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하염없이 부수어지는 것들
심승욱 전 (8.30-10.27, 김종영 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
심승욱의 『흐르는 시간 속 지워지지 않는 질문들』 전은 건축자재같은 흔한 재료들로 연출한 현대사회의 단면들이다. 첫 전시장은 검은색 비닐로 된 수수께끼같은 구조물들이 놓여있다. 작품 [지난 시간 속에 남겨진 5개의 군상]은 온몸을 가린 수도사들같은 군상들로, 검은 비닐의 반사면은 그것들이 인체임을 짐작하게 한다. 군상의 애도의 몸짓은 조금 떨어진 곳에 [귀여운 것의 죽음]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서 있는 것과 누워있는 것은 삶과 죽음을 나누는 기본적인 구분이다. 두 개 전시 층 중간에 아카이브룸과 작가 인터뷰가 배치되는 등, 난해한 작품을 이해하는 정보가 풍부히 제시된 편이다. 죽음과 가림막의 관계에 대해서는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본 손자의 모습이 마스크로 가려진 채였음을 깨닫고 슬펐다는 내용이 있다. 근처의 [비닐 산수]는 살아있는 즉 서 있는 모든 것이 돌아갈 자연 또한 수평적임을 알려준다. 사도매저키즘적인 성적 유희에 등장하는 라텍스 패션의 번들거리는 검은 표면이 피부 역할도 하듯, 조명을 받은 검은 비닐 안은 몸이 있을 거라는 암시적 실루엣이다.
지나간 시간 속에 남겨진 5개의 군상, 압축단열재, 발포 우레탄, 미송구조목, 비닐, 가변설치, 2024년.
하지만 그 내용물을 채우는 것은 압축 단열재, 발포 우레탄폼, 각목(마송구조목) 등, 같은 거의 건축 폐자재 류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채우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은 없겠지만, 다른 전시장의 설치작품에서 그 재료들은 망가진 구조물처럼 연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관객은 안과 밖의 상관관계를 묻게 된다. 뼈와 살이 바로 붙어있는 듯한 작품 [구조-뼈에 붙은 살같이]에 대해 작가는 뼈에 붙은 고기를 발라 입에 넣는 저녁 식사 와중에 들려오던 타국의 전쟁 소식에 대한 무심한 반응도 언급한다. 막 적출된 듯한 기관 [껍질의 틈]은 부글거리는 우레탄폼의 질감에 붉은 물감이 칠해져 있다. 막이나 껍질 등은 내용물을 투명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박춘호 큐레이터는 심승욱 전의 특징으로 ‘명확한 게 없다’는 것을 든다. 검은 비닐의 불투명성이나 아련히 중첩된 글과 숫자들, 패러디 등이 그렇다. 미술사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현대조각사의 흐름]에서 불투명성이라는 현대조각의 중요한 국면을 개시한 이로 로댕을 지적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로댕이 단절시킨 것은 표면과 그 해부학적 깊이 간의 소통 관계이다.
망토를 둘러쓴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은 고전적 조각의 구조적 선명성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상을 이루는 행위의 결과로서 인식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연상시키는 심승욱의 [승리의 여신]이나 [계단을 내려오는 기계처럼]은 미술사의 유명한 도상을 변주한다. 그의 변주는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견고한 도상을 극히 취약한 상태로 만든다. 곧 폐기처분될 가건물 같은 어정쩡한 모습이지만, 중간단계에서는 건설과 파괴가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분절화된 요소들은 이리저리 응집되어 애초의 계획에 없던 괴물들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블랙/핑크로 구분된 두 전시장의 맥락에서 보자면, 검은 비닐은 피부이자 옷이자, 쓰레기 봉지인 셈이다. 전 세계에서 벌어진 전쟁이나 재난은 거대한 환멸과 함께 비닐봉지에 넣어 버리는 물건처럼 ‘처리’하는 엄청난 양의 사체들과 폐기물을 생산한다. 벽에 걸린 프린트 작품 [그날의 기억은] 시리즈에 언뜻 보이는 것은 문자와 숫자들이다. ‘memory’, ‘erased’, 연도들로 짐작된다.
피튀기는 살륙의 현장을 비롯해 비극은 기억될 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이 시리즈는 모든것을 분쇄하는 날카로운 칼날같은 선으로 빛난다. 앞서 인용한 책에 의하면 현대예술에서 의미는 시간의 축에 따른 경험과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선험적이지 않다. 하지만 심승욱의 작품 해석에서도 중요한 시간은 매우 짧다. 제목과 연관되어 언뜻 숫자의 변형 같은 이미지는 자연의 시간이나 인간적 시간이 아니라, 디지털 차원의 시간으로 작품들을 둘러싼 불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암시한다. 그의 작품은 디지털적 시공간 개념이 변형시킨 자연과 인간, 그리고 건축이나 기계같은 문명의 운명을 말한다. 단열재 아이소핑크를 소재로 제작된 작품들은 핑크 검은색 등이 칠해져 있어, 블랙과 함께 핑크가 이번 전시의 주요색임을 알려준다. 가건물처럼 급속하게 폐기되는 것들의 목록에는 생명이 포함된다. 핑크는 피부와 피의 색깔이고 한 개체가 망가지는 순간 경계 밖으로 흘러내린다. 때 이른 폐기나 죽음을 처리하는 검정 비닐 봉투는 전쟁과 재해가 편재하는 시대에 우리가 해독해야 할 비밀스러우면서도 허접한 껍데기인 셈이다.
출전; 아트일컬처 202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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