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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다, 의미의 집이며 이데올로기의 성좌인 몸

고충환

人-길을 묻다. 이 주제는 아마도 사람에게 길을 묻는다기보다는 사람의 길을 묻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길이며 생활의 길이다. 생명과 생활 곧 존재론적 조건과 환경적 조건이 인간을 이루는 두 축이다. 그리고 그 조건 그대로 인간의 몸 곧 신체에 아로새겨진다. 이렇듯 신체 자체는 가치중립적이고 중성적인 개념이며 대상이 아니다. 의미의 집이며 이데올로기의 성좌다. 말하자면 신체는 시대와 당대를 지배하는 지식체계며 가치관, 이를테면 에피스테메(미셀 푸코) 내지 패러다임(토마스 쿤)을 구현하고 반영하는 실질적이면서 추상적인 대상이다. 더 쉽게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이를테면 미술사에 나타난 역사화에 등장하는 인물묘사랄지 특히 군주의 초상화에는 일종의 계급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투영된다. 롤랑 바르트 식으론 일종의 문화적 기호랄 수 있는 스투티움의 좌표 정도로 볼 수가 있겠다. 신체는 이런 문화적 상징자산은 물론이거니와 상대적으로 더 개인적이고 심층적인 의미의 지층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무의식이나 억압된 욕망을 은연 중 반영하고 드러낸다. 얼굴과 머리의 구분에서 이렇듯 심층적인 반영을 확인해볼 수가 있을 것인데, 얼굴이 사회에 내어준 주체인 페르소나에 해당한다면, 머리는 가면 뒤에 숨겨진 진정한 주체에 가깝다. 그리고 물론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지층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면의 외화며, 바깥으로 드러난 내면을 반영하는 것. 이렇듯 신체는 눈에 보이는 것을 반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반영한다. 때로 그 반영은 한눈에 읽히기도 하지만, 더러 최소한으로만 겨우 암시될 때도 있다. 

 

여기에 신체에 대한,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사유의 과정을 기록한 작가들이 있다. 중력 무중력 시리즈를 통해 촉발된 존재며 시대의 표상을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를 통해 확장하고 심화시킨 김영원, 부서진 얼굴을 통해 내면의 외화를 실현한 한편으로 네이키드 개념을 매개로 보통사람들의 초상을 시대의 초상으로 끌어올린 안창홍,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눈에 폭력으로 얼룩진 어른들의 세상을 대비시킨 박대조 같은 작가들이다. 이 작가들을 통해서 생명원리며 생활철학에 바탕을 둔, 지금여기의 상황논리로 재해석된 사람의 길을 그들과 함께 더듬어 가볼 수가 있을 것이다. 

 

김영원, 중력 무중력과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 중력 무중력 시리즈는 작가의 전기 작업을 대표하고,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는 작가의 후기 작업을 대변한다. 그만큼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며 경향이며 주제의식을 뚜렷하게 부각하는 편이다. 

중력 무중력 개념을 테마로 한 일련의 작업들은 대략 허공중에 헛몸짓을 하는 사람들, 틀에 갇힌 사람들과 그 틀을 깨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중력 무중력 개념은 무엇보다도 역학 개념이다. 나와 외계가 만나지는 물리적 현상을 통해서 나와 외계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인 만큼 여기서 역학은 물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작가는 철봉대를 맞잡은 손에서 철봉대가 소거된 상황을 표현한다. 비록 철봉대는 없어졌지만 철봉대만큼의 빈 홈이 손에 남겨진다. 이로써 여전히 무언가에 매달려 있는 몸이 헛몸짓으로 허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안았던 몸짓에서 안겼던 사람은 안았던 사람에게 흔적을 남긴 채 허공중에 부유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동적인 몸짓을 만들어준 상황논리가 소거된 연후에도 여전히 빈 몸짓으로 그 상황논리를 증언하고 있는(기억하고 있는?) 기묘한 형상을 만들어놓고 있다. 그렇게 개별주체에게 작용되어졌다가 불현듯 지워진, 그리고 그렇게 지워진 연후에도 여전히 개별주체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상처?)을 남기고 있는 그 상황논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틀을 깨고 나오는 사람이나 틀에 갇힌 사람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작업들에서 그 상황논리란 다름 아닌 관성과 제도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틀임이 밝혀진다. 개별주체로 하여금 거듭나게끔 유도하는 틀이며(자기라는 틀), 개별주체를 옥죄는 틀이다(제도라는 틀).     

 

이처럼 작가는 중력 무중력 개념을 매개로 존재론적 틀이며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틀을 다룬다. 그리고 이 가운데 존재론적 틀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심화된 것이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다. 틀 자체는 실체가 없듯(이를테면 이데올로기) 그림자 역시 스스로는 실체가 없다. 다만 어떤 실체에 기대어 부수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실체와의 연관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가 있는 것이 그림자의 운명이다. 그림자와 그림자의 그림자는 다르다. 그림자가 실체와 맺고 있던 관계며 의미가 그만큼 더 흐릿해진다. 그리고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에서 그 의미연관은 더 희미해지다가 종래에는 최소한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작가의 조각은 나로부터 유래한 또 다른 나를 보여준다. 나는 나를 낳고 또 다른 나를 낳는다. 그렇게 나로부터 비롯된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나는 나를 반영하고 또 다른 나를 반영한다. 그렇게 나는 끝도 없이 반영된다. 그렇게 반영된 나는 반영하는 나와 같은가. 그림자의 그림자와 나는 같은가. 나, 자아, 주체, 에고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는 이처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실체(불교에서의 진아)를 향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의 미궁 속에 던져 넣는다. 그 미궁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은 저마다에게 주어진 공유할 수 없는 몫이다. 

안창홍, 부서진 얼굴과 사이보그의 눈물 그리고 베드 카우치 시리즈. 부서진 얼굴과 사이보그의 눈물 시리즈는 사진과 회화의 관계를 재고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베드 카우치 시리즈는 인체에 대한 전혀 다른 태도를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안창홍의 회화의 핵심논리며 방법론을 엿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언젠가 익명의 사람들이 찍힌 명함판 크기의 네거티브 필름을 뭉텅이로 얻는다. 사실상 방치되거나 버려졌을 것들이지만, 우연한 기회에 작가의 예사롭지 않은 의식이며 감각의 레이더에 붙잡힌 의미심장한 오브제들이다. 작가는 이 필름들을 확대 인화하고 복사한다. 그리고 사진들을 마구 잘라 재편집하고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표면에 그림을 덧그리는데, 눈을 감겨 영혼을 가두거나 입술을 붉게 칠해 생기를 불어넣는다. 흑백 모노톤을 강조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컬러를 덧입혀 친근하면서도 낯 설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친근한 것은 오랜 시간 망각 속에 묵혀 있었을 색 바랜 사진들이 불러일으키는 시간의 아우라 때문이고, 낯 설은 것은 작가가 익명의 얼굴들에 불어넣은 느닷없는 생기 탓이다. 그 생기는 말하자면 자연스럽거나 편안한 생기와는 거리가 멀다. 주검으로부터 되살아난 좀비들 같고, 가장 지극한 죽음이랄 수 있는 망각으로부터 불현듯 기억의 표면 위로 호출된 허깨비들 같다. 도대체 이 기묘하고 낯 설은 얼굴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소리 없이 쓰러져간, 미처 존재를 피워볼 새도 없이 잊혔을 익명의 주체들에게 새삼스레 그렇게 잊힌 소리며 존재를 되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작가는 마찬가지 방법으로 편집된 사진 위에 덧그리거나 연필 스케치 형식을 빌려 일련의 사이보그의 눈물 시리즈를 제작한다. 유독 기계적으로 보이는 눈동자나 찢어진 목 부위로 삐져나온 몇 가닥의 전선줄이 아니라면 영락없는 사람 그대로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사이보그를 그렸다기보다는 사실은 사이보그를 빌려 인간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현대문명과 더불어 점차 인간의 의식이 기계화되고 특정의 기능에 맞춰 진화되는(?) 현실에 대한 풍자처럼 보인다. 그 기계화며 기능에 자기를 맞추는 일에 실패할 경우에 그는 어느덧 익명인간으로 낙인찍혀 망가진 로봇처럼 폐기되고 분해되고 버려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보그가 흘리는 눈물은 사실은 그렇게 폐기된 인간의 눈물처럼 보인다. 

 

자크 라캉은 상징계로의 편입이 좌절된 탓에 상징계의 틈새로 실재계가 출현할 때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기호도 표상도 상징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실재계의 출현은 언제나 기묘하고 낯설고 생경하다. 부서진 얼굴이나 사이보그의 생경한(혹은 무표정한?) 얼굴은 어쩌면 상징계의 인식 코드가 파열되면서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게 된 실재계의 출현이며, 차마 드러나서는 안 될 것들이 드러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아니면 캐니 속에 잠재돼 있던 언캐니의 예기치 못한 출현으로 볼 수도 있겠고. 

 

작가는 진작부터 익명의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다. 존재의 증상이며 시대의 징후를 내면화하거나 실현하고 있는 보통사람들이다. 비록 익명이고 보통사람들이지만, 사실은 존재며 시대를 읽게 해주는 좌표들이다. 베드 카우치에는 이렇듯 전문 모델이 아닌 보통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웃집 농부며 가게 주인 그리고 다방 레지들이다. 모델들 중에는 한때의 청춘을 불살랐을 반항의 지표를 아로새긴 문신을 한 남자가 있는가 하면, 선남선녀들의 수줍고 당당한 사랑이 여실하다. 그리고 엉큼한 남자 마냥 개 한 마리가 누운 모델을 훔쳐보고 있기도 하다. 가식 없는 몸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벗은 몸을 재현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재고하게 한다. 다름 아닌 누드와 네이키드의 비교와 차이가 그것이다. 누드가 연출된 몸이라면 네이키드는 있는 그대로의 몸에 가깝다. 누드가 미학에 기울어져 있다면 네이키드는 진실에 속한다. 네이키드 자체는 비록 벗은 몸을 그린 것에 지나지 않지만, 누드가 다만 미학의 층위에 머물 뿐인 것에 비해, 이처럼 벗은 몸에 반영된 진실이 모델이나 화가 개인의 층위를 넘어 사회적 진실까지 아우르고 확장된다. 이로써 작가는 진실을 담보하는 미학만이 비로소 미학일 수 있음을 재확인시켜준다. 

 

박대조,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상. 눈은 마음의 창이다.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보는 동시에 지각하면서 인식한다. 보는 동시에 분석하고 판단하고 예기한다.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지만 똑같이 보지는 않는다. 저마다의 인문학적 배경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른 만큼 다르게 보고 차이 나게 본다. 이를테면 아프리카 오지 사람들은 다만 눈(雪)에 대한 추상적인 어림개념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에스키모 원주민들은 천차만별의 눈 색깔을 구별한다. 피나 불에 얽힌 사고의 경험이며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빨간색은 부드럽고 따뜻하게 감싸는 안온한 느낌을 주기가 어렵다. 다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보는 것에는 마음이 실린다. 본다는 것은 곧 마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한 시지각의 경계를 넘어 마음의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박대조의 그림은 이처럼 마음이 반영된 시각이며 특히 시점의 문제를 건드린다. 

 

작가의 그림은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상을 보여준다. 이 말은 흔히 그렇듯 그저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보면서, 동시에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그 눈에 비친 것을 본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보는 주체(아마도 어른)는 정작 그림 속에선 등장하지가 않는다. 여기서 작가는 시지각과 관련한 일종의 생략과 확장을 실현한다. 어린아이가 보는 것은 어린아이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다. 그 현실을 눈동자에 압축해 그린 것이므로 생략이고, 그림 밖 정경을 그린 것이므로 확장이다. 비록 그림 자체는 어린아이를 그린 것이지만, 이렇듯 눈동자에 반영된 이미지를 매개로 어린아이는 어른과 연결되고, 그림 속 정경은 그림 밖 상황으로 연장된다. 바로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현실성을 획득하게 해주는 문법이며 장치가 되겠다. 그림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은 주로 내전이 한창인 분쟁지역에 사는 희생양이며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 정황은 이를테면 어린아이의 입을 가린 수건에서처럼 분쟁지역의 기호로 알려진 기표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보다는 불에 탄 탱크나 폭발현장과 같은 눈동자에 반영된 현실에서 더 잘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어린아이의 시점과 어른이 속해져 있는 현실을 대비시키고, 순진무구한 세계와 폭력으로 얼룩진 세계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특이한 기법이며 방법론으로 주목된다. 대리석판에다가 그림을 그린 것인데, OHP 필름을 가공해 제판을 만들고, 그 제판을 매개로 대리석 판면에다가 이미지를 전사한다. 그리고 일종의 디지털 상감기법을 이용해 그렇게 전사된 이미지 그대로를 옮겨 그린다. 그리고 덧그리거나 채색을 가해 최종적인 그림을 얻는 것인데, 이 일련의 프로세스를 통해서 대리석 판면에 미세 요철로 새겨진, 사진과 마찬가지의 정치한 묘사를 얻을 수가 있게 된다. 대리석 판면으로서 화지를 대신한 것이나, 사진과 판화 기법의 도입으로서 회화의 표현영역을 확장한 것이 남달라 보인다. 근작에선 아예 사진의 매체적인 특징을 이용한다거나 라이트 박스를 도입하는 등 형식을 심화하는 것이 확인된다.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본 어른들의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심장한 메시지와 함께 이런 형식실험 역시 눈여겨 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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