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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 전 / 기억의 메아리

이선영

기억의 메아리

김 웅 전 (5.31–7.11, 이길이구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

 

 

김웅의 작품들은 한지 꼴라주와 물감 칠하기를 반복적으로 실행해서 여러 층을 만들어, 그림이라기 보다는 오래된 담벽같은 묵직함이 있다. 화면에 붙여진 한지 조각들은 때로 입체적인 형태로 납작하게 붙여지면서 형상의 역할을 맡고, 색의 층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화면을 부조에 가까울 정도로 견고하고 두툼하게 만든다. 종이 재질과 결합해 생겨난 독특한 색감은 만들기와 칠하기가 복합된 결과이다. 배경과 형태가 색채로도 구별되었던 초기와 달리, 최근 작품에는 모노 톤이 강세다. 작품마다 주된 색감이 화면 위 다양한 요소들을 싸안고 있는 형국이다. 정체불명의 단편들을 포함해서 화면 전체를 조율하는 것은 색이다. 이번 전시는 뉴욕을 오가며 작업하는 그가 서울에서 13년 만에 여는 29번째 개인전으로, 올해 제작된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44년생으로 올해 팔순에 접어든 노화가의 작품은 기억이나 원형 같은 테마가 흐른다. 삶과 예술이 함께 해온 오랜 세월이 포함된 작품은 추상적이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직접 지어주시던 옷이나 창호지에 쑥이나 꽃잎을 붙여 멋을 낸 기억’ 등에서 영감을 받은 형상들이 내재한다.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크고 작은 둥근 형태는 처음과 끝을 명시할 수 없는 순환적인 시공간대를 떠올리며, 불연속적으로 배치되었지만 공명하고 연동된다. 오랜 시간의 외국 생활은 기억 속의 토속적 풍경을 새로움의 원천으로 역전시킨다. 작가는 당시 한국에서의 유년의 체험을 일일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 형상으로 응축한다. 그에게 추상은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미학적 본질이기보다는, 더 보편적인 내용을 담기 위한 넉넉한 그릇이다. 화면 자체도 층이 있지만, 액자 속의 액자같은 이중적 구성의 작품들은 수평/수직 양방향으로 층을 늘려나간다. 이러한 확장은 계속 열리는 창문처럼 이어지는 해석을 유도한다. 작품들에서 화면 상단부에 산의 실루엣을 그려 넣고 그 아래에 화산재로 덮인 듯한 작품들은 화산에 대한 경험이 반영돼 있다. 화산폭발은 대재앙의 이미지가 있지만, 쌓여진 화산재들은 수분과 결합하여 비옥한 대지로 거듭날 것이다. 화산활동을 포함한 지구의 운동은 지금 여기의 지형을 형성함과 동시에, 그 이전의 표면을 갱신하는 살아있는 과정이다. 현재의 정지 상태는 운동과 운동 사이의 과도기에 불과하다. 


김웅의 작품은 일상적 시간 감각을 넘어선 지질학적 시간대가 압축 재현됨으로서, 관객은 고고학자의 시선으로 그 아래에 묻힌 단편들을 상상하게 된다. 약간 바랜 듯한 색감은 오래된 기억 속의 장면과 어울린다. 수많은 겹과 층의 산물은 그림이라는 인공적 언어를 자연에 근접시킨다. 자연과 문명은 대조적인 관념이지만, 시간이라는 요소는 이러한 이항 대립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 문명, 그리고 예술은 한 몸으로, 함께 시간의 흐름을 탄다. 시간은 많은 것을 사라지게도 하지만 남아있는 흔적은 작품의 무게감이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회화, 특히 재현적 회화의 패러다임이기도 한 시간을 한칼에 베어낸듯 한 공시적 표면은 시간의 흐름에 다시 진입한다. 낯선 장면이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풍경으로 통합되듯 이물적인 재료들은 동화된다. ‘명제 없는 풍경(Untitled Landscape)’이라는 부제에서 ‘풍경’은 이것저것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융통성이 있다. 명제의 부재는 개별적 사건들이 보편화한다. 


시간은 선형적 질서를 해체하고 단편화되었지만, 문득문득 되살아나 또 다른 서사를 생성하게 한다. 70년대에 한국을 떠났던 작가의 무의식에 침전된 유년기 기억의 편린들은 작품마다 다른 맥락으로 조합되어 표면으로 떠오른다. 서양화 재료가 쌓기를 통해 형태와 색을 만들어 낸다면, 그가 도입하는 한지 꼴라주는 또다른 층위들로 합세한다.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는 낡은 벽과 같은 김웅의 작품은 바위나 퇴적층처럼 늘 그렇게 있을 것이다. ‘존재와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을 펼친 한 철학자는 그러한 오래된 벽에서 위대한 단순함을 보기도 했다. 최초의 벽은 마치 선처럼 경계의 역할을 했겠지만, 시간이라는 시험대는 선을 영역으로, 장으로 변화시킨다. 모든 것이 코드화 되어 자신을 알리려고 소란스러운 현대에 김웅의 작품은 침묵 또는 낮은 목소리로 답한다. 그의 작품 속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중심을 향하는, 내부로 울려 퍼지는 메아리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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