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창작미술협회 50주년 전시
한국현대미술과 창작미술협회한국현대미술의 기점에 대해서는 대개 1960년대, 엄밀하게는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앵포르멜의 도입과 그 시기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본다.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국내 화단에는 소위 뜨거운 서정 추상을 표방하는 앵포르멜 경향과, 상대적으로 차가운 추상을 표방하는 탈앵포르멜 경향, 그리고 설치와 해프닝을 통한 탈평면의 경향이 공존했다. 돌이켜보면, 50년대 후반에 등장하여 60년대에 정착한 국내 앵포르멜 운동은 전후 유럽의 경우처럼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심각한 반성의 산물이기보다는 다분히 미술 내적인 문제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구상회화로 대변되는 아카데믹한 국전 풍에 반대하는 소위 반(反)국전을 표방하고 나선 것이다. 이후 앵포르멜은 1957년 창립된 모던아트협회와, 1957년에 창립돼 1961년 해체되기까지 향후 5년간 지속된 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를 중심으로 그 정신과 방법론이 이어졌으며, 같은 해인 1957년 조선일보사가 개최한 ‘현대작가초대전’을 계기로 본격적인 전개의 단계로 접어들기에 이른다.
이처럼 국내 현대미술의 태동과 관련해서 1957년은 여러모로 그 의미가 크다. 창작미술협회 역시 1957년에 창립되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거의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창작미술협회는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가 국전을 중심으로 한 세력다툼이 한창이던 1957년 당시 기존의 세력권으로부터 이탈하여 순수창작을 표방하며, 그 해 5월 동화화랑에서 제 1회 창립전을 개최하였다. 당시 전시에는 이봉상, 최영림, 황유엽, 장리석, 이준, 류경채, 고화흠, 박항섭, 박창돈 이상 9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작가들의 면면에서도 확인되듯이 특정의 경향이나 이념보다는 순수한 창작의지가 이들을 결속시키는 구실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경향을 보면, 최영림의 작품세계는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 유학 시절 당시 일본의 목판화가 무나카타 시코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이는 주로 피리 부는 소년과 나체의 여인들을 소재로 한 목가적인 전원 풍경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불어 1934년과 1940년에 일본창작판화가협회전에서 입선한 작가는 국내 최초의 현대판화작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편, 황유엽이 향토색이 짙게 배어나는 구상회화를 보여주고 있는가 하면, 변시지와 함께 제주도의 작가로 불릴 만큼 제주도의 지역적 특정성에 천착한 장리석의 그림에서는 제주도의 풍광을 빼닮은 질박한 질감이 묻어난다. 이들 작가에게서 나타나는 향토색이나 질박한 질감은 난리 통에 고향을 버리고 월남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박창돈의 그림은 단아한 자세의 여인을 소재로 한 구상회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창작미술협회의 창립에 참여한 작가들은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와 관련하여 하나같이 중요한 인사들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류경채는 창작미술협회의 창립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본회의 창작이념을 견인하는 실질적이고 정신적인 스승이었다. 구체적인 자연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이를 점차 순수 추상의 관념세계로까지 확대 적용해나간 그의 화풍은 흔히 ‘서정적 추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러한 화력은 한국현대미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그를 자리 매기는데 주저하지 않게 만든다. 1995년 류경채가 타계한 이후에 그를 기리는 여러 행사와 전시들이 줄을 이었다. 1997년에는 고인의 유족들이 중심이 돼서 류경채 미술재단이 설립되었으며(고인의 장남인 류원을 비롯한 작가 전뢰진, 유희영, 강광, 하영식 등이 재단 설립에 참여했다), 기념미술관(유씨예술연구지려)과 미술상 제도가 현재 설립 추진되고 있다. 전시와 관련해서는 2002년 덕수숭미술관에서 <류경채 회고전>이 열렸으며, 류경채 작고 10주기인 2005년에는 이를 기념하는 문집 <폐림지 근방>(우수적이고 목가적인 작가의 화풍을 함축하고 있는 대표작의 제목에 따른)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는 금호미술관에서 회고전(영원 - 승화된 서정적 추상)이 열렸으며, 그리고 예술원 미술관에서는 추모전이 열리기도 했다. 실로 창작미술협회의 연륜은 이들 초창기 멤버 중에서 류경채를 비롯, 정린, 이봉상, 박항섭, 최영림, 고화흠 등의 작가들이 이미 세상을 달리했다 데서도 읽혀진다.
이후, 협회는 정기적인 회원작가전과 더불어 1972년부터는 일본과의 작가교류전을 통해 그 전망을 더 확대했다. 1972년 6월 일본의 전위그룹인 이과회(二科會)와의 교류전 형식으로 일본 현지에서 열린 제1회 한일작품교류전은 현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당시 현지 언론으로부터도 일본작가들에 비해 더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매년 한 차례씩 열리던 한일작품교류전은 1984년 10월 후쿠오카 미술관에서의 제11회 전시를 마지막으로 그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는 범아시아 지역을 하나로 묶는 본격적인 국제전 형식으로 그 교류의 장을 더 확대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니까 1985년 제1회 아시아국제전(국립현대미술관)에는 일본작가들을 비롯해서 대만과 인도 출신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이는 이후 매년 개최국을 바꿔가며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국제전 형식의 전시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1979년 제24회 전시에서 일본작가(이끼요시시케오)와 함께 특히 독일 출신 작가들이(카알 보오만, 마리아 로위터, 엘제 베히탤러, 올리비아 휘서, 카알 임호프) 대거 참여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작가들을 이후 전시에까지 지속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본 전시를 아시아 지역을 비롯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국제전 형식으로까지 확대하는 실질적인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와 함께 창작미술협회는 1976년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고 더불어서 동시대미술과 그 호흡을 같이 할 요량으로 제 1회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이후 회원작가를 중심으로 한 정기협회전과, 신진작가를 대상으로 한 공모전, 그리고 아시아 지역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국제교류전을 병행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창작미술협회는 순수추상미술그룹인 <신조회>(주로 대구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의 창립에도 사실상의 산파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동질성은 추상회화로 나타난 주요 경향성에서도, 그리고 특히 참여 작가들의 면면들이 중복되고 있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창작미술협회의 주요 경향성창작미술협회는 특정의 경향이나 이념을 중심으로 모인 단체가 아닌 만큼 참여 작가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지배적인 경향은 없다. 다만 대체로 추상미술의 비중이 높고, 특히 서정추상의 경향이 대세임이 확인된다. 이는 아마도 다른 선배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류경채의 화풍이 지배적인 코드로 작용했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그 대략적인 경향은 구상회화와 형상미술, 기하추상, 서정추상, 그리고 디지털매체 시대 이후의 영상설치미술과 형상미술을 재해석한 신형상미술 정도로 구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구상회화와 형상미술은 강우문(전통적인 탈춤을 소재로 한 해학적인 인물화), 김경인(시사성이 강한 사회적 풍경), 한운성, 황용진의 그림 등에서 그 예를 접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한운성은 시사성이 강한, 시대정신을 반영한 일련의 회화와 판화들을 보여준다. 예컨대 찌그러진 코카콜라 캔을 소재로 한 판화 <거인>을 통해서 자본 잠식을 목적으로 한 신제국주의를 비판하는가 하면, 천과 끈으로 동여맨 신호등을 소재로 한 판화를 통해서는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를 풍자한다. 근작에서는 각종 채소와 과일의 표면 질감에 천착한 촉각적인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말이나 소 등의 동물과 인간의 몸을 소재로 한 황용진의 회화는 일종의 도상성과 함께 우화적이고 신화적인 멘탈리티를 느끼게 한다. 근작에서는 풍경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로부터는 마치 시간이 멈춰선 비현실적인 장소와 대면하는 듯한 정적이고 아득하고 목가적인 명상의 계기가 느껴진다.
기하추상은 다른 경향들에 비해 현저하게 모더니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회화의 특정성으로부터 창작의 이유를 찾는 것으로서 나타나며, 주어진 화면 자체를 인위적인 질서로 구축되고 재편된 자족적인 장으로 보는 태도가 특징이다. 흔히 예술의 자율성과 회화의 자율성 개념은 이러한 태도를 정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경향은 이기원, 류희영, 하관식, 배영철, 최기득, 이애경, 그리고 이나경 등의 회화에서 확인된다. 이들 중 이나경의 그림은 회화 자체의 내재적인 원리에 충실한 편이며, 이는 화면에 대한 구조적이고 구축적인 관심으로서 나타난다. 더러 화면의 구조에 대한 관심이 사물(화면에 대고 눌러 찍어 이미지를 얻기 위해 도입한)의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기도 하지만, 이때도 사물의 구조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개별성을 획득하기보다는 화면의 구조에 종속되는 형태로서 드러난다. 화면의 구조와 사물의 구조가 하나의 결로 짜여 있어서 그 경계와 구분이 없고 일체화된 화면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서정추상은 그 자체 순수추상 혹은 절대추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어떠한 식으로든 형상 혹은 구상과의 상당한 관계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즉, 형상을 나름으로 추상화한 반(半)구상의 양식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골판지와 요철지, 한지를 비롯한 각종 인쇄물을 이미지 대신에 차용한다든지, 콜라주와 데콜라주 기법을 차용하는 등의 (평면) 오브제의 부분적인 도입이 확인된다. 이외에도 다양한 기법에 의한 마티에르 효과를 통해서 감각적이고 회화적인 화면을 연출해낸다. 서정추상은 그 경향이 액션페인팅과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앵포르멜의 다양한 스펙트럼과도 통하는 것이다.
대략 이영륭, 최욱경, 이상욱, 홍정희, 정점식, 강광, 문종옥, 박종갑, 백광기, 신미례, 강홍윤, 김영배, 유인수, 고영일, 백광익, 이응구, 이주숙, 박태홍, 하진용, 김학광, 민영욱, 이명애, 이경애, 유순희, 이상혜, 남상운, 최상현, 김성태, 김정호, 하영식, 유병수, 백미혜, 남춘모(재료의 물질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미니멀하고 감각적인 화면이 특징인), 엄시문(자연 오브제의 도입), 도윤희(마치 화석의 단층이나 세포의 결정체를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특징이며, 그 자체가 일종의 시간의 지층을 암시함) 등의 작업이 이런 서정추상의 경향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외에도 물감을 두툼하게 올려 바른 후 그 표면을 빗으로 긁어내는 것으로서, 내면적인 빛을 형상화한 김형대의 화면에서는 일종의 빛의 현상학이 감지되고, 특히 안료의 물질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런가하면 구보경, 오경환, 김선회, 이혜순(환상적인 이미지) 등의 경우에는 추상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상과의 상당한 관계를 암시하거나 내포한다. 이 가운데 구보경의 회화는 서정적이고 장식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짧게 끊어 중첩시킨 붓질이 중층화된 시간의 궤적을 느끼게 한다. 자연 친화적이지만 소재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대신 자연으로부터 취해온 소재(예컨대 꽃과 비 같은)가 회화적 프로세스 속에 해체됨으로써 회화적 평면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부드러운 색조와 중첩된 붓질에서 일말의 내재적 운율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리고 오경환은 40년이 넘는 화력(畵歷) 내내 우주라는 특정 주제에 천착해 왔다. 작가에게 있어서 우주는 세계의 감각적인 지평(현상적 실체)과 추상적인 지평(관념적 실체)이 통합되는 장이며, 과학적인 사실과 예술적인 사실이 교직 되는 장이다. 생성과 소멸이, 삶과 죽음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서 순환하는 시간의 장이기도 하다. 우주가 함축하고 있는 이런 다양한 스펙트럼은 우주를 지식으로 재단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그럼으로써 우주의 시원적 풍경을 열어 보이고, 그 비의를 드러내 보여준다.

또한 이광미(요철화면 혹은 판각된 저부조의 이미지), 이명재(수제 종이를 이용한 릴리프), 조혜연(수제 종이를 이용한 릴리프), 이명숙(판화와 아티스트북), 홍재연(부도를 소재로 한 추상회화와 판화), 김상구 등의 화면에서는 판화와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관계가 읽혀진다. 이 가운데 흑과 백의 대비가 두드러진 모노톤의 화면과, 세부가 생략된 심플한 화면, 최소한의 형과 선으로만 이루어진 절제된 화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판을 중첩시키지 않고 한번에 찍어낸 프로세스가 특징인 김상구의 목판화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심상 풍경을 그려 보인다. 이외에도 화면에 형상을 그리고, 그려진 형상을 따라 바느질을 덧댄 김수자의 화면은 바느질을 드로잉의 한 형식으로 끌어들여 조형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흔히 1980년대를 이념의 시대로, 1990년대를 몸과 감각의 시대로, 그리고 2000년대를 에코 즉 환경과 생태의 시대로 각각 정의한다. 그러니까 당대를 지배하는 코드가 그 속에 함축돼 있는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와 맞물려 본격적인 다원주의의 시대로 접어든다. 장르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학제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만큼이나 이후 나타난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하나의 특정 장르 혹은 경향으로 묶어내는 것이 사실상 무리이다. 그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내심으론 여전히 아날로그의 미적 감수성과 향수를 추억하는 세대(실제 세대를 지칭하기보다는 작업에 나타난 감각의 종류로 추정해본)의 작업은 생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역동적이며, 다양하게 현상한다.
대략 신원섭(오브제의 도입), 유중희(프로타주 기법과 오브제의 도입), 임철순(사진전사기법과 오브제의 결합), 원상용(사진전사기법의 차용), 김향남(콜라주), 이상은(디지털프린트에 의한 기하추상), 김경애(각종 고문자를 차용한 콤포지션), 홍창호(디지털프린트와 개념미술), 박상숙(디지털프린트와 오브제의 차용으로 나타난 식물이미지), 이계원(설치작업), 김재권(영상설치작업), 송선영(바코드를 재현한 설치미술), 권용래(스테인리스스틸 판에 반영된 빛을 소재로 한 설치작업), 강영민(신세대 작가들에게서 나타난 네오팝의 경향을 반영한 캐릭터), 손성진(정물의 재해석), 권기동(표현주의적 신형상미술), 조명식, 권여현, 차기율, 송은영 등의 작업에서 그 다양한 스펙트럼이 느껴진다.
이들 중 조명식은 우표, 상표, 전화번호부, 직인이 찍힌 엽서, 사진 등을 종이 위에 전사하기도 하고, 콜라주하기도 하는 등의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기호의 편린들을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권여현은 차용, 특히 자기차용의 사례를 보여준다. 작가는 조선시대 풍속화를 차용하고,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차용한다. 이때 모델은 단순히 소재로서 차용될 뿐만 아니라, 모델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함으로써 창작주체를 모호하게 한다. 그러니까 그림의 창작 주체가 작가 자신인가 하면, 모델이기도 하고, 둘 다 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어디까지가 작가에게 속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러한 차용과 자기차용은 이미지의 생산보다는 이미지의 소비에 맞춰진 동시대의 이미지의 존재방식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땅의 기억>을 테마로 작업해온 차기율은 마치 반쯤은 자연이 만든 듯한 조형물을 보여준다. 이는 나무토막을 떠낸 테라코타로 기둥을 축조하거나, 껍질을 벗긴 단풍나무 가지에 조약돌을 매단 오브제를 설치하는 등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때로는 자연의 원형에 주목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과 문명을 대비시키기도 한다. 근작에서는 시대를 관통하는 각종 아이콘이 담겨져 있는 수조 작업을 통해 문명 비판적인 작업을 내놓고 있다.
그런가하면 송은영은 스테인리스스틸판과, 은빛으로 발광하는 비닐판을 소재로 한 설치작업을 보여준다. 이 소재들은 거울을 대신한 것으로서, 그 거울에 반영된 영상은 작가의 주체를 고정된 실체로서 되돌려주지는 않는다. 자기를 향한 작가의 탐색이 그 강도를 더하는 만큼 이미지는 오히려 파편화된 자기, 분절된 자기, 왜곡된 자기, 낯선 자기를 되돌려줄 뿐이다. 자기에로의 이러한 지향성은 마치 만화경처럼 표면적인 놀이로 환원되는 것이다.
특정의 경향이나 이념은 단체를 결속시키는 구실이 되어준다. 따라서 창작미술협회가 이러한 경향이나 이념을 표방하지 않고 순수한 창작의지만으로 협회를 견인해왔다는 것에, 더욱이 국내 최고(最古)의 협회로서 지금까지 존속해왔다는 것에 경외감을 갖게 된다. 어쩌면 이념이나 경향이나 시대에 휘둘리지 않았기에, 오로지 순수한 창작욕구에 의해 결속되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전통의 골이 깊으면, 그만큼 정체의 골도 깊은 법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있어야 하며, 동시대 미술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실천논리의 개발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창작미술협회에 나타난 경향성의 스펙트럼은 더 다양해져야 하고,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특정의 이념이나 경향의 부재가 오히려 다양한 경향성에 대한 포용력으로 나타나고, 이는 그대로 현대미술의 다원주의와도 맞물려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