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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근/ 추상의 새로운 용법을 제안하는, 추상과 구상을 재정의하는

고충환




오정근/ 추상의 새로운 용법을 제안하는, 추상과 구상을 재정의하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처음엔 색면추상인가, 했다.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만으로 이미 회화라고 선언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 라는 동어반복으로 지지 되는 프랭크 스텔라의 전언을 실천한, 평면성으로 지지 되는, 그 자신 색면추상의 적극적인 옹호자이기도 했던,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전언을 변주하고 각색한 그림인가, 했다. 편의적인 부분이 없지 않지만, 보통 추상은 면 분할과 색면구성에 바탕을 둔 기하학적 추상과 붓질이 떠올려주는 정서적인 환기를 중시하는 서정적인 추상으로 구분된다. 평면성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나 색면구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면 기하학적 추상인가, 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추상이 아니라고 했다. 구상이라고 했다. 구상적 회화라고 했다. 구상적 회화라고 한다면, 당연히 모티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티브는 무엇이고, 그 모티브는 또한 그림 속 어디에 있는가. 하늘이라고 했다.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에서, 하늘을 찌를 듯 빼곡한 도심의 건물 사이에서, 때로 돔 양식의 지붕 구조가 보이는 건축물 사이에서 올려다본 하늘이라고 했다. 

보통 하늘로 치자면, 화면 전체를 하늘로 가득 채우는 식이 아니라면, 그래서 하늘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는 식이 아니라면, 하늘을 그릴 수도 한 화면에 담아낼 수도 없다. 작가의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 하늘이고, 가장자리가 따로 없는 만큼 가장자리가 있는 틀(화면) 속에 가둘 수 없는 것이 또한 하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늘 자체는 가시적인 대상이지만, 동시에 구름과 같은 다른 무엇에 의탁한 경우가 아니라면 여전히 비가시적인 대상인 채로 남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비가시적인 하늘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줄 매개체가 필요하다. 마치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바람의 실체를 알 수 있듯 매개체를 보고 하늘을 유추해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매개체로 도입된 것이 건축물이다. 건축물로 빼곡한 도심에 서서 위쪽을 올려다보면 건축물 사이로 잘린 하늘을 볼 수 있고, 건축물과 건축물이 구획한 하늘을 볼 수가 있다. 유기적인 형태와 시야가 열린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하늘이란 점에서, 그 자체 기하학의 변주라고 해도 좋을 형태와 시야를 가로막는 도시 속에서 찾아낸 하늘이란 점에서, 아래에 서서 위쪽을 올려다보는 앙각 시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시각은 도시적이다. 도시친화적이다(작가의 그림에서는 도시가 제목을 대신하고, 장소 특정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여기에 건축물을 매개로 하늘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건축 친화적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왜 색면구성이 두드러져 보이는지, 기하학적 형태를 변주하고 각색한 것처럼 보이는지 알게 되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건물이 자른 하늘을, 건물에 잘린 하늘을 그린다는 발상을 하게 되었을까. 작가의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도심에서는 하늘을 보기가 어렵다. 하늘을 볼 일이 없다. 하늘을 볼 새가 없다. 하늘이 있으면서도 없다. 하늘을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다른 데서 하늘을 찾는다.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방이 열린 뷰를 찾는다. 좀 극적으로 말해 현대인은 동시에 도시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시인은 자연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상실감을 유일한, 전형적인 시대 감정처럼, 시대적 징후이며 증상처럼 장착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마치 그런 뷰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여기에 그 뷰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만 있다면(마치 하늘을 소유할 수 있기라도 하듯이) 이런 상실감을 단번에 보상받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다른 하늘을 찾는다. 이미 상실한 하늘을 찾아 헤맨다. 

비록 부드럽고 우호적인, 감각적이고 묵직한 색감으로 위로하고는 있지만, 적어도 기하학적인 형태만 놓고 본다면 이처럼 칼로 자른 듯 구획된 하늘을, 날카로운 예각을 보여주고 있는 하늘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하늘을, 자연을,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를, 자기 상실감을, 소외를 상기시킨다. 도시를 거닐면서 작가도 이런 소외를 느꼈을 것이다. 도심을 헤매면서 작가도 이런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건물 사이로 잘린 하늘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하늘을, 자연을, 자기를 발견했을 것이다. 예술은 사적 경험을 객관화하는 일이다. 그래야 공감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늘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쳐다보면서 작가에게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비롯한 것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저마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 주지시키는 힘이 있고,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다. 

작가의 색채감정은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감각적이고, 묵직하다고 했다. 그 색채감정이 치유와 위로를 준다고도 했다. 도시의 건축물이 보여주고 있는 칼로 자른 듯 날카로운 예각으로 대변되는 형태에 대한 감각과 비교되는 이 색채감정은 그렇다면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가능해졌는지 볼 일이다. 작가의 그림에서는 밝은색마저, 원색마저 가라앉은 듯, 충분히 숙성된 듯 들떠 보이지 않는다. 검은색 때문이다. 모든 화면을 처음에 검은색 바탕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일단 검은색으로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원하는 색채를 7, 8회 거듭 올린다. 색과 색이 섞인 혼합색감이 만들어진다기보다는, 매번 색이 충분히 마른 연후에 겹쳐 올리는 과정을 거쳐 마치 화면 아래쪽에서부터 위로 색을 밀어 올리듯 색과 바탕색이, 색과 색이 은근하게 배 나오게 했다. 그렇게 표준 물감으로는 찾아볼 수 없는 자기만의 색감을, 색채감정을 찾아냈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서는 무엇보다도 하늘이 포인트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세필에 물감을 찍어 일일이 수를 놓듯 발라 올렸다. 역시 7, 8회 정도 횟수를 거듭하면서 그 표면 질감이 만져질 듯 마티에르가 강조되고, 질감이 강조되고, 물성이 강조된다.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증명하고, 작가의 존재를 증언한다. 아마도 작가의 그림에서 작가의 개입과 매개와 행위가 가장 적극적으로 작용한 부분이라고 해도 좋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다가도 빛을 받으면 두드러져 보이는, 마치 숨은 것이 드러나 보이기라도 하듯 자기의 피부를 강조하는 하늘이 하늘을 쳐다보는 작가의,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하늘을 올려다볼 도시인의 감정의 질감을 반영하는 것도 같다. 


그렇게 작가는 도심의 한 가운데 서서 건물 사이로 드러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 하늘이 도시의 한 부분으로 보이고, 기하학적 구조로 보이고, 색면추상으로 보인다. 추상이 아닌데, 추상처럼 보인다. 여기서 작가는 추상과 구상을 나누는 전통적인 구분법에 의문을 던진다. 추상은 구상 속에 이미 내재해 있었고, 구상은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추상을 예비하고 있었다. 하나의 사물도 가까이서 볼 때 다르고, 멀리서 볼 때가 다르다.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볼 때 다르고, 사물을 따로 떼어놓고 볼 때가 다르다. 감각을 통해서 볼 때 그렇고, 의식의 프리즘을 통해 볼 때는 더 그렇다. 그렇게 다시, 추상은 일상 속에 이미 있었다. 그렇게 일상 속에 이미 있었던 추상을 찾아내는 일, 그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굴하는 일이 문제다. 존 버거는 다르게 보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는 하늘을 보는, 자연을 보는, 사물을 보는, 일상을 보는, 현실을 보는, 그러므로 어쩌면 현실의 총체인 자기를 보는 다른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로써 추상의 새로운 용법을 제안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중요한 것으로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의 개념을 재고하게 만드는 것도 주목된다. 보통, 사람들은 건물을 보지 하늘을 보지는 않는다. 새를 보지 정작 새가 나는 하늘을 보지는 않는다. 나뭇잎을 보지 정작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을 보지는 않는다. 특정 모티브에, 특정 주제에 초점을 맞춘 채 볼 버릇한다는 말이다. 의식의 관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의식의 관성에 의하면 하늘은 그저 배경일 뿐. 다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사건을 위한 배경일 뿐. 그러므로 다시, 포지티브로 관성화된 의식이라고 해도 좋다. 

여기서 작가는 건물을 통해 하늘을 보여주는 대신, 하늘을 통해 건물을 보여준다. 하늘을 통해 도시를 보여주고, 도시인을 보여주고, 도시인의 삶의 질감을 보여준다. 배경이 모티브가 되고, 주제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관성적으로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증명하고,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적인 것을 증언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네거티브로 포지티브를, 포지티브로 관성화된 의식을 수정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다시, 다르게 보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빼곡한, 아찔한 도심의 건물 사이에서 올려다본 하늘을 통해 상실과 소외, 치유와 위로로 나타난 도시인의 양가감정을, 그 삶의 질감을 증언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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