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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전 / 이름붙일 수 없는 어떤 색에 대한 연구

이선영

이름붙일 수 없는 어떤 색에 대한 연구

BLUE 전 (4. 30—5. 29 살롱 드 에이치 Salon de H)

  

이선영(미술평론가)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인류학자인 브렌트 베를린과 파울 카이는 98개의 언어에 나타난 색채명칭의 유래를 조사했다고 인용한다. 그 결과 단순한 여러 언어 체계에서 파랑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 언어에서 파랑은 녹색의 하나로 분류된다고 말한다. 우리말에서도 녹색의 산야를 ‘푸른 자연’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녹색과 파랑의 구별이 명확치 않다. 파랑은 일차 색 중의 하나이면서도 실체가 모호하다. 언어학적으로는 물론, 물리학적으로도 파랑의 위치는 불확실하다. 마가레테 브룬스의 [색의 수수께끼]에 의하면, 뉴턴은 그의 색 환의 스펙트럼 색 가운데에서 인디고 파랑을 언급하고, 그것을 태양광선의 분해에서 나오는 색 가운데 가장 어두운 파랑이라고 묘사했다. 그것은 가시적 색광의 끝에 즉 파랑에서 보라로 넘어가서 결국 불가시적 자외선 속으로 사라지는 곳에 위치한다. 스펙트럼 바깥을 향하는 푸른색은 머나먼 영원이나 정신성을 상징하곤 했다. 

  




김온유_M bius-strip_향, 플라스틱(오브제)_18.5×4cm_2015

 

블루에 주목하는 이 전시는 의미를 고착시키는 방법으로서의 상징에 기대지 않는다. 여기에서 블루는 가시적, 상징적 스펙트럼 바깥, 그 무한대의 영역을 가리키는 최소한의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상징으로의 환원이 일어나지 않을 뿐, 각 작품마다 블루에 관련된 문화적 상징은 풍부하다. 그것은 이 프로젝트가 미술 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이 두루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와 설치미술가는 물론, 드러머, 조향사(perfumer), 요리사(patissier)까지 참여한 ‘블루’ 전은 가장 친숙하면서도 가장 낯선 색인 블루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도처에 편재하면서도 다가가기 힘든 이 색에 대해 소리와 냄새를 포함한 공(共)감각적 접근을 꾀함으로서 블루가 가진 무한대의 뉘앙스를 살려내고자 한다. 그것은 환원이 아니라, 끝없는 대리와 보충의 방식을 통해 접근하는 방식이다. 깊은 바다나 드높은 하늘의 색인 블루는 그것이 속해있는 실재 자체가 무한이다. 블루가 위를 향할 때 그것은 정신성을, 아래를 향할 때 그것은 멜랑콜리를 자아낸다. 

    

색에 대한 공(共)감각적 접근

 

‘블루’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전시라고 해서, 당장에 활용될 수 있는 푸른색 물감만의 향연은 아니다. 이 전시는 블루로 대변되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블루 아닌 것을 통한 우회적 접근이 흥미롭다. 소리와 냄새같이 붙잡기 힘든 감각은 물론이거니와 가장 구체적인 조형예술에서도 블루에 대한 접근은 간접적이다. 예술이라는 우회로는 더디지만 풍요롭다. 전시공간에 들어가면 향이 가득함을 먼저 느낄 수 있다. 아크릴 박스 안에 연한 블루 계열로 칠해진 뫼비우스 띠 아래에서 풍겨져 나온 향이다. 향수 전문 스튜디오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김온유의 작품 [Möbius strip]는 무한대를 상징하는 도상에 칠해진 블루를 통해 최소한의 시각적인 단서만을 제공한다. 작품의 몸통은 향기이다. 공기 중의 향은 그 안에 들어선 관객에게 감지되어 각자의 기억에 호소한다. 그 냄새는 지금여기와 단절된 갑작스런 시공간을 열어 제치며 그때 그곳으로의 순간이동을 가능케 한다. 

    




이현희_Fresh Mint Macaron_마카롱(화이트초콜릿, 민트, 크림),아크릴채색_2015

 

마가레테 브룬스는 파랑이 제 5원소에 해당하는 공간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테르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파랑은 4원소인 불, 물, 공기, 흙의 춤 즉 우주의 유희를 위한 공간을 제공한다. 공기를 통해 전파되는 되는 향을 블루와 중첩시킬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공기원근법을 활용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공기의 파랑이 ‘빛과 어둠이 합쳐진 색’이라고 보았다. 2층에 설치된 향은 조금 다르다. 냄새가 가장 촉각과 더불어 가장 원초적인 감각임을 생각할 때, 여성과 남성으로 대표되는 향을 무한을 향한 최소한의 방향타로 제시한 것은 자연스럽다. 파랑은 남성을 나타내는 주요색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분홍은 딸, 환한 파랑은 아들을 나타냈다. 현대에도 남녀가 구별된 화장실 표지는 남성이 푸른색이다. 하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상징체계에서는 파랑이 여성적 색이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파랑은 수동적이며 조용한 색으로, 적극적이며 강하고 남성적인 빨강의 정반대였다. 그래서 파랑은 기독교 문화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여성, 즉 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동양에서 음(陰)을 나타내는 파랑도 그렇다. 문화사를 보면 양성이 푸른색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종종 있었던 것 같다. 김온유의 짙푸른, 연푸른 뫼비우스 띠 아래의 향 발생기는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향기를 공기 중에 뿜어낸다. 오후의 간식이 생각날 때쯤에 전시장에 들른 관객에게 그다음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한 계열의 푸른색으로 만들어진 과자들이다. 대표적인 디저트 메뉴로 자리 잡은 마카롱은 색깔마다 다른 맛으로 인기가 있다. 프랑스에서 제과를 전공하고 디저트 바를 운영 중인 이현희의 작품 [freshmint macaron]은 배고픔을 채우는 것을 넘어서 심미적 단계에서 향유되는 디저트를 통해 푸른색 계열이 음식의 색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는 금기를 깼다. 에바 헬러는 파랑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지만, 수면제나 안정제라면 모를까, 먹고 마시는 음식 중에는 파랑이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파랑이 가지는 차가운 안정감은 식욕마저 가라앉히기 때문일까. 

   

차가움과 서늘함의 색조는 식료품의 포장으로 이상적인 색일 뿐이다. 그러나 단순한 기능을 넘어선 단계의 음식에서의 파랑은 미묘한 색의 차이를 감식하는 것만큼이나 예민한 감수성을 요구한다. 오늘날 같은 미식의 시대에 음식과 색에 관련된 금기는 사라진다. 소리 또한 향이나 맛 못지않은 섬세함을 요구하는데, 푸른색에 내재된 강한 에너지가 감성의 차원으로 전이될 수 있다. 가장 강렬한 감성은 사랑이다. 블루를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강동규(예명; Mandoo chaplin)는 ‘일렉트로니카 뮤직 그룹 WYM’에서 드러머로 활동 중인 뮤지션으로, 전시 오픈 날 재즈밴드 MKS와 함께 뮤직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무한한 블루처럼, 경계가 소멸되는 체험을 낳는 사랑의 체험을 심장의 박동소리와 함께 하는 드럼 비트로 들려준다.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의 가사처럼, 사랑은 파랑이며, 블루스에서 파랑은 그리움의 색으로 울려퍼진다.

   

깊은 바다부터 높은 하늘까지에 이르는 색

    




윤나나_5 Horizons_00:28:56_2015

 

여행광이기도 한 비디오 작가 윤나나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5 horizons]는 세계 곳곳, 또는 여러 계절, 또는 여러 시간대의 수평선들을 수집한 영상을 보여준다. 여행자에게 육지는 푸른 바다에 싸여있고, 지구 어디에서나 푸른 하늘이 지붕이 될 수 있음은 자명하다. 지구별 여행자에게 지구라는 별은 푸른색이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은 블루와 블루가 맞대결하는 거대한 장이다. 차분한 수평선의 계열로 환원된 바다는 그 내부에 강한 야성적 에너지를 숨기고 있다. 푸른 바다에서 태어나 푸른 하늘로 향하는 인간의 생은 두 무한 사이에서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인간은 두 양극을 알 수 없고 잡을 수도 없지만, 양극 사이에 있는 중간을 과정으로 체험할 수는 있다. 조각가 이소영은 여기와 저기를 잇는 계단을 설치했다. 전시장 1층에서 2층으로 좁고 긴 계단을 올라가면 또 하나 놓여있는 계단은 아래에 바퀴가 달린 것 빼고는 실제의 계단과 거의 같다. 

    

안정감 없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계단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하는 과도기의 위험한 순간을 암시한다.  작품 [moving stair]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간 만큼 더 멀어지며 또 가야할 과제를 남겨주는 끝없는 과정으로 블루를 해석했다. 또 다른 작품 [far-text]와 [farther]가 말해주듯이, 반복과 차이를 통한 이행의 단계는 끝이 없을 것이다. 끝없는 다가감은 하늘색을 영원의 색으로 만들었지만, 작가는 푸른색 대신에 또 다른 무한의 색인 하얀색을 택했다. 하얀색도 푸른색처럼 무한해서 그 위에 무엇이든 써 넣을 수 있다. 파랑은 하늘이다. 그래서 파랑은 신성한 색, 영원한 색이라고 말해진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인간은 지속되기를 바라는 모든 것, 영원히 계속되어야할 모든 것에 파랑을 결부 시킨다. 물과 공기는 실제로 파란색이 아니지만 파랑으로 느껴진다. 공간이 깊어지면서 모든 색이 파랑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파랑은 무한히 투명해질 때 생겨난다. 따라서 파랑은 경계가 없는 무한한 차원의 색이다. 하얀 계단은 그러한 파랑으로의 이행을 위한 중간단계들이다. 

 




이소영_먼 더 먼 가장 먼(Far-Farther-Farthest)_가변설치_2015

 




애나한_The Booth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5   

 

설치미술가 애나한에게 여기와 저기를 이어주는 것은 전시장 귀퉁이에 설치된 낡은 전화기이다. 작가는 멀리 떨어진 물리적 시공간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되어 나날이 업그레이드되는 기계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얼마 전까지도 보편적이었던 공중전화는 이제 유물이 되어 심미적 회로에 끼어든다. 지나간 시공간을 떠올리는 사물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전화 부스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 네온의 선은 오래된 사물에서 풍겨 나오는 광채와 겹쳐진다. 여기에서 블루는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짙은 향수도 떠올린다. 관객이 전화기를 들면 파도소리인지 노이즈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옆에 걸어놓은 정방형의 회화들은 푸른 단색화들인데, 작가는 푸른 색 속에서 푸른빛이 발하는 효과를 주었다. 보통 파랑은 그림자, 노랑은 빛을 표현하는데, 작가는 ‘어둠을 항상 끌고 다니는 파랑’(괴테)에서 빛을 끌어낸다. 색으로 빛의 느낌을 표현한 애나한의 그림은 물질로부터 정신으로의 도약을 보여주는 듯하다. 

   

칸딘스키는 [예술의 정신성에 관하여]에서, ‘파랑은 깊어질수록 우리를 무한한 것으로 이끌며 순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운다’고 말한 바 있다. 화가 김혜나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 또는 어떤 본질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변해가는 중의 것을 그린다. 공기, 매우 작은 것, 풀과 돌. 나무들 아래의 유령들 같이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그 특징만 요약해서 그리기에 눈은 캔버스 위를 방황하게 된다. 관객은 이 그림은 무엇을 표현한 것이냐고 묻고 싶으며 재현 또는 제시된 이미지와 의미를 연결시키고 싶겠지만, 작가는 변죽을 울릴 뿐이다. 김혜나에게 ‘포근하면서도 춤추는 공기, 겨울바람, 얼어 있는 작은 땅, 그 위에서 녹고 있는 얕은 얼음, 새벽에 보이는 어슴푸레한 방 안의 풍경’(작가노트)처럼, 블루는 일상에 편재하지만 잡을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정작 푸른색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김혜나의 ‘블루’는 뭔가 꽉 조여진 것들이 스르르 풀려나갈 때의 해방감과 두려움이 함께 한다. 

  




김혜나_In the air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15

 




한진수_In Between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5

 

한진수는 높이가 3미터 정도 되는 공간 천정에 모터를 매달고 그 위를 끝없이 통과하는 길 다란 끈 같은 우레탄 벨트를 설치했다. 작품 [in between]은 불규칙한 굴곡 면이 공중에서 끝없이 회전하면서 주변에 떨어지는 휘어진 폐곡선 그림자들과 함께 유희하는 형태이다. 바닥에 닿을 듯한 선이 어느 순간 저 높이 가있고 그 반대의 과정도 되풀이 된다. 뭔가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것에는 그 맹목성이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 매달린 인간은 끝없이 이상을 향해 도약하곤 하지만 추락을 반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이 모든 악무한의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 인간을 내려다보는 무심한 하늘빛을 떠올린다. 절대적 타자의 영역에 속한 파랑은 낯설게 다가온다. 가령 스테인드글라스로 푸른빛이 쏟아지도록 설계된 대표적인 종교건물을 생각해 보자. 마가레테 브룬스는 12세기의 성당건축이 유리창을 통해 끊임없이 눈부시게 아름답게 쏟아지는 빛은 신적인 빛의 이해에 도달하도록 만들어주었다고 말한다.

   

푸른 빛 색유리는 전대미문의 성스러운 힘을 공간 속에 불어넣었다. 그러나 마가레테 브룬스는 빛의 형이상학에 반대되는 또 다른 신비적 경험, 즉 신 자신이 가진 빛은 인간에게 너무도 낯선 존재이므로 인간의 눈과 생각에 단지 형용 불가능한 암흑으로밖에는 묘사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명료성, 빛, 그리고 광채는 모든 사물들이 신적인 빛 속에 몸담고 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파랑 안에 숨겨진 요구의 절대성, 신성함은 일반인들에게는 견디기 어렵거나 낯설었을 것이다. 천정 높이 내걸린 채 끝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한진수의 [in between] 무엇과 무엇사이의 관계를 그렇게 집요하게 묻는 것일까. 그가 생각하는 블루의 무심함은 이성이 광기에, 질서가 혼돈에, 의미가 무의미에 둘러싸인 것처럼, 강렬한 관심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역설적 관계는 타자의 영역에 속한 예술이 절대적 타자의 영역에 근접하기도 하며, 블루는 그 매개가 되어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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