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평론 일반〕
융합예술의 개념
김성호 (미술평론가)
(1편에 이어서)
3. 예술과 일상의 융합-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데리다의 차연과 해체 그리고 들뢰즈의 차이와 해체/융합이 야기하는 운동성으로서의 융합이란 실제로 예술융합의 현장에서 어떠한 담론들로 구체화되었을까?
양자의 철학에서 해체와 융합이 기실 같은 뿌리처럼 사용된 개념들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아서단토(A. Danto)의 역사철학에 근거한 예술철학에서 하나의 정점으로 정의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영향관계를 언제나 서술해야 하는 특성상, 융합의 개념은 1960년대의 한 시점을 ‘예술종말’이란 이름으로 구체적으로 장착된다.
구체적으로 아서 단토가 1984년 예술종말을 선언하게 된 계기는 20년 전인 1964년 뉴욕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던 앤디워홀의 작품 브릴로 박스를 본 충격으로 거슬러 올라가 깊은 재성찰을 거치면서 비롯되었다.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는 브릴로 박스와 그것을 똑같은 양상으로 재현한 앤디워홀의 브릴로 박스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사유는 결국 일상과 예술의 차이를 식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결국 슈퍼마켓의 산업생산품과 워홀의 예술작품 사이, 즉 일상과 예술작품 사이의 ‘식별불가능성(indiscernibility)’21)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일상과 예술의 융합을 선언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 이전까지의 그린버그 식의 ‘훈련된 눈’22)으로 가능했던 예술과 일상의 구분은 이제 아서단토에 이르러 불가능해졌다. 달리 말하면, 예술을 일상과 다른 것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기에 예술의 위상을 철학과 미학으로 서술하는 것 자체가 브릴로 박스의 등장 이후 이제는 불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단토에게 있어,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일상을 주요 소재와 테마로 삼아온 팝아트 경향의 당시 미술 현장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일상과 예술을 동일시하게 된 팝아트류의 당대 예술은 이제 일상과 그 차이를 식별할 수 없기에 일상과 별리된 예술의 위상을 설명할 길이 막연해진 것이다.
그래서 단토는 이 식별불가능성에 대한 해답을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문제가 아닌 ‘어떻게 그것이 예술이 되는가’의 문제를 통해서 풀어가기로 했다. 즉 그것은 관계의 차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문제는 우리가 무엇에 관계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관계하느냐는 것”23)이다. 그래서 팝아트 이전까지의 예술과 일상과의 관계의 역사를 검토한다.
단토의 견해로는 이 시대 이전에는 예술이 일상과 구분된 탓에 충분히 그 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파악했다. 그 예로 그는 이전까지의 예술을 두 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팝아트 이후를 하나의 시기로 펼쳐놓는다. “처음에는 미메시스의 시기이며 이데올로기 시기가 그 다음을 따르고, 그 다음은 역사후기(post-historical)의 시기”24)로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는 본연의 미술개념이 잉태했던 13C로부터 20C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바자리25) 내러티브’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재현 미술의 역사가 실재와의 유사성을 목적으로 진보해간다”26)는 내러티브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단토는 모방에 근거한 담론인 미메시스(mimesis)의 시기라고 규정했다. 한편, 20C로부터 20C중후반(1964년 워홀의 브릴로 박스 나아가 1960년대 팝아트)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단토는 ‘그린버그27) 내러티브’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당시의 예술은 ‘매체의 물리적인 조건에서 미술의 고유한 특징을 찾는 일’28)에 집중했던 예술창작이었고 “매체의 극한을 받아들여 각각 분리되고 집중되고 규정”29)되는 종착점이었던 추상미술의 경향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린버그에게 있어서, “캔버스의 평평한 표면과 같은 매체적 한계가 오히려 모더니즘 시기에 이르러서는 회화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긍정적이고 가중 중요한 본성”30)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평면이라는 2차원성은 어떠한 다른 예술과도 공유하지 않는 회화의 유일조건이었기에, 모더니스트 회화는 어떠한 다른 것과도 공유하지 않는 평면성 그 자체로 적응해 왔다.” 31)
이렇듯 종국에 극도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추상예술을 극단으로 두고 팝아트에 이르러 마감하는 이 시대의 예술은 늘 새로운 것들로 충만하기를 염원했던 탓에, 전통의 구식의 것으로 내몰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지속적으로 창출해 나갔음을 성찰하면서 단토는 이 시대를 ‘이데올로기의 시기’로 명명한다.
반면, 추상의 끝에 도래한 팝아트의 양상을 단토는 어떠한 내러티브로도 규정할 수 없었다. 일상이 예술 안에 깊이 잠입하여 일상으로부터 예술을 분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토는 예술종말을 선언한다. 철학의 어떠한 내러티브로도 설명할 수 없게 된 팝아트의 시대로부터 그동안 진술 가능했던 거대 내러티브가 결국 종말하고 말았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예술의 종말이란 결국 일상과 한 덩어리가 된 예술을 설명할 거시적 내러티브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즉 예술에 관한 새로운 거대 내러티브가 종말했음을 말한다.
단토의 견해로는 이제 진보적인 거대 내러티브는 사라졌다. 이 시대에 남은 것은 거시적 내러티브로 설명할 수 없는 다원주의 미술이다. 예술을 설명해왔던 진보적 거대 내러티브가 소멸했다는 차원에서 그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넓게는 팝아트)의 시대를 기점으로 예술종말을 선언하고 팝아트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이제 ‘역사 후기의 시기’로 상정한다. 종말을 통해 열리는 역사 후기 시대란 마치 기독교의 종착 지점인 ‘천국’, 막시즘의 종착지인 ‘계급 차별이 없는 평등의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즉 단토는 우리에게 ‘목적론적 종결점(a teleological end-point)’에 이미 도달했음을 거듭 상기시킨다. 그래서 일상과 예술이 융합된 종말 이후의 시대에 위치한 지금의 컨템포러리 시대에는 더 이상의 진보적 행진이 없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관론이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열림을 천명하는 것이다. 더 이상의 진보적 내러티브가 없는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이 가치를 지니며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자격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단토의 예술종말론이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희망이란 이와 같이 모든 스타일이 가능한 다원주의적 양상의 풍부한 가능성과 정당성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예술종말 이후의 시대에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 다원주의 예술이란 저마다 상대적 가치 판별이 가능한 다원주의비평으로 그 가능태가 보다 더 넓어진 희망적 세계가 된다.
A. Danto
4. 일상과 예술의 융합-보드리야르의 ‘예술의 무가치’
물론 ‘일상과 예술이 융합된 다원주의예술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 또한 없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평범한 한 미술에세이 ‘예술의 음모(Le complot de l'art, 1996)’32)에서 이러한 비판적 논의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은 비록 전문적인 논문의 성격을 띠고 있지 않은 그저 한 편의 ‘미술에세이’일 뿐이지만, 이 글이 당시의 프랑스 사회에 미친 파장은 자못 심대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예술(art)과 비예술(non-art)이 혹은 예술과 일상이 서로의 정체성을 닮아가게 되면서 야기되는 부정적인 견해들로 가득하다.
보드리야르는 “나는 무가치하다, 나는 무가치하다, 정말 무가치하다.”33)라고 한탄한다. 이러한 한탄은 미학이 예술의 위기로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조였다. 구체적으로 그의 한탄은 예술이 일상의 평범함으로부터 줄곧 벗어나려 하고 고상함과 초월적 가치를 독점하려고 시도하면서 특권화하려는 태도를 지속하게 되는 상황으로부터 출발된다.34) 즉 현대예술은 이제 일상과 별리된 ‘예술로서의 초월적 가치’를 찾을 곳이 더 이상 없게 되자 일상 자체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즉 그에 따르면 현대예술이란 “진부함, 쓰레기, 보잘것없음에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부여하고 적용시키는 것”35)이다. 그럼으로써 art은 오히려 일상과 하등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예술이 일상과 구분되려고 애쓰다가 아예 일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결과적으로 일상의 세계 전체는 어느덧 미적으로 되어버렸고, 예술은 미적 가치를 상실한 평범한 일상이 되고만 것이다.36) 어느 것이 예술이고 어느 것이 일상인지 구분조차 불가능하게 된 세계를 구현하게 된 것이다.
“환영의 욕망을 잃어버린 예술 역시 미학적 평범함에 이르는 모든 것을 고양시키기 위해 결국은 초미적(transesthétique)인 것이 되었다” 37)
달리 말하면 오늘날 예술이 가장 외설스러운 것과 가장 평범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미적으로 추구하게 됨으로써 미적인 것이 결국 평범함에 이르게 되어 오늘날 예술은 초미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초미적이란 미가 너무 많아 더 이상 미가 아닌 지점에 이른 것에 다름 아니다. 즉 한마디로 현대예술이 무가치해졌다는 것이다. 38)
특히 보드리야르는 컨템퍼러리 문화에서 모든 것에 대한 미적 가치 추구가 결국 미적 가치의 소멸을 가져오게 될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모든 대상이 미적 대상이 된다면, 결국 어떤 것도 미적 대상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보드리야르는 ‘가치의 과도함이 오히려 평범함과 무가치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포르노그래피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실제로, 그 자체로 포르노그래피라고 할 만한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왜냐면 포르노그래피는 사실상 도처에 있고, 그것의 본질은 시청각과 시각에 관한 모든 기술들 속에서 이미 과거화되었기 때문이다.” 39)
따라서 오늘날 포르노그래피가 만연하게 된 이후에는 환영에 대한 성적 욕망이 가득한 외설스러움이 사라지고 무관심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미의 과도함으로 인해 초미적(transesthétique)으로 된 현대예술 또한 무의미(non-sens)와 무가치(nullité)에 이르게 한다. 미의 과도함으로 인해 미술의 미적 가치를 판단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이 결국 무관심적이게 된 것이다. 그의 입장으로서는 현대예술에는 더 이상 가치의 법칙이 없으며, 불확실성(incertitude)와 ‘미적 가치판단의 불가능성’(l'impossibilité d'un jugement de valeur esthétique)만이 있을 따름이다. 40)
결국 그는 세계 전체가 미적인 것으로 된다는 사실이 예술과 미학의 종언을 어느 정도 의미한다고 바라보면서 예술의 이러한 ‘미적 포화상태가 미술의 종말의식을 일깨우는 것’으로 역설한다.41) 즉 그는 너무나 많은 예술이 있기 때문에 예술이 죽는다고 말하기까지 이른다. 42)
그렇다면,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받는 예술을 많은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믿으면서 예술을 가까이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보르리야르는 ‘이미 무가치한데도 무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이중성’이라고 설파한다.43) 그 이중성의 원인을 그는 ‘예술의 음모(Le Complot de l'art)’로 정의한다. 그것은 예술이 무가치한데도 가치 있다고 설파하는 다름 아닌 전문가들의 범죄(délit d'initié)이자 그들의 공모인 것이다. 이처럼 보드리야르는 예술계와 일상계의 간극이 모호하게 된 오늘날 예술의 존재론적, 의미론적 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일상이 예술을 흉내내고 예술이 일상과 다를 바 없어지는 이러한 예술=일상이라는 융합의 결과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논의의 한계는 있지만, A. Danto가 예술종말을 통해서 다원주의미술이라는 긍정적인 지평을 열고 있다고 한다면, 보드리야르는 예술종말을 통해서 ‘art의 무가치’를 주장하면서 비주얼아트의 존재론에 대한 부정적이고 회의론적인 시각을 전개한다. 그럼에도 둘의 사유에는 예술계와 일상계 사이에 놓인 경계의 모호함을 인식하고 예술종말을 검토하는 관점이,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J. Baudrillard
(3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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