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에서 민화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나?
박영택
한국 현대작가들에게 민화는 고갈되지 않는 샘, 작업에 대한 영감과 새로운 해석을 무한하게 안겨주는 보고에 다름 아니다. 언제부터 민화가 그토록 매력적이고 인기 있는 전통, 한국적인 이미지가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미술사가나 미술인들은 가장 한국적인 미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는 민화와 분청, 백자 등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7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은 어쩌면 그 백자나 민화를 어떻게 작업에 응용하고 해석하는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매진해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좀 거칠게 말해 당대 서구현대미술의 최근 정보와 형식이 민화, 백자와 결합해 만든 변종 같은 것, 또는 서로 이질적인 것에서 공유성을 부단히 찾아보려는 지난한 노력, 아니면 ‘전통(민화, 백자)의 현대화’ 란 과제를 당위로 받아들여 똑같은 숙제를 열심히 풀어냈던 궤적이 그간의 우리 미술이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일제 식민지시대 이래로 향토주의나 동양주의의 연장선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형성되고 논의되었던 조선적인 미에 함몰된 부분도 있고 70년대 민족문화의 압력 같은 것들이 영향을 주었다고 미루어 짐작된다.
서구 현대미술의 일방적 수용과 일상적인 삶, 현실과 무관한 미술에의 반성, 전통미술에 대한 확인 등에 힘입어 민화나 전통회화가 새삼 주목되게 된 것은 전통의 계승과 재창조, 민족문화, 미술에 대한 요구가 관제적으로 주창되던 1970년대였다. 이때 상당수 작가들이 전통미술로서의 민화전통을 돌아보기 시작했고 따라서 많은 작가들이 민화를 주목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일본의 영향, 일본인들의 취향과 감식이 꽤나 컸다. 단색주의 회화와 한 쌍으로 민화가 위치해있었던 것이다. 70년대 초만 해도 민화는 골동상에도 가장 인기 없는 품목이었는데 일본인 화상이나 관광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민화를 집중적으로 수거해가기 시작했다. 민화가 갖는 독특한 양식의 아름다움은 이미 안목 있는 이들에 의해 더러 수장되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거의 통용되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외국인들에 의해 대량으로 팔려 나가면서 내국인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전통에 대한 관심의 증가, 한국적. 민족적 문화의 추구, 우리 미술에의 요구 등등이 얽혀진데다 서구미술이론의 경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비전으로서의 ‘민족전통의 계승’을 고려하고자 한 다수의 작가들이 그 매개로 민화를 선택했다는 생각이다. 80년대는 민족, 민중미술이 영향 아래 민화가 새삼 주목받으며 응용되었으며 특히 당시 박생광의 작업세계가 준 충격은 상당수 작가들에게 민화와 채색화의 힘에 대해, 이미지의 물신주의에 대해, 전통미술이 온전한 의미에 대해 인식하도록 독려한 사건이었다. 박생광 이래로 동양화단 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에 걸쳐 박생광 신드롬, 민화 붐이 일어났는데 이는 또한 형식주의적 미술관, 모더니즘 미술론에서 벗어나 내용과 표현의 주목, 지역성과 정체성 등등에 대한 모색 속에서 개화되었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강력한 영향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80년대 들어와 활발하게 전개된 민화 해석과 응용 및 조형적 실험 등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한국현대미술이 서구미술과 전통과의 긴장 속에서 나름의 접점을 찾고 한국적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는데 단서를 마련해주고 적지 않은 성과를 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민화의 현대화란 문제를 도상의 차용이나 장식적 구성내지는 단순한 응용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민화를 흥미 있는 그림, 재미있고 해학적이며 무기교의 극치를 보여주는 그림으로만 접근하고 눈에 보이는 수준 이상의 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데서 빚어진 오류는 곳곳에서 노정된다.
최근에 와서 민화라는 텍스트를 개인의 서사로 전환시키거나 전통에 대한 메타비평의 단서로 삼거나 혹은 이미지 물신주의의 환생, 미술의 소통 등등으로 관심을 넓혀나가며 그에 따른 일정한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음은 주목된다.
다소 거칠지만 몇 가지로 나누어 민화를 차용하는 작업들을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이런 분류가 작위적인 카테고리로 그칠 위험을 무릅쓰고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1. 민화의 차용으로 이루어진 회화
전체적인 구성과 이미지가 민화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해 온 작업들이다. 민화에서 어느 한 도상, 이미지를 추출해 쓰거나 다른 이미지와 병치해서 다루는 경우에 해당하며 전체적으로는 민화의 형식이 그림의 한 영역으로 들어와 약간의 변주가 이루어진 경우들이다. 전체적으로 민화를 독립된 회화적 이미지로 추출해내고 주술적 이미지와 색채세계가 순수한 조형의 체계 안으로 수렴되는 형식이다.
1970년대에 민화가 가진 소재의 해학성과 표현의 자유로움에 깊이 매료된 김기창은 <바보산수>, <꽃 그리고 새>를 통해 민화 화조의 현대적 변용을 시도했다. 전체적인 구도와 형상은 민화에서 그대로 따왔지만 운보 특유의 활달한 필치와 해학성을 강조했는데 최순우는 그 그림을 이렇게 평했다. “바보산수 그림 속에 그는 그가 좋아하는 조선시대 민화의 정다운 치기와 익살의 상쾌함, 그리고 자연스러운 생략과 대담한 왜곡의 참 멋을 새로운 눈으로 탈피시켜서 우리 그림의 희한한 회화성의 일면을 선보였다.” 운보는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가 동심의 천진난만한 세계로 몰입하자는데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민화야말로 우리에게 예술의 신비로움을 제시하고 있다면서 민화에 우리나라의 토속적이고 미적 얼이 담겨있고 그것은 순수한 동심이 넘치는 인간 본능인 미의 세계라고 인식했다.
이후 박생광은 민화에 내재한 이미지와 색채의 주술성과 힘에 주목한 대표적 작가다. 그는 민화와 불화, 무신도 등 동일한 성격의 이미지를 융합해서 한 화면에 서술화시켰으며 한국인의 소망과 꿈, 희망과 생사관을 그림 속에 축제화 시킨 이다. 박생광 이후 상당수 작가들이 새삼 민화의 아름다움과 의미에 주목해왔는데 김용철은 일관되게 민화의 형식을 차용해 온 작가다. <입춘대길-온수리>와 같은 작품에서 보이듯 한국의 민화를 소재로 끌고 들어와 그 안에 한국의 풍경을 펼쳐놓거나 현실의 욕망과 기복을 의미하는 문장을 삽입시켜 즐거운 이야기 그림을 통해 동시대의 민화로 탈바꿈시켰다.
이희중 역시 민화의 시각 중에서 병치의 기법을 사용하고 민화의 십장생, 모란도, 연자도 등을 통해 독특한 풍경을 형성하는 대표적 작가다. 민화의 소재는 객관화되고 그 자체가 기호가 되고 이 아이콘을 당대의 것으로 끌어내고 있는 그는 한국의 정체성과 정서적 원형을 찾아내고 이상향과 더불어 이제는 잊혀진 신화적 설화적 이야기를 복원하고자 한다. 그러한 이상향을 그리기 위해 민화가 도입되고 재해석 된 것이다.
김종학이 그려내고 있는 <설악산 풍경>연작 역시 화조화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연상된다. 이 시작도 끝도 없이 펼쳐진 풍경은 민화 속 장면이자 동시에 현실적 자연의 모습이기도 화다. 범신론적 생명관이 가득하고 온갖 생명체의 수런대는 싱싱한 소리와 건강함, 해학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민화에서 평등한 생명사상, 대칭적 사유를 접했고 그것이 중요성을 그림으로 재확인하고 있다.
80년대 민중미술에서는 단연 오윤의 민화해석이 돋보인다. 그는 민화에서 민중적 정서와 신명, 해학 등을 읽어내고 형상화 해내는 데 탁월한 혜안을 지녔다. 그는 자신의 긴장된 화면의 전거를 민화적 전통에서 찾아냈고 민화전통의 계승과 재창조에서도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었는데 민화의 도상이나 색채보다도 그 안에 깃든 정신, 민중성 등에 본격적으로 주목한 것이다. 이후 홍성담, 유연복, 이철수 등 후배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민화의 ‘민족성’과 ‘민중성’에 주목케 했다.
민화의 도상과 색채의 힘, 그리고 이와 함께 실존의식을 하께 결합시켜 낸 이는 서정태다. 그는 80년대 후반 강렬한 채색작업을 통해 민화나 민예적 소재를 자신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작업을 선보인 그는 특히 현대인의 실존적 고뇌와 민화의 재구성을 결합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김병종은 민화의 도상들을 자의적으로 구성해서 문인화와 결합시켜 낸다. 그는 조선민화에서 보여주는 색채의 여유와 해학의 미에서 한국적 미를 찾는 동시에 민화가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무목적성, 서민의 소박한 미의식으로 형성된 내용, 외래의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적인 것의 처녀성을 말해주는 사투리 언어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교나 완성도에 있어서는 숨막힐 듯한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고 인식하고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박남철 역시 간결한 선묘와 선명하고 평면적인 색채를 통해 민화와 신화의 세계를 동화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민화에서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발견하고 이를 화면 안에 발산한다. 그는 민화에서 보는 천진난만함과 모든 생명체들의 박동치는 생명력, 아이들 그림처럼 순수한 경지를 꿈꾼다. 그런가하면 배성환은 ‘민화연습’연작을 통해 한지에 채색, 선묘와 인장, 사각모서리에 색동천의 콜라주 등을 통해 조형적인 긴장감과 장식적 요소, 선묘와 채색, 민화에서 보여 지는 이미지의 주술성 등을 조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다.
그 외에 대다수 작가들은 민화에서 나타나는 화조도나 조충도를 약간씩 변형시키거나 그대로 따와서 채색화로 공들여 그리거나 ‘전통회화의 민화의 소재를 가져다가 현대인의 미적 감각에 부흥하는 형식으로 재해석’한다거나 진정한 한국현대미술은 우리 회화전통에서 그 뿌리를 캐어야 한다는 당위에 따른 맞춤형 그림을 장식적으로 꾸미는 작업들이 양산되고 있다. 고구려고분벽화의 한 장면이나 민화의 도상들을 간편하게 끌어다가 자신이 작업 사이로 밀어 넣고 결합시켜내는 유형이 작업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이다.
2. 민화의 유기적. 순환적 화면 구성
민화의 도상과 이미지이 물신주의 뿐만 아니라 민화 안에 내재한 순환론적 세계관, 유기적 생명관, 범신론적 사유 등을 그림으로 해석해내는 작가들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나로서는 민화에서 보이는 그 대칭적 사유, 모든 생명체를 동일한 존재의 연쇄망 속에서 파악하는 시선이야말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중반 황창배의 개인전에서 바로 그런 시선을 만났다. 민화를 단순히 형식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민화가 지향한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의식을 상기시켜준 그 그림들은 민화에 나타난 즉흥적 생명력과 무목적적 자유방임의 순수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산수화와 민화를 뒤섞어 놓았고 찰나의 진동하는 기운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력을 포착하고 순수한 조형요소들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지극히 우연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구체적인 것으로 찾아내는 방법 및 과정에서 인간의 모습이나 나무, 꽃, 새 같은 자연의 이미지가 자동발생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바로 순환론적 세계관, 범신론적 사유의 증좌다.
그런 영향은 이왈종의 1990년대 이후 민화의 새로운 변용을 보여준 작업에서 다시 등장한다. 민화의 해학성과 자유로움을 강조하는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끝없이 돌고 도는 형국을 보여준다. 원근법이나 명암법도 의미가 없어지고 시점이나 공간설정 또한 지극히 자의적인 편이다. 마치 조선시대의 지도를 그리는 부감법과 민화의 기법을 도입해 모든 사물이 단위적으로 나열되는 전면화 형상이라든지 동물과 식물, 유기물과 무기물의 혼유는 범신적 관념의 독특한 전개방식이다. 인간의 눈으로 대상, 자연을 바라보고 질서지우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시물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전도된 시각, 저마다의 독자적인 절대가치를 인정하는 세계를 지향하여 자연과 조화롭고 평등한 관계, 대칭적 사유를 보여주는 것, 다름 아닌 민화의 시선이다. 유사한 경향으로 장혜용의 작업이 있다. 전통 민화나 단청 또는 한복의 색채를 끌어들여 만든 ‘얼’시리즈는 화면 가득 구비치는 가락과 선율과 리듬이 충만하다. 도상들은 서로 한데 엉켜있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민화의 구성체계를 연상시킨다.
전혁림이 그림 역시 전통적인 오방색과 민화의 도상을 끌어들여 구상과 추상의 중간지대에 머물면서 공간의 분할과 주제의 재구성, 공간이 확산과 수축 등 모든 조형적 방법을 동원해 민화이미지의 유기적 관계성을 연출한다.
<3. 새로운 모색과 실험적 변용
민화의 부분적 원용과 별다른 차이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단순한 도상의 차용이나 장식적인 관심을 벗어나 민화라는 텍스트를 새로운 언어로 구조화하거나 그 문맥에 개입해 전통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감행하는 식이다.
대표적으로 박이소를 꼽을 수 있다. 아마도 민화를 전통에 대한 비평, 메타비평으로 끌어들여 새롭게 텍스트화 한 최초의 작가일 것이다. 책거리그림에서 차용한 이미지는 박제화 되고 골동화 된, 죽은 전통을 창백하게 보여주는 기호로 이용된다. 박이소의 작업은 다양한 전통적 도상을 끌어들여 이를 전통에 대한 메타비평으로 언어화한다. 이 작업은 ‘그냥 풀’과 함께 한국현대미술에서 죽은 전통들의 기념화에 대한 모든 시도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작품이다.
이제 작가들은 민화를 통해 도상이 차용이나 색채구사라는 표피적 관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한만영은 다양한 문화적 코드와 시대적 의미들의 상호충돌을 통해 새로운 초현실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가다. 그는 동일한 맥락에서 작호도의 실루엣만 따오고 색면 추상과 오브제 철선의 개입을 통해 현대미술이 구조와 방법론 아래 민화를 재해석하고 있다.
근자에 젉은 작가들은 민화라는 텍스트를 흥미롭게 재구성, 다시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써니킴은 클리셰적인 포즈를 지닌 소녀들의 사진을 차용해 회화적 공간으로 변용시켜 놓고 그 배경에는 자수로 장식된 십장생 문양을 배치했다. 여성들에게 강요된 대표적 노동형태인 자수와 도교적 이상향인 십장생도가 조응하고 그 안에 수동적인 여성의 육체가 놓여있는 이 그림은 남성중심의 세계간과 이상향으로서의 민화, 여성의 수공적 노동인 자수, 바느질이란 치유의 행위 등등을 복합적으로 얽혀놓아 민화를 여성적 시각에서 다시 보게 한다. 발랄하고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서은애의 작업은 바로 민화의 문자도 등을 차용해 그 일부분에 직접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거나 또는 자신을 상징하는 대체물을 삽입 또는 환치시킨다. 민화가 지닌 기복신앙을 현재의 자기 생의 욕망과 결합시켜 내면서 민화의 주술성을 환기시켜낸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지혜 역시 책거리 그림을 인용하고 이를 현대일상 오브제와 교차시키며 대중소비사회 현대인들의 욕망을 기호화하는 현대판 민화를 형상화하는 작가는 전통을 통해 한국적 정신성이나 관념성의 표출에 주목하기 보다는 시각성과 전통의 창조적 변용에 관심을 두고 있다. 서희화 역시 민화가 가지는 팝 적 요소와 화려한 색상이 오늘날 플라스틱 일상 오브제를 통해 환생한 이 작품은 민화처럼 일상 공간, 벽에 직접 부착되고 설치화 되면서 공간에 서식하는 부조회화, 조각적 회화가 된다. 소비산업사화의 일상용품과 키치적인 물건들이 재배열, 기이한 접속에 따라 민화의 도상으로 다시 태어난 것들은 새삼 현대인의 욕망과 기복을 염원하는 진부한 기호로 작동한다.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과다한 고민대신 원본(전통)의 자유로운 참조와 이에 대한 독창적 변역을 과감하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태도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민화 혹은 전통이미지라는 텍스트들은 고유한 의미를 발현하는 오리지널리티로서의 권위를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원본의 무게가 탈각된, 언제든지 인용하고 조합할 수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 중의 하나로 기능한다. 그에 따라 이 복수적 텍스트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작가에 의해 조작 가능한 수많은 기표들로 다루어지고 서로는 자유롭게 접합되고 연쇄된다. 당대인들의 간절한 생의 염원을 드러냈던 조선시대의 민화는 젊은 작가들에 의해 현대인들의 삶과 욕망에 대한 표상으로 재구성된다. 우리 문화 속에 내장되어 온 시각적 텍스트들이 당대 텍스트들과 마구 뒤섞이면서 작품은 다차원의 공간으로 재영토화하고 그 의미는 무수하게 복수화되어 산개한다.
그간 한국현대미술에서 민화는 수없이 참조의 대상으로 제공되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민화를 원용, 차용해서 간편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또는 민화를 적당히 끌어 쓰면서 전통의 계승, 한국적 정체성을 지닌 그림으로서의 알리바이를 웬만큼 확보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같다. 민화를 날로 먹으려는 작가들이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민화를 소재로 해서 저마다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작업들은 다수지만 정작 민화의 본뜻이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도상이나 색상 자체에만 매료되거나 아니면 다소 어리숙하고 치기 어리게 그려진 그림의 재미 같은 부분적 요소만을 자의적으로 끌어 쓰거나 화면을 장식적, 인테리어적으로 꾸며내는 차원에서 이용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나 동양화 분야는 그 정도가 무척 심하다. 반면 몇몇 작가들은 민화 속 이미지들을 통해 이 땅에서 살다간 선인들의 간절한 기원의 뜻을 헤아려 보고자한다. 비록 그 이미지의 물신주의는 지워져 버리고 도상들이 지닌 삶의 욕망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들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근원적인 생에 대한 본능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동일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이미지의 물신주의 역시 나름대로 오늘날 미술에서 새롭게 탄생되고 있다. 새삼 미술이 물신주의에서 벗어나 이미지 그 자체로 귀결되는 과정을 겪은 것이 현대미술의 역사라면, 그것이 또한 서구 현대미술이란 우리의 현대미술의 과정 역시 이미지의 물신주의를 지워가며 부정해온 역사였다. 그로인해 전통미술과 단절되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서도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함께 공유했던 생의 욕구와 희망과 구원이 미술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기능했던 모든 이미지들은 일종의 주술적 물건들이다. 이미지의 물신주의가 그것이다. 이미지들은 그렇게 꿈과 소망의 뜻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민화의 모든 도상들은 가장 인간적인 욕망의 구현을 소망하고자 했던 소박한 상징물이다. 그것은 우리네 전통사회의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 반추해 떠올려 보았던 이미지들이다. 아마도 그것들과 함께 평생을 안락하게 보내고자 했던 생의 열망이 촘촘히 깃들어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 파라다이스가 그 안에 온전히 서식했다. 생각해보면 모든 미술은 인간적인 소망과 기원, 이미지를 통한 보이지 않는 모종의 힘에의 열망 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미술이 본질적으로 소통에의 욕망이자 수단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자 한다. 여러 의미에서 민화는 오늘날 또 다시 새롭게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열린 텍스트다. 단순한 도상의 장식적 차용이나 한국적 작업의 당위로 삼는데 머물지 말고 그 본래의 뜻을 잘 이해하고 오늘날 미술의 결핍을 극복하고 전통미술의 진정한 모색이란 의미에서 다시 읽어야 할 그런 텍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