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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식물성의 사유

박영택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공부 중 하나가 바로 나무를 세면서 그 이치를 깨닫는 것이었다고 한다. 1)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나무를 세는 공부가 일종의 성리학적 격물치지格物致知였다는 얘기다.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이 격물치지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물物에 이르러 그 이치를 깨닫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는 매우 점진적인 공부이다. 아울러 그들은 우선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을 생각했는데 그것이 이른바 ‘근사’近思라는 것이다. 근사는 공부의 기본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성리학의 공부대상은 인간의 행위 자체이자 삼라만상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부의 대상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며, 모든 공간이 학습장임을 새삼 깨닫는다. 미술 역시 그러하다. 미술의 위기가 주창되는가 하면 미술의 진정성, 혹은 미술의 의미가 부단히 탈색돼가고 있는 상황에서 아울러 전통과 현대의 갈등 속에서 상실한 우리 미술의 본래의 뜻과 지워진 의미를 상기해보면서 새삼 이 격물치지적 자세와 사유를 통해 미술을 다시 시작해보는 근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았다. 그 실마리가 바로 주변에 산재해있는 한 떨기 꽃이나 하찮은 풀과 나무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삶 속에서 흘러 넘치는 것들, 동양인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철학적, 인생론적 뿌리인식을 심어준 것들, 그러나 서양적, 과학적 세계관 앞에서 힘없이 스러져간 것들, 해서 더 이상 우리들 삶에서 의미문맥을 형성치 못한 것들, 대신 장식적이고 습관적인 미술의 초라한 소재로 전락된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다. 과연 그런 것들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근대 이후 우리가 망각해가던 사물을 보는 또 다른 하나의 관점, 즉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고 내면적으로 깊이 결부시켜 파악하는 그런 관점을 떠올려본다. 이른바 ‘생태적 지혜’라고도 말해볼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서구의 근대적 합리성을 부정하기보다는 그 기저에 놓인 기계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인간의 이성을 ‘열린 이성’으로 가져가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점에 놓여있다. 생태학적 세계관은 모든 존재의 내재적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하며, 따라서 자연과의 공생과 화해를 강조하는 것을 말한다. 2)

그것은 동아시아에 있어 전통적인 세계관, 우주관과 자연관을 다시 상기시킨다. 동아시아 사상은 자연, 다시말해 ‘자연의 규율’을 곧 ‘도’道 라 간주하는 특징이 있다. 이 자연의 도는 만물의 존재론적 근거인 동시에 인간 삶의 윤리적 근거이기도 하다. 도는 모든 존재에 내재해있으며, 인간의 삶은 이 도를 체득하거나 체현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고 보았다.
동양인들은 만물이 그 외관상의 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으로 평등하다고 여겼는데 그 까닭은 생사 生死에 대한 동일한 마음과 생명현상의 근원적 동일성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물의 외관이 보여주는 차별성 너머에 존재하는 생명의 근원적 동일성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천지자연을 ‘생의’生意라 표현하기도 하였고 생생지리 혹은 인仁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 원리는 무망불식無望不息하여 잠시도 그치는 적이 없으며 어디에도 미치지 않음이 없는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사람. 금수. 벌. 개미. 초목 등 목숨을 지닌 모든 존재는 다같이 자연에서 받은 성性에 따라 생명을 구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생태계를 장엄한 생명의 장, 커다란 조화와 공생의 장으로 파악한 것이다.3) 그러니까 인人과 물物이 똑같이 천지의 생의生意를 받아 자신의 본성에 따라 생명을 누린다는 점에서 사람과 천지만물은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유통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과 물이 하나라는 이 같은 존재론적 통찰은 인간만이 주체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주체로 간주하는 입장에 다름아니다. 동아시아에서 문화와 예술(미술)은 결국 그런 사유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다시 동아시아에서 자연인식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생긴다.
육식보다는 주고 곡식을 재배, 수확하여 생을 영위하는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들 역시 자연의 성장과정이 규칙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잘 인식하였으며, 창조적인 힘의 원천이나 창조 과정의 중단이 가져오는 결과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이 생각한 기氣는 천天과 지地와 같은 외적인 힘으로부터 모든 피조물에게 배분된 성질이나 속성이며, 만물의 생성 순간부터 그 속성이 되어 그것을 생육시키는 역할을 한다. 초목이 생장할 때 그 꽃과 잎은 싱싱하고 무성하며 화려한 서체書體를 방불케 할 정도로 모두 곡선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하나의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로, 때로는 전혀 다른 이종異種으로 변신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상이라는 신앙도 그래서 파생되었다.4)

유학은 사계절이 분명한 온대 지역의 농경생활 조건에서 형성되었으므로 유학의 자연관에는 자연스레 온대의 농경사고가 깃들여있다. (유학에서는 자연을 우주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그것으로 대상 세계 전체를 지칭한다.) 유학에서의 자연은 농경적인 생명 현상의 시각으로 파악된 자연이다. 농경이란 적응을 전제로 한 자연의 응용을 말한다. 농경의 성공은 곧 증산과 번식에 의한 번영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식, 번식, 지배를 통한 생산, 산출과 증산, 번영은 사멸의 공포를 잊게 하고 현세를 살만한 것으로 긍정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 같은 생명에 대한 시각은 무엇보다도 주역에 잘 나온다. 예를 들어 “역易이란 끊임없는 생성이다”, “천지의 특성은 생生이다”.라고 한 명제들에서 더 없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생명현상이란 식물과 동물의 자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남과 자람, 종種의 번식과 개체의 죽음이라는 과정 모두를 일컫는다. 개체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런 생명현상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종이란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순환과정에 다름아니다. [도덕경]과 [주역]에 ‘세상은 늘 변한다. 고정 불변한 것은 없다’고 한 것은 그들이 늘 보고 살았던 이 땅의 이치를 삶의 이치와 연관시켜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유학에서 본 자연의 변화는 단순한 물리. 화학적 변화가 아닌 생성인 것이다.그래서 리理와 의義라는 것은 천지를 본뜨고 사시四時를 본받으며 음양을 준칙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동양인들은 자연에 대한 애착을 갖고 이를 인생의 지혜를 습득할 교본으로 삼는 한편 정신적인 자아를 우주아宇宙我로 성숙시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5)

자기가 사는 땅에서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의 대부분을 얻을 수 있어 땅에 붙박이가 되어 살았던 동아시아의 농경문화권 사람들에게는 농사를 좌지우지하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자연의 이치를 도라 불렀고 도는 주어져 있는 것이기에 인간은 거기에 간섭할 수도 없으며, 오로지 스스로 궁구하여 그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노자가 언급한 무위無爲가 그렇고 자신의 정신력을 드높이는 내면화작업이란 수행방식 및 그 같은 문화가 역시 그러한데서 파생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땅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은 살리고, 필요한 것들의 생육에 지장을 주는 것들은 제거하는 노력은 필요했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것들보다는 야생의 것들이 더 잘 자랐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농경문화권에서는 입으로 내뱉는 말이 아니라 자기 몸을 움직여 필요한 생명체를 키워내는 몸의 움직임이 보다 중요했다. 말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생명체를 키우는 작업이란 스스로 창조작업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키우는 것이 선이었고, 그 반대가 악이었기에 별도의 창조자를 상정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범신론과 다신론이 오랫동안 농경문화권을 지배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변화가 생명을 만드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성들은 변화의 원리를 체득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비결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6)

이렇듯 생명의 본성, 자연의 이치 및 삶의 이치를 식물성의 세계를 통해 깨달았던 것이다.
사실 아주 겸허한 태도로 자연과 교호한다든지, ‘우주적 연민’cosmic pity의 정조로 모든 존재물을 성찰한다든지 혹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 자체로 존중한다든지 하는 마음들은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예술/미술하는 정신일 것이다. 미술이란 것도 결국은 뭇타자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고 인간과 세계와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의미있는 가치와 윤리,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동양적 자연과, 우주관과 겹치는가 하면 생태학적 사고와 유사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서로 유기적 관련 속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확보한다는 것이 다름 아닌 그런 견해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자연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최근 생태와 환경, 생명을 이야기하고 이를 다루는 많은 작업들은 그런 주제의식을 다만 작업의 알리바이로, 개념적으로 그리고 슬로건 화 하고 있을 뿐이다.
‘생태’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생활하는 상태, 즉 어떠한 존재가 유기적이고 포괄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상태이자 존재방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생태는 몸과 욕망의 문제이며 몸과 욕망의 상생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생태는 같은 공간 속에 존재하면서도 타자에게 주는 피해(장애)를 최소화 내지는 무화시키는 연기적인 삶의 방식과도 연관된다고 하겠다. 생태론의 시각에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면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관계의 그물 안에서 제 몫을 다 하며 서로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특히 불교사유 속에 잘 녹아있다. 불교 경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흙과 물은 다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
불교는 ‘내 것’에 대한 연기적 이해를 제시하면서 그 ‘내 것’이라는 것을 통해 ‘나의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즉 나는 변화하는 존재이며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존재이며 오직 타자의 전제 위에서만 존재하는 폭포수와 같은 의식의 흐름 덩어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불교의 생태이해가 연기 패러다임, 즉 나의 욕망 공간의 확장이 남의 욕망공간에 대한 장애(희생)를 최소화 내지 무화시키는 인식틀 위에 존재7)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이 거대한 연속체라는 생각과 함께 인간과 자연 사이를 기가 매개하는 것으로 보았던 동양인들은 인간은 대자연의 일부요 그렇기에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인식은 무엇보다도 노장사상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자가 인간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자연의 객관성으로 돌아가고자 했다면, 장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자연의 객관성을 다시 개체의 주관 안에서 적극적으로 긍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니까 장자는 정신의 자기기만성을 해체하고 대상적 자연에 몰입해가는 노자의 방식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객관성을 주관화하는 ‘인간 정신의 자기 충족성’에 주목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요의 정신’이다.
그러니까 장자는 “시간의 변화에 안존하고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면 슬픔과 즐거움이 마음에 파고들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연의 변화를 타고 그것을 도리어 즐기는 심미적 삶을 획득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자연의 존재론적 동등성을 인간의 편견을 버리고 제대로 인식하여 자연과 인간을 통일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것이 장자가 얘기한 지극한 즐거움 지락至樂혹은 자연과 함께 하는 즐거움天樂이다.




여기서 동양인의 마음과 물질의 관계를 이해해보아야 한다.
동양인들은 물질과 운동의 관계를 어떤 하나의 실재가 모이고 흩어지는 관계로 이해했다. 물질과 운동을 하나로 본다는 생각은 인간의 마음을 물질과 분리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낳게 했는데 운동 자체를 감쌀 수 있는 마음이 곧 물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의 마음은 물질의 자기 조직성을 기억하는 표피적 개체화 작용에서 우러나는 무엇이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물질과 마음을 따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단지 인간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행위 속에서의 인간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운동 또는 인간의 운행방식은 원래 자연의 자기 조직적인 운행방식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자연히 자연의 운행방식과 같다고 여긴 것이다. 아울러 마음을 자아내는 생명은 본질적으로 일방향의 선형이 아닌 순환적인 시간 속에 놓여있고, 생명의 관계망인 생태계 역시 순환적인 비선형의 시간관계에 있기 때문에, 생명의 시간을 체득하는 일은 생태계의 비밀을 체득하는 것이 된다. 생태계는 생명의 시간 속에 있고, 자연의 관계이며 혼돈의 모습인 것이다.9)

그래서 장자는 이기양양조(以己養養鳥; 나의 마음으로 새를 기르는 것)가 아니라 이조양양조(以鳥養養鳥;새의 마음으로 새를 기르는 것)의 마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마음이며, 자연의 그러함이며, 이로써 생태계의 모습을 말한 것이다. 결국 그런 마음이 화훼와 분재, 수석취미 및 사군자와 산수화를 그리거나 완상하게 한 동인이기도 했다. 동양미술이 바로 그런 마음에서 발현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관이 ‘존재의 사슬’이었음을 이해한다.
즉 전체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그물로 짜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근원적 세계관으로 나아간다. 근원적 세계관이란 인간과 자연의 일체를 꿈꾸는 전체론적 사고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모든 생명이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의 온전한 발현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은 동시대의 과학적 합리주의 세계관 내지 서구중심의 인식론적 패러다임과 그로 인한 모든 문화적 논리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데 중요한 사유의 단초를 던져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다분히 명목론적 구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매우 일상적이고 ‘근사’적인 학습과 체험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가장 단순한 실마리가 바로 식물이며 생태론적 시선이다.

생태주의는 ‘환경 속의 인간’ 이라는 이미지를 거부하는 대신에 관계적이며 그물망적인 이미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태주의는 인간이 모든 생명과 연합된 하나의 생명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미지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감지, 관찰로부터 솟아오른다. 안으로 밖을, 밖에서 안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체험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 몸을 다하여 소리를 듣고, 온 몸을 다하여 대상을 바라본다. 그것은 ‘관’觀만이 활동하는 세계이다. 단순한 시선, 습관적인 본다는 것은 이미 편견을 가지기를 택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관찰하는 ‘내’가 사라지고, ‘관찰의 작용‘만 있는 세계, 관하는 것 없이 관하는 세계에 이르는 것은 가능할까? 사실 직관적인 시선의 힘이 만물에게 원초의 모습을 되돌려준다. 본다는 것은 ‘몸을 깨운다’는 말이다. 아울러 가장 순수하게 아는 것이란 문제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즉 문제를 끊임없이 보살피고 키우는 것 10) 을 말한다. 관념에서 사물로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괴로움이자 행동이며 그것이 곧 예술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고는 몸 이상의 것이 아니다.

한 시인은 “세계는 죽음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천국으로 변한다”라고 했다. 죽음 속에서만 모든 사물은 사물답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 시선은 일종의 무한의 의식이기도 하다. 죽음은 비었으나 에너지로 충만하고 죽음은 몸과 몸 사이의 관계를 무한히 확대한다. 만물은 생사라는 호흡이자 생멸生滅이라는 호흡이면서, ‘지금, 여기‘의 무한한 호흡, 열림이라는 싱상을 체득한다. 그래서 생명의 본질을 안다는 것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한다는 것이고 드라마가 배제된 상태에서 본다는 것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체험 속에서 ’생멸이 불생멸‘로 형성되는 순간을 산다는 것 11) 이다. 반면 자연에 대비되는 일상에의 집착은 직선적 시간의식을 노출시킨다. 자연의 도전에 응전함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집착에 머물러 있음으로 작가는 자신의 삶이 지속되는 직선적 시간 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울러 중심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그때 재현된 풍경은 작가에게 체포된 풍경일 뿐, 본래적 자연의 모습은 아니다. 잘 알다시피 서구의 원근법은 자연을 침탈의 대상으로 삼는데 기여했다. 활처럼 눈에서 쏘아진 시선은 자연을 네모로 절단해 풍경을 만들었다. 그 속엔 생명보다는 바라보는 시선의 폭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작가라는 존재는 이미지를 이미지로 느끼는, 공空을 아는 자이다. 따라서 그림이 그려지는 자리는 자신의 욕망이 미끄러진 자리에서 잠시 느껴보는 틈새의 자리일 것이다. 공은 이미지를 세워 가는 삶의 의식에 대한 죽음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잠시 미끄러지는 자리, 욕망이 하나의 대상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그런 환유적 자리에서 비로소 그림들이 그려진다. 그것은 내 몸과 세계가 계속적으로 환경과 교환되고 있음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내 삶과 자연의 삶이 육체적 대화를 통해 죽음과 죽음의 과정 속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것이 바로 내 몸이 자연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다. 모든 자연은 인연에 따라 형성되고 소멸하면서 지금을 향해 달려들고, 또 변화한다. 반면에 기존의 생태와 생명, 식물을 다루는 그림들은 단순히 자연을 절대정신 및 대전제로 간주하고, 우리 인간을 큰 자아에 귀속된 작은 자아로 그리는, 환원주의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즉, 일반적인 공식을 특수한 상황에 적용시켜버리는, 윤리적 목적에 갖다 바치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결코 자연은 자원도, 신비화할 정신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이 끊임없이 연기緣起하는 그 움직임에 동참하는 일밖에는 없다. 결국 미술/그림이란 것 역시 자연의 형식과 조응하는 몸의 형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틀이다. ‘내’가 자연을 전용,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연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유기성 안에 살고, 우주의 미로 안에 살아있는 유기적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미술은 바로 그러한 변형의 역할 속에 있다. 그러니까 그림그리는 이는 관찰과 함께 ‘행’한다. 그 ‘행’함을 미술의 형식이라고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인식 속에서 우리는 새삼 격물치지라는 것, 그리고 식물적 사유와 동시대 미술의 의미를 엮어나가는 한 단초를 만들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1)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세기, 강판권, 지성사, 2002, 19쪽

2) [이성은 죽지 않았다], 박이문, 당대, 1995, 199-203쪽 참조.

3) 한국 고전문학의 전통과 생태적 관점, 박희병, [창작과 비평] 제 23권 제 4호, 1995, 96쪽.

4) [고대 중국인의 생사관], 마이클 로이, 지식산업사, 1987, 87-89쪽.

5) 유학의 자연철학, 윤사순, [조선 유학의 자연철학], 예문서원, 1998, 18-36쪽 참조.

6) [문명은 디자인이다], 권삼윤, 김영사, 2001, 49쪽

7) 불교의 생태관-연기와 자비의 생태학, 고영섭, [생태문제와 인문학적 상상력], 나남출판, 1999, 177쪽

8) 동양철학의 환경윤리학적 태도, 이효걸, [생태문제와 인문학적 상상력],나남출판, 1999, 129쪽

9) 동양적 환경철학의 모색, 최종덕, [우리들의 동양철학], 동녘, 1997, 206쪽

10)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 문학동네, 2001, 63쪽

11)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김혜순, 문학동네, 2002, 191-192쪽 참조.

- 출처 / 식물성의 사유 2002 3. 6 - 3. 25 갤러리라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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