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기 화단의 영수, 이경성 -스스로 있는 아름다운 사람
최열(미술평론가)

나는 늘 궁금한 게 있었다. 팔십 팔 년 세월을 지탱해 온 힘은 무엇이었을까. 어찌 저리도 여전하실까. 학처럼 고귀하고 연꽃처럼 화사한 저 삶의 동력은 대체 어디서 솟아오르는 것일까. 물어도 물어도 답 없을 질문을 해 온지 열 다섯 해만에 내가 얻은 말은 ‘스스로 있는 사람’이었다. 오직 하나일 뿐 둘도 없을 길고 긴 생애를 한 마디로 줄일 수 있는 재간은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에 감춰둔 답 있을 터이고 비로소 나는 당신 스스로 남겨 둔 글에서 그걸 찾아냈다.

1961년 이화여대 재직시절, 교정을 산책할 때 이경성의 귓가를 스치는 말씀이 있었다. ‘스스로 있기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짧은 문장이다. 이 말은 이경성 미학의 뿌리이자 인생의 거점을 이루는 사상이다. 그것은 미이기도 하고 인생이기도 하며 세상이기도 하다. 마흔 셋의 젊은 날 이 같은 깨우침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이경성을 포함한 근대 미학자들은 이 때까지 모든 아름다움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깨우침은 그 인간중심주의의 믿음을 깨뜨렸다.

사람을 둘러싼 것 따위를 설명하는데 그친다면 모를까 ‘광대무변한 대우주의 미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말이다. 그 대답은 가톨릭 신자인 이경성이 생각하기에 우주를 조화롭게 운행하는 신의 섭리이기도 하거니와 신비주의와 불가지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경성이 깨우친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우주의 질서, 조화의 법칙은 조물주의 창조론을 거부한다고 해도 물질의 요구, 사물의 요구를 따르는 자연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바로 스스로 있는 것, 자연 그것이다. 젊은 날 이경성은 바로 그 스스로 조직하는 우주의 아름다움에 다가갔던 것이고 그 깨우침이야말로 아무런 막힘조차 없을 긴 생애를 물 흐르듯 그렇게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게다.

그러므로 이경성은 주어진 시대의 과제 앞에 언제나 두려움 없이 마주했다. 미술사학과 비평, 미술관 활동 및 해외교류에 이르기까지 이경성을 가로막을 과제는 없었다. 그 거침없는 행보의 동력은 회고하는 바처럼 ‘스스로 있기 위하여 있는 것’이란 세계관이었거니와 가난과 낭만을 벗하며 소유욕 따위를 제거해 버린 소박한 인생관이었다.

미술관 개척자의 탄생

부유한 가정에서 천진난만하게도 문학소년으로 자라난 이경성은 열 아홉 살 때인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률과에 입학했다. 두 해를 다녔고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1943년 봄 미술사로 전공을 바꾸어 와세다대학 문학부에 입학했지만 공습과 학병의 두려움에 모든 것을 중단해야 했다. 귀국하여 조선기계제작소 직원으로 징용 당해 세월을 견디다가 해방을 맞이한 약관 스물 일곱의 이 젊은이는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국립박물관과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그 해 10월 인천시립박물관 창설 관장으로 취임하여 개관을 시킨 뒤 또 1947년 4월에는 인천시립예술관을 창설하였는데 이 시절이야말로 미술관 전문가 이경성이 탄생하던 때였고 더불어 미술이론가 이경성이 탄생하던 세월이었다.

과도하게 젊은 나이에 아무런 배경도 없이 이렇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회고하듯 그 ‘젊음’이었지만 건물 설계와 소장품 수집, 전시 같은 일들을 해결할 인문학 지식 없이 이뤄진 것은 아닐 터이다. 1947년 예술관에서 개최한 대규모 근대미술전은 이 젊은 관장의 미래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이경성은 당시 발표한 <예술관 개관을 앞두고>란 글에서 ‘예술은 창작과 감상의 총칭’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짧은 문장 속에 이경성의 미래가 함축되어 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창작 분야는 물론, 감상 분야 다시 말해 사회 생활 속에서 미술의 기능에 관심을 주었던 것이고 이 관심이 바로 이경성을 미술관 영역의 개척자로 만들어 낸 거점이었던 게다.

이경성의 미술관 경력은 20세기 후반 대한민국 미술관의 역사 그 자체이다. 여든 살 때 출간한 회고록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이란 제목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 그 때문이다. 인천시립 박물관, 예술관, 이화여대박물관, 홍익대 현대미술관, 박물관을 창설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을 거쳐 워커힐미술관을 창설하였고, 동경 소게츠(草月)미술관, 호암미술관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모란미술관 자문역에 이르고 있는 지난 육십 년의 세월은 이경성이란 이름이 곧 미술관의 대명사임을 새기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스스로 말하듯 그 미술관 관장실의 창문은 ‘인생의 꿈을 키웠던 행복의 창’이었다. 생애를 바쳐도 부족한 무엇이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이경성은 생애를 미술관에 봉헌했거니와 그가 개척하고 다듬어 나간 미술관은 모든 분야에서 오직 처음이었으며 그의 손을 거친 공립, 사립, 대학 미술관은 최고의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그 황금의 손은 어디서 비롯한 것이었을까. 다름 아닌 ‘아름다운 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그의 사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대민족국가 건설을 이루기도 전에 식민지로 전락하여 민권민주주의 이념으로 충만한 미술관, 박물관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이경성은 미술관의 근대 이념과 좌표를 정확히 포착하였고 그것을 ‘모든 사람의 것’으로 베풀어 나가도록 헌신했다. 이경성의 손을 거친 모든 미술관은 이경성기획의 그물을 실현하는 날줄씨줄이었다. 천박한 식민지 미술관 유산이 그토록 우아하고 고상한 근대이념으로 채워질 수 있었던 것은 이경성이 미술관장을 오래 해서가 아니다. 바로 이경성의 사상과 조화로운 운영 및 균형잡힌 행정 능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69년에 출범한 국립현대미술관은 1980년까지 미술관이 아니었다. 그저 행정관료들의 직장이었고 대관화랑이었을 뿐이다. 1981년 이경성은 관장직 수락 조건으로 건물, 소장품, 학예사 세 가지를 요구했고 이를 충족시켜 나갔는데 ‘수집, 연구, 전시, 교육’을 수행하는 학예직 확보야말로 미술관다운 미술관 탄생의 최대업적이었다. 그러나 이십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은 행정관료 우위구조를 견고히 지키고 있거니와 놀랍게도 책임운영기관 따위 민권민주주의 이념에 어긋나는 퇴행으로 치닫고 있다. 이경성 관장이 시작한 일이 무너지고 있으니 역사의 시계가 1981년 이전으로 되돌아감에 차마 나는 이 사실을 이경성 관장님께 고할 수 없었다.

근대미술사학의 비조

이경성은 스스로 미술사학자임을 내세우지 않고 있거니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경성은 근대미술사학을 탄생시킨 비조로서 드리운 그늘이 너무도 넓고 짙다. 1959년 이경성은 기념비와도 같은 <한국회화의 근대적 과정>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 아로새긴 근대미술사론의 핵심은 ‘왜곡근대론’이다. 서구근대를 표준으로 삼는 이경성의 근대이념으로 보아 조선 근대미술은 지극히 왜곡된 것이다. 그 원인은 식민지 지배에 있다. 그러나 이경성은 이 때 조선왕조의 쇄국 정책 및 동양적 정체성(停滯性)론을 견지하고 있었으므로 왜곡근대의 원인을 온전히 외부로만 돌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지식인들의 근대사관은 서구화중심주의였고 이경성은 이러한 관점을 근대미술사학에 철저히 관철시켜 나갔다. 건축, 공예, 디자인, 조각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걸쳐 투영시킨 그의 근대미술사관은 20세기 후반기 미술사관의 기준으로 자리잡았으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4년에 출간한 <<한국근대미술연구>>와 <<근대한국미술가론고>>는 그 태풍의 눈이 되었거니와 내가 근대미술사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이 두 권의 고전 읽기였음을 고백해 두고자 한다. 그랬다. 이 고전은 우리 세대가 자라나는 동안 너무도 풍요로운 자양분이었다.

이경성은 자신이 대상으로 삼은 미술사의 근대 시기를 ‘왜곡과 불운 속에 지새운 비극의 연대로 한국미술사 가운데 가장 그늘진 곳’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그러므로 ‘황무지와 같은 상태로 방치되어 왔거니와 역사의 전환점인 그 시기 미술사를 쓰는 일을 몹시도 긴급한 일이라고 여겨왔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끝내 한국근현대미술사 저술을 내놓지 못하고 말았는데 스스로 내세운 바의 ‘식민지 잔재 불식과 가장 민족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미술의 창조를 위한 터전을 논리적이고 미학적으로 정리하는 일’과 ‘국적 있는 미술과 주체성 있는 미술의 창조’를 지향하는 과업이 벅찼던 것일 게다. 그래서였을까. 이경성 선생께서는 나에게 ‘그 새로운 과업은 너희 후학의 몫’이라고 늘 말씀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경성선생은 이미 새로운 과업의 싹을 틔워놓으셨다. 은밀하고도 신비로운 그 비밀은 두 가지다. 동서융합의 가능성을 헤아리고 있음과 더불어 내재발전론의 여지를 열어두었던 것이다. 서구중심주의를 추진하면서도 한국의 고유성, 독자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경성의 노력은 1962년 <<한국미술사>> 저술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거니와 일찍이 동서양 접근운동에 주목하고 있었다. 동도서기론의 연장과도 같이 보이는 이러한 견해는 근대기점을 개항기 및 갑오경장으로 제시했던 자신의 견해를 수정해 18세기로 끌어올리는 노력에서도 헤아릴 수 있다. 이처럼 중층구조를 지닌 이경성의 미술사관은 자칫 혼돈스럽지만 오히려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었고 비조로서 ‘많은 극복해야 할 고난’을 미리 떠 안아버린 넉넉한 풍모의 산물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두 권의 고전에서 출발하여 지금도 여전히 이경성 사학의 거대한 봉우리를 바라보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펼쳐놓은 그물망이 너무도 넓고 촘촘하기 때문이다. 극복의 대상임을 알고 있지만 극복이 간단하지 않음 또한 또렷한 것은 너무나도 버거운 상대인 탓인데 선생께서는 자신의 업적을 과소평가하고 계시니 어찌 그 나이에도 저토록 겸손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미술비평의 거목

이경성은 일찍이 1946년 자신이 기획한 전시를 대상으로 하는 비평을 발표하여 활동을 시작한 이래 무려 육십 년을 그침 없이 이어왔다. 게다가 이경성 이전 비평가들은 모두 작가 출신이었고 거의가 창작과 비평을 겸전하였는데 이경성에 이르러 처음으로 전업 비평가가 출현하였다. 오로지 비평만 수행하는 이경성의 탄생은 시대의 요구였다. 처음엔 돌연변이였을지라도 뒤이은 후예들이 즐비하게 등장함으로써 전문분업화 추세를 반영하는 필연이었음을 증거 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경성은 전업 비평가의 선구자 지위를 자연스레 장악하였지만 그저 먼저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경성의 비평은 언제나 그 시대의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생명력을 과시하였던 것이다. 날카로운 직관 감각의 소유자인 김환기와 최순우의 권유와 아낌없는 지지를 계기로 시작한 비평이었기에 메마르지 않아 환영받았던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소박한 평가일 것이다. 이경성 비평은 여러가지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었는데 첫째, 지도로서의 비평관으로 채워진 비평은 언제나 역사의 요구, 미래 가능성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고 둘째, 현장에서 이뤄지는 미술활동에 밀착하여 살아있는 문제의식을 생명처럼 담고 있었다. 셋째, 작품과 작가를 보는 눈부신 통찰력과 직관력에 근거하여 그것을 적절한 낱말로 구사해 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넷째, 풍요로운 인문학 지식을 배경으로 삼아 설득력 넘치는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1962년에 발표한 비평 <이중섭>이 그러한데 여기서 제시한 이중섭의 미학과 조형 분석 및 성격은 이후 비평가들에게 그대로 수용되었고 아직도 그 수준을 뛰어넘는 비평이 나오지 못하고 있거니와 더욱 놀라운 일은 그게 이중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비평 대부분에서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미술제도, 행정, 단체, 기관을 비롯한 거의 모든 미술분야의 과제들을 다룬 비평에서도 뚜렷하고 일관된 비판정신을 견지하고 있는데 오히려 후배들이 그 넓은 관심 범위는 물론, 날선 비판정신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경성 선생은 스스로 ‘나를 딛고 앞으로 전진하는 젊은 평론가들에게 나는 하나의 디딤돌에 지나지 않는다’고 스스럼없이 말씀하시지만 그게 아니다. 여전히 넘기 어려운 거대한 산이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다.

오히려 요즘 주례사 쓰기에 매몰된 비평가들이 즐비하거니와 ‘주례비평’이라는 이 유명한 낱말을 1976년 이경성이 고안해 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더욱 놀라운 일은 비평가 이경성이 주례사 비평에 지극히 인색하였다는 사실이다. 넉넉한 성품으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탓에 어쩌면 줏대 없는 비평가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깊이 새겨볼 줄 아는 이라면 이경성 비평의 강단진 줏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중심, 외연을 확장하는 주체의 올곧음이 장엄하게 똬리를 틀고 있었기에 비평 육십 년이 가능했던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거장이란 그런 것이다. 넓고 깊음만이 위대함을 뜻하거니와 장대한 우주가 중심 없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20세기 후반기 화단의 영수

과거 문인화가는 시대에 충실히 참여해 세상을 경영하는 학자인 경세가들 사이에 탄생했었다. 또 문인화가는 어떤 경우에도 권력 앞에 비굴하지 않았다. 은거를 할지언정 불의에 타협하여 스스로의 절개를 더럽히지 않았으며 경세를 위해 관직에 나갔더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아 좌천과 유배를 거듭하였다. 20세기에 이르러 문인화가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문득 전문화가들이 문인화가를 자처하며 문인정신을 내세우곤 한다. 우스운 일이다.
이경성 선생은 스스로 ‘여기화가’임을 밝히면서 자기 그림을 낙서나 유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간단하지가 않다. 1960년대에 시작한 그 유희가 사십 년을 훌쩍 뛰어넘으니 내력이 생겼다. 게다가 세월 탓만 아니다. 식민유산 및 관료주의 온상임을 비판하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폐지 주장을 줄기차게 지속했으며 서예대전과 관련해 입장을 굽히지 않자 퇴진압력을 받았고 식민잔재청산을 주장하다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자리에서 쫓겨나는 필화사건 겪었음을 헤아릴 일이다. 1983년 <<계간미술>> 지상에다 식민잔재 청산 주장을 펼쳤는데 이를 문제삼아 친일활동경력을 쌓은 미술인들이 집단행동을 펼치며 관장 사퇴를 요구하였고 이에 권력이 나서서 타협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경성 관장은 이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사퇴했다.

이경성 관장은 ‘타협할 것이 따로 있지 자기의 소신을 꺾어 가면서 그들과 융합한다는 것은 미술평론가로서,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하고 있거니와 왕조시대의 선비들이 지조를 지켜나간 길 그대로였다. 뒷날 예술의 전당 윤범모 미술부장 사퇴사건에 앞서는 단호한 선택이었는데 비로소 이경성이 지닌 문인정신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세상에 알려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참된 20세기 문인화가를 들라면 김지하와 더불어 이경성을 손꼽는 것이다.

나는 이경성이란 이름을 떠올리면 현대화를 추진해 온 20세기 후반기 미술계의 중심을 연상한다. 이경성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맡으면서 ‘앞만 내다보고 가자’는 지침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지향은 일본과 중국, 유럽과의 교류를 통한 한국미술의 세계화 구상을 실현해 나가는 토대였다. 실제로 이경성은 전후 미술비평 및 미술사학의 주요 과제와 목표를 세계화로 설정하였고 한국미술의 후진성을 질타하는 가운데 새로운 이념과 양식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전위였다. 이러한 이경성의 활약은 18세기 예원의 총수 강세황을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후반기에 이경성의 세계화를 향한 이념의 세례를 받지 않은 미술인이 없음을 헤아리고 보면 비로소 이경성이 20세기 후반기 화단의 지도자이자 말 그대로 화단의 영수였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이념의 본질은 동도서기론의 심화였고 동서융합을 향한 21세기 미래의 자양분이었다. 이제 곧 환기미술관에서 열릴 김환기와 이경성 2인전은 바로 그 동서융합을 추구해 온 두 거장의 만남인데 그들이 지닌 동서양 정신 및 문물의 융합을 향한 지침 없는 전진은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스스로 있기 위하여 이미 있었던 것’이었기에 이렇게 세기를 바꿔서까지 만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경성 선생님의 제자는 아니더라도 넘어야 할 장엄한 산맥으로 여기는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거니와 그 인연이 삼십 년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내 스스로 보잘 것 없음을 깨우치게 해 주시는 어른으로 여기고 있다. 어느 날인가 자수박물관 허동화 관장과 더불어 어린애들처럼 장난치시는 그 장면을 마주한 적이 있다. 그 풍경처럼 연꽃 만발한 못 가에 흐드러진 우정이 ‘스스로 있음’으로서 당신들의 축제가 그렇게 영원히 이어지길 빌어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