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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 / 빛으로 기억되는 여로

이선영

빛으로 기억되는 여로

 

이선영(미술평론가)

 


장지에 색을 여러 겹 칠해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색이 된 깊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것은 빛나는 선이다. 족자나 병풍처럼 긴 화면 비율, 그 위에 마른 식물 줄기같이도 보이는 선들은 스며들면서 조형적 화학 반응을 내는 한지와 함께 한국화의 기본 문법을 떠올린다. 칠해졌으면서도 여백같은 넉넉한 공간감 또한 그러하다.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언어만이 무의식까지 길어낼 수 있다. 이번 전시 작품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리적 또는 마음의 여행을 포함하는 미지의 기억을 풀어내는 장이다. 단순한 물질적 표면이 아닌 숨 쉬는 재료인 장지 내부로 계속 쌓은 색, 그리고 매 순간의 도전과 선택의 산물인 선들의 흐름은 밀도를 높인다. 영상에 대한 즉각적인 소비의 시대에 그림은 밀도를 통해 시공간을 확장한다. 색이 수직적 층의 결과라면 선은 수평적으로 분열한다. 화면 안에는 바람이 부는 듯 볼 때마다 선은 다르게 움직이는 듯한 환영이 있다. 




FIND THE SECOND STAR 전시전경, 헬로뮤지엄



입체 작품에서 더욱 분명하듯, 홍시의 작품에서 선은 길이다. 빛나는 색으로 그려진 여정 그 자체가 빛의 궤적이다. 그 길의 시점과 종점은 불확실하다. 특히 그림에서는 중간 과정만 나온다. 모든 설레이는 여정이 그렇듯이 과정은 고정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삶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기계적 반복에 대한 부드러운 거부, 또는 탈주의 선들이다. 점에서 점으로의 최단거리인 직선이 기능과 효율을 대변한다면, 시점도 종점도 불확실한 흐름은 불확정적이다. 불확정성은 현대물리학에서도 그 의미를 부여받은 과학적 진리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억압되거나 주변화된다. 불확정성은 자유로움의 양면성을 가진다. 그렇다고 긴장의 강도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자의가 아니다. 장지 위로 활주하는 부드러운 선들은 촘촘한 그리드 위의 이동이 아니라, 좀 더 많은 가능성 중의 선택이다. 홍시의 작품에서 우연은 필연의 반대가 아니라, 서로 그 존재를 의지하는 상보(相補)적 관계에 있다. 


작가는 [Serendipity]라는 제목을 통해서 운 좋게 발견한 세계의 경이로움을 표현한다. 매순간의 새로운 선택 가능성은 기계적 결정이 지배적인 노동과 다른 예술의 특징이다. 그러한 창조적 과정만이 진정한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전시부제이기도 한 작품 [FIND THE SECOND STAR](2024)는 평면 작품들 가운데에 자리한다. 그것은 피터팬 동화 중에 나오는 네버랜드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선으로 이어지는 형태는 ‘감각과 상상, 기억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표현’한다. ‘네버랜드로 가기 위해 아침이 올 때까지 두 번째 별을 향해 날아가야 한다는 설정’은 힘든 도전을 말한다. 동화의 관점에 의하면 어른이 되면 자유롭게 나는 법을 잊는다. 피터팬은 ‘왜 날지 못하지? 날 수 있다고 믿기만 하면 되는데.’ 라고 말한다. 그는 ‘현실의 경계를 넘어 상상력과 꿈의 날개를 펼치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을 믿는다. 피터팬은 작가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대리물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애니미즘처럼 사유 전능이 유지되고 있는 영역으로 예술을 꼽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의 마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예술가를 마술가와 비교’(프로이트)하곤 했다. 예술과 마술은 허구로 간주된다. 하지만 허구에도 힘이 있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 픽션]에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대역해 줄 다른 사람들을 찾는다’고 인용한다. 캐스린 흄은 [환상과 미메시스]에서 환상의 전통에 보다 많이 노출될수록 환상은 우리에게 더욱 쉽게 작용한다고 말한다. 상상은 어른이 되어서도 네버랜드에 다시 갈 수 있게 한다. 상상에 대해 많은 철학자들과 문필가들이 의미를 부여해왔다. ‘상상력은 자기 주인들을 이성보다 훨씬 더 충만되고 완전하며 만족스럽게 해주며’(파스칼),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관한 지식에 필수적인 필수적 기능’(칸트)을 가지고 있고, ‘정신과 자연의 세계를 연결시키게 하는 힘’(코울릿지)이다. 


입체 작품에서 금색으로 칠해진 배의 여정은 수평적이지 않다. 스릴 만점의 위험한 놀이기구처럼 속도감 있게 상승하는 구조이다. 그것의 여정은 강한 에너지가 결정적인 궤도를 이탈시키는 것과 같이 도약과 비약의 연속이다. 지상의 좌표계를 초월할 또 다른 세계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이동을 나타낸다. 금속 좌대 위의 푸른색 덩어리는 별들의 주재료인 광물을 상징한다. 반투명한 덩어리는 푸른빛으로 단파장의 강한 에너지가 잠재한다. 물질의 색은 빛의 속도여야 도달할 수 있을 만큼 거리가 멀어질 때 빛으로 보일 것이다. 지금여기의 현실은 돌맹이지만 그때그곳은 빛이 된다. 이러한 마술적 변화 과정이 모든 물리적, 정신적 이동에 대한 욕망을 추동한다. 하지만 작가는 도달할 그곳의 모습이 어떨지에 대한 것은 생략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두번째...’라는 키워드는 대안의 세계를 암시한다. 






그러한 이동 가능성의 부재, 가령 붙박힌 기계적 삶은 절망적이다. 푸른색 덩어리도 석순처럼 싹을 돋아내는 등, 변화를 암시한다. 그 주변을 휘감고 도는 선적 궤적은 중심과의 중력 관계를 가지면서 자기만의 길을 만든다. 선이 시간이라면, 그것은 생성 즉 ‘창조적 진화’(베르그송)를 하고 있다. 장지에 금과 금분으로 자유롭게 그린 작품 [Serendipity_2311](2023)은 마치 구름 같다. 금색이 지배적인 가운데 언뜻언뜻 그 배경인 푸른색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한 겹이 아니며, 그 내부에는 어떤 직선도 없다. 자연에서 유일한 직선은 빛인데, 홍시의 작품에서 빛을 발하는 황금색은 구름이나 연기처럼 잡을 수 없는 형태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분명히 현존하지만 재현될 수 없는 무엇을 가시화하려 한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조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 발광한다. 작가가 ‘자연에서 찾은 시간의 반짝임을 기록’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눈을 감았을 때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며, 그 공기, 온도, 습도, 향, 소리와 숨결을 온전히 경험하고, 이를 시각적 형태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색의 번짐과 흡수, 순수한 금과 금분을 사용하여 그 빛나는 순간들’을 기록, 또는 그린다. 같은 크기의 작품 두 개가 나란히 걸린 [Serendipity_2312](2023)에서 두 화면은 잠재적으로 연속성 상에 있다. 전시장 벽이 그 사이에 보이는데, 마치 중간 생략 기호처럼 무한을 향한 두 평면이 동질이상의 관계에 있음을 알려준다. 나란히 걸린 다섯 작품 [Serendipity](2022)는 여러 여행지의 기억을 담았으며, 장소는 제목에 병기된다. 같은 지구촌에 속해 있지만, 장소마다의 공기는 다르다. 여러 장소를 병렬한 작품에서 [Serendipity_Arles](202) 만이 빛으로만 가득하다. 푸른 계열의 색감 위에 빛나는 선들로 이루어진 다른 네 곳과 달리, 아를르 지역은 선 자체가 공간에 녹아버린 듯하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베를린과 잘츠부르크는 서로 연결된 듯한 선의 배열이 특징이다.





 

다섯 작품이자 다섯으로 분리된 화면은 각 지역만의 여정을 표시한다. 작품 [연(緣)의 변주_2218](2022)에서 복잡한 획으로 이루어진 제목 속 한자같은 이미지는 GPS로 추적한다면 나올 수도 있는 여정처럼 보인다. 작가는 성스러운 순례를 닮은 여행을 통해 의미 있는 장소를 방문했을 것이다. 작품에 나타난 것은 장소를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정의 표시(marking)에 집중한다.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에서 이러한 행위들은 ‘기억의 문제이며, 경로, 길, 자취, 표시 그리고 발자국의 언어’이며, ‘성스러운 공간의 재현이 아니라 자리에 대한 동사적인 관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추상의 언어로 표현된 여로의 맥락을 잘 설명해 준다. 조너선 스미스에 의하면 공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사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자리는 그저 수동적인 용기(容器)가 아니라, 인식의 능동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때 기억과 회상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터팬이라는 캐릭터는 어른과 다른 어린아이의 상상력을 강조하는데, 아이들의 상상력은 상당 부분 알지 못함과 관련된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알지 못함은 때로는 통찰력을 발휘하는 또 다른 방식의 앎’(그램 질로크)이다. 그램 질로크의 [발터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는 벤야민의 유년 시절에 관한 에세이를 분석하면서, 한 도시를 알기 위해서는 어린아이로 도시에 있어야 함을 말한다. 벤야민의 예에서, 착각으로 가득 찬 어린아이의 앎은 도시 풍경의 감춰진 측면을 드러낼 수 있고, 성인 관찰자를 매혹시키는 신화적인 허울에 불과한 사물들의 거짓된 외관을 벗겨낼 수도 있음을 발견한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벤야민은 기억과 자신의 일시적이고 역사적인 과거의 삶을 공간적으로 재현하려 한다. 거리와 골목길의 복잡한 망은 얽히고설킨 기억의 실과 유사하다. 이때 기억과 도시는 시각도 끝도 없는 끊임없이 보강해야 할 미로의 형상을 이룬다. 






작품 [찰나가 영원이 될 때_2422](2024)는 깨진 도자기의 균열같은 선들이 공간에 분포되어 있다. 금이 가 있는 듯한 모습인데, 그것은 동시에 정교하게 봉합된 모습이다. 다른 작품의 맥락에서 보자면 선은 깨짐의 결과이고, 단편들은 연결의 가능성을 말한다. 봉합된 자국들은 그자체로 아름다운 무늬가 된다. 2021년부터 홍시(이전 홍사현)로 개명한 이번 전시는 8회 개인전이다. 이름의 변화는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아이와 어른을 이어주는 동화 피터팬은 적절한 상징이 되어 준다. 피터팬이 떨어진 그림자를 찾아 붙이려 애쓰자 웬디가 피터팬 발에 그림자를 꿰매어 준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림자가 떨어져 우는 피터팬에 자신을 투영하여, ‘뭐든 된다고 믿자’ ‘나만의 네버랜드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피터팬은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심리를 대변하며 ‘콤플렉스’라는 접미사가 따라붙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징후의 긍정적인 면을 높이 평가한다. 


‘어린 시절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상상력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아이들의 놀이에는 상상적 요소가 강하며 이는 예술의 모델이 된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이 회고한 베를린에서의 어린 시절에서 놀이의 의미를 밝힌다. 그에 의하면 놀이는 주체와 개체의 구분을 피하고 사물의 세계와 상호적이고 비위계적인 관계를 만드는 유토피아적인 충동을 포함한다. 벤야민의 에세이는 마법에 걸림으로서 현대도시를 탈마법화 하려는 변증법적 동화로 평가된다. 어린아이는 사물과의 원형적이고 마술적인 관계 맺음에 대한 믿음을 지닌다. 작가는 세계와 아이 사이에 일어나는 유희적인 상호작용을 예술의 모델로 삼는다. 보르헤스는 [바빌론의 제비뽑기]에서 삶을 우연의 게임으로 축소하면, 골격만 앙상한 허구의 세계는 우리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는데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홍시가 현실에서의 경험을 선들로 삭감하는 것은 놀이이자 예술에 필수적이다. 





(참고)개인전 ARMONIA_전시전경



그것은 ‘의미의 모방적(mimetic) 구성과 대립되는 기호적(semiotic) 구성’(롤랑 바르트)인 셈이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 픽션]에서 놀이를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미해야 하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와 해방의 한 형식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을 하나의 게임으로, 그리고 그 게임을 모든 즉각적인 호기심이나 목적성이 제거된 본질적으로 피상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면운동으로 해서 전 존재를 빨아들일 수 있는 자유로운 활동으로 만들기’(모리스 블랑쇼)이다. [메타 픽션]에 의하면 놀이가 예술처럼 새로운 의사소통일 수 있는 것은 ‘놀이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메타 단계는 자신의 행동과 문맥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가를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시의 작품들은 ‘--의 모험’ 담처럼 기기묘묘한 장면이 끝없이 펼쳐지지 않는다. 작가는 새로운 장소에 자주 가려 한다. 새로운 시공간에 던져진 작가의 감각은 새롭게 일깨워지고 이는 새로운 기억을 남긴다. 


하지만 작품은 여행에 대한 일화가 아니라 그 시/지점의 색, 온도, 소리, 향기 등에 대한 기억의 산물이다. 가령 [Serendipity]는 다섯 장소의 지각에 대한 기억이다. 금색은 그중에서 하이라이트가 된다. 금박, 금가루, 금분 등으로 칠해지는 금색은 아우라처럼 빛이 발하는 질적으로 고양된 순간을 기록한다. 금색은 순간이 영원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금색은 고정적이지 않고 주변의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정지된 매체는 열린 예술작품이 된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창이 되려고 한다. 작가는 창문 너머 만년설을 몇 시간이고 봤던 기억을 말한다. 그런 창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물론 그림은 창과 비유되어 왔던 재현주의의 전통이 있다. 홍시의 작품은 추상적이면서도 조형 언어 그자체로 환원되는 경향을 거부한다. 작가는 여전히 작품 안에서 소요하고 싶은 것이다. 옛 산수화도 그랬듯이 관객은 그 내부로 들어가 여행할 수 있는 작품을 꿈꾼다. 





(참고)개인전 ARMONIA_전시전경



몇 년 전 한옥에서 한 전시는 비단으로 층을 만들어 바람드는 창처럼 연출하기도 했다. 관객은 창/그림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로 들어가 소요한다. 그 작품에서 창문은 ‘자연의 순간들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재현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작가는 ‘한옥에서는 창과 문의 구분 없이 공기와 빛이 드나드는 길목을 창문이라고 통칭’했다고 하면서, ‘이를 통해 자연의 순간과 개인의 기억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감각과 기억의 교차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선으로만 감축된 조형 언어는 여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종이와 선이라는 한국화의 주요 조형 언어를 구사하는 작품에서 두 달에 걸쳐 색을 얹어 만들어 내는 공간은 여백처럼 융통성이 있다. 습도나 온도 등의 변수에 따라 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작가조차 결과를 확신하지 못한다. 시리즈처럼 [Serendipity]으로 붙여진 작품 제목들은 우연과 필연이 복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선들은 그 하나하나가 새롭게 시작하는 놀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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