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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순 / 성장하는 상징적 우주

이선영

성장하는 상징적 우주

 

이선영(미술평론가)

     

윤명순의 최근 작품 [하루, 욕망하는 풍경](2014) 시리즈는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서울의 오래된 동네 풍경과 닮았다. 실제의 풍경과 가상의 풍경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는 선들이 용접된 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은 무게와 부피를 대폭 덜어내고 선이라는 최소한의 물질적 구조로 만들어졌지만, 정겨운 삶의 터전을 표현하는데 모자람이 없다. 그것들이 설치될 벽면에 드리워지는 선들의 그림자는 가상적 풍경에 실재감을 부여한다. 보는 위치에 따라 원근법도 달라지고 그림자도 이동한다. 벽에 걸리는 작품은 물리적으로 움직이지 않지만 가상적인 움직임이 있다. 가상적 움직임을 강조하기 위해 시간에 따라 변하는 조명을 사용하기도 한다. 윙윙거리며 움직이는 기계장치를 부착하지 않은 단촐한 작품은 움직임의 환영이 있을 뿐이지만, 거기에는 기계적 반복으로 유형화된 형태가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형태화의 과정이 있다. 

 

 

 


11909-1

 

대부분의 작품은 벽에 걸려 있다. 건축이라는 소재이기에 바닥에 서있어도 될 것 같지만, 작가는 벽을 고집한다. 그것들은 담쟁이처럼 벽에 붙어서 벽을 타고 확장한다. 땅위에 서있는 건축이 나무의 뿌리내림에 기초한다면, 벽에 걸린 건축은 뿌리줄기와 비교될 수 있다. 바닥에 서 있는 전형적인 조각 작품에 비한다면 회화적 환영에 의지한다. 추상 스타일로 제작된 작품에서도 작품의 허상적 속성은 강조되곤 하는데, 가령 흙 판을 동선으로 연결한 [허상의 풍경](2003) 시리즈가 그러하다. 허상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의 어느 차원이 감축됨으로서 내포하는 바는 더욱 풍부해진다. 환영은 단순한 허구를 넘어서 현실을 압축적으로 재현한다. 환영의 차원을 포기하고, 즉물적으로 변화하는 경향은 예술이 가질 수 있는 많은 부분을 포기한다. 설치 작품이라는 미명하에, 전시가 끝나면 철수해야 하는 일시적인 인테리어로 해소된 지점이 없지 않다. 

 

설치에 걸 맞는 현대적 미학을 실현한다할 지라도, 장(場)의 내부에 관객을 맥락화해야 하는 과제는 규모가 너무 커져야 하는 번거로움을 동반한다. 규모가 커지면 작업보다는 작업을 가능케 하는 맥락--타인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문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 조직 등--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결국은 작업의 지속가능성과 작품의 밀도가 불확실해진다. 작가에게는 삶의 지속 가능성만큼이나 예술의 지속 가능성이 중요하다. 시간의 흐름은 늘 젊기만 할 것 같은 인간을 삶의 한가운데에 던져놓는다. 대부분 그 지점에서 고꾸라지지만,  그 지점부터 예술의 진면목이 시작될 수 있다. 윤명순의 작품에는 당면한 삶과 밀접히 반응하면서 만들어지는 감각이 있다. 작가는 자기가 살고 작업하는 동네에 주목했다. 많은 현대인들이 생활공간과 직장이 다르며, 분리된 두 영역을 투명 인간처럼 오고 가는 것과는 다른 생활 패턴이다. 

 




11909-12

 

좁다란 골목길 사이사이로 연결된 오래된 집들은 가로 세로의 투명한 좌표축을 따라 정의되는 아파트가 보편화된 한국 사회의 추상적인 주거양식에 비교한다면 불투명하다. 연결되어 있을 것 같은데 막다른 길일 수도 있고, 막다른 골목 같은데 절묘한 연결지점이 있을 수 있다. 어떤 동네에 가면 복잡한 골목길에 어리둥절한 행인을 위해 친절하게도 ‘길 없음’이라는 표지가 담벼락에 써 있기도 하다. 윤명순은 불투명한 풍경을 선이라는 투명한 요소로 구축한다. 선은 형태를 만드는 합리적인 요소지만, 용접된 동 선은 형태를 경계 지을 뿐 아니라 오래된 자연을 닮은 깊은 색감과 두들길 때 끈적거리는 물성도 가진다. 쇠보다 오래 보존되지만 딱딱하지는 않은 동 선은 불이 닿는 부위에 따라 색이 달라지며, 녹이 슬 때도 푸른 녹, 검은 녹 등 다양한 색감이 있다. 그것은 조각보다는 회화적 성격이 강한 윤명순의 부조 작업에 어울리는 재료이다. 

 

윤명순은 흙 자체가 가지는 색을 곧잘 활용하곤 했다. 가령 초창기 작업에 속하는 작품 [마주보는 사람](1988)에서, 마주 보는 두 흉상의 색감을 결정하는 것은 피부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흙의 색이다. 조각에서 색은 본질적이지 않다. 색은 형태에 비해 불투명하다. 색은 막연한 감성을 지시할 뿐, 형태처럼 명확히 말하지 않는 것이다. 구조의 불투명함은 미로에서 전형적이다.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오래된 마을의 골목길은 미로 같은 구조를 가진다. 지름길은 거주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건물 자체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가령 윤명순의 작업실 위층에 자리한 주거공간에 들어가는 대문이 이웃의 대문 두 개와 ‘ㄷ’자로 마주하는 이상한 구조들이 이 동네에는 많이 있다. 지배와 관리의 용이성 때문에 그리드 구조로의 환원이 대세인 가운데, 한 집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호한 집합적 구조들은 다양한 것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연과 비슷하다. 

 




하루-욕망하는 풍경, 2007년

 

물론 그 풍경도 초창기에는 산이나 언덕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조성된 구조물이었겠지만, 오랜 세월의 흐름은 생경한 인공의 풍경 역시 자연에 가까운 모습으로 자리를 잡게 한다. 윤명순의 작품에서 집들 안팎의 사이의 나무들은 집과 질적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자연이 구조를 가지듯이, 구조 역시 자연처럼 증식한다. 총괄적인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옆에서 옆으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증식한다. 제목에 포함되어있는 ‘욕망’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불확실한 방향성을 가진다. 불쑥 나타났다 불쑥 사라지고, 기능과 목적이 불분명한 욕망은 단지 멈추지 않고 흐를 것만을 욕망한다. 욕망이든 뭐든 고여 있는 것은 썩는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트임과 열림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임의성들이 축적된 풍경은 총체적 계획에 의거한 구조물이 가질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성북동같은 오래된 마을에는 이처럼 자리 잡은 풍경들이 많다. 

 

거기에는 상품과도 다른 삶의 발명품들이 가득하다. 한날한시에 한꺼번에 생산된 상품조차도 시간의 축을 따라 서서히 변모하는 사물의 세계에 속하게 된다. 작품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하루’라는 키워드는 자신의 주변과 일상성에 주목함을 알려준다. 가파른 계단 사이로 주거공간과 작업실이 나뉘어 있는 윤명순에게 예술은 일상이다. 예술이 일상처럼 평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만큼 실재적이다. 일상을 재생산하는 일 만큼이나 작업은 생활이 되어 있다. 작업의 생활화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것이 말처럼 잘 안되기에, 작업을 그만두거나 개점 폐업을 하고 있거나 언젠가는 열심히 해야지 하는 부질없는 결심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세월을 보내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 자리가 어디든, 작업하는 자리가 더 익숙하고 아늑하고 편안한 이들이 작업을 지속하게 돼 있다. 자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허상의 풍경, 2003년

 

윤명순의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점부터 시작해서 차츰 자리를 넓혀가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선의 움직임은 마을의 모습 같은 사물의 외양 뿐 아니라, 구조와 운동을 집약적으로 구현한다. 마을은 그러한 선의 움직임처럼 형성되었을 것이며, 마을을 거니는 자 또한 그러한 동 선을 가질 것 같다. 윤명순의 작품은 자연처럼 자라나려는 야망을 가진다. 가변적 설치로 완성될 작품은 벽의 여백을 길이나 통로 삼아 무한히 확장 가능하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형태는 마치 동양화 같은 구도로 벽에 앉혀진다. 그것은 하나의 시점만 강요하지 않는다. 공간을 잠식하는 것은 시간성이다. 이동한 만큼의 공간이 또한 시간이다. 용접으로 덧대어 이어질 수 있는 금속선은 시간의 이미지이다. [시간은 지속된다](2011-2012), [길들여지지 않은 시간](2010-2011)같은 작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윤명순에게는 시간이라는 키워드가 흙과 금속이 조합된 추상작품에서도 강조되곤 한다. 

 

그러나 명확한 시점에서 종점을 향하는 ‘쏜살같은’ 전진이 아니다. 미로화 된 공간에서는 방향과 속도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혼돈스러운 공간에 상응하는 혼돈스런 시간의 이미지이다. 혼돈의 시공간이 유쾌하게 변모될 수 있는 것은 예술이나 놀이의 특징이다. 방황은 낭비가 아니라 향유할만한 가치가 된다. 윤명순의 작품에서 선들의 이어짐으로 가시화되는 시간의 흐름은 어느 구간에서는 빠르게 흐르고, 어느 구간에서는 역으로 흐르며, 또 다른 구간에서는 머물러 있는 등 대중이 없다. 가령 작가는 용접 외에 철망 같은 오브제를 작품에 부착하기도 하는데, 깔대기 구조가 ‘시간을 소용돌이치게’(미셀 세르) 하듯 여기에서 시간은 체처럼 ‘걸러지는’(미셀 세르) 것이다. 이렇듯 균질하지 않는 시간 감각은 노동과는 다른 작업의 특징이다. 특히 작업에는 가속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예술 작품에는 서서히 흐르다가 질적 전화가 일어난 시간을 각인한다. 

 




 돌아오는 방, 2003년

 

그러한 질적 시간이 없다면 작업은 노동에 불과하다. 젊었을 때 큰 규모의 작업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회화에 가까운 조각을 하는 윤명순은 ‘노동의 즐거움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작업은 한시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경쟁적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는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끝없는 과정이다. 1955년 태생으로, 수 십 년 작업을 해온 윤명순은 아직도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의 설렘과 작업과 하나가 된 순간의 희열에 대해 말한다. 그것이 어려움 속에서도 작업을 지속해왔던 이유이다. 작업 한가운데는 주체가 있지만, 윤명순의 작품에서 주체는 단독자가 아니라 주체가 접속하는 타자들에 흩어져 있다. 인간은 인체 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 현재 몰두하고 있는 작업인 마을 풍경은 단순히 주변에 눈에 띄었던 하나의 소재가 아니라, 삶과 예술의 자리, 그리고 그 안팎에 존재하는 주체에 대한 초상으로 다가온다. 

 

마을 풍경에는 대부분 사람이 없지만, 집 하나하나는 작가를 포함한 인간의 초상이며 신경망이나 혈관계처럼 뻗어있는 내면공간이며, 동일자를 둘러싼 타자들과의 관계망이다. 모세관처럼 뻗어있는 연결망을 통해 하나와 다른 하나는 연결된다. 그것들은 마치 다중(多衆)처럼 하나이자 다수이다. 이러한 방식은 추상적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입구를 옆으로 놓고 쌓아 놓은  작품 [만나지는 풍경](2003)에서 각 공간은 관객과 마주하는 얼굴처럼 보이고, 비워놓은 마음처럼 보이고, 때로 방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따로 또 같이 연결망을 이루고 있다. 윤명순의 선구조물들은 재현을 넘어서 영감과 해법과 소통까지고 가능하게 해줄 섬세한 망에 대한 비유다. 구체적인 삶의 풍경을 따라가는 선들은 그 살아있음의 표지가 추상적인 작품에 비해 분명하다. 금속이지만 따뜻한 느낌을 주는 동 선들을 용접하여 공간에 드로잉 하듯이 구축한 마을 풍경들은 추상적 공간이 아닌, 구체적 자리들이다.

 




만나지는 풍경, 2003년.

 

작가는 무한정 선을 증식시켜 자리를 만든다. 누구네 집인지 알아볼 만큼 사실에 바탕 한 작업이지만, 내부도 보이는 상상적 풍경이다. 내부이자 외부인 집들은 주체의 상징적 우주이다. 슬레이트 지붕과 축대, 그리고 계단같이 집의 외부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한편, 어떤 집에서는 웅크리고 앉아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어떤 집에서는 실내를 따뜻하게 밝히고 있을 알전구가 보인다. 윤명순은 선이라는 투명한 요소를 불투명한 풍경을 그리는데, 색이라는 회화적 요소를 입체작품에 활용한다. 흙은 최근 작업의 주재료가 되고 있는 금속과 함께 해왔던 재료로, 투명함/불투명함, 조각/회화의 경계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윤명순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선으로 된 마을 풍경을 시작할 무렵 발표한 작품 [돌아오는 방](2003)을 보면, 흙으로 된 덩어리와 금속선으로 된 구조가 함께 한다. 금속과 흙은 건축이나 도시를 떠올리는 기하학적 구조 뿐 아니라, 식물을 떠올리는 원통형 구조에서도 함께 한다. 

 

작품 [흔들리는 풍경](2009) 시리즈는 금속으로 대칭이 되는 틀을 만들고 틀 하나하나에 깃털 같은 모양새의 흙덩어리가 붙어있는 테라코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금속은 기하학으로 환원될 수 있는 추상적 틀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추상성을 완화하는 것은 제각각의 모양새로 붙어있는 흙덩어리다. 흙덩어리는 시간성의 흐름과 무관해 보이는 철제 구조에 시간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뼈와 살, 견고함과 취약함, 규칙성과 불규칙성, 인공과 자연 같은 대조 항을 연상시키며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풍경’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금속구조물 또한 시간적 추이를 따른다, 그것은 최근의 마을풍경 뿐 그 작업이 시작될 무렵 제작 된 작품 [돌아오는 방](2003)에서도 발견된다. 이 작품에서 바닥에 놓인 테라코타가 각기 다른 단면을 가진 덩어리로 나뉘어 있는 것과 달리, 벽에 걸린 금속구조물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원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풍경, 2009년

 

작품 [지나가는 풍경](2009)같은 추상적 작품은 금속선과 흙으로 된 면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금속선으로 대변될 수 있는 추상과 흙 판으로 대변될 수 있는 구체는 서로를 의지하고 서 있다. [하루, 욕망하는 풍경] 시리즈로 대변되는 최근 작업은 금속 하나만으로도 이러한 경계의 게임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금속선은 이전작품처럼 추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이나 대지라는 실재계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의 [변신-대지로부터] 시리즈로 거슬러 올라가면, 웅크리고 있는 자화상부터 건축적 구조에 이르기까지 흙이 작업의 전면에 놓임을 알 수 있다. 흙으로 가능한 규모--테라코타는 가마에서 구워야 하기에 크기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를 넘으면 FRP 같은 다른 재료를 사용하고 나서라도 마감은 흙으로 하는 것이다. 변신이나 대지라는 키워드는 자연과 자연적 과정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껍데기처럼 비어있는 구조 한 켠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하나의 점으로부터 발생하는 것들은 자연적 과정에 대한 비유가 된다. ‘한국현대미술 신세대 흐름’전에 전시된 작품 [변신, 대지로부터](1994)를 보면, 껍데기도 성장하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껍데기는 보이지 않는 중심을 에워싸고 점차 확장되고 있는 듯하다. 미지의 가능성으로 비어 있는 빈 공간은 구조라기보다는 생성의 이미지이다. 마치 그것은 탈피한 개체가 남겨놓은 껍데기 같지만, 작가는 이 나머지에 집중한다. 단단한 덩어리로서의 실체는 비워지고 이 빈자리로부터 가능한 잠재태를 더욱 중시하는 것이다. 자연 또한 실체이기 보다는 과정이다. 본질이기 보다는 현상이다. 하나이기 보다는 다수이다. 작가에게 흙이라는 재료는 자연에 대한 관심을 견인해 왔다. 윤명순의 초창기 작업인 1980년대의 작품들은 조각적 질서의 기본을 이루는 인체 상 역시 흙이 많이 사용되었다. 

 




변신, 대지로부터,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있는 초창기 작품 [작품85](1985)은 흙으로 만든 군상으로, 구체적인 생김새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흙으로 만들어진 흉상들은 단독자로서의 주체가 아닌 익명적 다수의 면모를 가진다. [작품86-2](1986)역시 대지 위에 기념비적으로 서있는 인체가 아니라, 웅크리고 있는 무명의 생명체에 불과한 모습이다. 그것은 ‘무명의 영토’에 있는 ‘벌거벗은 생명’(조르조 아감벤)의 취약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윤명순은 마치 조물주가 흙을 빗어 최초의 인간을 만들었듯이 흙으로 인간상을 만든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신학적 관념은 빠진다. 조각에서 흙은 최종적인 재료가 아니다. 과정적 속성을 가지는 흙은 인간에 대한 추상적 관념도 변화시켰을 것이다. 80년대 파리에서의 유학 당시, 그리고 80년대 한국의 엄혹한 상황에서 작가는 인간이 이상과 이성의 상징이 아니라, 흘러내리는 물질 덩어리일 수도 있음을 발견하였고, 이후에 인간보다는 자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간중심주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에서 상황으로’(로잘린 크라우스) 변모하는 현대조각에서, 인간의 위상 역시 달라진다. 조각에 남아있는 유기적 관계를 완전히 해체하는 미니멀리즘에서 인간은 해체되기도 했지만, 인간이 완전히 사라졌다기 보다는 중심이 달라진다. 가령 인체의 구조가 아니라, 유전자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는 현대에 구조가 사라지기보다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철학에서 구조주의는 주체, 인간중심주의를 특히 문제 삼았다. 윤명순이 인간에서 자연으로 관심을 돌렸을 때 작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연에 내재된 구조적 질서에 대한 감탄이다. 작가에게 자연은 구조이다. 일순간 고정시켜 놓은 구조가 아니라, 시간성을 통해 펼쳐지고 접혀지는 살아있는 구조를 중시한다. 그래서 최근의 마을풍경은 구조이며 흐름인, 물질이면서 심상인, 외부이면서 내부인 형상을 갖추게 된다. 

 




금속과 흙은 상호보완적으로 자연의 구조와 실재감을 강조했다. 조각에서 흙은 주로 중간에 사용되었다가 없애지만, 윤명순은 흙 자체의 느낌을 좋아한다. 금속과 같이 사용되었을 때 흙의 느낌은 더 강조된다. 하나가 공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시간이다. 하나가 영원이라면 다른 하나는 변모이다. 작가는 ‘흙을 만지면서 형태와 내가 일치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흙은 자연에서 온 재료이고 자연을 표현하는 자신의 작품도 ‘흙의 느낌’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흙의 색은 거칠 질감과 더불어 회화적 느낌을 살려 주었다. 단단한 재료를 깍고 새기는 것보다 붙이는 것에 대한 애호는 현재의 용접 작업에도 지속된다. 금속과 흙은 상호보완적으로 자연의 구조와 실재감을 강조했다. 크고 육중한 덩어리에 갇혀있는 조각의 잠재성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비워내기는 멈춰있는 덩어리를 잠재적 흐름에 열어놓는다. 열림은 무엇보다 연결에 대한 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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