은 다소간 숨통을 틔워주는 듯하다. 색은 늘 단독으로 작동하기 보다는 비교를 통해 감지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산이나 식물보다 더 감정이입이 잘되는 대상이다. 최만식의 작품 속 숨막히는 환경 곳곳에 자리한 동물들은 멸종의 위기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만식, 그들의 환경, 2024, 캔버스에 오일, 130.3x193.9cm.
최만식, 그들의 환경, 2024, 캔버스에 오일, 181.8x227.3cm.
[그들의 환경]이라는 제목에서 ‘그들’은 다소간 냉소적으로 들린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오랜 전통이 있지만,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한 종이며, 자신의 산물을 적절히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해, 스스로 앞당긴 종말을 막지 못한다. 권력이 집중될수록 타자도 많아진다. 도구적 합리성은 착취 대상을 점점 더 넓혀나간다. 작가는 전시부제 '그들의 환경'에 대해 ‘그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존재하는 모든것’이라고 하며, 환경은 ‘지구의 자연적 조건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자연스러운 조건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극명한 대비는 위기에 대응하는 작가의 화법이다. 그는 작품의 메시지 전달을 위해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에 중점을 두어왔으나, 최근 작업은 팝아트의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를 결합하는 어법을 선택한다. 여러 자연물이 조화롭게 배치된 작품은 일종의 풍경이지만, 팝 문화처럼 자극적이다. 그것은 시급한 문제에 대한 작가의 강한 주장이기도 하지만, 그가 주목하는 온난화가 도처에서 극단의 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는 소비자의 눈에 띄어야 살아남지만, 자연은 잔잔한 것이 미덕 아닌가. 온난화로 도처에서 신음하는 자연은 균형을 되찾기 위한 운동에 돌입한다. 가이아가 주관하는 자연의 반작용은 지표면에 살짝 걸쳐 살고 있는 인간을 굳이 배려하지 않는다. 현재 온난화를 비롯해서 모든 생태적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보면 자연은 선도 악도 아니다. 작가는 배경을 단색으로 해서 대상을 강조한다. 최근 작품 [그들의 환경](2024)은 히말라야 설산에 흰 부엉이를 결합시켜 마치 녹아내리고 멸종되어 가는 두 자연이 관객과 눈을 마주치게 한다. 다른 작품에서도 매서운 눈초리를 한 동물이 산이라는 기념비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사라져 가는 동물과 급격히 변화하는 산을 결합시켜서 다소간 무심한 광물질적 대상에도 표정을 부여한다. 그것들은 지금의 총체적 난국을 지켜본다. 최만식이 표현한 자연은 문명이 야기한 위기 이전의 시대처럼 영혼을 가진다. 전경에 배치된 열대 식물인 극락조화(극락조를 닮은 꽃이라고 함)는 설산과 열대를 다시 한번 대조한다.
최만식, 그들의 환경, 2024, 캔버스에 오일, 193.9x193.9cm.
작품 속 열대 식물들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를 넘어 열대화 시대(global boiling)가 도래했다’는 진단과 관련된다. 눈이 사라진 산과 하늘을 채운 난색 계열은 산사태처럼 관객을 덮쳐 오는 듯하다. 다른 작품에서는 선인장처럼 더위를 견디는 식물이 등장하여 최악의 생태조건에 대응해 온 자연의 투쟁을 표현한다. 작가는 산과 동식물의 조합을 다양하게 구사하면서 그림이라는 환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공존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양한 식생이 있는 장소인 식물원은 좋은 소재가 된다. 식물원의 열대 기후관의 식물들과 토코투칸, 북극곰, 젠투펭귄, 황제펭귄 새끼 등을 배치한 작품은 녹아서 사라지는 동물의 선택을 통해 여러 생태 문제 중 온난화에 찍힌 관심을 표현한다. 하지만 곰과 펭귄은 이미 온난화를 상징하는 주황색 물이 들었다. 그가 등장시킨 동물들이 진귀하고 멋질수록 슬픔은 커진다. 그것들을 위협하는 힘의 불길함 때문이다.
출전; 전북특별자치도립미술관 서울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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