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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보의 심경산해화(心景山海畵)- ‘제주, 몽환 먹빛에 물든 심경’

변종필



양창보의 심경산해화(心景山海畵)- ‘제주, 몽환 먹빛에 물든 심경’


변종필 | 미술평론가, 前제주현대미술관장

한국 현대미술에서 전통 산수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옛 문인화가들이 수묵산수화를 심신수양과 철학적 사유를 넓히는 계기로 삼았던 시절의 목적과 의미가 현대 작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할까? 
1990년대 이후 전통 방식의 틀을 넘어 다양한 해석과 실험을 수용하며 지속적으로 변화·확산 되어온 한국화는 그 명칭이 지닌 불완전한 개념 인식 만큼이나 현대 미술에서 전통 한국화에 대한 기대와 반응은 예전과 현격히 달라졌다. 한국화에서 전통적으로 중시해온 화법이나 서법, 준법 탐구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대미술의 조류에 따른 파격적 조형 어법을 활용한 표현에 더 많은 시선이 집중된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한국화가 변화하는 미적 양식의 범주에 능동적으로 대응할만한 평가나 한국화의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지 못한 한계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화가들의 작품 형성 배경과 목적, 의미 자체가 달라진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전통 산수화의 특성을 유지하며 독자적으로 창작활동을 지속한 작가들도 존재한다. 특히 지방을 거점으로 활동한 작가들에 의해서 한국 산수화의 맥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 대표적 예로, 제주에서 활동하며 제주의 풍경을 전통 산수화풍의 맥락에서 해석하고, 자신만의 필묵법을 구축한 호암(湖岩) 양창보(梁昌甫, 1937~2007) 화백(이하 양창보)을 들 수 있다. 

제주를 거점으로 삼은 작가에게 제주의 자연은 뿌리치기 힘든 매력적인 소재이다. 우뚝 솟은 한라산 백록담, 섬처럼 솟아오는 수백 개의 오름, 섬들을 끌어안고 있는 바다는 그 자체로 작가에게 표현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런 매혹적인 자연환경을 놓고 보더라도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제주의 산과 바다를 화폭에 담아온 한국화 작가는 드물다. 양창보가 제주의 자연을 지속적으로 화폭에 담아낸 작가로서 돋보이는 부분이다. 1)
 
그러나, 이런 특별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화명은 한국 화단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다. 아무래도 제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한국화 전공)를 졸업한 후 제주로 내려가 고등학교 교사와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작고하기까지 지역 미술발전에 매진하는 등 제주에 국한된 활동을 한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2)
 
양창보의 작품세계는 수묵을 기반으로 담채를 절제되게 활용한 부드러운 화풍이 특징이며, 이는 그의 효과적인 용묵법(用墨法)에서 비롯된다. 동양화론에서 ‘용묵은 화가의 인품을 드러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떻게 먹을 쓰는가는 곧 화가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양창보의 용묵법은 선적으로 구획 짓지 않고 자연스럽게 인간의 감정을 적시듯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본 작가의 심정이 묻어난다. ‘먹을 번져 퍼지게 하는 발묵법과 ‘물기가 마르기 전에 먹을 덧칠하여 번짐 효과를 내는 ’운염법(=선염법)’을 잘 활용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로 감상자의 마음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이러한 운염법은 중국 남종화 계열의 산수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먹의 농담 기법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하던 남종화의 문인화적 특성과 닮아있다. 자연 속의 고요한 정취와 철학적 사색이 만들어내는 그윽한 분위기도 유사하다. 여백과 농담을 활용한 운치, 먹의 번짐 효과를 활용한 분위기, 인간과 자연의 이상적 관계 추구 등도 남종화의 특징에 가깝다. 
양창보는 1987년 자신이 직접 발표한 「한국화와 일본화 표현기법 비교 연구」의 논고 3) 에서 ‘한 나라의 예술 창조에 있어서 고유의 전통이 얼마나 중한 의의를 갖는가는 자명한 일이다 4) 고 강조했다. 이에 이론적 연구를 통한 한국 전통화풍의 특징을 숙지하면서, 한국화다운 기법을 계속 연구하고 시도하며 제주의 자연을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화풍을 체득했을 것이다. 이런 추정은 그가 2000년도에 발표한 「탐라순력도5) 의 회화적 의의」라는 논고에서도 드러난다. 

   ‘중앙과 가장 멀리 떨어진 지방 감영의 화공에 의해 그려졌다는 점에서 각 도면에 나타난 산과 오름, 폭포, 수목 등의 독특한 기법들은 타 지역과는 색다른 표현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고, 또한 정선이나 당대의 다른 화가들에서 볼 수 있는 진경 표현에 차이가 나타나는 경우가 잘 비교된다.’ 6)


위 분석은 제주의 풍경과 그것을 소재로 한 예술세계가 타지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자신이 타지역의 화가들과 달리 제주의 자연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차별 있게 표현해야 한다는 자의식의 발로로 읽힌다. 〈탐라순력도〉에서 드러나는 제주의 자연에 대한 토착적, 경험적 시각은 다른 지역의 회화 양식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징이다. 특히 지역적 인식과 체험에 근거한 시선은 지역 미술의 범주를 넘어 한국화의 시야를 확장 시키는 조형 언어로서 가치가 있다. 이러한 특별함은 자연스럽게 양창보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논고 발표 후 2003년에 제작한 <북군십경>(2003)이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되는 <북군십경>은 제주 곳곳을 직접 돌아보며 느낀 풍경을 자신만의 화풍으로 시각화한 작품으로, 10폭을 하나의 화면에 펼쳐 북제주군의 원초적 풍경과 실제 풍경을 조합하고, 양창보 특유의 화법을 모두 활용한 역작이다. 행정적 기록화인 〈탐라순력도〉와 예술적 소산물인 <북군십경>은 근본적 차이가 분명하지만, 작품에 담긴 풍경은 제주 자연을 시각적으로 펼친 기록화적 성격이 짙다. ‘우도-비자림-교례석원-엄장해암-새별오름-추자도-팽나무 숲-비양도-차귀도’로 이어지고, 이 외에 수많은 오름, 해안, 다도 등 제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근경-중경-원경으로 한 화면에 일몰, 계절, 현재와 과거의 공존, 실제 거리를 무시한 원근의 파괴 등 철저한 작가적 시점에서 제주 북군을 동시에 바라보는 느낌이다.
이번 《바람의 섬과 붓끝 사이》 전시에는 <북군십경> 외에도 양창보 화풍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다수의 산수화가 포함되어 있다. 출품된 산수화들은 장소성과 지명이 확실한 실경과 관념이 조합된 구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성산 일출봉’, ‘산방산’, ‘한라산’, ‘비양도’, ‘사계리해안’ 등 제주 주요 장소를 담은 작품은 그림을 제작할 당시의 풍경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훨씬 옛스러운 풍경이거나, 당시에는 없던 풍경들이 그림 속에 등장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를 그리되 그림 속에는 자연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화면들이 있다. 중국 북송의 화가 곽희(郭熙)는 산수화를 “마음속에 있는 언덕과 골짜기의 심상을 그리는 것(胸中丘壑)”으로 정의하며, 인간이 동경하는 자연은 화가의 내면에 형성된 자연관의 표현으로 보았는데, 양창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경을 오감으로 즐기고, 그 체화된 기억에 상상력을 조합했다. 이는 겸재의 진경산수화처럼, 실경을 토대로 화가의 마음속 심경을 더하여 가장 이상적인 자연미를 표현하려는 의지가 더해진 것이다. 
양창보의 작품을 대하면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이성과 감성이 긴밀하게 교차하면서도 동양화론에서 강조한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중시한 태도가 느껴진다. 산수에 깃든 정신성과 생동하는 기운은 화론육법 중 회화의 정신성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한국화가라면 누구나 의식하는 점이다. 양창보 역시 내면적 호흡과 자연의 감응이 융합된 심원산수(心源山水)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운필과 운염을 생기 가득한 붓질로 실현했다. 이는 〈백록담-白鹿潭〉(1999), 〈산방산 해안〉(2001), 〈영실-靈室〉(2005), 〈월야〉(연대미상), 〈일출〉(1997), 〈향리〉(2005) 등 여러 작품에서 확인된다. 화면의 중심이 되는 상(像)이 ‘기(氣)’의 응집점이며, 그 주변을 감싸는 산세, 능선, 물결, 해안 등에서 호흡하듯 내뿜는 먹의 농담과 번짐에 생동감이 배어있다. 이러한 기법은 결과적으로 보는 이의 감정을 파고들며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다. 작품에 표현된 인물들은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서 조용히 살고 싶은 은둔자적 태도를 상기시키도 한다. 
양창보의 작품은 화면 구성상 웅대한 해안의 암석과 그 아래 평온한 수면 위의 작은 배, 그리고 배경의 붉은 해가 인상적인 <낙조>의 작품처럼 ‘중심대상-배경-인물(혹은 배,집)’의 구성형식이 자주 사용된다. 자연 앞에 한없이 작은 존재와 사물,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배경은 그 자체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말해주는 듯하다.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 한 인물이 안개와 구름, 달빛 사이에서 고요히 서 있는 장면을 서로 구분 짓거나 구별하지 않고 용(龍) 형상의 원형적 구도로 보는 이를 심리적 깊이로 끌어당기는 듯 표현한 <구도(求道)>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 작품은 양창보 산수의 특징인 몽환적인 느낌이 강조된 그림으로 ‘미완성의 형세서 완전을 발생하고, 결락의 형에서 충실을 육성하는 발생형태(변성형태)’라는 동양화의 특징이 반영됐다. 한마디로 미완과 여백, 생략을 통해서 완성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몽환적 분위기는 양창보의 수묵기법과 더불어 화면 구성에서 시점의 독특한 활용이 큰 역할을 한다. 그는 한국전통회화의 화면구성은 시점을 이동시킴으로써 공간의 깊이에 거리의 원근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 많이 응용된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대상을 일정한 방향에서 본채로 두고 시선을 이동시키는 방법, 그려진 형체의 변화에 의해 필연적으로 시점을 이동시키게 되어 그 깊이를 느끼게 하는 방법, 그림의 의향이 가리키는 곳에 따라 그 깊이를 느끼게 하는 방법’, 여기에 동양회화 중 수묵산수화의 독특한 표현방법인 삼원법 7) 까지 화면을 구성하는 시점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다. 이러한 시점이동의 화면구성은 평면에 머물지 않고, 중첩된 시점과 공간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구조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실제 양창보의 작품에는 삼원법의 거리감을 무시하거나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지 않게 약간씩 뒤트는 시점의 양창보식 화면구성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은 ‘바다’가 화면에 등장할 때 더 극대화된다. 내륙지역의 진경산수와 다른 양창보만의 진경산수가 가능한 것은 ‘바다’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바다와 산의 조합은 강과 산의 조합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과 감성을 갖게 한다. 마음에서 그려지는 자연의 크기와 깊이 차이의 반영이다. 이러한 화면구성의 특색이 양창보의 산수화가 독자성을 이루는 중요한 지점이다. 

양창보 작품은 살펴본 화법과 더불어 작품의 제문들에서도 내재적 의미와 제작 시 심리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제문들은 대부분 자연에 대한 감흥과 정서, 사유가 담긴 시적 표현이 많다, 예를 들어 <백록담>(1999)을 보면, 제주의 성산(聖山)을 조감한 화가의 내면적 사색과 백록담을 바라본 심경을 표현한 시어들-현봉(玄峯), 청(情), 징(澄), 설장(雪藏)-이 있다. 특히 이 제문에는 구름이 걷히자, 드러나는 한라산의 신령한 백록담을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인식하고, 예술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8)  먹빛에 스며든 잔잔한 담채로 맑고 고요한 설산(한라산)을 표현하여 인간의 손길이 쉽게 다다를 수 없는 백록담을 제주의 근원이자, 예술가(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일깨우는 대상으로 표현했다. 그림과 시상이 일체되어 화면 전체에 정서적 울림을 더하는 표현은 앞서 언급한 <구도(求道)>(1998)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그림의 구도, 분위기, 정서를 감지할 수 있으며, 바람, 구름, 달, 눈, 꿈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은 대상이거나 일시적이고 덧없는 존재의 인식을 통한 자아 성찰적 태도가 읽혀진다. 9)  반면, <일출봉 해안>(2006)처럼 일출봉에 대한 느낌이나 그림과 연관된 내용보다는 화가로서 태도와 예술적 자각10)을 드러낸 제문도 있다. 이처럼 작품마다 쓰여진 제문은 그림의 구도와 분위기는 물론 양창보의 삶과 예술정신까지 들여볼 수 있는 심상의 거울 역할을 한다. 
한편, 제문의 서체는 전체적으로 강한 개성보다는 전통 서체에 기반한 그림과 어울림을 고려하여 서체가 지나치게 부각되지 않는 선을 유지했다. 갈필이 두드러진 작품에는 그에 어울리는 서체로, 선염과 발묵이 강조된 그림에는 그에 상응하는 부드러운 서체를 택했다. 시·서·화의 일체를 문인화의 본질로 인식한 표현으로 보인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양창보가 그린 작품은 제주와 연관이 깊다. 지역성과 독자성 강한 양창보의 작품세계는 보면 볼수록 그에 어울리는 특별한 용어의 필요성을 느낀다. 일반적인 산수화로 칭하기에는 그의 작품세계가 담고 있는 제주 풍경이 너무 각별하다. 이에 ‘마음으로 본 산과 바다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란 의미의 ’심경산해화(心景山海畵)’와 같은 용어가 그의 작품에 더 부합하게 느껴진다. 실경(實景)에 심상(心象)을 가미한 심경(心景)으로 제주의 ‘자연-장소-기억-정서’가 어우러진 양창보 특유의 조형 세계를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과 바다’라는 제주의 공간적 특이성을 양창보만의 수묵 언어로 구축한 세계는 그 자체로 독자적이다. 노련한 필치, 정련된 구도, 완숙한 기법을 구축한 그의 화법으로 표현된 세계는 전시 주제처럼 ‘화폭에 담긴 바람의 섬들이 붓끝 사이’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근원은 하나, 오로지 한 길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11) 라고 했던 말처럼 양창보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자신의 마음속 스스로 확신하는 한 길이 있다면, 유행이나 외적 시선을 따르지 않아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신념대로 양창보는 올곧게 제주 섬(근원)에 뿌리내린 화가로 살면서 가장 제주다운, 한국화다운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했다. 

이제 다시, 한국 현대미술에서 전통 산수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라는 처음 질문을 떠올려본다. AI 시대가 도래하며, 데이터 입력과 클릭 한 번으로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화풍을 모방한 이미지들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작가와 대중에게 전통 산수화가 주는 메시지는 과거 문인화가들이 수묵산수화를 그릴 때 추구했던 정신성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대하는 마음가짐, 자연을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정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보다 직접 체험한 자연과 정신적 사유가 녹아 있는 심경 산수화는 현대미술에서 단순히 과거로 회귀가 아닌 현재를 돌아보고, 우리가 자연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사유하는 하나의 매개물로 작용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양창보의 작품은 제주의 지역성을 그림으로 마주한다는 특별함과 함께 겸재를 포함한 전통 산수화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독자적인 수묵법과 화면 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가 구축한 화풍은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바람의 섬, 제주’를 전통 산수화의 맥락 속에서 계승하고, 재해석한 작가로서 위상을 입증하는 근거로는 충분하다. 나아가, 전통은 그 의미를 자각한 작가에게 시공간을 넘어서는 창작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ㅡㅡㅡㅡㅡ

1) 양창보 화백은 ‘제주를 그린 화가’라는 단순한 수식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제주의 풍광을 전통 한국화로 재구성한 창작자이다. 제주 지역에 머물며, 지역 정체성을 반영한 작품으로 제주 자연을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예술성과 작품활동은 제주 한국화의 표본처럼 인식되고, 미술 교육자이자 행정가의 멘토로서 제주화단과 후배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2018년 제주예술인 아카이브사업으로 진행한 회고 도록 『호암 양창보-파묵의 정수』에서 수록된 평론 및 회고의 글, 그리고 강시권 외 10인의 자문위원 면담을 기록한 자료를 통해서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은 떠나고 나면 그 사람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호암 양창보는 70년 고희 인생을 살다 떠났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못내 아쉬워한다. 사람이 원래 자리에 없을 때 그리운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처럼 사실 모든 사람은 서로에게 상대적 평가를 내린다.”라는 김유정(미술평론가, 2018)의 평가처럼, 예술을 사랑하는 제주인은 모두 양창보 화백을 기억한다. 

2) 이는 우리 미술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지역 작가에 관한 연구가 소홀하고,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만한 전시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반증이다. 필자 역시 제주도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양창보 화백의 작품세계를 면밀하게 살펴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독자적인 화풍과 조형 탐구를 재발견하면서, 지역 작가를 넘어 한국 현대 한국화의 주요 작가로 재평가될 필요성을 절감했다.

3) 양창보,「한국화와 일본화 표현기법 비교연구」,『제주대학교논문집』, 제24집, 1987. 2018년 제주예술인 아카이브사업 회고도록 『호암 양창보-파묵의 정수』, 제주문화예술재단, 2018, pp.206-222 참조 요함.

4) ‘예술에 있어서 전통은 그 예술을 낳는 민족의 예술정신을 일관하여 민족의 양식을 규정한다. 따라서 예술의 창조와 올바른 발전은 선조의 풍부한 정신적 유산을 전능하는 뿌리깊은 전통의 힘에서 뒷받침을 얻고 있다는 말이다.’ 앞의 책,p.206.

5) 『탐라순력도』는 제주 유일의 행정적 기록화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1702년(숙종28)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제작한 것으로 지방 순력을 그린 국내 유일의 기록 화첩이다. 풍속, 지리, 군사, 신앙, 주요 시설 등과 함께 제주의 특정 장소를 상세하게 그린 일종의 사찰기록, 혹은 시각 보고서 같은 그림으로 18세기 초 제주의 사회성과 지역성이 화폭에 오롯이 담겨있다. 옛 제주의 풍경은 물론 당시 제주민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행정적 기록화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6) 양창보,「탐라순력도의 회화적 의의」,『耽羅巡歷圖硏究論叢』, 앞의 책, p.233인용.

7) 앞의 책, p.214.

8) ‘雲開立嶽 玄澄雪藏’-‘구름이 걷히고 큰 산이 우뚝 서 있으며, 신비롭고 맑으며 눈이 감춰져 있다.’ 는 문장은 〈백록담〉의 정수를 함축한 구절로 꼽을 수 있다.

9) ‘風裏雲藏月 雪中夢遠遊’-‘바람 속에서 구름이 달을 감추고, 눈 속에서 꿈이 멀리 유람한다.’를 이 그림의 핵심 문장으로 꼽을 수 있다. 

10) ‘亭露筆 人畫筆’-‘정자에서 붓을 드니, 사람이 곧 붓이다’는 장소와 무관한 화가로서 자연을 대하는 마음, 즉 자연을 그리는 자신도 곧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흉중구학(胸中丘壑)적 모습을 엿볼수 있다.

11) 앞의 책, p.45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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