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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22/ 동시대 미술의 쟁점(장소 3): '장소해제'를 넘어 '장소지정'으로

심현섭

공공미술 22/ 동시대 미술의 쟁점(장소 3): '장소해제'를 넘어 '장소지정'으로

‘장소해제(unsiting)’는 권미원이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수용하면서 제시한 개념으로 공동체에 대한 단정적인 장소 선정(siting)의 부담을 넘어서자는 제안으로 나온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소해제’는 인간의 소외를 낳을 수 있다. 루시 리파드(Lucy Lippard)에 의하면 인간의 정체성은 장소와 거기에 속한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새롭게 형성되며 장소는 자연, 문화, 역사 및 이데올로기가 교차하는 곳이다(Lucy Lippard, 1997). 리파드는 이어서 장소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책임의식과 그곳에서 생겨나는 예술의 토대 위에서 역사연구가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예술과 장소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한다. 따라서 인간은 역사가 깃든 구체적인 장소를 떠나서는 자기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소외 상태에 빠진다. 

“우리의 정체감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장소, 그리고 그것들이 체현하는 역사와 맺고 있는 관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자발적인 이주나 강요된 이동을 통해 지역의 특정한 문화와 장소에서 우리의 삶의 뿌리가 뽑히게 되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파악하는 우리의 능력이 감퇴했다고 리파드는 주장한다. […] 그리고 이 결핍은 우리가 자연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역사로부터 단절되며, 영적으로 공허해지고, 우리 자신의 자아 감각으로부터 소외되는 일차적인 원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권미원, 2012) 

장소해제는 당장 우리를 구체적인 장소의 지정 없이 어떻게 우리가 사는 장소의 변화를 이룰 것인가. 공공미술이 추구해야 할 공중의 국가나 단체에 대한 인식변화가 불러온 전통적 강제적 규율 해체/강제성 없는 공동체의 실험, 공공공간의 공중생활화/장소의 실제적인 변화, 공중의 공공영역의 수용자에서 주체자로 전환은 무엇을 기반으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원론적인 질문 앞에 서게 한다. 티 제이 데모스(T.J. Demos)는 ‘장소해제’ 논의가 “장소를 지리학적 혹은 물리적 장소 대신 담론의 영역으로 대체하면서 물리적 실재, 역사성이 제거되었다고 보고,” 그 논리의 한계를 지적한다. 장소의 영토적, 물리적 성격을 소외시키는 장소의 추상화는 역사 속에서 공동체의 실현이라는 이상적 목표를 무화하며 미술을 탈역사화하고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약화한다. 

미술이 이슈를 제기하고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감으로써 공중의 감각과 문화적 욕구를 채우고 각성하게 하는 역할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미술이 역사의 현장, 장소를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면, 특히 공적자금과 공중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공공미술은 특별한 입지를 가진 구체적인 장소에서 거기에 속한 사람들에 관련한 제도, 권력, 정치, 문화 등의 비판과 변화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장소의 변화를 주도하여야 한다. 이러한 시도가 공동체의 어려움, 소통의 문제 등으로 어려운 과업일지라도 미술은 미래의 가능성을 선도하여 도전하는 아방가르드의 위치에서 이를 실천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장소지정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미술이 구체적인 장소를 선택하지 않으면 장소 뿐 아니라 장소를 기반으로 형성할 공동체를 관념화하여 공동체 건설의 의지를 무력화한다. 데이비드 하비는 창조적인 예술작품의 번성이 자연 토양에 달려있음을 강조하면서 장소와 예술의 연관성에 대해서 이렇게 피력한다. 

“이 같은 뿌리를 잃어버리면, 예술은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었던 의미 없는 풍자(caricature)로 전락한다. 따라서 문제는 의미 있는 뿌리가 정착할 수 있는 생명력 있는 고향을 회복하는 일이다. 장소 건설은 뿌리를 회복하고 거주의 예술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D. Harvey, 1993) 

예술과 장소의 불가분의 관계와, 예술이 장소성의 회복을 위해 감당할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하비는 또 무장소적 정치나 사회운동이 아니라 개인들의 실제적인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장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에 의하면 장소는 “개인적인 것이 특정 장소들에서 국지적 연대의 조직을 통해 정치적이게 되는 근본적 운동에서부터 권리와 정의에 관한 보다 보편적인 정치로 나아가도록 하는 운동의 주요매개 요인”이다(최병두, 2002). 하비의 말을 대입하자면, 공동체 기반 미술로 진화해온 공공미술은 사람들의 기억을 담고 있는 실제적이고 지시적인 장소를 기초로 했을 때 비로소 예술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공공미술이 담론을 기반으로 하든,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든 구체적으로 기능하는 장소를 잃어버리면 미술관에서 광장으로, 광장에서 담론과 공동체로 나아온 장소와 미술의 긍정적인 변화를 향한 지금까지의 노력을 추상화해버릴 가능성이 있으며, “구체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흔적을 지우며, 그 장소와 연결되어 작동하는 그들의 심리적 구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김영옥, 2010). 낭시 또한 “바타유가 공동체의 영역성이 어떤 영토가 아니라 탈자태-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입증되는 상태에 이르는 깨달음의 경지-의 영역성을 형성하게 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Jean-Luc Nancy, 198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시는 “그로부터 영토와 경계에 대한, 모든 종류의 지역적 분배, 예를 들어 도시 계획에 대한 물음들이 다시 제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동체의 영역, 즉 구체적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획일화한 장소의 반복과 이로 인한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 상실은 최병두가 지적한대로 “현대사회에서 장소성 재생을 추구하는 공동체주의자마저 장소성 상실의 원인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한 결과”인지 모른다(최병두, 2002). 미술이 공공미술을 통하여 사업 수행과정의 공동체성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인 사회공동체의 실질적인 개선과 회복을 원한다면 구체적으로 지시된 장소에서 기득권과 제도에 저항하는 예술적 실천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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