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단색화-과거, 현재, 미래
윤진섭 | 미술평론가
01.
단색화란 무엇인가? 내가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를 가리켜 ‘Dansaekhwa’란 명칭으로 명명한지도 어느덧 ‘24년’이 지났다. 근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 가만히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게 도대체 무엇이건대, 그토록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미술시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단 말인가? 마치 꼬리 셋 달린 여우나 수염이 다섯 개 나 난 이무기처럼 변신을 거듭하면서 사람의 애간장을 태웠단 말이냐?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적수공권(赤手空拳) 그대로인데, 누구는 거부(巨富)가 되고 누구는 세계미술계에서 알아주는 작가로 군림하는가?
이 말은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구를 원망하거나 서운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단색화’를 통해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제법 트였다고나 할까, 아니면 사람을 바로 보는 지혜같은 것이-이렇게 말하는 게 약간 쑥스럽긴 하지만-단색화 명명 이전보다 조금 더 생겼다고 하는 편이 났겠다. 할!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내가 단색화란 영어명을 맨 처음 쓴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2000)을 기획했을 때 내 나이가 마흔 여섯이었으니, 한창 혈기방장하던 때가 아니었겠는가? 그랬던 내가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인생 칠십이 돼 보니 이제야 단색화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다는 것. 바로 그것!
02.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세월, 바로 그것이었던 것! 시간의 축적을 세월이라고 한다면, 단색화야말로 세월이 없었다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 바로 그것! 이것이 바로 권영우, 김기린, 박서보, 서승원, 윤형근, 이동엽, 정상화, 정창섭, 최명영, 최병소, 하종현 등으로 대변되는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작업을 관류하는 요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난한 역사 속에서 과연 어디에 맥락이 닿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기엔 원조 곰탕집 할머니의 손맛에 닿지 않겠는가? 밤새도록 장작불을 때가면서 김이 피어오르는 큼지막한 가마솥을 응시하는 우리네 할머니들. 과연 그 행위의 절정은 어디인가? 세월이 흘러 손주 며느리가 끓이는 가마솥 안을 휘저어 한 국자 국물을 뜬 다음 한 모금 맛을 본 할머니의 일성(一聲). “됐다!” 바로 이것. 이것이 단색화의 요체에 닿는 것! 그것은 닭이 꼬기오! 하고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우친 극근 스님의 일화를 상기시키는 것과도 같은 것. 바로 그것!
03.
“됐다!”니, 대체 무슨 뜻인가? 영어로는 “오케이!”. 오케이는 오케인데 ‘됐다’와는 맥락이 좀 다르다. 둘 다 긍정의 뜻이지만, 할머니의 ‘됐다’는 독자적이고도 예민한 미각의 판단이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 그것은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역시 오랜 세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축적과 경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04.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거의가 평생 같은 작품 제목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가령, 박서보의 ‘묘법’, 정창섭의 ‘묵고(默考)’, 정상화의 ‘무제’, 서승원의 ‘동시성’, 이동엽의 ‘사이’, 최명명의 ‘평면조건’, 하종현의 ‘접합’ 등등. 이 명제들 사이를 흐르는 공통점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무엇이 있길래 저토록 평생 갈고 닦으며 한 우물만 판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항상성이 아닐까? 제작 태도의 항상성, 미적 취미의 항상성, 이념의 항상성같은 것들. 이를 일컬어 그냥 ‘삶’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05.
우리의 삶에는 늘 거울이 따라다닌다.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투명한 거울. 그렇다면 마치 면벽수도 하듯이 평생 일관된 태도를 유지해 온 전기 단색화의 특징으로 내가 든 반복성, 촉각성(물성), 정신성은 삶 그 자체일까? 아니면 단지 거울에 비친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언행일치(言行一致)라는 지고한 삶의 지경에 도달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궁극적 지점에 이르렀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 그 투명하면서도 지극한 법열(法悅)의 세계가 오늘날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뒤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에서 맡는 바로 그 세계인가? 정녕 그러한가? 혹시 단색화의 열풍이 분 뒤, 시장통의 돈바가지를 뒤집어 쓰고 악취를 풍기는 것은 아닌가? 그것을 예술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돈바가지는 곧 똥바가지일진대, 그것은 예술혼을 죽이는 직효약이라, 만병의 근원이라는 설. 믿거나 말거나.
06.
곰탕집의 할머니가 노망이 들었는지 오십 년 전통을 버리고 어느날 곰탕솥에 슬그머니 인공조미료를 타기 시작했다. 순수한 할머니를 부추긴 사람은 시장통의 교활한 양념장수였다. 할머니, 눈 딱 감고 조금만 느셔. 사람들이 기막히게 좋아한다니깐 그러네. 할머니는 처음에 그저 장사꾼이 다 그렇지 뭐, 하고 꿈적도 아니 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자기가 보기에 맛이 형편없는 건너편 곰탕집으로 손님이 죄다 몰려가는 게 아닌가? 이런 이거 안 되겠는걸. 가만히 당할 수만 없어. 중얼거리며 할머니도 슬그머니 조미료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웬걸 손님이 느는 게 아닌가?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수가! 영희 어머니, 정말 고맙수! 순수를 타락과 바꾼 할머니의 노망 팔십 삼세. 살아도 산 게 아니야! 이상은 문화비평가 Y씨의 글에서 퍼온 것. 미술계에 빗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07.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그렇게 혐오하면 안 된다. 자본주의는 원래 쇠란 쇠는 다 먹어치운다는 불가사리의 습성을 닮았다고 경제평론가 P씨는 말하지 않던가? 예술계에서 자본은 필요악이 아닌가? 특히 요즘처럼 스펙타클한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는 상황에서 자본의 지원없이 어떻게 작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맞는 말이다. 욕망은 욕망을 낳고 허영은 허영을 낳으니, 절제가 숲속 깊은 곳으로 숨는구나.
08.
단색은 절제의 색이다. 고로 단색화는 절제의 그림이다. 서양의 미니멀 아트나 미니멀리즘 또한 절제의 미학이 아닌가? 비우고 또 비우니, 남는 것은 평면과 기하학적인 덩어리뿐. 기본적인 원소로의 환원인 것. 바로 그것!
반면에 한국의 단색화는 단일한 색에 반복되는 행위를 통한 수행적인 것(박서보, 최병소, 김기린, 정상화 등), 정신적인 것(공통), ‘몸’적인 것(최병소, 하종현, 이동엽), 촉각을 통한 물성의 발현(박서보, 정창섭, 하종현 등)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상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필자가 쓴 다음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이 글들을 읽고 토론에 임하도록 하겠다.
Ⅰ.
197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일어난 단색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하나의 ‘운동(movement)’이었는가?
그렇게 말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전위예술 운동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전위예술론’의 저자인 레나토 포기올리(Renato Poggioli(1907-1963))는 전위예술 운동에 필요한 기본 요건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 바 있는데, 곧 이념과 사상을 같이 하는 동반자적 결속체로서의 그룹과 선언문(manifesto), 그리고 예술적 주장을 펼치기 위한 잡지 등이 그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단색화를 이 범주에 넣기는 어렵다. 70년대의 단색화는 그룹도 아니었을뿐더러 단색의 이념을 펼치기 위한 기관지나 그 어떤 선언문도 없었기 때문이다.
(2014, Frieze Round Table 원고)
Ⅱ.
내가 201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ing)]전을 기획할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다. 70년대의 단색화는 이른바 ‘촉각성(Tactility), ‘정신성(Spirit)’, ‘수행성(Performance)’ 등의 특징을 지닌 작가들(국제갤러리의 [단색화의 예술(The Art of Dansaekhwa)]전의 초대작가들인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등으로 대표되는) 외에도 기하학적 패턴의 반복을 기반으로 하는 진옥선과 파이프의 이미지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이승조, 촛농을 캔버스에 떨어뜨려 점의 반복을 보여준 홍민표 등등이 있으며, 천의 물성을 강조하여 회화의 일루젼을 실험한 김용익, 캔버스의 아사 천에 단색을 사용, 천의 주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박장년, 실의 풍성한 물성을 조형적으로 실험한 김홍석 등등 그 유형과 재료는 실로 다양하다.
(2014, Frieze Round Table 원고)
Ⅲ.
문제의 핵심은 ‘평면성’의 개념이었다. 검거나 희게 칠해진 캔버스 앞에서 관객들은 낯선 표현술에 어리둥절하기 일쑤였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전시장에 들른 대부분의 관객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단색화 작품들이 집단적으로 내걸린 70년대 중반의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등등의 전시장1)에서 이러한 광경을 목도하기란 흔한 일이었다. 그것은 전혀 대중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말의 이면에는 대중에게는 낯선 어떤 회화적 장치가 그 안에 숨겨져 있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그것은 회화를 회화이게끔 하는 근본적인 어떤 것, 즉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면 ‘평면성의 용인’이었다. 평면을 평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일, 다시 말해서 평면성을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인식하는 일이야말로 ‘미적 모더니티(aesthetic modernity)’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2014, 단색화-미학을 말하다, 원고>
Ⅳ.
나는 2000년도에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열린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의 도록 영문판에서 한국의 단색화를 가리켜 ‘Dansaekhwa’로 처음 표기하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 단색화라는 용어는 모노크롬 회화, 단색조 회화, 단색 평면회화, 모노톤 회화, 단색회화 등등 다양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의 등장과 국내외적 확산을 둘러싼 다채로운 에피소드는 이미 여러 글에서 소개했기 때문에 생략하거니와,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세계화에 상당히 성공한 편이다. 그것의 단초가 된 것이 바로 2012년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ing)]전이다. 나는 지금도 초빙 큐레이터 자격으로 이 역사적인 전시를 기획할 수 있었던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이 전시를 계기로 비로소 한국 단색화의 존재가 세계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4, 단색화-미학을 말하다, 원고>
Ⅴ.
단색화에 해당하는 영어는 ‘monochrome painting'으로 미국의 경우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1913-1967)를 비롯하여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1930- ),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1912-2004) 등등 백색 혹은 검정색 작품이 이 계열에 속하며, 유럽의 경우에는 이브 클랭(Yves Kline:1928-1962))의 청색 모노크롬 작품과 피에로 만조니(Piero Manzoni:1933-1963)의 백색 모노크롬 작품 등이 대표적이다. 1960-70년대에 미국 화단을 풍미한 미니멀 아트 경향의 작품들 대다수가 여기에 속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1970년대 초반이후 본격화한 다양한 단색 회화 작품들을 총칭하는 용어로 나는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 기획한 [한일현대미술단면]전 이후 이 특정한 경향의 작품들을 가리켜 ‘Dansaekhwa’라는 고유명으로 불러왔다.
<마음의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 도록, 2012>
Ⅵ.
‘몸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의 수신(修身)은 유교적 덕목의 핵심인 수기치인(修己治人) 중에서 수기에 가깝다. 그것의 목적은 인격의 도야에 있지만(大學, 爲己之學), 궁극적으로는 타인을 위한 봉사로 발전해 나간다는 점에서 군자적 삶의 근본을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 단색화 작가들이 그림이란 수행(修行)의 방법을 통해 타자를 위해 나아가지 못하고 자아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전기 단색화가 지닌 한계임에 분명해 보인다. 2)
수행의 관점에서 봤을 때, 곽인식, 김환기, 박서보, 정상화, 김기린, 최병소, 이동엽 등 대부분의 전기 단색화 작가들이 주제의 심화나 행위의 반복을 통해 어떤 극점을 향한 구극(究極)의 자세를 평생 일관되게 유지한 것은 한국의 단색화가 지닌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작가적 삶의 태도는 보는 관점에 따라 상이한 평가가 가능하다. 가령, 그것을 일종의 매너리즘으로 보느냐 아니면 최고로 순화된 미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몸짓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들에 대한 비평적 평가는 어긋난다.
대부분의 전기 단색화 작가들이 지향하는 미술의 이념은 형식주의자인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품었던 작품의 ‘질(質)’에 대한 생각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와 키치>라는 글에서 당시 미국사회에 팽배해 있던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사이의 길항관계를 분석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키치와 같은 하위문화의 확산을 우려했다. 그는 키치와 같은 저급한 하위문화가 당시 미국의 문화를 오염시키는 원인으로 봤던 것이다. 3)
<마음의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 도록, 2012>
Ⅶ.
1970년대 한국 단색화를 보면서 추사 김정희와 같은 조선 사대부들의 미적 취미에 관해 생각해 봤다. 당시 이들의 취미란 직접적으로 ‘질’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건국 초기부터 조선의 지배 엘리트 계층으로 정치의 전면에 부상한 사대부 계층은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양당 체제를 수립해 조선조 5백년의 긴 역사를 지배하였다. 주지하듯이, 조선조 말 실학으로 대변되는 격동과 변혁의 시기를 살았던 김정희는 청(淸)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이 땅에 신문화를 정착시키고자 했다. 4)
비단 학문뿐만 아니라 시ㆍ서ㆍ화와 전각에까지 두루 능했던 김정희 예술의 핵심이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에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학문을 갈고 닦아 고매한 인품이 예술에 깊숙이 스며들 때 고품격의 작품을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녔던 것이다. <세한도>는 곧 고난 속에서도 변절하지 않는 선비의 꼿꼿한 기상과 인륜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미에 대한 헌사(獻辭)인 것이다. 5) 나는 조선조 사대부의 예술이 궁극적으로는 예술에서의 ‘질’을 추구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향한 것은 궁극적으로 인격의 완성이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비평적 기준으로 삼았던 칸트의 ‘무관심성’ 개념은 세속적 이익이나 관심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탈속(脫俗)’이야말로 바로 추사가 말하는 ‘서권기문자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한국의 단색화가 보여주는 미적 세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마음의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 도록, 2012>
Ⅷ.
기록에 의하면 고희동의 도일은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었다. 6)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자원화보(介子園畵譜)를 펴놓고 산수와 풍경, 화조를 그리던 그가 서양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문법에 의한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개인적으로도 충격이었겠지만, 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구체제와 신체제 간의 길항작용이 낳은 근대적 사건인 셈이다. 그것은 화선지 위에 모필로 화보를 본 따서 그렸던 전통적 방식에서 캔버스에 유성물감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를 가라타니 고진 식으로 표현하자면 고희동에게는 ‘풍경’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식 캔버스를 마주한 고희동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기법이나 세계는 더 이상 풍경이 아니었던 셈이다. 풍경, 다시 말해서 근대적 자아는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볼 때 고희동이 훗날 다시 동양화로 돌아간 것은 이 풍경의 내면화, 즉 의식의 근대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 도록, 2012>
Ⅸ.
한국의 단색화는 타자적 시선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는 내가 나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잘 맡지 못한 상태에서 남이 먼저 나의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1970년대에 한국의 단색화에 대해 가장 먼저 주목한 측은 일본인들이었다. 1975년, 일본의 정상급 화랑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과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가 기획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이 동경화랑에서 열렸는데, 초대작가는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 등 5인이었다. 전시서문에서 나카하라 유스케는 “색채에 대한 관심의 한 표명으로서 반(反) 색채주의가 아니라 그들의 회화에의 관심을 색채 이외의 것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미술평론가 이일 역시 서문에서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빛깔 이상의 것이다......백색이기 이전에 백이라고 하는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라고 썼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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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하라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한국 단색화 작가들은 색채 그 이상의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무엇’을 가리켜 정신이라고 해도 좋고, 이일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우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비록 한국의 단색화가 1970년대 초반에 서구의 모더니즘, 보다 정확히 말해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스트 페인팅이나 미니멀 아트와 같은 해외 사조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그것을 발효시켜 독자적인 양식을 창출한 주체는 백색파 작가들이란 사실이다. 야마모토 다카시와 나카하라 유스케와 같은 일본의 미술관계자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 한국의 ‘백색’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나카하라는 “한국의 현대회화가 모두 구미와 똑같은 맥락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화가의 작품에는 다른 나라의 현대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봄, 서울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어떤 화가의 작품을 접했을 때 나는 중간색을 사용함과 동시에 화면이 매우 델리키트하게 처리되어 있는 회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8) ” 고 쓴 바 있다. 이처럼 일본인들의 백색에 대한 주목은 구한말에 한국 땅을 밟은 벽안의 서양인들이 인상 깊게 본 백색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단색화의 세계, 정신, 촉각, 행위, <단색화의 예술>전 도록, 국제갤러리, 2014>
Ⅹ.
한국의 단색화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거기에는 부정과 긍정의 두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과연 초기의 정신을 견지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내려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다가올 미래보다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리차드 바인의 조언처럼 세계의 무대에 뛰어들어 “준비된 자세로 자신의 비평적 관점과 신념에 대해 논박9)”할 수 있어야 한다. 바인의 다음 글이 인상적이어서 여기에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고자 한다.
“이 세계무대에는 한국 미술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이 다수일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무대는 상호 교류의 기회가 있어서, 고집 센 반대자로부터 배우고 또 역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유쾌한 기회가 광활하게 펼쳐 있는 곳이다.”
<<단색화의 예술전> 서문, 국제갤러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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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0년대를 통해 이 대형 전시회들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2) 가령, 1980년대에 들어서 전기 단색화 작가들을 포함한 모더니즘 진영에 대한 민중미술 진영의 비판은 이의 전형적인 예이다.
3) 1970년대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변함없이 대다수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이 구태의연한 구상적 화풍에 대해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미술에 있어서 이 ‘질’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상미술에 대한 이러한 반응이나 평가는 자신들의 미적 취미에 대한 확고한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 당시 단색화는 아방가르드와 동의어로 인식된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인식은 그린버그가 논하는 아방가르드(모더니즘)의 입장에 비쳐볼 때 흥미 있는 부분이다.
4) 최완수, ‘추사의 학문과 예술’, <추사집>, 현암사, 1976. 17-20쪽.
이 변혁기에 서양의 원근법과 명암법에 근거한 사실적 화풍의 천정화를 접한 뒤 감탄하고 놀라는 장면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속에 잘 묘사돼 있다. 당시 연암은 청나라 연경에 있는 한 천주교 성당을 방문한 뒤 그 소감을 적었다.
5) 오주석, ‘추운 시절의 그림, 김정희의 <세한도>’,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솔, 2011, 153쪽.
<세한도>의 발문에 있는 추사의 글에서 이와 관련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 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세한도>는 추사가 그런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6) 고희동, ‘나와 서화협회 시대’, <신천지>, 1954년 2월호, 이경성, <근대한국미술가논고>, 일지사, 1976, 23쪽에서 재인용.
“나는 심전, 소림 양문하(兩門下)에를 출입하다가 무슨 심경이 변하였던지 서양화를 연구하여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두 분 선생님 문하에 다닌지 3년 되던 해 처음으로 단신 동경을 향하여 떠난 몸이 되었다. 때는 2월 하순경이었다. 4월 초순에 다행히도 우에노(上野) 공원 안에 있는 토오쿄오(東京) 미술학교 서양화 예비과에 들어가 앉게 되었다.”
7) 오광수, <단색화와 한국 현대미술>,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21쪽.
8) 나카하라 유스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 서문.
9) Richard Vine, 앞의 글, [한국의 단색화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국제학술세미나 자료집,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