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이어온 미술여정 석남(石南) 이경성(李慶成)
글 김인환(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1919년 인천에서 출생하여 와세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미술사 연구과정에서 수학하였다. 아울러 그는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홍익대박물관, 워커힐미술관 등의 관장을 지냈으며 이화여대와 홍익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1981년 부터 석남 미술상을 제정하여 시상해오고 있으며 현재 호암미술관 자문위원인 석남 이경성은 지난해 12월 월간 미술세계가 제정한 「자랑스런 미술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최초의 '미술평론가'
석남 이경성은 '미술평론'이라는 분야가 불확실하던 시대에 여기에 뛰어들어전력투구한 분이다. 따라서 그를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을 가진 실질적인 제1호 평론가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당시만 해더라도 이 생소한 분야에서 평필을 든 논객은 주로 화가들이었다. 해방 이후까지는 윤희순이, 그리고 그이후 김병기, 김영주, 이봉상, 정규 등이 주요 간행물의 평론을 도맡아 집필해 왔다. 그러므로 한국에 있어서의 미술평론의 역사는 매우 일천할 뿐만 아니라 종사하는 인력도 빈약한 실정이었다.
서구의 경우도 미술평론의 역사는 한 세기를 좀 넘겼을까 할 정도로 긴 여정을 갖지는 못했다. 물론 르네상스시대에 <회화론>을 쓴 첸니니나 알베르티, 다빈치 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바사리의 <예술가열전>도 고전으로 남겨져 오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예술학'이라는 포괄적인 범주에서의 학문적 성과였던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서 형성된 '살롱비평'을 효시로 미술의 본격적인 비평적 지평이 열려졌다. 그나마도 보들레르나 졸라 같은 시인 또는 소설가를 겸한 문학인들에 의해 미술평론이 수용되던 시기였다. 20세기 전반 입체파의 옹호자이던 아폴리네르, 미래파선언을 주도한 마리네티, 다다이즘의 아라공, 초현실주의의 브르통 등 이들은 모두 시영역(문학)에 몸담고 있던 문학가들이었다.
석남이 펴낸 회고록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을 보면 그도 역시 문학지망생으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미술평론이 글을 통해 미술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미술과 문학과의 접목이라는 유대관계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것 같다. 어떻든 미술평론이라는 영역은 미술을 문학으로 풀이하는 분야임에는 틀림없다. 평론가를 일컬어 '말꼬리에 붙어 다니는 파리'정도로 폄하한 러시아의 문학가가 있었을 만치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결코 원만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양자는 공존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이이며 그러한 공존관계야말로 예술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할 것이다.
그러니까 미술평론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시대에 석남은 이 분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50년대, 6·25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선 황폐한 시기에 새롭게 문화를 일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현대사에 유례없는 동족상잔의 뼈아픈 국난을 겪은 그 시점은 모든 기존의 가치가 전도되고 의식의 변혁이 불가피해진 전환기였다. 일제 침탈과 암울한 식민지시대를 지나서 민족의 자립적 기반을 다지던 때 돌발적으로 일어난 전쟁은 일시 모든 문화활동을 무력화시키고 무위로 돌려놓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과 가치의 전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돌파구이며 새로운 문화의 여명을 시사하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외부로 감추어졌던 우리 민족의 실체가 밖으로 드러나면서 한국이라는 분쟁지역은 세계의 뉴스 망에 포착되어 지구촌의 이목이 쏠리는 중심지로 부상되고 있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시대적 각성에 눈뜨고 다양한 선진문물을 접하게 되었으므로 한국미술도 이제 체계적인 전환논리를 갖춰야했었다.
석남이 1951년 민주신보라는 신문에 쓴 평필 「전시미술전을 보고」를 첫 화두로 그는 결국 미술평론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 무렵부터 석남은 박물관장·대학교수·미술관장이라는 일관된 직업 코스를 밟으면서 미술평론의 집필활동 뿐만 아니라 미술교육·미술행정이나 경영·시설관리까지 책임지는전 방위적 미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가 미술평론가를 자임하고 나섰을 때 '미술평론'은 어느 정도 확고한 규준에 따라 작품을 판별하고 분석하는 단계에 끼지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명의 시대 미술평론 내지 비평은 다분히 계몽적인 것이어서 작가와 향수자인 관객(대중)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에 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술이론의 성립에 다소나마 공헌하여 크게는 미술사 정립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작게는 미술가들로 하여금 자기 작품의 점검과 내성을 통해 신장을 모색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감상자들이 쉽게 미술작품에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일이다.
미술평론의 습작기에 석남은 이 험난한 길을 개척하며 걸어왔다. 미술평론의 작품에 대한 기술이 미술가들로 하여금 자기 작품에 대한 그릇된 평가라는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미술평론을 자신의 작품을 음해 하는 적으로 간주하던 시절이었다. 아직 활자문화에 익숙지 못한 대다수의 미술가들은 신문한 귀퉁이에 기재되는 전시회 시평의 글자 한자에까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의 미술가들이 일반적으로 미술평론에거는 기대는 회의 반, 불신 반이었을지도 모른다. 비평이라는 입장에서 구별 되는 몇 가지 유형가운데 '재단비평', '인상비평'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러한 유형에 해당되었을 미술평론 자체의 미흡한 결함도 물론 간과할 수는 없다.

현대미술운동의 옹호자
한국에 있어서 현대미술의 개념을 어느 시점부터 적용시켜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한국이 일제침탈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1940년대중반을 기점으로 삼기도 하나 문화의 가치변동이라는 측면에서 무리가 있다.
오히려 6·25전쟁이 종결되고 전후 새로운 문화질서가 정립되기 시작한 50년대 후반을 전환점으로 삼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전쟁은 기존의 문화가치를 전도시키고 새로운 가치에 적응케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이 국제사회에 부각되고 세계에 눈뜨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국가적으로는 큰 환난에 봉착하고 인명손실은 물론 정신적·물질적으로 막대한 결손을 본 전쟁상황을 극복하고서야 새로운 문화가치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5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구조적 중심을 이루며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행사하던 세력이나 그룹은 국전과 그 주변의 친위집단이었다. 그들은 관官을 등에 업고 화단에 군림했으며 국전의 수순을 거치고서야 미술가로서의 위상과 입지를 보장받는 식으로 국전계급장제도'가 공공연히 통용되던 시기였다. 국전이라는 보호막 속에 안주하며 천편일률적인 낡은 작품양식만을 고수해 온기성의 원로·중진급 미술인들은 거세게 밀려들어오는 현대미술의 외래사조를 더 이상 꺾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이르며 해방 후 국내에 개설된 미술대학을 졸업한 신예 미술학도들이 드디어 미술계 전면에 진출하여 활동의 발판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제한적인 정보망을 통해서나마 선진 여러나라의 현대미술사조를 단편적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1960년대는 그 초입부터 현대미술운동의 절정기나 다름없었다. 추상표현주의앵포르멜의 첨단적인 추상양식은 현대미술운동에 관심을 가진 전체 화가들의 화풍을 석권하며 전면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사실계열의 기성 관화파官畵派 일부의 화가들조차 한번쯤은 여기 경도했을만치 그 영향력의 범위는 넓게 확산되어 갔다. 미술평론가로서 석남 이경성의 진면모가 여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였을 것이다. 또 한 사람 미술평론을 담당했던 방근택은 앵포르멜운동의 첨병역할을 하며 제1선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의 현대미술운동에 대한 가치평가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의 양면성이 있다. 서구 현대미술사조의 적극적인 수용은 '우물 안 개구리'식의 차폐遮蔽된 미술의식을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지나친 서구편향주의가 우리의 고유한 민족정서나 정체성을 훼손시켰다는 지탄의 목소리도 있다.

우리 시대의 로맨티스트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치우침이 없이 평상심을 지켜 가는 것을 중용中庸 이라고 했던가. 동양에서는 유교 교리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의 각박한 생활 속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몸가짐에 있어서 참으로 필요한 것이 이 '중용의 평상심'이 아닐까 싶다. 해방공간에 있어서의 좌우익 이념 대립의 시대에도 그랬고, 그 이후 남북분단이 고착된 현실상황 가운데서도 그랬다. 이제는 정치권에서 동서 편가르기식 파쟁으로 이어지는 오늘날과 같은 황폐한 시대에 우리는 이 중용사상이 고갈된 현실임을 뼈저리게 느낄 때 가 많다. 화단이 대한미협과 한국미협으로 갈라진 50년대 후반의 사태 이후 그것이 급기야는 '홍대파', '서울대파'의 명분 없는 파당싸움으로 번지면서 지금까지도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석남 이경성은 무난히 이 현대사의 질곡을 헤쳐왔다. 그가 교수·관장이라는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도 큰 뒤탈 없이 현직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관운이 좋았다'거나 '제도권 안에서 유유자적했다'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석남이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에도 불구하고 슬기롭게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와 직책에 헌신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생래적으로 지니고 지켜 온 중용의 미덕 때문일 것이다. 미술평론이라는 분야가 비평을 본분으로 하는 만치 그러한 기능에 충실하려면 도전과 응전의 양 칼날을 세워야 하는데 그는 극단적인 대비관계를 순화시키며 절제할 줄 아는 유연성을 체질적으로 갖춘 우리 시대의 로맨티스트였다. 석남의 평상심에는 여백餘白같은 것이 침전되어 있다.
결코 서두르지 않으며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크게 드러냄이 없으며 모남도 없다. 옷매무새에 이르기까지 흐트러짐이 없다. 겉으로 보아 일종의 무색무취 같은 것,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강인한 각질의 보호막 같은 것이
그를 싸고 있어서 쉽게 안을 드려다 볼 수도 없다. 외유내강이라 했던가.
석남의 인물 됨됨이와 이러한 품성은 그의 글 논조에도 어김없이 반영되고 있다. 전쟁과 격변의 시대를 살아 온 동 연배의 세대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그라고 해서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남의 어느 구석을
뜯어보아도 통한痛恨의 세월을 지탱해 온 각고刻苦의 흔적이나 내색은 찾기 어렵다. 요컨대 그는 지극히 긍정적인 자세와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관조적이고도 낙천주의적인 체질을 경험을 통해 터득해 왔던 것이다.
카톨릭 신자로서 한때 수사가 되기를 원한 적도 있는 석남에게 내연하는 종교적 열정이나 신심이 그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기도 했을 터이다. 다른 한편 오로지 외길을 자청했던 '미술을 사랑하고 미술 속에서 살아가는'미술
인으로서의 구도자적 자세 또한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 활력으로서 궁극적인 수레바퀴의 역할을 했으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자상한 동료와 당대 미술계를 빛낸 유명 지인들이 그의 학문적 파트너가 되어주었는데 예컨대 최순우·김환기·김원룡·김중업·류희강·조요한·임응식·이대원·김수근 등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의 분들이 이제는 유명幽冥을 달리하고 있다.
석남이 태어난 고장은 수도 서울을 지척에 둔 변방도시 인천이다. 그가 일본유학으로 동경에 체재했던 한 시기를 빼고 그의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연고지는 인천과 서울이다. 귀국 후 8·15해방과 동시에 사회에 진출하여 첫발을
내디뎠을 때 27세의 이른 나이에 인천시립박물관장에 부임한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 서울의 몇 대학으로 자리를 바꾼 시기에도 그는 향리를 떠나지 않고 경인선 통근열차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석남과 필자와의 관계는 같은 연고지인 인천에 살았다는 점, 사제관계라는 점, 같은 길의 동업 선후배관계라는 점등이 얽혀 있다). 석남이 인천을 떠나 서울에 주거를 옮긴것은 81년 제9대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취임하면서 있은 불가피한 조처였다.
인천은 석남에게 있어서나 성장기의 필자에게 있어 고향의식을 각인 시킨 어머니의 고장이나 다름없다. 이 시기 석남은 서울에서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지역적 향토문화의 신장에도 남다른 애정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그가 미술이론이 아닌 그림(실기)에 직접 손대기 시작한 것도 50년대 중반쯤이었으며 인천화단에서 간헐적인 발표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인천은 동양화가 이당 김은호, 서양화가 장발 등을 배출한 지역이며 해방공간에서 잠시 활동한 조각가 조규봉도 이 고장 출신이다. 이화여대를 거쳐 홍익대 교수로 몸담고 있던 1960∼70년대의 기간이 석남으로서는 가장 활동의욕이 왕성한 황금기였을 것이다.
1960년대 현대미술운동의 상승기류를 타고 석남은 홍익대의 후배교수인 이일과 더불어 현대미술사조를 옹호하는 평론의 주도 역으로 나선다. 60년 당시 인천에서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홍익대 재학생·동문들로 <재인홍대미전>이라는 전시가 결성되었는데 교수의 신분으로 찬조 출품한 석남의 작품 2점이 아마도 일반에게 공개된 첫 그림이 될 것이다. 화가의 입장으로 돌아가 선을 보인 석남의 회화작품은 크레파스로 그린 추상표현주의 양식에 가까운 그림이었다. 인천지역은 현대미술활동의 무풍지대나 다름없었으며 잠재적인 많은 미술인력을 서울로 송출시킨 상태였다. 미술인들의 중앙으로의 이동이 가장 빈번했던 시기가 60년대였다.
인천 도심의 신포동에 자리잡은 은성다방은 전시도 겸하는 문화공간으로 사랑방 같은 구실을 하는 문화계 인사들의 집합장소였다. <오소회五素會>라는미술단체의 출범은 아주 단순한 착상에서 이루어졌다. 인천에 거주하며 홍대에 출강 중이던 석남의 착상과 발의로 50대 중반의 동년배 미술인들이 담합하여 은성다방에서 대체적인 구상과 골격을 짜고 성립된 그룹이다. 여기 회원으로서는 화가인 박응창·김영건·우문국·오석환·황병식, 서예가인 류희강·정재흥·장인식 등이 있으며 두 아마츄어 화가인 이경성·윤갑로의 참여가 특히 이채롭다. 이경성 외에 윤갑로는 당시 인천시장에 재직중인 별 화력을 갖지 않은 관료였음에도 그림에 애착이 강해서 당당히 현역 미술인들과자리를 같이 했던 것이다.

그의 미술관, 미술편력
석남의 일본유학은 1937년 동경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률과 입학으로 시작된다. 법률학도였던 그가 졸업 후 재차 같은 대학의 문학부에 입학, 전공을바꿔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급박한 전시상황 때문에 단기로 끝
나고 중도 하차해야 했다. 국내로 돌아온 석남이 인천에서 일시 재판소 서기직을 맡아 보냈는데 자신이 배운 법률지식을 쓸 수 있었던 일회성의 첫 경험이었다. 전쟁의 징집을 피하기 위한 방도로 택한 직업이었다. 인천 출신의미학자이자 고고미술사학자인 우현 고유섭이 당시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해 있을 때였다. 우현과 석남은 우현의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나 서신상의 지우로 잠시 알고 지낸 관계였다. 우현은 44년에 작고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현의 제자로는 우리 나라 고고 미술계 초기의 개척자인 최순우·황수영·진홍섭 등이 학계의 대를 잇는다.
석남이 인천에서 인천시립박물관장이라는 자리를 지키며 1945년부터 54년에 걸쳐 재임한 초기의 행적은 우현에게서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받았으리라 믿어진다. 대학 강단으로 이적한 후에도 이화여대 박물관 참사 및 홍익대 현대미술관장이라는 직책을 맡은 일이 있었다.
홍대 교수에서 현대미술관장으로 변신한 기간(1981∼83년, 86∼92년) 그리고 그 사이 워커힐미술관장까지의 3년의 재임기간을 가산하더라도 석남의 생애는 대학교수-미술관장의 연속이었다. 결국 그가 미술인 내지 학자로서 경륜을 편 것은 '미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인 인연으로 맺어져 미술분야의 전문인으로서 우리 미술의 현대사와 궤軌를 같이 해 온 유대 관계에서 비롯된다.
초창기 국립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미국에 가서 미학을 전공한 장발이나 프랑스에서 공부한 임영방도 인천 출신의 토박이 집안으로 분류된다. 석남의 후학으로 미술평론의 대열에 낀 김인환·이재언·이경모도 인천에 연고를 둔 출향인사들이다. 인천지역에서 고고미술계의 절대적인 선각가인 우현 고유섭을 사실상 미술이론의 대부로 보고 그와는 직접직인 연계가 없을지라도 미술의 이론적 형성에 미흡하나마 동참한 고향 후배들이 이만큼 이나마 등장한 것은 대견한 일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석남 이경성이 상당 부분 교량 역학을 했다고 본다.석남은 앵포르멜시대부터 새로 유입되는 각종 서구의 미술동향을 긍정적으로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어떠한 첨단적인 실험경향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려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그가 소속했던 홍대의 이른바 '홍대파'의 학풍이나 화풍과도 걸맞는 그것을 대변하는 입장이기도 했었다. 사실 60년대·70년대의 연간은 미술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의 전반에 걸쳐 앞만 보고 뛰어가던 시절, 그러므로 해서 우리도 국제화의 문턱에 들어서게 되었노라고 자부심과 긍지에 부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각종 국제적의 참여를 통해 한국의 현대미술도 국제적 관점에서의 눈높이를 높여갔다고 보는 견해는 많다. 80년대에 들어서면 민중미술 계열이 제동을 걸면서 정체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이 오랜 군부통치의 현실정치에 대한 반감이나 저항으로 변질·표출되면서 그간 진행되어 온 현대미술운동 전반을 싸잡아 '제도권 미술'로 규정짓기도 했지만 여기에는 견강부회의 소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1981년에 제정된 석남미술상은 35세 미만의 젊은 신예작가들의 발굴을 목표로 2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20여명의 미술가들에게 수상의 혜택을 안겨주었다. 석남은 89년에 석남미술재단을 창립하여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다. 석남이 몇 년 전 펴낸 저서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는 그의 인생 역정이 가감 없이 꼼꼼히 기술되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이 회고록의 표지에 실린 '미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라는 부제가 눈길을 끈다. 이 담론이야말로 석남의 미술에 대한 평소 소신의 일단과 그의 미술관이 응집된 석남사상의 노른자위가 아닐까 생각된다. 미술을 만인공유萬人共有의 것으로 이해하려는 석남의 평상심, 즉 '미술사랑'이 그의 오늘을 있게 한 요체일 것이다.
석남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은 직접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작업은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이란 미술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을 뒷바라지하거나 교육 혹은 경영을 통해 예술풍토를 조성·운영하는 일이었다. 창작활동이나 향수활동(감상)에 있어서는 항상 비평적 계기가 성립되어 디딤돌이 되면서 객관적 가치판단의 판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미술평론이 미술사 사료의 근거로 남을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고 요긴한일이다. 석남은 1970년대 초반 제1차적으로 <한국근대미술연구>를 통해 그기초를 정립하려는 시도를 저서로 남겼다. 그는 틈틈이 신문의 미술란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미술일지'를 작성하는 등 거기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한국근대미술사의 기술에 있어서는 석남과 이구열이 나름대로 자료수집과 정리에 기여했다. 노경에 접어들어 일체의 공직생활에서 물러난 석남은 이제 그의 평상심을 화폭에 의탁하여 마지막 정열을 쏟아 붓기라도 하듯이 '사람'연작의 일필휘지一筆揮之에 매달린 화가로 변신하였다. 이들 그림에 대한 작가 석남의 언급대로라면 '사람을 그리워하면서''일종의 유희본능으로 낙서하듯' 그리기 시작한 작품이다. 먹과 붓, 검정 사인펜으로 종이 위에 그려진 기호 형상들은 끝없는 행렬의 물결을 이루며 소밀하게 퍼져나가는 공허한 인간군상의 박제된 모습으로 다가선다.

글쓴이 김인환은 인천에서 출생하여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신아일보 기자를 지냈다. 한국미술평론가 협회 회원인 그는 조선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는 인천대 대학원, 서원대 대학원에 출강하면서 활발한 비평활동을 펼치고있다.

미술세계 200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