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종기 /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대안의 세계

이선영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대안의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삼청동 핑크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종기의 개인전 ‘Enchanted White’에서는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심슨가족이 오래된 거리나, 자연 등을 배경으로 보여주는 유쾌한 장면들이 한 축을 이루고 있고, 청화백자를 비롯한 한국의 도자기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보여주는 시리즈들이 또 다른 한 축을 이룬다. 청화백자에서 마법같은 매혹을 발견한 작가는 심슨가족을 도자기라는 우주에 투입했다. 심슨가족이 청화백자에 들어가서 노는 것이다. 일상적 공간에서 작품 속 공간으로 들어간 심슨가족은 일종의 화자가 되어 낯선 유물의 세계와 대화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간과하는 청화백자의 기기묘묘한 측면이 화면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신화와 자연, 당대의 기술과 예술관을 품고 있는 역사적 사물인 도자기는 일상보다 더 집약된 소우주이며, 가상적 존재인 심슨가족은 이 상징적 우주를 무대로, 때론 이 무대 바깥으로 몸을 내밀기도 하며 경계를 오고 간다.     



Enchanted White-Dragon 용   90X90cm  acrylic on canvas  2021


이번 전시에서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백자 시리즈는 작가가 ‘Enchanted White’로 묘사한 마법처럼 황홀한 화이트다. 작품 [Enchanted White-Dragon]에 나타나듯이, 백자 항아리와 함께하는 캐릭터는 도자기의 안에 있는 것인지 밖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위치에 배치된다. 도자기가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고, 캐릭터 또한 원래 이미지와 같다 보니 눈속임의 유희가 가능한 조건이 성립된다. 문화재와 만화의 스타일은 다르지만, 재현주의에 충실한 탓에 관객은 청화백자와 만화 캐릭터를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청화백자에 바트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마그리트로 하여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반복적으로 외치게 했던 지점이다. 에른스트 크리스와 오토 쿠르츠가 쓴 [예술가의 전설]에 의하면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인간은 그림과 실물을 얼마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종기의 경우에는 실제와 유사한 정밀한 화법이다. 


저자는 그림과 실물을 동일시하는 것은 주술적 사고라고 평가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종교 분야에서 유례가 깊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인간 무의식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림과 실물의 동질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면서, 그 예를 몰락한 독재자의 기념상을 깨부순다든지, 변심한 연인의 사진을 찢어 버리는 경우 등에서 찾아낸다. 심슨가족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머리털까지 포함하는 얼굴 전체가 노란 인간은 현실에 없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문화적 산물로 나타나는) 가상적 세계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백자든 캐릭터든 재현에 충실한 도상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 작품은 두툼한 물감으로 회화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지만, 어떻게 보면 회화적 생산물로 나타나는 개념미술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개념미술 또한 어떤 관념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재현주의에 속할 수 있다. 재현주의는 현대미술에서 지양해야 될 것으로 설정되었지만, 수 천 년 역사를 가진 이 미학적, 철학적 관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Enchanted White-Dragon in the Cloud 구름 속의 용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1



Enchanted White-Tiger  호랑이     90X90cm  acrylic on canvas  2021



 Enchanted White–Haetae  해태- 행운의 뒷머리를 잡다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1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재현(모방, 미메시스)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이천 년 동안 유럽을 풍미하던 미의식이며, 자연 대상을 최대한 유사하게 복제하는 눈속임 기법을 따른 작품이 완성도 높은 회화를 말한다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사진을 비롯한 다른 매체들의 추격으로 상당 부분 퇴색된 상태다. 이종기의 작품에서 청화백자 안 청색 안료로 그려진 용의 등에 올라탄 바트는 용과 비슷한 표정으로 포효한다. 보통 신기한 대상과 함께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많이 벌어지는 장면이다. 용이 도자기 안에만 있는 평면적인 형태라면 캐릭터는 입체감 있게 대조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백자는 블루 스크린을 배경을 찍은 문화재 사진처럼 중성적인 배경에 자세한 형태와 색채를 보여준다. 오래된 도자기를 강조하기 위해 균열이 강조되었고, 다른 차원의 존재와 자연스럽게 결합하기 위해 형태의 위치도 조정되었다. 도자기와 만화적 캐릭터는 모두 기성의 이미지로부터 온 파생 실재다. 


이종기는 창조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기보다는 기성의 것을 재배치함으로써 새롭게 탄생하여 생겨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활용하는 작품이 맥빠진 이차 생산물은 아니다. 그것은 예술작품이 삶은 아니라는 근본적 사실에 대한 현대예술의 각성과도 관련 있다. 캐스린 흄은 환상과 미메시스라는 두 가지 대립되는 사조로 문예사조를 살펴본 책 [환상과 미메시스]에서, ‘한때 우리는 소설은 삶에 관한 것이며, 비평은 소설에 관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제 소설은 다른 소설에 관한 것이며, 사실상 비평이거나 메타 픽션이다’(스콜즈)를 인용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현실로부터 시작되고 현실로 귀결된다는 사실주의의 전제를 흔드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예술이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텍스트 이론이다. 후기 구조주의 학파에 의해 활성화된 텍스트 이론에 의하면, 세계는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고 작가가 하는 일은 이러한 텍스트의 우주에서 기성의 텍스트로 또 다른 텍스트를 짜는 것에 불과하다. 



Enchanted White-Apricot Tree  매화나무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1



Enchanted White-Pine Tree  소나무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1


새로움과 창조에 대한 기대는 줄어들지만, 소통과 독자의 몫은 커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인 끌로델은 ‘나의 시구들 속에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물들을 재발견하게 하라’고 작가의 역할을 규정한 바 있다. 이종기의 작품에서 용만큼이나 자세히 묘사된 도자기의 균열은 이 마법같은 장면이 도자기처럼 깨질 수 있는 허구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깨지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다뤄지는 도자기는 죽을 수 밖에 없기에 더욱 빛나는 삶처럼, 잠재적으로 작동하는 반대 항을 끌어들인다. 또한 도자기는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用器)다. 정신을 담고 있는 머리, 열정을 담고 있는 가슴, 여분의 지방을 가득 담고 있는 아랫배, 무엇보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림 그 자체와 같은 존재다. 2차원 평면에 3차원의 현실을 담는 그림은 늘 양 차원 간의 길항작용이 벌어지는 마법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림 안으로 들어가서 그림 속 산야를 산보하고 나온다는 동양화에서의 상상력이나 그림 안으로 들어가서 영영 나오지 않았다는 저주받은 근대예술가의 신화를 아우르는 무대가 바로 그림이다. 


그려진 도자기 안팎에 걸쳐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종기의 작품은 그림의 틀에 대한 메타적 놀이를 한다는 점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전략과 비슷하다. 수지 개블릭은 [르네 마그리트]에서 마그리트에게 문제는 새로운 정보를 이용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항상 알고 있었던 것을 재배열함으로써 해결된다고 본다. 수지 개블릭에 의하면 그것은 언어에 대한 현대철학의 관점과도 공유된다. 즉 마그리트의 전략은 언어를 사실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 언어 놀이의 모음으로 보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개념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 의하면 문장의 의미는 무엇을 언급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용되는 방식에 달려있다. 그것은 현실이나 환상이 아니라 그 모두를 포함하는 어떤 메타적 차원의 놀이를 말한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 픽션]에서 이러한 메타적 작품, 또는 비평이 리얼리티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준다고 말한다.

 


Sled 5 썰매 5 90X90cm  acrylic on canvas  2021 


즉 ‘속임수를 어떻게 발견해낼까 하는 연구는 또한 대체로 부품을 조립해야 할 것인가의 연구’이기에, ‘어떻게 리얼리티가 모방되며 리얼리티가 위조되는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대안의 현실을 통해 현실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퍼트리샤 워는 예술(또는 비평까지 포함하면 예술적 담론)이라는 대안의 세계가 ‘참이나 거짓일 수 없으며, 그 자체의 전제와 관련될 때만 유효하다’(토도로프)고 인용한다. 이종기의 작품에서 도자기 굽의 오래된 흔적의 표현까지 백자의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캐릭터는 구름 사이에서 용트림하는 용 등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도자기 밖으로 선을 뻗친다. 마치 문화재 안내사처럼 캐릭터는 허트루 보았던 백자를 새삼스럽게 꼼꼼히 보게 한다. 심슨가족을 만든 필체와는 다르지만, 용 또한 만화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예술과 대중문화를 넘나드는 하위문화의 만화에는 엄청난 필력이 느껴지는 작품들도 많이 있다. 


호랑이 등 위에서 자세를 잡고 있는 바트는 원래의 청화백자라는 색상에다 노랑과 빨강을 첨가한다. 선묘로 이루어진 도자기 그림은 만화적 표현과 어울린다. 눈을 부릅뜬 호랑이는 무섭기보다는 유머러스하다. 옆의 만화적 인물이 호랑이 도상에 내재된 환상적인 몫을 바깥으로 끌어낸 결과다. 캐릭터의 색은 튀기보다는 청색, 백색의 우주와 어우러진다. 도자기의 바탕 면은 회화적 질감이 강조되어있다. 그것이 그림일 때만 2차원과 3차원, 허구와 현실 간의 게임은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작품 [Enchanted White-Apricot Tree]에서  결기있게 표현된 매화 나무 위에 캐릭터가 앉아 관객과 시선을 마주한다. 오래된 백자의 흠집도 자세히 묘사했으며, 백자의 갈라짐은 바탕 면에 적용되었다. 작품 [Enchanted White-Pine Tree]에서 소나무가 그려진 청화백자 안에서 주안상을 놓고 맥주를 마시는 심슨은 다른 시리즈와 달리 그림 속에 푹 파묻혀 있다. 배불뚝이 심슨을 만든 것은 바로 그 맥주였을 것이다. 



Samcheongdong 삼청동    60.6X72.7cm  acrylic on canvas  2021 



Samcheongdong View 2  삼청동 풍경 2   51.5X73cm watercolor on paper 2009 


한편 실제 도자기 위에 그려졌던 청색 그림은 화면 밖으로 넘치지는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족적인 소우주로서의 도자기 문양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것은 이유가 있다. 전시의 또 하나의 축은 도자기 밖의 세계, 그러나 도자기만큼이나 오래되고, 그래서 사실과 환상이 반반씩 섞여 그 경계가 도자기처럼 깨지기 쉬운 그런 세계이다. 작품 [Sled 5]에서 심슨가족이 하얀 설경을 무대로 썰매를 타는 광경은 오래된 사물에서의 ‘Enchanted White’를 떠나 현실계로 이동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것은 두 계열로 나뉘는 이 전시 작품의 중간지대에 속한다. 눈 쌓인 세계로 설정된 화이트는 그 색의 기원을 말해준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독일에서는 하늘에서 막 내린 눈 위에 태양이 비칠 때의 흰색, ‘눈의 흰색’을 ‘가장 하얀 흰색’으로 꼽는다고 인용한다. 에스키모들은 흰색을 가리키는 색이름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데, 에스키모인에게 수십 가지로 구별되는 화이트가 필요한 이유는 그들이 하얀 세계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언어학자들이 밝혀낸 에스키모들의 세분화된 어휘는 흰색의 이름이 아니라 다양한 상태의 눈을 가리키는 어휘다. 백자의 화이트에서 온 전시 부제는 도자기의 상태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는 마법같은 차이를 말하며, 작가는 도자기 외에 바탕 면도 물감의 촉각성을 살려 화이트의 다양한 마법이 발휘되도록 했다. 도자기 속 선묘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묘사된 배경의 눈 쌓인 숲은 도자기가 일상용품으로 가능했던 시대가 자연과 보다 가까웠음을 암시한다. 심슨가족처럼 눈에 팍 띄는 팝적 도상은 많은 볼거리들이 경쟁하는 현대의 산물이다. 눈 쌓인 대관령처럼 친숙해 보이는 풍경 속에서 단체로 눈썰매를 타는 모습에서 여백처럼 하얀 전경 부분은 컬러풀한 주인공들을 강조한다. 원경과 달리 아무것도 부가되어 있지 않은 하얀 배경은 탈 것이 지상을 달리는 것인지 붕 뜬 것인지 알 수 없게 한다. 달리는 썰매는 인원 초과인데, 이 운전대 없는 아찔한 질주에서 위험을 감지한 존재는 그래도 가장 나이가 있는 소년이다. 



 Gyedong 5  계동 5  50X117cm  acrylic on canvas  2021 


가족의 즐거운 체험에 함께 등장하는 개는 반려동물이 줄 수 있는 행복을 보여준다. 얼굴을 포함해서 머리카락까지 샛노란 인물들에 비하면, 개는 사실에 가까운 이미지다. 야생은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인간계의 동물은 이미 캐릭터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나무의 묘사도 거의 사실적이다. 만화의 선적 묘사는 회화의 드로잉에 해당되는 것으로 서로 이물감 없이 결합될 수 있는 공통적 언어이다. 그 점은 도자기 시리즈에서 더욱 분명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도시는 도자기 만큼은 아니어도 모종의 시간여행의 산물이다. 공간에 대한 가성비를 따진다면 야트막한 건물들이 있는 거리가 도시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겠는가. 작품 [삼청동]은 전시가 열리는 삼청동의 갤러리를 배경으로 심슨가족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 셋에 반려동물까지, 만약 그것이 현실이라면 버거운 풍경일 수도 있다. 아이 중 하나는 유모차를 탈 정도로 어리기 때문이다. 


말썽꾸러기 아들은 엄마의 핸드백에 매달려 보드를 타고, 걸어도 될 만한 딸은 유모차에 매달려 심슨부인을 힘들게 한다. 이 상황에서 심슨부인은 작품 속에 나타난 바와 같은 풍경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겠는가. 가로수가 죽 서 있는 야트막한 건물의 배경의 청명한 하늘은 그 자체가 멋진 풍경이며, 오늘도 이런 장면을 즐기기 위해 삼청동은 북적거린다. 이 장면을 보고 있을, 또는 찍었을 또 하나의 가족은 심슨, 즉 가장이며 아마도 작가와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이다. 대중에게 알려진 만화적 인물을 새로운 상황에 배치하는 이종기의 작품은 심란하고 무거운 현실을 유쾌하고 가볍게 표현한다. 만화 자체에 그러한 힘이 있지만, 작가는 미술작품이라는 맥락에 배치함으로서 그 내재된 정서를 증폭시킨다. 유쾌한 상황설정, 팝적인 색감, 익숙한 캐릭터까지, 작가의 감성에 맞고 대중과의 소통도 용이한 방식은 코로나로 우울한 시기를 위로한다.

 


Gwanghwamun Band 광화문밴드  53X72.7cm   acrylic on canvas  2021 


이 장면에서 현실의 무게는 삭감되어 있다. 자유롭게 산책하는 반려동물,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가족들, 북적임이 삭제된 동화같은 거리까지...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동물들은 그것들을 자유롭게 해줄 ‘주인’의 배려와 경제력을 필요로 하며, 가족은 해체되어가고 있고, 특히 미래 세대의 생산에는 인색하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저 푸른 하늘의 상태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으며,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되는 나무들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정감 있는 오래된 거리는 공공정책의 강제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더 나은 미래는커녕 ‘일상의 회복’이 문제 되는 시점에서, 한때 자명하게 주어졌던 것들이 이미 우리를 하나둘 떠나고 있다는 불안감이 이 자연스러운 장면을 이상화한다. 만화는 어떤 이야기를 향해 부산하게 움직이지만, 회화는 이미지를 시간과 함께 단일한 방향으로 흐르는 서사의 압박에서 해방시키고 여러 은유가 중첩된 장면으로 고정시킬 수 있다. 


이종기의 작품은 만화에서 끌어온 인물들과 또 다른 현실과의 만남을 통해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자연스러운 현실처럼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 ‘순수한’ 예술작품에서 기대되는 무에서 유의 창조는 아니지만, 선택과 조합을 통해 말하는 방식이다. 작품 [계동 5]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층고가 1-2층 내외로 길게 펼쳐진 상가는 공간이 부족한 도시에서는 사치스러운 것이고, 공간은 있지만 사람이 없는 시골에서는 썰렁한 것이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의 플로 챠트처럼 언제나 양극단의 선택만을 강요하는 단선적인 논리 속에서, 구경꾼이 지나가는 야트막한 상가의 풍경은 그 불가능성 때문에 눈길을 끈다. 작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거리가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지만, 그것의 비현실성을 강조하는 것은 거리의 만화적 인물이다. 가상현실 속의 인물처럼 그들은 길 양편으로 흥미로운 사물들이 가득 진열된 뻥 뚫린 길로 끝없이 나아간다. 



Haeundae Station  100X80cm  acrylic on canvas  2021 


구경하거나 때로는 사서 내 것으로 만들만한 물건들은 이 가상의 진열대 위에 끝없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예전의 인사동을 연상시키는, 옛 기와가 얹힌 상가는 이제 거의 사라진 풍경이다. 그 안에서 팔던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도 이곳 사람들이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그림의 모습처럼 인파를 뚫고 나가기에 힘들지만 않는다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라지는 상가의 풍경은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거리를 향해 가게 전면부가 열려 있는 상가의 구조는 축제적 분위기를 고양 시키며, 색다른 상가를 만들려는 건축 디자인에도 활용되는 인기 아이템이다. 작은 가게들은 누군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만든 것을 세상과 교환하는 무대이며, 그 안을 채우는 것은 화이트 큐브에 걸려 있는 예술작품 못지않은 치열함이 서려 있다. 코로나 때문에 상가들도 빈 구멍이 뻥뻥 뚫리게 되기 이전에도 국적 불명의 건물과 물건들이 가득해지면서 이미 예술의 거리라고 할 수 없는 현대 도시 안의 옛 거리에서 예술 비슷한 대리체험이나 가능할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본 지나간 풍경에는 이중의 거리감이 주는 자유로움, 자신의 직접적인 생활과는 무관한 홀가분함 때문에 작품 속 캐릭터들처럼 여행을 즐긴다. 


붉은 노을이 내려 앉아갈 무렵에 몰려오는 여행의 피곤함도 그리 싫지 않은 여행자가 걷는 길은 행복 가득한 노란 길이다. 동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벽돌 길처럼 허구적이다. 어둠이 내린 광화문 광장 앞에서 연주하는 심슨가족의 모습은 음악 매니아이기도 한 작가의 취향이 담겨있다. 청화백자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그렇지만 음악은 청취자를 질적으로 다른 어떤 시공 안에 온전히 들여놓을 수 있는 마술적인 힘을 가졌다. 비합리적 세계를 믿지 않는 이에게는 그 세계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음악애호가에게는 음악이 마술적 효과를 줄 수 있다. 음악은 지금 여기에서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도자기든 옛 거리이든 자연이든 다른 세계 안에 들어가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 것은 큰 행복이며, 이종기는 그러한 상태를 작품을 통해 타인에게 전염시킨다. 작품 [광화문 밴드]의 배경을 이루는 광화문 광장은 촛불파와 성조기파의 극한적 대립으로 늘 소란스러웠던 정치의 거리였다. 하지만 그 어떤 측이든 간에 그들의 외침은 공적 공간에서 자기들만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퍼포먼스였다는 사실이다. 



Enchanted White-White Tiger 백호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1 


가장 황당한 상황으로 있음직한 현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예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한편 문화재 앞에서 힙(hip)한 퍼포먼스로 인기를 끈 한국광광공사의 홍보물처럼 문화재가 재맥락화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 점은 최근 시리즈인 도자기를 소재로 한 작업으로 이어진다. 작품 [해운대역]에서 대단지 고층아파트의 산책로를 무대로 하는 부자(父子) 간의 놀이에서 어른은 아이보다 더 심각하게 놀이에 몰입한다. 분장을 한 채 악당의 역할을 맡은 아버지와 광선 검을 든 아들의 대결은 보랏빛 하늘 위의 비행체도 떠 있는 미래 도시같은 배경과 잘 어울린다. 심슨가족은 ‘미국의 중산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산층에 대한 풍자가 더 맞겠지만, 심슨가족이 풍요의 사회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미국적인 모델을 향해 나아가는 한국 사회를 풍자하는데에도 도움을 준다.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물질주의 사회, 원본보다 더 그럴듯한 시뮬라크르는 차용의 언어가 가질 수 있는 한 조각의 현실성을 말해준다.


진짜 싸우듯이 노는 심슨가족의 모습은 그것은 잘 놀게 할 수 있는 것만이 흥행이 될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때 예술은 보편적인 언어가 된 대중문화의 언어를 참조해야 할까? 이종기는 이미 그런 선택을 했으며 소통뿐 아니라 유통 면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번 전시 작품에는 보라색이 자주 등장한다. 궁궐, 고층아파트 등의 배경이 다 보라색이었는데, 보라가 가장 자연스러운 맥락을 만드는 것은 옛 자수작품 속에 있는 심슨부인의 이미지다. 작품 [Enchanted White-White Tiger]에서 로코코스타일의 과장된 머리 장식을 고수하는 심슨부인은 우아한 보랏빛 우주 속에서 전통 문양 속의 환상적 동물 등을 타고 있으며, 그 옆에는 아들이 꽃가지 위에 앉아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게끔 정교하게 구축된 이전 시대의 상징적 우주다. 우리에게조차 전통 문양은 글로벌한 캐릭터보다 낯설다. 낯선 우주는 친근한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부각된다. 한 장면 안에 전통과 현대, 예술과 대중문화의 대화가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