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 전 (10.6-10.25, 갤러리 현대 강남)자연스러운 세월의 힘, 또는 파국적인 사태 때문에 폐허가 된 건물 앞에 잡초만이 무성한 정재호의 작품과 혼돈에 빠진 우주적 어둠을 뚫고 창조되는 세계를 묘사한 지용현의 작품에는 역사 이후의 장면이라 할 만한 것이 있다. 우리 근대사에 부침했던 장소들이 등장하는 정재호의 작품들이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가 있다면, 북유럽의 환상적 리얼리즘을 떠오르게 하는 지용현의 작품은 현실을 압도하는 환타지의 세계가 특징이다. 한지에 목탄, 아크릴릭으로 그려진 정재호의 작품이 텅 빈 쓸쓸함을 보여준다면, 유화로 그려진 지용현의 작품은 명암의 대비가 강하고 고밀도의 이미지로 채워진다. 정재호의 그림은 하나하나 보면 달콤한 감상주의도 자극하지만, 전시장에 걸린 모든 작품들에 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전멸이라는 대재앙이 연상된다. 그것은 시간의 끝을 지시하고 있다. 지용현의 작품에서는 대 파국으로 어둠과 혼돈에 빠진 세상 한켠에 웅크리고 있는 인간이 꿈꿀 법한 우주적 비전, 즉 시간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우주창생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정재호의 ‘fathers day’나 지용현의 ‘혼돈의 새벽’이라는 전시부제는 시간의 끄트머리에서 또 다른 시간의 시작을 예시한다. 그것은 한쪽으로 방향을 잡은 시간의 화살, 그리고 그것에 내장되어 있는 단 하나의 보편적인 역사라는 이데올로기, 즉 역사주의historicism를 추동하는 이성과 욕망의 복합체에 대한 조용한 이의제기이자 대안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정재호의 옛 그림은 70년대에 지어진 근대적 주거단지인 시범아파트를 그린 작품들이다. 그것은 마치 사실에 충실한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시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시야, 그리고 불과 몇 십 년 전에 지어진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살고 있는지 없는지 모호한 살아있는 화석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파리의 텅 빈 풍경을 사진에 담았던 으젠느 앗제의 사진처럼, 가감 없는 즉물성은 변화무쌍한 상상력 못지않게 초현실주의와 가깝다. 이러한 역설적인 조합은 가차 없이 드러난 삶의 흔적에서 인간(그 속에 살았던 자, 작가, 관객)의 욕망과 부응하는 순간들이 종종 포착되기 때문이다.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시간의 템포 속에서,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압축 성장은 짓고 허물기를 반복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근대사를 공간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수의 동의를 전제하지 않는 소리 없는 소멸과 생산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역사는 축적되고 계승되는 것이기 보다는 사회적 갈등으로 벌어진 시간의 틈들을 덮고 뛰어넘는 질주에 가깝다. 그 틈사이로 많은 것이 망실되었다. 무엇을 위한 단절이고 도약인가를 묻지 않는 풍토에서 작가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를 멈추고 틈 속으로 꺼져버린 시공간을 되찾으려 한다. 사료와 대조해보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사실에 충실한 면도 있지만, 이전 작품보다 더 과감한 시공간의 편집으로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시공간의 간극은 세월의 힘에 의해 무마되어 다시금 자연화 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시간을 과거로 되감았다.

정재호가 작품에 사용한 자료 사진이 50년대까지 소급되니까, 전시부제 그대로 아버지의 시대까지 폭을 넓힌 것이다. 그 시기는 전쟁으로 전국토가 폐허가 된 시점이므로, 작가는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파괴와 폐허를 선택한 셈이다. 전후 복구와 고도성장의 시기를 거치면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정치적 비극까지 가세하면서 파괴와 폐허는 이어졌다. 다만 집단 이기주의적 욕망에 잠시 가려져 있을 뿐이다. 발전에 대한 강박관념은 파괴를 파괴로 보지 못하게 하고, 폐허를 폐허로 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가 재구성한 연대기들은 애써 잊어버리고자 했던, 또는 가속화된 시간의 주기로 말미암아 시효가 지나 삭제 되어버린 시대이다. 작가도 얼마간 공유했을 아버지 시대의 시공간에는 구체적인 삶의 무대가 가졌을법한 체취와 표정이 남아있지 않다. 그는 실증적 단서라 할 만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처리한다. 국적조차 모호하다. 맥락이 부재하는 삶에 대한 풍자는 애수에 가까워진다. 유적지의 분위기까지 나는 이 장면들의 추정 연대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정도에 비례하여 올라갈 것이다. 부당하게 사라진 것들은 나타남을 극적인 것으로 만든다. 정재호의 근작들은 누가 탓 는 지, 왜 그곳에 서있는 지 알 수 없는 빈 자동차를 주변에 가득 피어난 풀꽃처럼 수수께끼와 비극적 정조, 향수를 동시에 자극한다. 정재호는 불과 한 세대전의 시공간을 고고학적 유적지에 버금가는 장면으로 연출함으로서, 망각과 변화를 선호하는 한국적 현실을, 창조적 파괴가 아닌 폐허로 귀결되는 파괴로 정의한다.
지용현 전 (10.15-11.8, UNC 갤러리)지용현의 ‘혼돈의 새벽’전은 우주가 질서 있는 구조를 갖추기 위해 위와 아래, 밝음과 어둠,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는 원초적 혼돈으로부터 출발해야하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초적 혼돈의 시기에는 구별되지 않는 것들이 구별되고 제자리를 잡기 위해 극심한 투쟁이 벌어지며, 여기에서 혼돈은 질서와는 다른 활기로 충전된다. 새 출발과 종말은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지용현의 작품은 어떤 한 시기의 종말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또 다른 시간대에 걸쳐있다. 이 장구한 시간대로 인해 그의 작품은 역사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신화에 가깝지만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구조가 부재하다. 그의 상징적 우주는 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위하여 핏줄과 가시로 지어진 기둥을 뻗고, 어둠이 스스로 빛내는 심연에 내 그림자를 새긴다’는 시적인 작가노트에서 알 수 있듯이, 지용현의 상징적 우주는 자신의 피와 뼈의 연장이다. 회화는 순간적인 비전을 포획하여 구조화시키기에 적절한 매체로, 작가가 애독한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싯귀처럼,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을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형식으로 발생하고 기이한 형태로 변신하는 미소한 피조물들이 순간적이라면, 한 화면에 들어찬 수많은 장면들을 포괄하는 전능한 시점에서 영원의 존재가 감지된다.

이번 전시를 채운 ‘space ritual’ 시리즈 에서 무엇보다도 영원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것은 기하학이다. 블레이크 또한 우주창생의 장면에 대형 컴퍼스를 든 기하학자로서의 신을 등장시킨 바 있다. 그러나 지용현의 작품에서 특정한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적 존재가 혼돈의 우주를 질서화하기 위해 발휘하는 힘이 드러날 뿐이다. 가령 작품 [space ritual-omphalos]에서는 아래의 심연으로 불똥이 떨어지는 가운데 화면 상부부터 벌집 형상으로 구조화되고 있으며, [space ritual-labyrinth]는 유성들 아래로 미로처럼 얽힌 복잡한 구조가 등장한다. 거기에는 우주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미로의 테마가 있다. 생물의 발생이나 진화 또한 선험적으로 정해진 신성한 규율을 따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빽빽한 숲 위에 도마뱀이 나선형으로 배열된 작품이나, 가운데 거대한 알의 형태에서 뻗어 나오는 방사상의 다리가 화면의 틀을 움켜쥐고 있는 듯한 작품이 그것이다. 축제나 전쟁의 대열이 연상되는 구조는 세계의 탄생과 죽음에 얽힌 드라마를 보여준다. 지용현의 작품에서 알은 생명과 우주의 탄생 상징이다. 반대로 뼈는 종말은 연상시킨다. 뼈는 하늘에 떠 있는 동심원 궤도나 빛이 흘러드는 구멍과 달리, 화면 아래에 첩첩이 깔려 있는 혼돈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상징조차 새로운 질서를 위한 토대가 된다. 작품 [space ritual-bones]에서는 뼈가 가득한 바닥 위에 새 질서를 잉태하고 있을 법한 황금알이 얹혀있다. ‘시간의 가공할 만한 무한성 위에 각인된 묵시록의 기호들’(프랭크 커머드)로 가득한 지용현의 상징적 우주는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으며, 새로운 시작을 위해 영원히 투쟁한다.
안개 속 신비에 빠져 있는 정재호의 작품과 번뜩이는 예지의 산물인 지용현의 작품은 지금여기와는 거리가 있는 역사적이고 신화적 시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의 작품들은 역사의 끝을 보여주거나, 끝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또 다른 역사에 자리한다. 그것은 다양한 시공간을 하나로 흘러들게 하는 거대한 깔대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바깥을 향해 있다. 정재호는 하나만 보고 달려왔던 우리의 근대사의 최후의 국면을 예시하며, 지용현이 그리는 묵시록적 환상은 근대적 진보와 종말을 향한 진전으로 역사를 규정했던 종말론적 세계관 사이의 유사함을 깨닫게 한다. 정재호처럼 현실에서 채집한 기표들을 이리저리 섞어 보거나, 지용현처럼 자신이 창안한 요소들만으로 상징적 우주를 꽉 채우려는 충동에는 진보나 발전으로 포장된 단선적인 궤도 속에서 동일한 규칙의 지배를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체계, 즉 하나의 거대한 보편주의를 무력화시키고 대체하려는 충동이 깔려있다. 그들의 고풍스런 화법은 아방가르드를 주류로 떠올렸던 예술사의 보편적 흐름에도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비록 그들이 근대적인 어법까지도 포함하는 형식적 장치와 기술도 함께 구사하고 있다할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의 주된 흐름을 가정하는 보편주의적 충동을 폐기하거나 상대화한다. 동일성의 보편화를 거부하는 새로운 시간 의식의 발현은 연속성이나 진보가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출전-아트 인 컬처 200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