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한성필, 천성명 전 / 인간이 사라져가는 풍경

이선영

인간이 사라져가는 풍경

   

한성필 전 (1.8--2.22,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천성명 전 (1.19—2.27, 스페이스K_과천)

   

천성명의 설치전과 한성필 사진전은 세계의 중심이자 만물의 척도였던 인간이 극도로 상대화 되는 시점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작품에서 인간은 삶, 또는 세상의 주인공으로 중심에 서있지 않고 해체되고 있거나 소소한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천성명은 풍선으로 부풀린 듯 큰 이미지로 한성필은 장면의 일부를 이루는 작은 사물들로 나타나지만, 극대와 극소는 뫼비우스 띠처럼 만나서 팔랑거리는 인간의 실존을 증거 한다. 지금 여기를 확대경처럼 들여다보는 천성명의 작품, 그리고 지질학적 시간대라는 보다 거시적 시점으로 문명을 들여다보는 한성필의 작품은 인간에 대한 신화를 깨 나간다. 그들의 작품에는 인간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힘이 예시된다. 그것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든, 아니면 자연력이든, 인간 삶을 가능하게도 하고 거둬들이기도 하는 어떤 거대한 힘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한성필


서사가 있는 인체조각상에 기본을 둔 설치작업을 해왔던 천성명은 이번 전시에서 인체를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건물로 친다면 가건물같이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모습이다. 이전 작품에서 건축물과 건축물 사진으로 된 가림 막을 한 장면으로 담은 [파사드] 시리즈에서 실제와 환영간의 관계를 다루었던 한성필은 이번 전시에서 극지방이라는 극한의 환경 속에 남아있는 인간의 흔적을 추적한다. 자연의 압도적인 실재성과 인공물의 취약함이 극적으로 대조되면서 인간 삶의 환영적 속성은 더욱 부각된다. 인간이 잔재로만 남아있는 그들의 작품은 자잘한 인간적 삶을 초월하겠다는 관념적 태도의 산물일까? 작품은 헐겁게 던져놓고 온갖 관념론적 수사로 가득한 작가들이 손쉬운 초월을 떠들곤 한다면, 이 전시의 작가들은 인간 삶에 대한 서사를 가일 층 섬세한 언어로 전개해온 차가운 열정이 느껴진다.

         

인체조각상이 출발된 몇 가지 기원중 하나는 무덤가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까지 인간들은 공통의 상징적인 우주 속에 살고 소통했기 때문에 기념비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익명의 도시인으로 뿔뿔이 개인화된 근대부터 기념비는 위선이 될 소지가 다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비는 계속 만들어져왔다. 적절한 맥락을 가지든 풍자적이든 말이다. 가장 큰 작품의 가로 길이만 10미터인 천성명의 작품은 기념비적인 스케일을 가진다. 그것은 인체조각상에 기본을 둔 서사적 작품을 해온 천성명의 조각적 뿌리를 예시한다. 그러나 그 스케일은 매우 공허하게 연출되어 있다. 횃불을 불끈 쥔 팔의 이미지는 얇은 판재에 그려져 각목 지지대로 받혀있는, 뒤가 다 보이는 엉성한 구조물로 서 있다. 이미지의 중심을 이루는 횃불 자체가 무색하다. 통유리로 된 큰 건물의 한켠에서 자연 광이 쏟아져 들어오는 공간에 놓인 작품에 조명등까지 가세하니 부조리에 부조리를 더 한다. 



천성명

인간을 둘러싼 인공적 생태계 속에서 횃불이란 깜깜한 숲을 헤매는 원시인의 이미지처럼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 맞은편에는 소녀의 조상 머리 부분을 싹둑 잘라서 3개의 의자 위에 얹어놓았다. [부조리한 덩어리]라고 이름 붙인 이 작품들은 조각의 보편적 존재 양태였던 기념비적 형식, 그리고 그 기념비의 구조적 중심이었던 인간의 해체를 말한다. 어디선가 잘려 나온 팔뚝이나 머리는 어떤 유기체적인 종합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고 있는 모습이다. 조립 가능한 것들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덩어리보다는 다루기 편할 것이다. 그러나 편리함이 꼭 합리적인 것을 낳는 것은 아니다. ‘부조리한 덩어리’라는 표현에는 기념비적인 인체상과 인간 모두를 지칭하는 듯하다. 전시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가 연필로 벽에 휘갈겨 써있는 것으로 봐서, 예술가라는 존재 또한 그 부조리한 덩어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전시 때마다 설치와 해체를 시지푸스처럼 반복해야 하는 바로 그 조각가라는 존재 말이다. 


천성명의 작품에서 인체, 또는 인간은 본질적이지 않고 색칠한 판자때기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판들의 조합에는 비밀이 숨어있을 곳이 없다. 낱낱이 코드화되는 환경은 인간, 또는 인체에도 관철된다. 인간/인체는 껍데기만 남았지만 유연하지도 못하다. 그것들은 엉거주춤 한시적으로 세워져 있을 뿐이다. 바쁜 발걸음을 보여주는 작품에서, 인간의 사라짐은 보다 직접적이다. 질주에 가까운 보행자들의 바쁜 발걸음은 사각형에 닫혀 있으며 무한 반복된다. 하얀 메가폰 두 개가 하나부터 열까지 반복적으로 세는 작품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것은 기계적 반복이라는 폐쇄회로 속 현대인의 일상을 표현한다. 사각형 같은 패턴으로 똑같이 반복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상이 인간의 발목 윗부분을 사라지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사라지고 있어서 언젠가는 바닥과 같은 레벨이 될 것이다. 


천성명

개체가 자기 항상성을 유지 못하고 환경과 동일화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라고 할 때, 더 잘 살기위해 바삐 돌아가는 삶은 종말을 향해 치닫는 발걸음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그 뒤에는 분홍색 장기들이 조립식 장난감처럼 연출되어 걸려있다. 간도 쓸개도 다 빼고 사는 삶, 누구와도 호환될 수 있듯이 기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인체의 무게와 부피는 사라지고 생경하게 칠해진 단편적 표면으로 남아있는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 및 현 문명의 상황이다. 인간이 온전히 서 있는 모습도 있지만, 종이로 접은 듯 구겨져 있고 좌대에 해당되는 하단 구조물에 발목이 완전히 잡혀있다. 사자 같은 야생동물 또한 같은 상황이다.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가 자연을 타자화 했지만, 부메랑이 되어 인간 또한 타자화 된 상황을 말한다. 천성명의 작품에서 자연, 인간, 예술, 이념, 사랑 같은 것들은 잠시 내걸린 입간판 같은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냉소적이고도 비극적인 메시지는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끝내 버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그것들은 여전히 인간에 대해 말하는 인간적 메시지들인 것이다.     

  

남극권과 북극권의 풍경을 담은 사진과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성필의 ‘지극의 상속 Polar Heir’ 전에도 인간의 이야기는 있다. 그러나 한성필의 작품에서 인간의 역사는 사회보다는 자연에 포함된다.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근대 이전까지 인간은 지구적 차원의 자연에 큰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산업 혁명기에 많이 쓰였을 것 같은 기계적 생산도구들이 유적지나 폐허처럼 나타나는 한성필의 작품에서는 인간이 본격적으로 지구를 망가뜨리기 시작한 근대의 흔적도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다양한 실루엣으로 녹아가는 빙하의 모습이 약간의 위기감을 주긴 하지만 말이다. 아마도 눈 덮인 풍경이라서 자원을 얻기 위해 광폭하게 파헤친 흔적이 가려져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자연은 더 큰 힘으로 철없는 문명을 싸안고 있다.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자연을 갈취해온 연장들이 아름다운 자연 여기저기에 을씨년스럽게 널려있다. 


작가가 포착한 광막한 자연이라는 무대 위에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것들은 곧 처치 곤란한 폐기물이 된다. 연속적인 자연에 불연속적으로 박혀있는 그것들은 자연을 정복한 위대한 기념비라기보다는 지구 생태계의 가장 치명적인 기생충같은 이물감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발견과 탐험이라는 깃발을 들고 도달한 곳 어디에나 핏빛 착취와 투쟁이 있어왔음을 한성필의 작품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고발은 부정보다는 긍정에 쏠려있다. 작가는 그 모든 크고 작은 충격들을 자연은 흡수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도구들은 선채로 죽어있거나 모서리를 노출하고 반쯤 대지에 묻혀 있곤 한다. 대부분 바다와 땅의 자원을 채취하기 위한 도구적 사물이다. 탄광의 막장을 포착한 작품은 그 도구들이 어머니/지구를 얼마만큼 깊숙이 찔러댔는지를 말해준다. 쓸모를 잃어버린 도구는 쓰레기가 된다. 한편 도구들이 놓여 졌던 자연은 도구가 아니다. 자연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도구가 아니라, 그자체로 목적인 것이다. 


한성필

1층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과 2층의 사진매핑을 이용한 영상작품은 한 장의 사진만으로는 충분히 말 할 수 없는 서사가 있다. 그의 영상에는 사진들이 있고, 사진에도 잠재적인 움직임이 있다. 정지된 장면에는 전후의 맥락이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수세기를 쌓아온 시공간적 흔적으로서의 자연은 서서히 움직인다. 별빛과 구름, 오로라 등으로 빠르게 변하는 하늘이나, 균열되고 녹아가는 빙하의 모습은 좀 더 극적인 장면일 뿐이다. 한편 북극과 남극 같은 극단적 조건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왔고, 작가가 포착한 자연에는 그러한 인간의 흔적이 있다. 고래잡이, 광산개발, 과학탐구 같은 이유로 인간들은 그곳에 머물다 갔다. 자연이 가지는 실체감에 비해 인간 역사의 흔적은 소소하다. 인간은 문명의 각 단계마다 대단한 성취를 거둬온 것 같지만, 거대한 지표면에 잠시 걸쳐있다 사라졌을 뿐이다. 폐허가 된 인공물이 완전한 자연이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3분 분량의 작품 [vain hope]은 무엇에 사용했는지도 수수께끼 같은 무너져가는 구조물 전후와 앞뒤로 접혀지거나 펼쳐지는 자연의 풍광이 장관이다. 방치된 폐허뿐 아니라 사람이 활동하고 있는 장소도 장난감 마을 같은 모습이다. 반면 인공의 빛이 힘을 발하는 야간풍경에서 인공 빛은 별빛을 삼키고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곤 한다. 그러나 낮 풍경에서 인공구조물은 거의 숨은 그림 찾기 차원으로 쪼그라든다. 자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인간의 흔적을 알려주는 수직 구조물이나 눈 쌓인 절개면 위의 집들이나 도구, 설원 위의 작은 집들이 그렇다. [시간의 무게] 시리즈는 자연을 이루고 있는 무수한 퇴적층들과 표면 질감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다. 화면 아래로부터 얼음, 바다, 빙산, 안개, 하늘이 시루떡처럼 포개진 작품은 자연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한 풍경 속에서 오롯이 담아냈다. 그의 작품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출전; 아트 인 컬쳐 2월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