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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다른 세대들(Any other generation)展 / 같으면서 또 다른 세대들

김성호

같으면서 또 다른 세대들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프롤로그

“눈이 온다. 그것은 어젯밤 내가 그에게 내어준 뜨거운 숨을 얼려 되돌려주는 차가운 답장. 내 맘에 비가 내린다. 내가 흘린 뜨거운 눈물과 그의 차가운 눈물이 엉긴 채 되돌아와 땅을, 지붕을, 내 맘을 하염없이 씻어내는 그것. 아서라. 나는 차라리 안개이고 싶다. 내 숨과 눈물이 끝내 떠나지 못하고 내 맘 속에 유령처럼 떠 있는 무엇이니까.” 
- 금비(金飛)의 시 ‘다른 눈물들’(2018) 중에서

우리는 안다. 눈과 비 그리고 안개가 공기의 다른 형태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고체-액체-기체로 변형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종종 마음 속 시어를 직조하고 그 변형의 존재 위로 시심을 투사한다. 어쩌면 그것은 시인의 글처럼 우리의 ‘다른 눈물들’일 수 있다. 한 존재의 무수히 다른 존재 형태. 그렇다. 애초에 분별은 없었다. 모두 서로 ‘같은 존재이고 한 존재이었던 것’을.  
3인의 여성 미술가들이 펼치는 중랑아트센터의 기획전 《다른 세대들(Any other generation)》은 위의 시 ‘다른 눈물들’에 대한 화답처럼 보인다. 30대, 40대, 70대의 3인 작가들이 펼치는 ‘다른 세대들’이란 전시는 이들 3인의 세대들이 ‘한 존재의 다른 형태’임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대(generation)은 흔히 ‘비슷한 연령층’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것은 대개 30년을 단위로 하는 시간의 층위로 표현된다. 한편 그것은, 사전적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 가문의 역사적 단계를 이루는” 시간의 층을 의미하거나 “한 생물이 생겨나서 생존을 끝마칠 때까지의” 기간을 지칭하기도 한다. 불명료한 지칭들 사이에 존재하고, 모호한 구분을 호명하는 ‘세대’라는 개념은 애초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한 존재의 다른 형태’로 현시되는 우리 맘 속 분별일 뿐일지도 모를 일이다. 
전시는 영국, 일본, 미국에서 장기간 유학 생활을 하면서 다른 문화를 경험했던, 각기 ‘다른 세대’의 3인의 미술가들이 펼치는 3인 3색을 통해서 ‘세대’라는 것이 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한 존재’임을 발언한다. 전시는 마치 하나의 삶을 3개의 방을 통해서 들여다보게 만드는 커다란 하나의 ‘창’처럼 자리한다. 신진, 중진, 원로의 구분조차 무화시키는 3인의 열정적인 작업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전시 《다른 세대들》이 함유하는 깊은 의미들을 곱씹어 보자.  

     


김영주(1987~  ), 잉여의 초상과 변형의 생산 
나는 안다. 문명의 찌꺼기들이 남긴 도시의 확장이 언제나 소외를 만든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갈등해 왔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말이다. 
나무 구조물 위에 특수 원단으로 외피를 씌운 작가 김영주의 쉐이프트 캔버스들은 증식하는 도시 풍경의 은유처럼 보인다. 매끈하게 증식을 거듭하는 도시의 이면에 인간 소외의 그늘이 있듯이, 매끈하고도 유려한 외관을 유지하는 외피의 팽팽한 장력과 싸움을 벌어야 하는 나무 구조물의 사투와 그로 인한 아픔이 존재한다. 화려한 도시 뒤편에 개발로 밀려난 허름한 판자촌의 우울이 있었듯이, 그녀의 변형 캔버스의 완벽한 구조 뒤에는 비틀린 채 신음하는 불완전한 잉여물의 우울이 자리한다. 그것은 마치, 작가의 언급처럼, 언어의 구조로부터 탈각된 영어의 전치사, 한글의 후치사와 같은 존재이다.
김영주의 초기의 작품  〈도시의 극〉에서 그리기와 지우기가 무수히 겹쳐지는 검은 오일파스텔의 지난한 흔적, 그리고 작품 〈순간의 연쇄〉에서 팽팽한 외피가 상기시키는 은폐와 억압은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남는 소외와 잉여를 상기하게 만든다. 가히 도시로부터 비롯된 ‘잉여의 초상’이라 할 만하다. 
누락되고 소외된 잉여의 존재는 억울하다. 그것들은 제 기능을 못할 바에야 자신의 몸을 비틀어 변형의 존재로 재배치되고 재생산을 꿈꾸기로 한다. 그녀의 신작 〈음소거〉 설치 작업은 그렇게 태어났다. 의자나 테이블로 보이는 구조물들은 이가 빠지고 성대와 척추를 잃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불구의 상태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위무한다. 연둣빛 눈물방울이 맺힌 눈가를 훔치고 마음을 추스르면서 일어나는 그들만의 공동체를 보라! 그것은 ‘쓸모없는 것들’이 만드는 이름 없는 도시의 풍경이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깊은 우울의 샘으로부터 건져 올리는 침묵의 교향곡이다. 




배수영(1973~  ), 관계 회복과 재생의 생태학 
배신하고 상처를 주고 간 자들을 용서하자. 그들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할 테고 나 또한 또 다른 만남 속에서 내 안의 상처를 아물게 할 테니까 말이다. 
작가 배수영은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은 폐(廢)재료들에 감정을 이입하고 그것들을 되살려 내는 작업에 골몰한다. 쓸모가 없어진 빈 페트병과 ‘회로 기판(回路基板)’을 자르고 이어서 그것을 쓸모 있는 무엇으로 재생시키는 그녀의 작업은 한마디로 ‘리사이클링 아트’이다. 쓸모란 무엇인가? 더욱이 예술에서의 쓸모란? 배수영의 작업에서 그것은 기능적인 심미감을 제공하려는 화용이기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미학의 의미 찾기에 집중된다. 즉 손괴(損壞)와 유기(遺棄)로부터 치유와 재생을 약속하는 마법의 손길 뒤에 자리하는 관계 회복과 재생의 미학이 그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은유한다. 
우리에게 삶이란 주체와 타자, 주체와 사물 사이의 관계로부터 기인한다. 희로애락의 삶의 양태는 결코 나 홀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얄궂은 것이다. 마치 회로 기판의 복잡한 관계항들을 만나고 헤어지길 거듭하는 인생처럼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복잡한 전기회로는 어느 하나라도 단절되면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회로 기판 앞면의 작은 전구 하나를 밝히기 위해서 수많은 전기 소자가 연결된 동박(銅箔)의 패턴 뒤에서 복잡한 만남의 관계학이 제대로 펼쳐져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 주체가 대면하는 많은 타자의 무리들 즉, 사물, 동물, 자연, 환경에 주목하면서 작가 배수영은 단절된 관계를 잇고 회복시키는데 골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근원적인 관계의 문제를 성찰하는 재생의 생태학이라는 문제의식에 이른다. 설치미술, 공간디자인, 공공미술, 환경미술, 야외미술, 생태미술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관객의 참여와 상호 작용을 도모하는 그녀의 작업을 가히 ‘미술 생태학’이라 호명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이다. 








노정란(1948~    ), 무심과 무의의 쓸기, 색 놀이 회화   
언제부터인가 무심(無心)과 무의(無依)의 평안 안으로 잠입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찾아온 평안이다. 젊음의 치기와 열정으로 얻은 마음의 갈등, 중년의 경험으로부터 맞이했던 독선은, 내가 물리치기 이전에 세월의 흐름 속에 벌써 저만치 물러나 앉았다. 
작가 노정란은 커다란 캔버스 위에서 펼쳐지는 <색 놀이-쓸기>(Colors Play Sweeping) 연작을 통해서 무심과 무의의 평안을 선보인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듯, 화폭을 ‘비’로 연신 쓸어내리는 작업 속에서 발현된다. 보라! ‘빗질’이 캔버스 위로 지나는 길에는 넓은 색면이 중첩되면서 이전의 행위와 이후의 행위를 함께 드러낸다. 투박하고 성긴 빗자루의 올에 담겨진 물감이 화폭 위에 거칠게 얹히면서 일필휘지로 붓을 운위하는 작가의 손길을 따라 움직인다. 연이어 중첩되는 색층은 이전에 칠해진 색의 밑층을 드러내면서 결을 남긴다. 그렇다.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것은 갈필의 붓질이 만드는 효과이자, 마른 물감과 젖은 물감이 연접하면서 만드는 효과이다. 또는 화폭 위에 동시에 쏟아진 물감들이 서로의 몸을 섞으면서 만드는 효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화폭은 기다림과 기다리지 않음이 교차하는 ‘시간의 공간’이 된다. 
시간이 흔적을 남기는 그 곳에는 대조적인 것들이 만나 창출하는 불명료함과 명료함이 교차한다. 면과 틈새의 공간이, 원색과 중간색이, 난색과 한색이, 수축과 팽창이, 그리고 명상의 경건함과 기운생동의 충일한 에너지가 함께 맞물린다. 캔버스, 물감 그리고 빗질이 작가와 함께 교감하는 가운데서 창출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작가의 다음과 같은 진술처럼 일상의 삶으로부터 온 것이다: '한 겨울에 쌓인 눈을 쓸어내다 보면 빗자루 결에 의해 낙엽, 흙이 겹겹이 드러나며 흔적과 함께 그림을 만들어낸다.' 거친 갈필의 흔적이 틈새를 만드는 그것은 작가가 살던 캘리포니아주의 광활한 지평선이 되기도 하고, 작가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일출과 일몰의 잔잔한 풍경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감추기와 드러내기를 함께 작동시키는 노정란의 <색 놀이-쓸기>의 시리즈물은 작가의 기억을 소환해서 벌이는 ‘지금, 여기’에서의 유희이자 명상이라 할 것이다.  





에필로그
중랑아트센터의 이번 기획전은, 원로 작가에게는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신진 작가에게는 원로 세대들의 과거를 경외의 마음으로 좇는 과정 속에서, 세대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이해하는 장이 된다. 그런 면에서 전시에 참여하는 3인의 여성 작가들은 ‘같으면서 또 다른 세대들’이라 하겠다. 이 전시가 ‘한국의 여성 작가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공유하는 통시적 사유’를 시간의 층위를 넘어 하나의 장 안에서 만나게 하는 까닭이다. 시대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하고 개인사의 눈물과 웃음을 나누며 서로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장으로서 말이다. 
글의 초입에서 살펴보았듯이, ‘세대’가 “한 생물이 생겨나서 생존을 끝마칠 때까지의” 기간을 지칭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3인의 참여 작가들을 ‘같으면서 또 다른 세대들’이라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일군 3인 3색의 출품작들을 살펴보고 향유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 전시는 ‘서로의 삶의 시간들’을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출전 /
김성호, 「같으면서 또 다른 세대들」, 『다른 세대들(Any other generation)』, 전시 카탈로그, 2018, 
(다른 세대들 전, 중랑아트센터, 2018. 11. 28- 2019. 2.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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