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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 불완전한 기호의 풍경

이선영

2012년 1월 서울대학교 우석 홀에서 열린 이다(Rheeda)의 ‘False truth’전과  6월 박영 갤러리에서 열린 ‘Tracking_Tracing’전은 비(非) 미술적인 재료로 현대회화의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루는 전시로 주목된다. 그녀가 다루는 정공법의 대상은 현실과 회화적 현실과의 관계이다. 화가는 구별될 수 있는 두 개의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 양자 간의 혼돈은 작가 개인을 위해서나 작업을 위해서나 바람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현실이 아니라, 그 관계이다. 그런데 그 관계의 중심에 작가 개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공법을 위해 빠져 줘야할 것들이 꽤 있다. 그 중하나가 사적 개인이다. 근대예술의 신화 구축에 큰 기여를 했던 개인(창조자, 천재, 자아)은 현대예술에서 좌천된다. 근대적 주체는 재현이나 표현이라는 주/객체를 대립시키는 형식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이다의 작품에서 새하얀 눈이 덮인 듯 순도 높은 캔버스 한가운데 안착되어질 작가 고유의 세계 같은 존재론적 신화는 흐릿해진다. 

이다의 작품은 그것을 통해 작가의 심리적 세계를 들여다보는 따위의 독해를 통해서는 극도의 허허로움 외에 아무것도 읽어낼 것이 없다. 하기야 허허로움이야말로 현실을 지배하는 코드들을 걷어내면 드러나는 가장 적나라한 정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열정은 그러한 허허로움조차 하나의 강렬한 표현으로 고양시킨다. 현대사회에서 타자인 화가, 그 박탈당한 자에게는 고양의 계기가 주어지는 점은 나름의 위안이 된다. 복잡한 현대사회의 왜곡으로 인해, 역설은 현실과 진실의 관계를 파악하는 유력한 방식임을 현대미술이 잘 보여준다. 이다의 작품에서 역설은 실제 작품과 상당한 개념적 밀착도를 가지는 전시제목부터 출발한다. 여러 인생의 경로 중, 아마도 예술을 선택하게 됨으로서 시작되고 더 강화되었을 그러한 허허로움은 오직 작업을 통해서만 충만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점에, 작가의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놓여있다. 그것은 작가라면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작업하는 삶으로부터 비롯된 고난은 오직 작업을 통해서만 풀려진다. 막혀있던 작업이 작업 외의 것으로 인해 풀리는 경우조차, 작가가 작업이라는 가장 중차대한 줄기를 놓지 않고 있는 가운데 가능할 따름이다. 화가가 붓을 쥐고 있는 동안에만 행운은 결정적으로 포획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행운은 행운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그 곁을 스쳐 지나가고 말 것이다. 작품은 단지 꿈꾸거나 생각하는 자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업의 중심에 작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중심에 작업이 있어야할 것이다. 작품은 어떤 작가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감수성, 집착, 편견, 이해관계 등 사사로운 자신을 비워냄으로서, 그 작가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온통 1인칭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유아론적 예술은 유일한 개성조차도 아니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현대의 대중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에어브러쉬나 에나멜페인트를 사용하곤 하는 이다는 작가의 필적과도 같은 붓질조차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이다의 작품은 보석같이 밀도 있는 하나의 결정체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이나 개념을 통해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휘휘 저어 떠오르는 부유물 같은 느낌을 준다. 현대미술은 이렇게 부유물처럼 떠도는 흔적들 역시, 어떤 의미 있는 행위의 결과로 포용할 수 있다. 갖가지 보이지 않는 금기로 묶여 있는 평면을 엄습한 타자들로 인하여, 동일성은 다양한 타자의 한 항목으로 축소되거나 상대화된다. 그녀의 작품은 마치 니이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말하듯이 ‘파편이고 수수께끼이고 끔찍한 우연을 창조하고, 이들을 하나로 만들어 한데 합치는 것, 그것이 나의 창작이며, 목적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다의 작품은 억압된 타자의 복귀가 잡다한 내용이나 형식의 나열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화라는 형식으로 딱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나의 판으로 완결되어지는 회화는 상호 무관한 것들조차 모종의 관계망을 요구한다. 

회화는 하나의 평면에 집중적으로 보여 짐으로 인해, 어떤 형식보다도 개념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림에 구현될 개념은 철학적 개념처럼 도식화될 수는 없다. 다양한 인터페이스들이 공전하는 시대에, 그림은 도식을 그려 넣기에 적합하거나 효율적인 형식이 아니다. 도식이란 그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 따위로 짜여 져 실행되어야 한다. 논리적 형식은 손상됨 없이 다른 형식으로 호환될 수 있음에 반하여, 회화적 형식은 그 자체의 목적 또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는 투명한 창이나 언어가 아니다. 투명함을 달성하고 싶다면 미술보다는 철학이나 과학을 하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불연속성이나 불확정성의 원리, 현대 수학의 불완전성의 원리 등이 말해주듯, 과학의 언어조차도 중성적일 수 없음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회화는 성급히 내린 지엽적 결론을 보기 좋게 장식화 하는 장도 아니다. 그러나 회화가 개념을 포함해 작가가 편력해온 많은 것들이 총괄되어 관계망을 이루는 장임은 분명하다. 

이다의 작품에서 이 장은 하얀 캔버스 같은 중성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거듭해서 씌여 진 고대의 양피지 문서처럼 이미 무엇인가로 잠식되어 있다. 오염은 이미 일어나 있으며, 최초의 순결한 출발은 없다. 해체는 일어나 있다. 빈센트 라이치는 [해체비평이란 무엇인가]에서 해체론에 기대면서, 순수 실체, 오염되지 않은 사물, 직접적인 현존, 원래의 대상, 분열되지 않은 기원 등은 필연적으로 허구라고 말한다. 작품이라는 텍스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텍스트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이 형태는 단일하거나 잘 짜여져 있거나 유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편이고 쪼가리이고 깨어지거나 지워진 그물망이다’(바르트) 그러고 보면 잡티하나 없는 하얀 캔버스는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신학적 가설과 상당히 조응하는 형식이다. 그 하얀 평면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관념이 재현되었고, 관념론적 행위가 실연(實演)되곤 하였다. 화가의 실존적 흔적과도 같은 일획들은 종국에는 진주로 완성 될  존재의 분비물 같은 위상을 지녀왔다. 

반면에 이다의 출발은 중간에 있다. 이미 거기에는 무엇인가 있었고, 그 위에 가해지는 행위로 인해 새로운 관계망이 맺어진다. 최초의 시작은 없다. 최후의 의미도 없다. 무엇으로 귀결될지 모를 단서들만 있다. 회화적 평면은 모호한 단서들을 제시하는 단초일 뿐이다. 캔버스나 유화 대신에 작가가 사용한 포마이카나 비닐장판, 에나멜페인트나 우레탄 페인트는 회화를 위한 전용재료가 아니라, 산업용 재료이다. 그것은 색상이나 재질면에서 강한 이물감을 주면서, 작품 표면의 기표를 거칠게 또는 생경하게 강조한다. 회화의 보편적 재료로 사용되지 않는 이것들은 원래의 기능으로부터도 상당히 벗어나 있으며, 대상도 물질도 아닌 단계를 구현한다. 이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물화된 기표이다.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처럼 현대회화에도 지시대상이나 기호, 기의에 대한 기표의 우위가 존재한다. 이러한 우위는 우리의 몸, 꿈과 무의식,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유하고 행동하는 인간에서 욕망하는 인간으로 방점이 옮겨간 시대에, 대상이나 의미로부터 자유로워진 기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근거가 모호하며 가볍디가벼운 욕망은 무엇보다도 기표에 달라붙는다. 

19세기적인 리얼리즘에 대한 환상으로 기표에 대한 강조를 기만이나 소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재 또한 기표들의 중층적 효과에 불과하다. 본질은 거듭된 해석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다의 그림 바탕을 이루는 것은 알미늄 판, 호마이카 판, 장판, 옷이나 커튼 천막 등을 만드는 천 등인데, 눈에 거슬리는 조악한 색깔, 광택, 딸기나 막대사탕 같은 유치한 무늬, 거친 질감에, 붓질이라는 화가의 실존적 행위를 무색하게 하는 공업용 도료의 사용은 작가가 부정하고 싶어 했던 회화적 순수주의에 대한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회화과 박사 과정까지 마칠 정도로 꾸준히 작업하고 연구해오기 이전에, 공예를 먼저 전공했던 작가의 이력은 공예의 기능주의만큼이나 회화의 순수주의를 기피하게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다의 작품은 그리기보다는 만들기에 가까우며 재료나 소재 또한 일상적이라는 점에서 공예와 관련되지만, 그것이 어떤 기능에 복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화이다. 아카데미가 추동하는 어떤 본질에의 추구는 분업화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전문성과 조응하는 이데올로기이지만, 작가란 존재가 실제로 그러한 분업화된 현대사회의 유효적절한 구성원이 되고 있는가?  

몇몇 안 되는 제도적 기관만이 그러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줄 뿐이다. 이다는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는 만큼이나 (변형된)도상의 원천 역시 광고부터 포르노그래피까지 다양한 시각물에 이른다. 그녀의 방식은 한정된 재료나 방법, 본질적 개념 등을 파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하나를 오래 똑같이 못 한다’고 고백하는 이다의 작품은 회화냐 공예냐, 개념이냐 대상이냐 보다는, 차라리 확장된 의미의 드로잉에 속한다. 확장된 드로잉에서는 그리기와 지우기, 또는 쓰기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드로잉은 재현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며, 그것이 움직이고 있는 한 빈 공간이 필요하다. 특히 스텐실을 이용하여 흔적과 얼룩으로 이루어진, 최근의 산수화 스타일의 풍경은 불연속적 틈이 강조된다. 문장으로 친다면, 산문이 아니라 시에 가깝다. 조각나고 중첩된 기표들로 이루어진 시는 알레고리적이다. 이다는 이질적 형식의 회화를 통해서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여러 본질 사이의 관계를 탐색한다. 

‘False truth’ 전의 <Cityscape #> 시리즈는 일종의 풍경이기는 한데, 작가 말대로 ‘풍경을 그리지 않은 풍경’이다. 아파트 브랜드로 만들어진 형태는 풍경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형태이다. 아파트에 살면서 동시에 그 브랜드를 사는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거주지에 상표를 크게 붙이고 산다. 현실은 기호화되고, 기표는 현실이다. 유럽의 성을 닮은 고급스러운 아파트 이미지는 포마이카나 장판 같은 싸구려 재료 위에 붓의 흔적이 남지 않는 에나멜페인트로 그려져 있다. 기표와 기표가 생경하게 맞부딪히는 어울리지 않음은 두 개의 화면을 병치한 작품 <고민의 역전>에서도, 기운 생동하는 붓질을 배반하는 꽃무늬 바탕의 작품 <방금 보던 것이 보일 때가 있다>에서도 발견 된다. 박영 갤러리에서 전시 ‘Tracking_Tracing’전 역시 산, 나무, 돌 등의 도상으로 인해 언뜻 풍경화, 그것도 산수화같이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풍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을 여기저기서 수집해온 것이다. 


작가는 <Tracking_Tracing> 연작에서 ‘풍경이나 사물을 쫓아 그리되 풍경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그리지 않고자 했다’고 말한다. 흔적은 현존을 부재로 치환한다. 정확한 위치가 없는 흔적(trace)은 ‘현존의 환영(simulacrum)’(데리다)이다. 천에 에나멜페인트로 그려진 <Tracking Blot> 시리즈는 동양화 같지만,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잡탕 형태들이 풍경처럼 모여 있다. 그것은 ‘하기’가 아니라, ‘ - 하는 척 하기’에 가깝다. 데칼코마니 형식으로 펼쳐놓은 작품들은 심리테스트 얼룩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흩어진 풍경의 요소들에서 무엇인가 길어 올리기를 바란다. 흔적과 얼룩이 특별한 인과 관계 없이 펼쳐져 있는 이다의 작품은 완전한 추상은 아니다. 관객이 알아볼 수 있는 자연, 또는 도시의 도상이 깨진 채 등장하기 때문이다. 추상은 모더니즘의 역사가 알려주듯이, 지시대상으로부터 독립된 언어를 자율화함으로서 생겨난다. 추상에는 자율성을 통해 쟁취한 화면의 순도가 있다. 그러나 이다의 작품은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그 순도를 거부한다. 

작가는 회화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내부로부터 회화라는 형식을 교란시킨다. 화면에 떠도는 것들이 대상이건 기호건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완전히 삭제되어 있지도 않다. 바탕은 바탕대로, 물감은 물감대로, 기호는 기호대로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저기서 호출한 이질적인 것들을 조화롭게 조율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호한 어수선한 화면을 보여주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다의 작품은, ‘무엇을 말하려는가’나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가’의 문제는 1순위에 놓여있지 않다. 캔버스 대신에 사용된, 프린트 혹은 기계자수가 드러나는 천들은 도료의 분사 량과 분사 방향에 따라 무늬가 드러나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한다. 이러한 표면의 무늬들은 세계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창으로서의 역할을 방해하는 흔적들이다. 대략 알아볼 수는 있지만 완전하지 못한 기호적 요소들이 떠도는 이다의 작품은, 관객의 시선이 그것을 어떻게 휘젓는가에 따라 다르게 보일 부유물들로 다가온다. 

그녀의 작품에서 기호들은 완전히 나타나지도 않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불완전한 기호들은 대상이나 의미를 투명하게 전달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이다는 ‘의미화 과정이란 의미가 전달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의미재생산을 공유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바탕의 무늬나 질감과 그 위에 다양한  도료로 그려진 이미지들은 대상이나 의미의 최초의 출발과 목적을 모호하게 한다. 그것들은 다층적으로 공존하며 상호작용한다. 기억들로 물든 지각은 투명한 이해를 지연시킨다. 낚시 밥처럼 드리워진 불완전한 기호들은 혼자만으로는 결핍된 상태에 있으며, 끝없이 다른 것의 보충(supplement)을 요구한다. 부재와 상실을 대리하는 이 끝없는 보충작용을 통해 작가는 ‘정답 없는 질문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불안정하고 불연속적인 운동을 야기하는 이다의 작품은 고유한 자기동일성이나 실체가 아닌 차이와 관계를 통해 접근한다. 회화의 동일성은 타자성(otherness)이나 이타성(alterity)에 의해 가능하다. 

이다는 기원과 궁극의 요소를 모호하게 하고 부차적인 것을 회화의 전면에 놓으면서, 회화를 탈 중심화(중심을 해체) 시킨다.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이다의 작품은 단일한 저자의 독백이 들리지 않는다. 저자의 목소리는 다른 소리들에 묻혀버린다. 그녀의 작품은 ‘동등한 목소리들의 다양성들을 포용하는 대화적 또는 다성적’(바흐친) 텍스트인 것이다. 텍스트의 다음성(polyphonic)을 강조하는 바르트는 ‘한 텍스트의 의미는 그 체계의 복수성, 즉 무한한 순환적 전달 가능성이다. 처음에 창조될 때부터 텍스트는 다(多)언어적이며 입구로서의 언어나 출구로서의 언어란 없다’고 강조한다. 캐서린 벨지가 [비평적 실천]에서 말하듯이, 관객 또한 작가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가능한 의미들의 다양성과 상이성 불완전성 그것이 제시하지만 설명하지 못하는 생략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의 모순을 찾아야 한다. 이다의 작품에 작동하는 다양한 계열(series)은 궁극적 요인이 없다. 

마이클 라이언은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해체론은 모든 철학적 형식의 궁극성, 즉 기초적 공리,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체계, 사물 자체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으로 정의되는 진리, 자기동일성, 합당성 등을 와해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과정에 필요한 것이 차이의 역동적인 운동과정이다. 이다의 작품에서 차이는 고정된 몇 가지 항목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계열을 이루는 보다 넓은 연관 속에서 운동한다. 불완전한 기호가 만드는 풍경은 기호의 충만함이 아니라,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 간의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이다의 작품에서 작동하는 차이들은 해체론의 핵심적인 개념이며, 회화의 고정된 동일성을 해체하려는 전략에도 유효하다. 작가는 다양한 기호와 물질을 활용하며 차이적 관계의 놀이를 한다. 불확정성이 곧 불가지론은 아니듯이, 이러한 놀이는 느슨한 절충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는 긴장이 있다. 여기에는 회화라고 가정된 장에 이질적인 것들을 끌어들이며, 어느 하나로도 환원될 수 없는 팽팽한 관계설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출전; P.M.P(박영매칭프로그램-갤러리 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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