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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지향 사이에 있는 작품, 그리고 비평

이선영


전시장이나 작업실에서 적지 않은 작가와 작품들을 만나며, 어떤 때는 전시나 작가 자료들을 한꺼번에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작품과 담론의 홍수 속에 살면서, 필자 역시 수많은 생산자 중의 한명으로, 뭣도 모르고 비평을 시작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글쓰기가 더 어려워진다. 얼마 전에는 내가 쓴 글의 제목을 훓어 보다가 다른 평문인데 제목이 똑같은 것을 발견하고 뜨악한 적도 있다. 참고 문헌의 공유는 말할 것도 없다. 아카데미의 학자처럼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없고 재충전할 시간도 없으니, 이렇게 가다가는 이렇게 저렇게 소비되다가 사라질 게 뻔하다. 나는 누군가를 평가하지만 나 또한 누군가로부터 평가당할 것이다. 비평가 역시 생산자로서 작가가 당면한 현실을 공유한다. 생산자들에게는 취향과 지향이 있다. 취향과 지향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취향은 호감과 비호감을, 지향은 옳고 그름을 가늠한다. 취향은 향유와 무의식의 문제이며, 지향은 신념과 의식의 문제이다.

응집력은 강하지만 하나의 덩어리로만 남아있는 취향은 결론이 날 수 없는 것이고, 교육과 학습에 의해 구축 및 강화되는 지향은 논의에 붙일 수 있다. 예술이나 비평은 취향만으로도 지향만으로도 안 된다. 다른 분야도 아니고, 바로 예술이기 때문에 취향과 지향을 하나로 수렴시킬 필요가 있다. 취향이 개인의 성격이며, 지향이 어떤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주도면밀하게 나아가는 것이라면, 나의 경우 그 간극은 크다. 나는 체계적인 계획 속에서 전체적인 지도를 가지고 나아가는 성격이 못된다. 그래서 학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그때그때의 당면 과제에 충실하려하고 거기서부터 그다음의 여정이 시작되리라 믿는다. 어딘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뿌리줄기’는 정말 나를 위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20대에는 누구보다도 지향이 강했다고 자부하지만, 현재 누군가 너의 지향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딱히 할 말이 없어 부끄럽다. 내 입으로 떠드는 비전이 아니라, 나의 생산물을 통해서 지향이 가늠되기를 바랄 뿐이다. 비평은 이론이기 때문에 지향—80년대식으로 말하자면 전망—의 문제는 중요하며, 풀어야할 피할 수 없는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작품의 경우에는 의도와 목적이 너무 드러나는 것은 좋지도 옳지도 않다. 잘 말하기를 권유하는 사회이다 보니 그것도 경쟁력일 수 있지만, 작품의 의도와 목적이란 것이 똑바로 서있지 못한 불완전한 작품에 대한 작가의 변명 같은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작품은 작가에게서 떨어져 나올 수 있으며 세상을 돌아다니고, 예기치 못한 때와 장소에서 미지의 관객을 만난다. 작가 자신에게 뭔가를 남겨두지 말고 작품에 최대한 쏟아 넣을 때, 관객이나 비평가가 의미를 구축하는 과정은 더욱 풍부해 질 것이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은 기원과 목적이 불확실하다. 비평은 이 불연속적인 간극을 채워 보려는 노력이다. 작품은 어떤 세계를 제시는 하지만 재현은 하지 않는다. 비평은 작품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퍼즐처럼 재구성 되는 것이다. 그래도 비평은 선적 논리를 가지는 언어를 매개로 하므로 보다 명확하다. 작가와 달리 비평가는 신비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취향과 지향은 부분과 전체의 문제와 연결된다. 누군가에게는 지엽말단의 문제처럼 보일수도 있는 부분에 충실한 전문가들이 있을 수 있다. 반면, 인간, 자연, 역사, 진보 등을 중심에 놓고, 총체적 사유를 지향하는 지식인적 태도를 가진 이들도 있다. 아니, 이제는 부분과 전체가 아니라,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를 전제하는 것과 그 관계가 해체된 것으로 구분된다. 전체와 총체가 의문시되는 현재에 단수성(singularity)과 집합이 주목된다. 분업 시스템처럼 전체의 일부에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속해 있는 이들이 있고, 한편에는 전체로부터 이탈, 또는 소외된 이들이 있다. 단순히 배제가 아니라 능동적인 이탈이 되려면, 그의 생산물에는 부분 속에 전체가 담겨 있어야 한다. 부분이나 전체 그자체가 아닌, 부분 속의 전체는 적절한 요소로의 분할과 연결이 필수적이다. 요소에서 작가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다면, 그 요소들이 어떻게 연결되느냐는 형식의 문제이다. 훌륭한 작품은 내포적 다양성과 외연의 확대가 가능한 요소의 절묘한 선택과 그것의 밀도 있는 연결이 존재한다. 내가 그러한 글을 쓰고 싶기에 그런 작품을 선호하고 높이 평가한다.

출전; article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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