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지난 2003년 8월 오픈아트(www.openart.net)에서 특집으로 기획한 인터뷰 “원로(元老)를 만나다” 중 이경성 관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게재한 것입니다.

이경성 관장과의 인터뷰 - 원로(元老)를 만나다(1)
인터뷰 / 오픈아트의 특집기획 인터뷰


오픈아트에서는 ‘원로(元老)를 만나다’를 기획, 한국 미술계의 원로 작가, 평론가 등을 인터뷰하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첫 번째로 한국의 평론가 1세대인 이경성관장을 찾았다.

이경성관장(1919~)은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일구어 온 대표적인 평론가이다. 화가들이 평론을 겸했던 시절에 이론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국내외 주요 미술관, 박물관의 관장직을 두루 겸하였으며 현재 석남미술문화재단의 이사장, 모란미술관 고문직을 맡고 있다. 오픈아트에서는 ‘원로’의 혜안을 엿보고자 평창동의 노인간호센터에 입주해 계신 이경성 관장을 방문하였다. 이번 인터뷰는 평소 미술계 명사로만 여기던 이경성 관장의 솔직한 대화와 웃음에 미술 보다는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김유숙 : 안녕하세요? 그림이 참 많습니다. 모두 선생님께서 그리신 것인가요?

이경성 : 네, 그래요. 요즘엔 내가 화가요.(웃음) 그림도 그리고, 수필도 쓰긴 하지만, 글씨 쓰기가 힘들어서... 누가 와서 받아 써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죠. 수필 하나 끝냈는데 아직 출판 단계는 아니고... 그래서 주로 그림을 그려요. 이제는 작품이 너무 많아서 전시하고 싶은데 화가들이 하지 말라는 군요. 영역 침범이라고 말이요.(웃음)



김유숙 : 그러시군요.(웃음) 그림은 취미로 그릴 때 가장 자유롭고 즐겁지 않은가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전시회도 여러 번 하셨으니 취미 이상이시지만요...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근현대미술사에 있어서 평론가로서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선각자로서 지내신 경험과 오늘날 미술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이경성 : 여러 글에도 썼지만, 나는 화가를 겸하지 않은 평론가로서는 최초의 평론가예요. 그 당시 좋은 평론가들 많았지만 다들 화가를 겸한 사람들이었거든요. 박물관장으로서 내가 10년간 일하면서 한국미술사도 두루 경험하고 평론도 쓰고 그러던 중 54년인가 홍대가 종로에 있을 시절 시간강사를 했었죠. 그러니 생활도 곤란하고 했는데, 시간강사 한 2년 하는 동안에 이화여대에서 박물관을 만든다고 도와달라고 해서 이대 미대 조교수로 들어가서 교수생활을 시작했어요. 이대 교수를 4년간 하고 61년에 홍익대 부교수로 가서 25년간 있었지요.

당시에는 평론 분야가 미개척분야였기 때문에, 평론이란 것이 뭔지도 모르고 또 평론가만 해서 살 수가 없었어요. 원고료 얼마 나오는 것 가지고 살 수가 없으니까 평론하는 사람도 없고, 고독한 길을 걸어갔는데, 다행히도 교수라는 직책이 있었기 때문에 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나는 내가 새로운 땅에 씨만 심었고 그 꽃은 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씨를 심었을 때 그게 무슨 나무인지 몰랐는데, 거기서 이상한게 나왔다는 거예요. 내가 선택해서 심은게 아니라 빌려다 심은 그 자리에서 내가 생각지도 않은 현대미술이 생겨난 것입니다. 다소 당황한 것도 사실이죠. 나는 현대인이 아니라 근대인이니 말이요.


김유숙 : 한국의 현대미술의 시작부터 그 바탕을 다지셨던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다소 놀랍습니다.(웃음)

이경성 : 나는 현대미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근대미술처럼 정말 실감이 가지는 않아요. 이해가 잘 안가기도 하고, 장난 같기도 하고, 아무거나 갖다가 공간만 차지하는 것 같고, 이게 미술인지 의문이 갈 때도 있고... 그래요. 현대미술이 원리원칙을 떠난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원리원칙을 모르게 되면 자기가 하면서도 왜 그걸 하는지 모르고 행방불명이 된단 말입니다. 현대미술이 행방불명이 되지 않으려면 자기의 원점을 알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할텐데, 현대 작가들이 자기가 온 길을 잊어버리는 경우, 결국 자기가 있는 현대를 올바르게 판단을 하기 어렵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교를 하자면 요리도 그래요. 요즘 유행한다는 퓨전요리도 원리원칙이 없잖아요? 내가 퓨전요리에 적응 못하는것과 마찬가지로 현대미술도 그런 셈이죠.(웃음)

김유숙 :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원리원칙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습니까?

이경성 : 그러니까 말하자면 서양 미술사, 우리나라 미술사, 흘러온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아름다운 것은 이래야 한다, 뭐 그런걸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뭔가가 있거든요. 우선 아름다워야 한다, 이게 나는 미술의 원칙이라고 봅니다. 미학에서의 아름다움에는 미(美) 뿐 아니라 취(臭), 더러운 것도 들어가고, 공포, 이런것도 포함되지요. 그러나 비미(非美)는 취하고 다르거든요. 진, 선, 미, 그리스 미의 본체, 흐름, 석기시대 그림에서부터 그리스 미술, 로마, 르네상스, 근대, 현대까지 그 흐름을 이해하면, 미술의 원리원칙을 인식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또 미술은 과학과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미술 속에 과학적 정신이 있다는 것이죠. 가령 그리스 시대에는 해부학이 발달 안했기 때문에 사람인체를 외부에서 보았지만, 미켈란젤로는 몰래 해부하다가 벌받았다 그러잖아요. 그런 해부학. 그리고 색채학... 색채학이 발달해서 인상파 화가들이 나왔지요. 그리고 투시원근법. 이게 다 과학이란 말이에요. 과학의 힘을 받아서 미술이 발전하는거죠. 과학하고 미술하고 어떤 연계속에서 현대미술이 나오고, 현대미술은 더구나 완전히 과학이라고요. 원리원칙이란게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본질을 그때그때 밀어내는 과학적인 지식을 도입해서 새로운 원형을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김유숙 : 네, 말씀을 듣고보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원리원칙의 윤곽이 다소 드러나는 듯 합니다. 질문을 바꾸어서 선생님께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70년대 한국미술에서 오늘날 보기에도 주요한 일들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이경성 :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한테는 국전이라는 터줏대감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미술이 국전을 통했고 국전에서 작가를 만들고 했었지요. 그런데 젊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국전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대중들도 수용하지 않아서 외로웠었어요.

더군다나 외국의 현대미술과 접목될 수 있는 계기는 전혀 없었어요. 단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근대미술이 우리나라의 근현대미술에 오용이 되었지요. 이종우씨가 파리에 가서 유학하고서 겨우 창을 하나 열어놨죠. 그때만 해도 미국은 전혀 몰랐어요. 해방 후 50~60년대 까지도 미국의 현대미술은 전혀 몰랐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70년대 현대미술을 국제화한다 해도, 자료도 없고 사람도 없고... 그야말로 우물안에 개구리였죠.

일례로 김환기씨가 파리에 다녀오고 왔다갔다 하다 보니까 우리나라 미술계가 완전 우물안에 개구리란 말이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유네스코에 우리가 가입해야 한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어요. 그런데 당시 한국은 자격이 되지 않았죠. 베니스비엔날레는 세가지가 조건이 있었는데, 박물관 협회, 미술협회, 평론가 협회가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김환기씨가 71년인가 72년에 평론가협회를 급하게 만들었죠. 평론가협회를 만들었다는 것은 평론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는것도 되지만 또 국제적인 시야를 넓히는 것도 되었지요. 그런데 국제적인 시야라는 것이 일본에서 나오는 미술 잡지, 또 프랑스에서 나오는 미술잡지로 한정되어 있었어요. 유학생도 그땐 얼마 없었죠. 미국가서 공부한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고요. 그렇게 시작한 것이 바로 70년대 현대미술이에요. 번역된 문학을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부터 번역된 미술을 받아들인 것이 70년대 미술이었다고 봐요.

김유숙 : 네, 1970년대는 현대미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라고 여겨집니다. 선생님께서는 78년에 국제적인 행사인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나가셨는데요, 그 때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이경성 : 그때 나도 국제 비엔날레는 생전 처음이라 언어도 안통하고 국가적 지원도 없고, 자비로 가서 그냥 몇 사람 만나고 그런 거죠. 상파울로 비엔날레 같은 규모의 전시에는 며칠 전에 가서 세계적인 사람들을 만나야 할텐데, 구경꾼처럼 구석에서 보기만 하다 왔어요. 커미셔너가 그런 대우를 받는 시절이었죠.

김유숙 : 언제부터 한국이 세계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이경성 : 그건 1963년 파리 비엔날레가 중요한 계기가 되요. 박서보 등의 작가들이 파리비엔날레를 나가서 좀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젊으니까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지요. 상파울로 비엔날레나 베니스 비엔날레보다도 파리 비엔날레가 오히려 한국 현대미술을 외국으로 전달시키고 받아들이는 최초 창구가 되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방법도 새롭고 그랬죠. 박서보씨가 나갔을때, 눈에 띄려고 머리를 삭발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김유숙 : 오늘날에도 국제무대에서 한국미술을 다소 국지적인 경향에서 선호하는 것이고, 때로는 작가들 역시 그런 이미지에 맞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국제적인 수준으로 같이 성장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작가 개인이나 큐레이터가 국제무대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경성 : 한국의 현대미술은 지금 굉장히 좋아졌다고 봐요.
한국의 미학이라는게 서양의 논리적 구축적인 것과 다르거든요. 색도 흰색, 검정색, 이런 것이지 원색 같은 것은 도저히 그사람들을 못 따른단 말이에요. 한국의 철학, 샤머니즘, 종교... 다양한 색채보다는 무색, 흰색, 검정색 이런 특징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미술이 일본에서 백색을 가지고 작업을 했었고 모노크롬 같은 운동도 있었던 것이고... 그러나 최근의 세대들은 초창기 화가들처럼 모노크롬이나 특수한 철학으로 하지 않으려는 작가들도 있으나 힘들고, 아직도 성공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세계화하는 길이 뻔한 것 아닐까 하는데, 일본과 파리에 가서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는 파리가 먼저이지만 우리는 일본과 파리를 거의 동시에 왔다갔다 했죠. 50년대에는 도불전이 유행이었죠. 누구누구 도불전... 그렇지만 프랑스 가서도 중심으로 진출하기는 어려웠어요. 1925년에 이미 이종우가 파리에 갔었지만, 돌아올때 가져온 건 아주 사실적인 것이었쟎아요? 입체파, 야수파 이런 조류가 한창이었을 때인데, 그 사람은 못보고 왔단 말이에요. 아카데믹한 누드라든지 그런 것만 보고 온 것이죠. 자기가 모르니까 할수 없었던 거예요.

그 다음 세대 한국 작가들의 목표는 뉴욕이 되었어요. 아직까지 뉴욕에서 성공한 사람은 백남준 한사람 밖에 없다고 생각되요. 수백 명의 한국 작가가 있지만 다 성공 못하고 성장도 못하고, 꽃도 못피고 죽어버리는 작가들이 너무 많아요. 뉴욕 화단이 그만큼 세계 최고라는 거죠. 현대 미술이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뉴욕에서 문제가 되어야지만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것이 되었죠.

미술계라는 것은 알다시피 뒤에서 화상들이 받쳐줘야 하는데... 한국에도 화랑은 많지만 아직까지는 세계적인 화랑이 되기에는 자본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예요. 그래도 최근 현대화랑의 경우 Basel 아트페어에서 자리를 잡았지요. 이러한 풍토는 화랑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화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영향을 주었다고 봐요. 화랑을 장사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죠. 한국미술이 국제적으로 발전하려면 화랑이 자본을 축적해서 외국으로 나가서 우리나라 작가들을 외국에 소개하고 또 외국 작가를 들여오고... 그런 식으로 연계를 가져야 하는데 자본력이 없으면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고, 작가들은 기회를 잃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한가지 잘못된 인식은 작가가 돈을 못 버는 것에 대한 인식인데, 작가는 돈을 벌어선 안된다는 통념이 아직까지도 존재한다는 거예요. 김환기씨, 김창열씨처럼 경제적으로도 여유있을 수 있는 게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들이 자기 스스로 일을 찾고 사회활동도 해야하고, 또 열심히 작업도 판매하고 그래야죠. 이런 통념은 작가에게도 큰 책임이 있어요.

김유숙 : 오픈아트에서 이관장님 인터뷰를 시작으로 “원로를 만나다”라는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한국미술계에서 원로의 위치와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경성 : 제가 일본 소게츠미술관에서 관장을 한 적이 있는데(92-95), 그 미술관에서는 아직까지도 심사위원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원로에게 발언권을 주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원로라고 하면서 높은 구름 위에 올려놓고 부르지도 않지요. 대접해주는 것처럼 하면서 소외시키는 것 아닐까요.. (웃음)

김유숙 : 마지막으로 미술계 후배들, 작가나 평론가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이경성 : 자기 생활을 해야죠.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던 간에 그걸 바탕으로 해서 자기 생활을 해야 되요.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좋은 그림은 평가받게 되고... 여기에 있으면서 먼 곳을 바라보면 안되죠. 모두 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유숙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평소 저와는 먼 미술계 명사로 여기던 분을 뵙는 일이 어렵게 느껴졌는데, 관장님과의 솔직하시고 즐거운 대화에 미술 보다는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인터뷰/정리 : 김유숙(오픈아트 디렉터), 최예빈(오픈아트 큐레이터)

◇ 이미지 설명(위에서부터)
이경성 관장의 최근작들
이경성 개인전 포스터들
이경성 관장의 최근작들
이경성 <사람들>, 종이에 먹, 26.5x34.5cm, 2001
이경성 <사람들>, 종이에 먹,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