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상들은 사용된 깡통처럼 찌그러져있다. 인물들은 일회용 사물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초상사진을 출력하여 찢거나 구기고, 입체로 만들어 다시 사진을 찍고 유화로 그리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외부적 힘에 의해 훼손된 얼굴들은 한 장의 종이 위에 살짝 얹혀 있을 뿐인 이미지의 불안정한 존재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방으로부터 힘을 받으며 가장자리로부터 구겨지는 인물들은 배경의 거의 삭제된 와중에도 어떤 상황과 시간성을 암시한다. 서서히 조여 오는 압력은 특정한 개인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끝내 사물화 된다. 한번 구겨지면 원상복구가 될 수 없는 종이의 물리적 성질은 같은 대상도 다르게 연출한다. 작품 [수집된 아름다움](2008)은 상표가 채 떨어지지도 않은 선글라스를 낀 클론 같은 인물들이 쇼핑백에 담겨있다. 어디선가 떼어내진 얼굴들은 존재의 무게를 떨쳐내고 보이지 않는 체계의 회로로 흘러 들어간다. 소재는 자못 가볍게 다루어지지만 이러한 가벼움에는 인간 존재가 처한 심각한 상황을 폭로하는 역설이 내재되어 있다. 특정한 개인이 익명화, 사물화 되는 과정은 눈 부분이 찢겨지거나 거대한 선글라스로 가려지는 것 등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그것은 상황으로부터의 도피 또는 배제를 암시한다. 공간에 붕 떠있는 머리들은 삶의 문맥으로부터 탈각된 인물들이며, 그것은 자신의 실체적 진실을 잃고 허구화, 추상화된다. 인물이 속했을 법한 문화 생태계 역시 찢겨져 나가며 허연 공백을 드러낸다. 위협적인 힘을 받는 인물들의 충격을 완충해줄 수 있는 공간도 텅 비어있다. 실험실 같은 무색무취의 공간에는 드리워진 그림자나 기저면 등이 암시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실재의 반영이기 보다는, 실제 공간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 보인다. 작품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_2](2009)는 판에서 뜯겨져 나간 구겨진 얼굴 뒤로 희미한 그림자가 보인다. 그것은 허상 뒤의 허상으로, 실체가 부재한 채 연속되는 무한한 상호 반사를 예시한다. 실제 공간이나 인물 같은 외관 대신에 들어서 있는 것은 작품 [optical illusion](2007)의 제목에 써있는 시각적 환영이다. 2007년의 작품들에는 구겨진 종이가 빙산이나 바위산, 호수 같이 풍경적 요소와 중첩된 화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3차원과 2차원 사이에서 환영을 발생시키는 구겨진 종이의 면들은 회화적 공간과 교차된다. 작품 [love](2008)처럼, 화면 아래가 흘러내린 캔버스처럼 그려진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평면에 고착되는 시각적 환영은 변형되지 않고서는 붙잡을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얼굴은 인간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 막스 피카르는 [사람의 얼굴]에서 우주만물은 사람의 얼굴 속에 그려져 있다고 말한다. 이성과 의지 등, 인간의 심오한 본성이 드러나 있는 얼굴은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신과 동일한 형상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분열을 거듭하던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꺼려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모습을 기억 속에 담아두려고 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로 지켜나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신의 참모습을 담은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두개골 앞에 살짝 붙여진 육체적 표면으로 축소되고, 붙어있는 세면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하나의 표면이 되었다. 김동원의 작품에서 원근법적 깊이를 가진 얼굴은 표면으로의 환원을 넘어, 이질적인 것으로 변질되는 중이다. 접힌 표면은 실체와 표면의 이중성을 하나의 차원으로 복속시킨다. 그것은 화면 더 가까이에 얼굴을 밀착시킨다. 막스 피카르는 아름다운 먼 곳과 가까운 곳 사이를 오가며 살았던 예전 사람의 얼굴에 비해, 오늘날 얼굴은 언제나 가까이 답답할 정도로 바싹 붙어 있다고 말한다. 차원 자체가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 버린 것이다. 찌그러진 얼굴은 그것을 이루는 각 기관에 내재된 유기적 질서를 와해시키면서, 얼굴을 우연히 던져진 어떤 것으로 변화시킨다.
간판들로 빼곡한 도시적 배경이나 축소 변형된 얼굴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품으로서의 상품은, 얼굴의 전락에 내재한 사회적 상황과 정체성의 변화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물심양면에서 변화가 완만했던 전통적 사회에서의 안정된 정체성과는 달리, 시장과 상품이 전면에 드러나는 현대사회는 변화와 선택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겉보기의 진보와 다양성 이면에, 변화는 강제된 것이고 개인이 어떤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가의 폭도 그다지 넓지 않음이 드러난다. 현대 미술가의 작품 속에서 인간의 모습이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갖춘 고유의 실체감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회학자들은 화폐 화 된 모든 형태의 부가 전통사회를 무너지게 했다고 지적한다. 혈통이나 기질 등으로 형성된 전통사회의 안정된 정체성 역시 화폐라는 코드가 들어서기 위해 텅 비워져야 했다. 자기 이해를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개인이라는 근대적 이상은 정립되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한다. 무엇이 이해인지 합리인지 결정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시장의 체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은 시장이 추동하는 정처 없는 욕망에 의해 움직여지는 장기판의 말로 축소된다. 개인을 찌그러뜨리는 힘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아담 스미스)을 연상시킨다.
김동원의 이질적 ‘초상화’에 내재된 깊이의 결여와 공허함은 존재론적이고 사회학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고, 실재와 환영에 얽힌 회화적 차원의 문제의식이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텅 빈 벽, 또는 공간을 배경에 모호하게 얹혀있는 얼굴들은 건드리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릴 듯하다. 얼굴 뒷면이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음이 강조되고, 얼굴 자체도 2차원이 접혀 만들어진 3차원적 환영이다. 구겨진 형태를 이루는 크고 작은 면들이 보여주는 원근감의 해체와 촉각적 성질,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환영은 분석 큐비즘의 공간과 비교될 수 있다. 존 골딩은 [큐비즘]에서 큐비즘의 공간 감각은 세잔의 말기 그림들에 잠재되어 있는데, 세잔의 그림 대상들에 내재된 미묘한 형태의 왜곡과 추상화는 그림에서의 단단함 및 구조의 감각과 공존한다고 지적한다. 김동원의 그림에서 평면을 구겨서 만든 형태는 전통적 원근감을 배제하면서도 회화적 공간으로 압축된다. 그것은 존 골딩이 지적한 세잔 이후의 근대회화처럼, 깊이를 제한하면서 평평한 화면 위로 회화적 공간을 압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크기와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작은 면들은 얼굴이라는 구상적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포개지면서 마치 저부조같은 물질성이 강조된다.

여러 개의 광원을 담은 부정형의 면들은 서로 엇물리면서 관객의 시선은 화면 앞으로 바싹 다가서게 만드는 점이 분석기 큐비즘과 비교될 수 있는 김동원의 회화적 공간이다. 그의 그림은 여전히 2차원 표면에 3차원 양감을 재현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차원들 간의 변용에는 큐비즘으로 촉발된 회화의 근대적 어법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김동원의 경우, 이러한 촉각적 공간은 인물의 형태에만 적용된다. 그는 변형된 인물들 배후로 희미하게 환영적 장치를 끌어들인다. 바닥에서 1/3에서 1/4 정도쯤에 그어진 기저 면이나 아래로 떨어지는 그림자 등이 그것이다. 시각적 환영이 만들어내는 이 빈 공간 속에서 촉각적 형태는 또 다른 문맥을 부여받는다. 큐비즘으로 촉발된 현대회화의 혁명은 회화의 자율성을 완성하였지만, 그것은 현실을 괄호치고 서야 가능했던 형식적인 자율성이었다. 모더니즘의 역사가 예시하듯, 자율화된 회화는 상처뿐인 승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김동원은 촉각성과 착시를 이용한 환영을 복합적으로 활용한다. 그것은 그림이 자족적인 사물이 되려고 하는 현대의 경향과 인간의 사물화가 이루어지는 공통의 지반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소외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좌표축이 설정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