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큐레이터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큐레이터의 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해 생기는 난센스들은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큐레이터 자격증 제도가 아닌가 한다. '큐레이터'와 '미술관 박물관 종사자'(Museum Worker)를 혼동해서 만들어진 이 제도는 큐레이터 외에도 미술관 박물관에 필수적인 전문 인력의 확보는 물론 양성에도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박물관, 미술관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다. 박물관이란 자연사/ 역사/ 경제, 생산 박물관/ 민족, 사회 박물관/ 과학기술박물관/ 그리고 미술관으로 구분된다. 즉 미술관은 박물관의 하나로 “미술박물관”의 준말이다. 따라서 사익을 목적으로 하는 화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박물관과 미술관 육성과 발전을 위해 1999년 2월8일 제정 공포된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은 공사립미술관의 설립과 운영이 용이하도록 만든 법안이다. 그러나 처음 법안을 만들 때부터 박물관학적인 이해부족으로 매우 기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미술계인사들이 나서 세미나를 열고 법안의 모순을 지적하는 등 법석을 떨어 일부 수정되었다. 하지만 전공자를 필수적으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미술관, 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l이유로 설립자 또는 관장이 관련전공자이면 학예직원을 별도로 두지 않아도 되도록 규정하였다.
그런데 2003년에 들어서면서 큐레이터 자격증 제도 도입을 위해 다시 법률 개정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큐레이터라는 직종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TV드라마의 주인공 직업이 큐레이터인 경우가 많았고, 큐레이터가 광고모델로 등장하고 각종 공중파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활약하는 등 방송매체가 만들어 낸 ‘멋지고, 화려하며, 감각 있고, 격조 있는’ 허구의 큐레이터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구체화된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합리화와 혁신의 노예가 되어있던 대학과 대학원들은 앞 다투어 큐레이터학과 또는 박물관학과, 미술관학과, 예술학과 등등을 행정, 예술, 경영대학원과정 또는 학부에 신설하는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학과 지원자는 쇄도하고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계속해서 학교마다 과를 신설하는 신속함을 보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졸업생들이 배출되면서기 학교와 학교에 몸담은 교수들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졸업장을 취득하고 학위를 수여받았다 하더라도 취업이 난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도권 대학정원 동결 때문에 타 학과 정원의 일부를 양여 받아 과를 신설한 경우 학위조차 수여하지 못하고 수료증만 주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런 과정에서 도입된 것이 큐레이터 자격증 제도이다. 이렇게 출발이 유쾌하지 못했던 큐레이터 자격증제도는 무조건 학과를 신설하고 학생들을 모집한 대학 측의 다급한 필요성과 큐레이터만 있으면 미술관, 박물관이 잘 돌아갈 것이라 오해한 문화부의 고급 관료의 자신감과 성과를 중시하는 습관과 맞아떨어져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면서 필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관료사회의 정치, 행정논리를 우선하는 습성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되고 말았다.
그 결과 2003년 12월 30일 큐레이터 자격증 제도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미술관 박물관에 큐레이터만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술관 박물관 업무는 많은 전문 인력들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협업체제로 이루어진다. 배에 기관사와 갑판장이 선장과 조타수가 각각의 임무가 있듯 말이다. 그런데 우리 큐레이터 자격증 제도의 맹점은 큐레이터는 전지전능해서 미술관 박물관의 모든 일을 해내는 슈퍼맨이 되어야 한 점이다. 이는 다른 중요한 직종은 미술관 박물관에서 필요 없는 것처럼 법령이 규정을 해버리고만 결과를 낳았다.
사실 이 제도가 도입되려면 우선 미술관 박물관 전문 직종에 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다. 제도도입을 검토하던 당시 필자는 미국의 박물관 미술관 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Museums, AAM)가 정한 자료를 제출한바 있다. 여기에는 모든 미술관 박물관이 확보해야 할 최소한 1. 관장 (Director), 2. 재무담당(Business Manager), 3. 큐레이터(Curator), 4. 교육담당자(Educator), 5. 등록담당자(Registrar), 6. 수복보존담당자(Conservator), 7. 전시디자이너(Exhibition Designer ), 8. 홍보섭외담당자(Public Relations Officer), 9. 자금조달담당자(Development Officer), 10. 사서(Librarian), 11. 박물관/미술관후원회담당자(Membership Officer), 12. 시설관리자(Superintendent), 13. 소장품관리자(Collection Manager), 14. 편집자(Editor), 15. 사진기사(Photographer) 등 15개의 전문직종을 구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 일 뿐 미술관 박물관의 메카라고 할 미국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에서 1996년 출판한『일하는 곳: 박물관』을 보면 박물관 미술관에 필요한 51종의 직종과 3가지 직급을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큐레이터가 미술관 박물관에서 필요한 모든 일을 하는 제도로 잘못 인식하고 제도를 도입 시행함으로써 미술관 박물관을 더욱 피폐화한 셈이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하기 보다는 자격증 신청자를 늘려 제도가 정착된 것처럼 보이려는 꾀를 동원했다. 그 결과 2003년 12월 30일 시행령을 개정해서 큐레이터 채용을 의무화했다. 초기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규정된 등록된 박물관 미술관외의 명칭사용에 대해서 규제라며 이를 폐지했던 문화부가 큐레이터 제도가 낳은 실수를 덮을 목적으로 규제를 하나 더한 셈이다.
그래서 종래법령에 의해 일하던 기존의 인력들은 부랴부랴 큐레이터 자격증을 신청하고 취득했다. 자격증 소지자가 급증한 것은 당연 한일. 게다가 향후 채용의무화로 일자리가 많아 질 것으로 생각한 전공자들이 자격증을 얻기 위해서는 2년 이상의 미술관 박물관 경력이 필요했던 탓에 너도나도 인턴 또는 자원봉사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해야했다.
하지만 인간의 꼼수는 항상 한계가 있는 법. 거개의 자격증 소지자가 미술관련 전공자인 탓에 특수 박물관에서는 전공 관련 학예사자격증소지자를 구할 수 없어 박물관 개관이 미루어지는 사태가 발생 한 것이다. 2004년 10월 문을 연 고서수집가 여승구선생이 설립한 <화봉책박물관>의 경우가 그 하나이다. 평생을 모은 희귀서적을 공개하려고 사재를 털어 박물관을 개관하고자 했던 선생은 미술이나 고미술관련 큐레이터는 공급이 넘쳐나지만 책과 관련한 학예연구사를 구하지 못해 근 6개월 동안 개관을 늦추어야 했다.
이처럼 한국의 큐레이터 제도는 박물관 미술관의 보편적인 인원을 확보하기 어려운 제도이자 특수한 미술관 박물관 전문일력의 양성과 일자리를 뺏는 제도이다. 이러한 큐레이터 제도가 꼭 필요하다면 “박물관, 미술관 종사자 자격증 제도”로 전환해서 미술관 박물관의 실질적인 활동에 필요한 인재의 육성과 재교육제도가 되도록 하거나 아니면 아예 폐지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이런 제도를 도입하기 전, 1986년 처음 도입된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사 제도에 대한 연구와 분석과 평가가 있어야 했다. 그들은 아무 권한도 없이 그냥 큐레이터란 직함만 가지고 미술관의 비전문가들, 행정직과 일부 별정직, 기능직들의 비 전문성을 위장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제도의 수정이나 보완 또는 전면적인 수술 없이 학예사자격증 제도만 도입했다는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일이다.
여기에 큐레이터 경험이나 박물관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이 국공립미술관이나 박물관장으로 부임하여 이들이 관장의 업무보다는 큐레이터의 업무에 더 관심을 보임으로써 큐레이터들의 불행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열악한 큐레이터들의 근무조건 개선과 여타의 유관 전문 인력 확보에 주력하면서 관장으로서 관의 정책수립과 예산 확보 등 본연의 업무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전시나 작가선정, 친분있는 작가 작품구입 등 구체적이고 세밀한 일에 더 관심을 두면서 큐레이터들은 관장의 지시를 수동적으로 따라야 하는 연구자로서는 치명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관장의 이러한 부당한 일에 대해 저항하면 가차 없이 한직으로 인사이동을 시키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또 관장은 당장 말 잘 듣고 순응하는 사람들을 임시직 또는 계약직으로 채용해서 정규 학예직들과 계약직들 간의 경쟁을 유도하면서 큐레이터들 사이를 벌려놓아 결국은 전문직들끼리 충성경쟁을 벌이도록 함으로써 미술관 박물관은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여기에 큐레이터에 대해 가장 결정적인 오해인 전시기획자로 새기는 일이 발생하는 것도 사실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기본적인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못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큐레이터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작품의 발굴과 조사연구 그리고 수집이다.
그런데 우리 미술관중 연간 20점 이상 작품을 소장하는 미술관은 몇 개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미술관 박물관의 상설전시건 기획전시건 소장품이 중심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부나 타 미술관 박물관 또는 개인 소장품을 대여하거나 또는 작가들을 직접 선택해서 전시를 구성하는 일이 큐레이터들의 중심업무가 되면서 우리나라의 큐레이터는 “전시기획자”가 되어 버렸다.
이제라도 미술관 박물관의 본연의 모습을 갖추고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여타의 전문 인력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등록미술관 박물관을 감시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동시에 “학예사자격증 제도”를 개선해서 “박물관, 미술관 종사자 자격증 제도”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개혁이다. 편 가르고 자리차지해서 “끼리끼리” 기금이나 나눠먹는 것이 개혁이 아니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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