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미술이 사회적 역할을 감당해야 해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면 현시점에서 랑시에르를 논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기는 쉽지 않다. 이는 랑시에르의 ‘정치의 미술’에 관한 이야기가 완성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러한 규범적 서술은 랑시에르 스스로 추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경계하는 일이다. 그가 자신의 저서에서 빼놓지 않고 강조하는 바는 자신의 모든 말과 사유가 ‘도래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랑시에르의 글을 해석하는 위치에 있는 연구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널뛰는 어법으로 말하자면, 희미한 랑시에르의 글은 언제나 희미하게 해석됨으로써 도래하는 '앎'을 희미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글이 읽는 과정의 시점마다 새로운 앎에 도달하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논문은 랑시에르의 ‘정치의 미술’에 관한 서술에서 연구자가 본 만큼 기록해둔 희미한 글이다.
랑시에르의 ‘정치의 미술’의 표현에서 인과의 단절과 기호의 적절성 문제
서론
I. ‘인과의 단절’과 정치의 이미지 생성
1. ‘무지한 스승’과 ‘해방된 관객’의 탄생
2. ‘인과의 단절’과 생각에 잠긴 이미지
II. ‘정치의 미술’에서 발생하는 내적긴장의 극복
1. 이미지의 동일성과 이질성
2.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의 수용과 ‘가시성의 다른 장치’
III. ‘정치의 미술’의 표현: 이질적 요소들의 결합과 기호의 적절성
1. 이질적 요소들의 결합
2. 기호의 과잉과 낯섦의 축소
결론
서론
본고의 목적은 공동체 구성원의 평등과 해방을 지향하는 ‘정치의 미술’이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되어야 하는지, 그 표현의 문제를 랑시에르의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랑시에르는 미술에 영향을 미치는 체제(regime)로 윤리적 이미지 체제, 재현적 예술 체제, 미학적 예술 체제를 내세운다. 이는 연대기적 구분이라기보다 예술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유적 범주형태의 인식의 구분이다. 예술이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고 믿는 랑시에르는 이러한 정치의 예술이 의도하는 바가 정확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제작과 해석의 영역이 예술의 미학 체제, 즉 둘사이의 단절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결국 미학과 정치의 불가분성, 나아가 일원화로 이어지는바, 이것이 랑시에르 정치예술론의 주요 논점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가 정치의 미술로서 드는 예가 주로 사진과 영상인 이유는, 그가 보기에 예술의 미학 체제에 가장 효과적인 전달 수단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 ‘정치의 미술’은 정치의 사진이나 영상 또는 ‘정치의 이미지’로 확장하여 읽어도 무방하다.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을 치안과 정치로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치안’은 지배자에 의해 피지배자의 몫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은 불평등한 불화의 상태이며 ‘정치’는 이와 같은 치안의 불평등한 상태에 ‘계쟁’을 불러일으켜 몫을 평등하게 재분배하는 행위다. 연구자는 이러한 몫의 재분배를 인식하게 하는 정치의 미술이 원인/제작(poiesis)과 결과/감상(aisthesis)의 단절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따라서 I장에서는 ‘무지한 스승’과 ‘해방된 관객’ 개념에 함의한 인과의 단절을 살펴본다. 전자는 가르침과 배움의 단절, 후자는 작가와 관객의 단절을 의미한다. 랑시에르는 관객이 생각에 잠길 것을 요구하는데 이러한 ‘생각에 잠긴 이미지’ 역시 인과의 단절을 전제로 생성한다. II장에서 연구자는 정치의 미술로서 ‘생각에 잠긴 이미지’가 생성하는 과정, 즉 사회비판적 예술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두 가지 내적긴장을 살펴본다. 이는 이미지의 동일성과 이질성 사이의 긴장과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의 수용에 따른 긴장을 가리킨다. 정치의 미술은 이를 극복하고 수용하는 가운데 제작된다. 연구자는 특히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를 수용하는 열쇠가 랑시에르가 제시한 개념인 ‘가시성의 다른 장치’의 실천 여부에 있다고 보고, 이를 하나의 실천적 방법론으로 확장하여 분석한다. III장은 콜라주로 구현되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과 기호들의 사용이 정치의 미술의 핵심적인 표현기법이라는 점을 밝힌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대변하는 이질적인 요소들, 즉 해석학적 기호들이 과잉에 이르면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이 낳는 낯섦의 효과를 오히려 축소한다는 점을 상기하며 기호의 적절성을 강조한다. 끝으로 정치의 미술의 표현에 관한 랑시에르의 제안은 그 효과에 대한 판단이 결과론적이라는 점, 즉 관객의 해석에 지나치게 의지함으로써 자신이 경계하는 스펙터클을 낳을 수 있는 개연성이 있음을 밝힌다. 그렇지만 그의 제안은 오늘날 ‘정치의 미술’이 공동체 구성원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는지, 더 근본적으로는 동시대 미술이 얼마나 ‘정치’를 지지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가운데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정치의 미술‘이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I. ‘인과의 단절’과 정치의 이미지 생성
1. ‘무지한 스승’과 ‘해방된 관객’의 탄생
랑시에르에 의하면 예술가가 관객에게 보게 만드는 것과 관객에게 전달되는 에너지 및 효과, 즉 원인과 결과가 동일할 때 관객은 바보가 된다. 랑시에르는 관객을 이런 상황에서 빼내려고 한 두 극단적인 예로, 연극 앞에 마주한 관객에 관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의 실천을 소개한다. 브레히트는 “외양에 매혹되어 - 관객을 무대의 등장인물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 감정이입에 빠지는 부질없는 구경꾼의 바보 만들기에서 관객을” 빼내어 “사리를 분별하고, 이치를 논하고, 과단성 있는 선택을 하는” 관객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려고 한다. 반면에 아르토는 이치를 따지는 거리두기 자체를 폐지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스펙터클을 제어한다는 착각을 버리고, 연극 행위의 마법적 고리 속에 휩쓸려야 한다. 거기서 관객은 합리적 관찰자의 특권을 내놓고 전적인 생명 에너지를 손에 넣는 존재의 특권을 얻을 것이다.” 결국 브레히트의 패러다임에서 연극적 매개는 관객에게 연극의 토대가 되는 사회 상황을 의식하게 만들고 그 상황을 변혁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욕망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아르토의 패러다임은 관객이 관객의 위치에서 빠져나와 연극의 퍼포먼스와 집단적 에너지의 고리에 휩쓸리게 한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 둘 모두의 패러다임에서 연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를 제거하도록 만듦으로써 관객을 바보로 만든다. 왜냐하면 원인(극작가와 연출자)과 결과(관객 혹은 관객의 사유) 사이의 거리가 단절되는 대신 인과가 철저하게 밀착함으로써 원인자에 관객을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관객을 바보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브레히트와 아르토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관객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랑시에르는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의 ‘지적 해방’ 실천을 제시한다. “지적 해방이란 지적 능력의 평등을 입증하는 것이다. 지적 능력의 평등이란 지적 능력의 발현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 모든 발현 속에서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평등하다는 말이다.” 모든 발현 속에서 평등하다는 말은 랑시에르가 지적 평등을 설명하면서 내놓은 개념인 ‘언어의 자의성’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언어의 자의성은 “어떤 이유도 언어에 내재적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신적 언어나 보편적 언어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각자 매번 의미화해야 하는 음성 덩어리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지적 능력을 나타내는 언어에는 사전에 주어진 어떤 절대적인 진리나 보편적인 것이 없으며 지금 이 순간 말하는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즉 모든 발현 속에서 매번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이런 상태에서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의 대립이 와해하고 감각적인 것에 속하는 지적 평등이 가능하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무지한 자든 학자든 관찰하고 이야기하고 입증하는 데는 동일한 지적 능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전제를 “지능의 평등에 대한 의견”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무지한 스승’은 말하고자 함과 듣고자 함이 평등한 상태를 이룬 사람이다. 이와 같은 무지한 스승은 모든 고정성과 위계를 폐지한다. 모든 고정성과 위계를 폐지한다는 의미에서 무지한 스승(원인자)은 관객(수용자)을 규제와 관습, 질서가 주는 억압으로부터 ‘해방’한다. 이러한 해방은 보기와 행위 사이의 대립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데서, 즉 “말하고, 보고 행하는 관계들을 구조 짓는 명징성들 자체가 지배와 예속의 구조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할 때” 시작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거리를 둔 구경꾼인 동시에 자신에게 제시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능동적 해석가” 즉 해방된 관객(emancipated spectator)이 된다.. 이처럼 제작과 수용 영역의 분리 혹은 단절을 통해 관객을 바보 만들기에서 구제하는 점에 ‘무지한 스승’의 역설이 있으며, 이 역설 가운데 ‘해방된 관객’이 탄생한다.
2. ‘인과의 단절’과 생각에 잠긴 이미지
이렇듯 그동안 비판적 예술은 관객의 의식을 변형하려는 과도한 책임감으로 사전에 원인을 장악하고 결과를 조정하려는 ‘스승’의 위치를 점하면서 관객을 지도하려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관객이 지각하고 느끼고 이해할 것은 이미 자신이 극작법이나 퍼포먼스 안에 집어넣은 것을 깨닫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원인과 결과의 동등성 추구가 제작과 해석 사이의 근본적 거리와 역할 분배, 그리고 영토들 사이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 불평등의 원리를 드러낸다는 것이 랑시에르의 비판적 예술에 대한 메타비평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강조하는 감각적인 것, 즉 제작자의 감각과 관객의 감각의 나눔의 문제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이 나눔이 정치와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그 감각자의 사회·정치·경제적 위치, 즉 존재의 시간과 공간을 가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이를 1890년대 한 노동자의 서신에서 발견한다. 이 서신에서 노동자의 관심은 노동조건이나 계급의식 형태에 관한 정보의 나눔이 아니었다. 그가 교환한 것은 그들의 조건에 대한 지식도 아니고, 이튿날의 노동과 다가올 투쟁을 위한 에너지가 아니라 탐미주의자의 여가, 철학자의 여가, 전도자의 여가로서 공간과 시간의 나눔을, 노동과 여가의 나눔을 지금 여기에서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정치‘의 문제다. 왜냐하면 그 서신에 나타난 노동자의 감각이 플라톤이 『국가』에서 주창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계급에 맞는 위치와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질서 정연한 공동체의 위계를 전복하기 때문이다.
‘무지한 스승’의 가르침과 학생의 배움 사이의 분리가 공간과 시간의 나눔이라는 정치의 문제로 이어지는 이 논의에서 랑시에르는 동시대 예술의 정치적 역할을 발견하는데, 동시대 예술의 어떤 특정한 예술적 능력이 제 고유의 영역에서 빠져나와 공간과 시간을 재분배하는 정치적 경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랑시에르가 지칭한 어떤 특정한 예술이 무엇보다 장르를 혼합한 예술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것은 동시대 예술이 이미지 윤리 체제를 거처 정치적 미학 체제로 전환해왔다는 랑시에르의 기대 섞인, 타당성 있는 전망에 비추어볼 때 충분한 개연성을 획득한다. 이처럼 장르혼합은 관객에서 몫이 불평등한 분배, 즉 치안을 드러내고 평등한 재분배로서 정치를 인지하게 하는 '정치의 미술'의 중요한 표현방법이다. 이러한 동시대 예술이 인간의 공간과 시간을 재분배하는 정치를 사람들에게 전유한다. 그렇다고 오늘날 행해지는 모든 장르혼합이 ‘정치의 미술’로 적합한 것은 아니다. 랑시에르는 오늘날 장르혼합의 방식을 총체적 예술작품의 형식을 되살리는 방식, 퍼포먼스의 효과만 증대시키려는 방식, 평등의 무대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구분한다. 처음 두 방식의 공통점은 원인과 결과, 즉 제작자와 관객이 접합한 상태에서 관객이 제작자의 의도에 포섭되는 바보가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세 번째 방식을 지지한다.
이 방식에서는 이질적 퍼포먼스들이 원인과 효과/결과의 단절을 통해 서로 동등한 번역/해석이 이루어진다. 달리 말해 원인과 효과를 단절하려는 ‘무지한 스승’과 원인으로부터 주어진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드는 ‘해방된 관객’이 동등하게 공존한다. 이러한 관객은 이미지를 보고 이미지에 저항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랑시에르의 ‘생각에 잠긴 이미지(pensive image)’는 이렇게 생성한다. 작품을 만든 자의 생각(주어진 생각)과 이미지의 형식 속에서 이미지의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특정한 이미지의 본성을 찾는 대신 이미지 안의 여러 기능 사이의 거리의 관계, 즉 간극을 찾는 것이 이미지 앞에서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생각에 잠긴 이미지’를 제작하기 위해서 우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연구자가 랑시에르의 논의 속에서 발견한 선행과제는 정치의 미술’에서 발생하는 두 가지 내적긴장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비판적 사유의 재난, 즉 비판적 예술 실천의 잘못된 결과라 할 수 있는 이미지의 동질성을 극복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미지가 정치적 사유를 담아낼 수 없다는 근거로 작용하는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는 일이다.
II. ‘정치의 미술’에서 발생하는 내적긴장의 극복
1. 이미지의 동일성과 이질성
랑시에르는 비판적 사유의 전통이 사라졌다고 선언하는 근래의 주장에 대해 오히려 비판전통의 개념과 절차가 전혀 낡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나타내는 방식의 정향과 목적이 완전히 뒤집혀져서 사회·문화적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끈질기게 지속되는 해석 모델과 전도된 그것의 방향/의미를 해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끈질기게 지속되는, 해명해야 할 해석 모델은 이미지의 동일성과 전시의 스펙터클이다. 랑시에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조세핀 멕세퍼(Josephine Meckseper)의 사진(Josephine Meckseper, <Untitled>, 2006)과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의 포토몽타주를 비교한다(Martha Rosler, <Balloons>, series “House Beautiful: Bringing the War Home1,” 1967-1972). <풍선들 Balloons>에서 로슬러가 베트남전에 적대적이듯 멕세퍼 또한 이라크전에 적대적이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로슬러가 죽은 아이와 고급스러운 실내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몽타주를 통해 현실을 둘러싼 내적 구조(제국주의)를 드러내고 전쟁(제국주의 폭력)에 대한 비판에 이른다면, 맥세퍼는 동일한 현실의 이미지들인 시위대와 쓰레기통이라는 ‘동일성’에 의지하여 현실의 피상적 구조를 보여주는데 그친다고 비판한다. 멕세퍼의 이러한 이미지의 동일성은 미국의 과소비와 전쟁을 연결하지만 전쟁에 적대적인 투사(鬪士)의 에너지를 강화하지는 않는다. 그 결과 관객은 시위대의 목적을 전쟁에 대한 반대 투쟁, 즉 전쟁과 그 저변구조에 대한 비판이 아닌, 이미지 소비와 맞닿아 있는 스펙터클의 하나로 인식한다.
랑시에르는 멕세퍼의 이러한 동일성이 그의 작업 <판매용 selling out>(2004)에서도 일정하게 나타난다고 본다(Josephine Meckseper, <selling out>, 2004). 이 작업에서 멕세퍼는 상품을 무수히 진열하는 방식으로 ‘이미지 자체’의 이질성이 아닌 ‘이미지들의 전시’를 보여줌으로써 이미지 속의 사건 - 전쟁이나 소비문화 - 을 고발하기보다는 이미지들의 전시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연구자가 보기에 이러한 전시는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소비를 강제하는 스펙터클한 광고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 광고 이미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광고 밖의 다양한 사건들을 소비의 쾌락으로 은폐한다. 이러한 은폐가 지속되면 최소한의 죄책감마저 사라진다. 이 현상을 랑시에르는 이렇게 묘사한다. “비판적 담론이 갖는 실효성의 토대인 외양과 현실 간 대립은 스스로 무너지고, 그와 더불어 어둡거나 부인된 현실 쪽에 위치하는 존재들에 대한 모든 죄책감도 무너진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동일성 기반의 작업이 결국 자본주의 방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스펙터클과 다르지 않으며 비판적 미술이 비판하려고 했던 소비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모순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이 점에서 로슬러의 이질성과 멕세퍼의 동일성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로슬러에게 충돌은 재화와 이미지의 행복한 진열 뒤에 제국주의의 폭력이 있음을 폭로한 게 분명하다. 멕세퍼의 경우에는 이미지들의 진열이 현실의 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밝혀진다. 현실 구조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 진열 방식”, 즉 소비 이미지의 반복이라는 스펙터클한 형식으로 전시된다. 이와 같은 동일성 기반의 이미지가 야기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멕세퍼가 촬영한 시위대/소비자 이미지는 전 지구적이고 유동적으로 퍼져나가는 우리 시대의 폭력과 전쟁들 앞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동일성 기반의 멜랑콜리한 표현은 비판의 대상에 포섭될 뿐 전쟁에 대한 어떠한 고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랑시에르의 냉정한 평가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표현의 동일성과 전시 스펙터클은 자칭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빈번히 나타난다. 오늘날 비판적 사유의 재난에 대한 책임이 어느 정도 포스트모더니즘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칭 포스트모던한 전회란 이런 의미에서 보면 동일한 원 안에서 한 바퀴 더 도는 것일 뿐이다. 모던한 비판에서 포스트모던한 니힐리즘으로 가는 이론적 이행은 없다. 현실과 이미지의 방정식, 부와 가난의 방정식을 다른 방향으로 읽은 것일 뿐이다. (…) 그 강박적 이미지를 둘러싸고 비판적 모델의 역전, 즉 상품과 이미지의 파도에 휩쓸리고 상품과 이미지의 허망한 이미지에 속아 넘어간 소비자 개인이라는 가엾은 백치의(완전히 케케묵었으나 항상 사용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목도하듯이 이와 같은 비판적 사유의 재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소비문화 혹은 광고 이미지에 함몰된 사회·문화적 비판의 전통은 오늘날 지배담론 속에서 전도된 형태로 순조롭게 유지되고 있다. 이처럼 잘못된 길로 들어선 비판적 사유를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비와 광고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미래지향적 꿈의 허망함에 대한 인식, 소비문화와 스펙터클한 전시가 은폐하는 현실 문제의 직시 등을 들 수 있지만 랑시에르는 ‘해방’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로 돌아가기를 제안한다. 그에게 해방은 플라톤이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동경하는 ‘공동체의 조화로운 조직’의 이름으로 계급을 나누고 각 직무를 결정지으려 했던 전체주의적 공동체, 즉 감각적인 것의 치안적 나눔 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랑시에르는 무능한 자들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비판의 사유가 불일치의 무대로 나아가기를 권한다. “불일치란 외양 아래 숨겨진 현실도 없고 모두에게 소여(所與)의 명증함을 강제하는 식으로 소여를 제시하고 해석하는 단일체제도 없는 감각적인 것의 조직화를 뜻한다.” 이처럼 누구나의 능력, 자격 없는 인간의 자격을 작동시키는 것, 즉 무지한 스승/제작자와 해방된 관객이 서로 강요하지 않은 채, 평등하게 보고 느끼고 ‘해석’하는 가운데 감각적인 것을 조직화하는 이미지를 마련하는 ‘해방’이 비판적 사유의 재난, 즉 비판적 예술이 동일성과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스펙터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랑시에르는 역설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예술에서 해석의 영역(아이스테시스)을 확대하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해방된 관객’의 수적 팽창을 의미한다.
2.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의 수용과 ‘가시성의 다른 장치’
정치적 미술의 실천에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긴장은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의 수용 여부에서 발생한다. 이미지를 용납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랑시에르는 올리비에로 토스카니(Oliviero Toscani)의 이미지를 예로 든다. 토스카니는 2007년, 거식증에 걸린 야윈 젊은 여성의 나체가 담긴 밀라노 패션 포스터를 이탈리아 전역에 유포한다. 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우아함과 사치스러움의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괴로움과 고통의 현실을 들추어 고발하는 용기에 대한 경의. 둘째, 분노의 가면을 쓰고 보여준 비천한 현실을 전시로 구성하면서 스펙터클의 지배라는 훨씬 더 용납할 수 없는 형태를 보여주었다는 비난. 셋째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실재적인 이미지에 대한 의혹이다. 둘째와 특히 셋째 반응은 이미지는 현실을 비판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이미지는 현실과 동일한 ‘가시성의 체제(regime of visibility)’에 속하므로 현실을 정확하게 드러낼 뿐, 현실을 비판하는 매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랑시에르는 이렇듯 이미지 안의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이미지가 정치성을 드러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으로 오인되어 그릇된 긴장을 발생시킨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는 꾸준히 관객에게 제시된다. 여기에 이미지의 이중적 성격이 있으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지를 보여줄까, 말까라는 거짓 싸움에 매달리게 한다. 이 싸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랑시에르는 이미지가 절대 홀로 작동하지 않는 ‘가시성의 장치’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용납할 수 없는 것의 물음의 자리는 옮겨져야 한다. 문제는 이런저런 폭력의 희생자들이 겪는 참화를 보여줘야 할지 말지를 아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희생자를 가시적인 것을 분배하는 모종의 방식의 요소로 구축하는 데 있다. 이미지는 절대 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된 신체의 지위와 그 신체가 받아야 하는 주의의 유형을 규제하는 가시성의 장치(system of visibility) 속한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지배미디어의 가시성의 장치 속에서 보여주는 참화 이미지는 자신들/지배층이 선택한 이미지로 말의 대상이 될 뿐 스스로는 말을 갖지 않은 저항하지 않는 신체일 뿐이다. 이는 지배미디어가 참화 이미지를 너무 많이 보여준다는 통념을 깬다. 그들은 오히려 선택된, 참화 아닌 이미지를 많이 보여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참화와 희생에 무디게 한다. 그렇다면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지배미디어와 다른 장치, 즉 ‘가시성의 다른 장치(different system of visibility)’가 필요하다. 문제의 핵심이 참화 이미지를 보여줄지 말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용납할 수 없는 것 - 예를 들어 폭력의 희생자 - 을 보여줄 때 그 희생을 어떻게 분배하여 보여줄 것인가라는, 쉽게 말해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가시성의 다른 장치’의 구축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랑시에르는 ‘가시성의 다른 장치’에 대해 별도의 세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며, 정치의 미술의 표현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구자는 알프레도 자르(Alfredo Jaar)의 작품을 설명하는 가운데 스치듯 언급한 랑시에르의 ‘가시성의 다른 장치’가 정치의 미술을 제작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기법으로 보고 논의를 전개한다.
‘가시성의 다른 장치’는 참화의 이미지의 정확한 표현과 전달을 위해 가시적인 것의 세분화를 통해 관객의 감각을 이미지의 본질로 향하게 한다. 이는 르완다 대학살을 다룬 자르의 <쿠테테 에메리타의 눈 The Eyes of Gutete Emerita>(1996)과 함께 또 다른 설치 작품 <침묵의 사운드 The Sound of Silence>(200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침묵의 사운드>는 자신이 찍은 사진에 대한 비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케빈 카터(Kevin Carter, 1960-1994)의 이야기를 다룬다. 카터의 사진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로 땅바닥을 기고 있는 아프리카 수단의 굶주린 어린 소녀가 먹잇감을 노리며 뒤에 버티고 앉아 있는 독수리에게 곧 잡아먹힐 것이라는 위기감을 준다. 아프리카의 식량난 문제를 충격적으로 드러낸 이 사진으로 카터는 1994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진이 널리 배포되면서 스펙터클한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아이를 즉시 구조하지 않았다는 봇물 같은 비난에 시달린다. 카터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르는 이렇듯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부추기면서도 이를 거절하는 ‘체계의 이중성’에 맞서 카터의 이야기를 다룬 <침묵의 사운드>를 제작한다. 자르는 사각형의 공간 속에서 카터의 사진이 찍힌 상황과 그 결과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소녀를 돕지 않고 사진을 찍은 카터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편지들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했던 카터의 투쟁이력이 포함되어있다. 이어 순간 눈부신 섬광과 폭발음과 함께 빛이 방을 채우고, 문제의 사진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자르의 장치는 카터의 사진이 홀로 작동한 이미지가 아닌 정치적, 개인적 상황이 맞물린 가시적 장치 속 이미지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관객은 이 장치 속에서 사진을 찍을 당시의 카터의 경험으로 이동하면서 스펙터클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근본적으로는 우리 내면의 아이러니를 직면하게 된다. 아울러 이 박스 안에서 카터의 이미지 속 참화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통해 여러 갈래의 시각/관점으로 분화하면서 투쟁가로서 카터의 배경과 소녀의 굶주림 속에 감춰진 수단 정치의 부도덕과 무능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으로 자르는 카터의 이미지에서 정작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우리의 이미지를 보는 시각을 단편적인 ‘가시성의 장치’가 아닌 복합적인 ‘가시성의 다른 장치’에 맡길 때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여기에서는 소녀의 죽음을 대가로 찍은 것으로 여겨져 용납할 수 없게 된 카터의 사진)를 수용할 수 있고, 이미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시각의 분화를 가져오는 ‘감각적 장치’, 즉 가시성의 다른 장치는 이미지 속 참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통로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를 용납 가능한 이미지로 변환하는 ‘가시성의 다른 장치’ 효과가 공동체 및 정치적 예술의 실천과 관계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미지가 어떤 현실감, 어떤 공통 감각을 창조하는 장치에 들어가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할 때 중요한 것은 “현실을 그것의 외양에 맞세우는데 있지 않고, 다른 현실, 공통 감각의 다른 형식, 다시 말해 다른 시공간적 장치, 말과 사물, 형식과 의미작용의 다른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는 창조는(이것은 치안이 정치로 전환하는 순간 혹은 과정과 다르지 않다) 곧 허구의 작업으로 “단어들과 가시적 형태들, 말과 기록, 여기와 저기, 당시와 지금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런 뜻에서 <침묵의 사운드>는 허구”다. 이처럼 ‘가시성의 다른 장치’는 우리가 용납하지 못하는 이미지를 허구적 작업을 통해 수용하게 하는 매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허구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종류의 공통 감각을 조직하고 어떤 종류의 시선과 고찰을 제공하느냐는 정치적 효과 여부에 있다.
'문제는 이 집단 학살들의 실재가 이미지화될 수 있느냐 없느냐, 허구화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실재가 어떻게 이미지화·허구화되며 이런저런 허구 내지 이런저런 이미지의 구축을 통해 어떤 종류의 공통 감각이 조직되느냐이다. 문제는 이미지가 어떤 종류의 인간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지, 그 이미지가 어떤 종류의 인간들에게 향하는지, 이 허구에 의해 어떤 종류의 시선과 고찰이 만들어지는지에 있다. 이미지에 대한 접근에서 이렇게 자리를 옮기는 것은 이미지의 정치에 대한 생각에서 자리를 옮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랑시에르는 이미지 안의 용납할 수 없는 것(참화의 이미지)으로 인해 이미지가 정치를 표현할 수 없다는 주장이 성립되지 않음을 논증한다. 그에 의하면 이미지는 비참과 참화를 분배하여 보여주는 ‘가시성의 다른 장치’라는 허구적인 시스템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치안 속 참화를 드러내면서 시각에 관한 것을 다중의 몫으로 만들고 언어에 관한 것을 몇몇 사람의 특권으로 만드는 지배논리“를 뒤엎는” ‘정치의 미술’을 구축할 수 있다.
III. ‘정치의 미술’의 표현: 이질적 요소들의 결합과 기호의 적절성
1. 이질적 요소들의 결합
랑시에르가 이미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언급한 장르혼합은 ‘정치의 미술’의 핵심적인 표현방법이다. 이러한 장르혼합은 먼저 문학과 미술, 연극과 미술과 같은 장르 사이의 경계를 제거하고 서로 혼합하는 것을 가리킨다. 랑시에르의 논의를 따라가면 미술에서 이러한 혼합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질적인 요소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첫째는 미적 경험의 낯섦을 예술의 삶-되기, 일상적 삶의 예술-되기와 혼합하는 것이고, 둘째는 두 세계의 비호환성을 통째로 확인시켜주는 이질적인 것의 순수한 만남이다. 첫째 예는 우산과 재봉틀의 초현실주의적 만남을 들 수 있다(Salvador Dalí, <Sewing Machine with Umbrella>, 1941). 여기에서는 일상세계의 현실에 맞서, 그 세계의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꿈의 절대적 권력을 표현한다.
둘째 예는 아돌프 히틀러의 목구멍 안에 있는 황금의 자본주의적 실태를 폭로한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의 포토몽타주(John Heartfield, <Adolf the Superman Swallows Gold and Spouts Junk>, 1932)와 베트남의 끔찍한 사진들을 미국의 편안한 광고들과 혼합한 로슬러의 포토몽타주를 들 수 있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하트필드의 몽타주는 일상 사물을 예술로 만드는 미적 경험의 낯섦을 통한 이질성을 드러내기보다는 히틀러와 돈 사이의 명백한 인과관계를 더 드러낸다. 반면 로슬러의 포토몽타주는 요소들의 이질성을 강조한다. 죽은 아이의 이미지가 평온한 실내에 통합되면서 이 몽타주는 은폐된 현실(전쟁의 비극)과 부인된 현실(전쟁의 비극을 부인하는)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다. 연구자의 이해에 따르면, 이러한 요소들의 인과 관계와 이질성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이라는 더 큰 명제 아래에서 ‘정치성’을 드러내기 위한 두 방법일 뿐, 서로 대립하는 관계는 아니다. 왜냐하면 결합을 의미하는 콜라주는 이해가능성의 힘과 낯섦의 힘, 의미와 비-의미 사이에 있는 식별불가능한 선 위에서 균형점을 찾아 작동하면서 정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의 미술’에서 인과성과 이질성은 상호배타적 관계가 아닌 공존의 관계에 있으면서 단지 균형을 요할 뿐이다.
다른 한편, 비판적 예술은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이 딜레마는 관객을 세계의 변형을 의식하는 행위자로 바꾸려는 의도를 가진 비판적 예술이 자본과 권력으로 구성된 치안의 지배 메커니즘 속에 존재하는 불가피함에 기인한다. 이는 일상적 사물들과 행동들 뒤에 숨어있는 자본과 지배 권력과 같은 기호들을 보도록 이끄는 비판적 예술이, 스스로 그러한 지배질서에 함몰할 가능성을 함의한다. 앞서 살펴본 멕세퍼의 작업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딜레마 때문에 미학과 정치가 함께 갈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랑시에르는 치안의 메커니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비판적 예술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비판적 예술은 ‘삶’을 향해 밀어내는 긴장과, 반대로 미적 감각성을 감각적 경험의 다른 형태들과 분리하는 긴장 사이의 협상을 제안한다. 이는 삶의 투박함과 이를 미적으로 표현하는 일 사이의 균형을 가리킨다. 이러한 균형 혹은 협상이 예술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
'비판적 예술은 “삶”을 향해 밀어내는 긴장과 반대로 미적 감각성을 감각적 경험의 다른 형태들과 분리하는 긴장 사이에서 협상해야 한다. 그것은 예술과 다른 영역들 사이의 불분명한 지역들에게 정치적 명료함을 유발하는 관계들을 빌려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의 고독에게 거부의 정치적 에너지들을 살찌우는 감각적 이질성의 감각을 빌려줘야 한다. 예술의 형태들과 비예술의 형태들 사이의 이 협상이 두 번 - 한번은 그것들의 이해 가능성을 바탕으로, 다른 한번은 그것의 이해불가능성을 바탕으로 - 말할 수 있는 요소들의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협상은 이질적인 논리들의 조정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몽타주나 콜라주의 정치·미학적 원리가 내재해있다. 몽타주는 근본적으로 미적·정치적 논리에 복종하는데 이는 몽타주가 미적 경험을 일상적 삶과 혼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질적 요소들 사이의 충돌과 형태와 내용 사이의 변증법적 대립으로 인한 혼합과 변형들은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교환과 옮김의 놀이 위에 세워진다. 즉 소위 순수미술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선을 허무는 자리 옮김, 초현실주의의 일상적 오브제의 발견과 같은 일상 사물의 예술-되기, 장르 사이의 거리의 제거와 같은 놀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계의 해체’가 정치적 콜라주에 내재한 원리다. 여기에서 우리는 랑시에르가 ‘정치의 미술’의 표현 방법으로 강조하는 ‘이질적 요소들의 결합’이 콜라주나 몽타주의 형식을 띠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형식과 형식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성’의 관계, 즉 몽타주가 ‘정치의 미술’의 중요한 방편이기는 하지만 몽타주라는 형식 자체가 ‘정치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정치의 미술에서 정치성을 담은 ‘내용’은 형식에 우선한다.
2. 기호의 과잉과 낯섦의 축소
랑시에르는 비판적 예술작품이 관객을 이해시키기 위해 콜라주나 몽타주와 같은 기법을 사용하여 오브제의 형태를 변형할 경우, 자칫 저항을 표현하는 외형의 낯섦(strangeness)을 죽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낯섦을 죽인다는 것은 외형의 충동적 형태가 사라져 이질적인 요소들이 동일 평면 위에서 일으키는 충격이 감소하는 것을 뜻한다. 랑시에르는 미술이 은유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외형을 변형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원인과 결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동일성을 주의하지 않으면, 즉 무지한 스승이 되지 않으면 ‘해석학적 기호(interpretative signs)’들의 과잉이 나타날 우려가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작품이 지향하는 저항을 소멸시킬 수 있음을 경고한다. 여기에서 해석학적 기호는 관객을 세계의 변형을 의식하는 행위자로 바꾸려는 비판적 예술, 혹은 이를 제작하는 예술가의 기획의도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기호의 과잉이 위험한 것은 정치적 고발 대신에 관객을 정치적 고발로부터 한발 물러서는 구경꾼으로 만드는 장치로 변형될 가능성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그러한 작품으로 2000년 파리에서 열린 《배경 소음 Bruit de Fond》에 참여한 왕두(Wang Du)의 밀납 박물관 인형처럼 재현한 클린턴 부부 모형과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세상의 기원>의 여성의 성기를 클로즈업한 작품을 적시한다. 두 작품 모두 행복이나 위대함의 이미지와 거기에 숨겨진 폭력이나 세속성의 관계를 다룬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왕두의 작품이 클린턴 부부의 정치적 이슈를 드러내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르윈스키 사건을 연상시키는 시사성만으로는 정치적 이슈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적 이슈를 드러내는데 있어 연상작용은 사건을 드러내는 사물의 직접적인 배치를 대신할 수 없다. 관객들은 밀랍 인형의 형태에서 정치인을 꼭두각시로 만들 뿐이며, 성적 세속성이 자신을 포함한 인간 일반의 명백하지만 숨겨진 비밀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이렇게 작품이 애매한 연상으로 ‘지나친 해석적 기호’를 제시할 때(관객의 지나친 해석을 요구할 때) 관객은 그 사태를 보편화하면서 정치적 고발의 자리를 일반적 권력을 조롱하는 자리로 바꾸고 만다. 그 결과 관객은 작품이 기대했던 정치적 고발의 충격(provocative shock)으로부터도 죄책감으로부터도 멀어지는데, 이를 랑시에르는 ‘유머러스한 거리두기(humorous distantiation)’라고 한다.
비판적 미술이 의도치 않게 유머러스한 미술, 조롱의 미술로 전락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작가의 의도가 함의한 기호의 과잉에 있으며, 랑시에르의 용어를 빌리면 이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교육학적 모델’의 산물일 뿐이다. 이 모델에서 작품은 작가의 의도로 배치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감각적 기호의 교육적 기능이 두드러지면서, 관객을 작가가 바라는 방식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작품의 정치적 고발이 약화하는 의외의 결과를 낳을 개연성을 높인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이러한 개연성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이다. 그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랑시에르는 양극단의 전달방법을 설정한다. 한 쪽은 재현적 매개로서 작가의 의도가 강렬하게 작용하는 전달방법이고, 다른 한쪽은 작가의 의도가 최대한 축소된(무지한 스승 개념에 공명하는) ‘윤리적 무매개의 교육법’이다. 그는 전자를 재현적 매개의 체제, 후자를 윤리적 무매개의 체제라고 정의하면서 양극단 사이에서 실효성 있는 체제, 즉 작품의 정치적 고발이 약화하는 개연성을 방지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를 발견하는데 이를 ‘예술의 미학적 체제’라고 부른다. 이 체제에서 미술이 정치와 관계를 맺으며 드러내는 미학적 실효성은 “예술 형태의 제작과 특정 공중에 대한 특정 효과의 생산 사이에 있는 모든 직접적 관계를 중지하는 실효성”을 뜻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랑시에르 예술론의 발화점인 제작과 감상(효과), 즉 인과의 단절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그는 예술 작업에서 작가의 메시지가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타당한가보다는 오히려 메시지를 전달하는 재현을 구성하는 장치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이때의 장치는 인과의 단절을 위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작가의 의도로 배치되는 기호의 과잉은 위험하다. 예술의 미학적 체제가 갖는 핵심적인 요소인 인과의 단절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미지의 낯섦을 죽이면서 작품의 메시지인 저항의 기능을 약화한다. 따라서 정치의 미술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재현을 구성하는 가운데 작품 내 기호의 적절성을 유지하여 정치적 고발이 약화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결론
작품의 표현에 대한 정당성이 작가를 비롯한 생산 주체가 아닌 다양한 감상 주체의 해석에 따라 결정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랑시에르의 ‘정치의 미술’의 표현은 스스로 밝히듯 정답이 될 수 없다. 랑시에르 또한 다양한 위치에 있는 감상의 한 주체로서 하나의 안을 제시할 뿐이다. 이는 주관적인 해석을 전제로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는 탓에 명료하기보다는 모호한 면이 있다. 이러한 모호함은 규정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랑시에르의 표현 방법의 미덕일 수 있지만, 동시에 ‘정치의 미술’의 표현을 어렵게 하는 현실적인 장애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애는 기본적으로 랑시에르가 자신의 정치예술론의 발화점인 인과의 단절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다. 예컨대 랑시에르의 ‘다른 가시적 장치’의 맹점 또한 언제나 그 정치적 효과가 결과론적이라는 점, 즉 관객의 감상과 해석에 과도하게 의지한다는 데에 있다. 랑시에르가 비록 제작자의 의도로서 해석학적 기호의 사용을 용인하지만, 동시에 기호의 과잉 방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감상과 해석에 방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저자의 죽음’ 이후 미술에서 정식화하였다. 결국 정치의 미술은 제작이 아닌, 심지어 제작자와는 무관하게 관객의 해석에 따라 좌우하는, 관객 중심의 미술로 치우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자칫 미술 제작자의 창의적인 의도를 해칠 수 있으며, 랑시에르가 그토록 경계하는 스펙터클의 개화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상황에서 ‘정치의 미술’의 절실함과 그 표현 방법에 대해 랑시에르만큼 진지하게 접근한 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제안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정치의 미술’이 공동체 구성원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는지, 더 근본적으로는 동시대 미술이 얼마나 ‘정치’를 지지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으면서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숙고하게 한다. 오늘날 ‘정치의 미술’이 제대로 표현되고 있는지, 공동체 구성원에게 우리 주변의 ‘치안’의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정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미술 활동과 작업들이 정말 ‘정치’를 향한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사라지면 ‘정치의 미술’은 더 요원해지며, 그만큼 우리 공동체의 ‘치안’은 더욱 사람을 억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의 논의 가운데 ‘정치의 미술’의 표현 문제를 살피는 일은 오늘날 미술이 어떻게 몫 없는 자들과 대중에게 다가가 계쟁을 일으킬 것인지, 몫의 재분배로서 ‘정치’를 어떤 표현방법으로 지지할 것인지를 되물으면서 '정치의 미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 표현의 방향을 지시한다는 면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 지면상황에 따라 도판과 각주를 생략했다. 본문은 심현섭, 「랑시에르의 ‘정치의 미술’의 표현에서 인과의 단절과 기호의 적절성 문제」, 『모멘텀』, 한국·예술·사진학회, 2024. 참고. https://acapa.or.kr/_Vol-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