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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필 / 세상의 자리를 풍자하는 화가의 자리

이선영

세상의 자리를 풍자하는 화가의 자리

 

이선영(미술평론가)

 

조광필의 작품에는 화려한 부귀영화의 이미지가 넘쳐흐른다. 짐짓 누구나 추구하지만 속물적으로 여겨 질까봐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는 욕망을 그림으로 적나라하게 풀어놓는다. 그러한 과도함은 회화의 물질적 표면에 대한 탐닉만큼이나 세상에 대한 풍자를 낳는다. 화려한 물건들을 너무도 자세히 재현한 그림들은 물질주의에 대한 풍자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진리가 단순하다지만 결코 단순할 수 없는 매체인 회화의 메시지치곤 단순하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피상적인 의도와 다르게 뻗쳐나가는 또 다른 의미의 그물망으로 복잡하다. 형식적으로 그것은 이미지 위에 덧쓰여진 문자들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일단 관객의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화려한 이미지다. 그의 작품은 세상에 확실하게 속해있는 것들을 재현하기 위해 탄생한 유화의 존재 의미를 십분 살린다. 맨몸으로 태어난 인간도 어딘가에 확실히 속해있고 싶어 한다. 그러한 소속감은 사회적 자리로 나타난다. 

 

 

 Ambilaterality, cm x cm, Oil on canvas, 2013. 

 


Dream of Cat, 72.7cm x 50cm, Oil on canvas, 2013.

 

붉은 색 벨벳이나 비단에 싸여있고 그 가장자리를 금으로 둘러친 보좌와 그 위에 놓인 금관은 그것을 향한 응시, 즉 자리와 권위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암시한다. 정밀한 묘사력은 그러한 상징적 물건에 물씬 풍기는 물신적 이미지를 고양하는 중요한 장치다. 작가가 그리는 과정에 몰입하는 만큼 관객도 그러한 몰입이 가능하다. 맘껏 환영을 펼치라고 마련된 평면 위에 투여된 에너지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이러한 물신적 이미지는 미술사에서 정밀한 초상화와 정물화 등이 탄생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 그림의 내용물과 내용물을 담아낸 그림 그자체가 동시에 값비싼 상품의 반열에 오르게 된 때는 근대 상업주의와 그 주체세력인 시민계급의 발흥이 겹쳐지는 시기다. 왕좌나 왕관, 기타 고색창연한 보물의 이미지는 고풍스럽지만, 그의 작품 속의 사물들은 과거의 기표를 차용한 티가 역력하다. 대부분 검게 칠해진 어두운 배경은 그것들이 일상적 장면은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세트로 맞춰 꾸며진 럭셔리한 실내 장식의 일부이다. 많은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보좌와 왕관은 자리와 권위의 대표적 상징으로 호출된 것이다. 광고나 옥션에 나온 물건이나 포토존같이 연출된 사물들은 검게 처리된 중성적 배경 속에서 정면성을 고수한다. 보좌나 왕관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서만 현실이 되는 환영이다. 인간 사회에서 생명을 빼고 그자체가 보물인 것은 없다. 그러한 물신적 이미지를 소격시키는 것은 그 안팎에 배치된 고양이들과 그림의 표면을 얇게 덧씌우고 있는 정체물명의 문자들이다. 문자는 유화로 그려진 광택 나는 사물의 이미지를 흐릿하게 하며, 그리기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또 다른 차원의 작업이다. 이러한 문자들은 여타의 극사실주의 그림과 차별 점을 주는 조광필의 특징이며, 고양이는 그가 매우 애착을 가지는 대상이다. 고양이의 가능한 표정과 포즈가 여러 그림들에 많이 나열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Story Paradox, 182cm x 291cm, Oil on canvas, 2014.

 


Dream of Cat, 91cm x 91cm, Oil on canvas, 2013.

 

애정을 가진 대상에 대한 표현은 일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일 수밖에 없다. 고양이들 역시 사진을 찍어 그린 것이겠으나, 사진 전후에 대한 현실적 인식이 단순한 인상을 벗어나게 한다. 고양이들의 생동감 있는 자태는 권위와 자리의 상징이 상투적인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한 고양이들에게 보좌나 왕관은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자리와 권위를 향한 인간들 간의 무한 경쟁이 부질없는 놀이터 같은 모습으로 소격된다. 희소가치를 향한 핏빛 전쟁터 또한 놀이터에 지나지 않을까. 간혹 의자 뒤에 놓인 시계나 던져진 주사위, 카드 패 같은 것들은 덧없는 시간과 우연이라는 맥락 속에 놓여 진 영광의 자리를 말한다. 나비의 환영들을 응시하거나 그 꿈을 꾸는 고양이들은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이 호접지몽(胡蝶之夢)에 불과함을 알려준다. 고양이들은 물신의 체계에 의해 잘 꾸며졌을 실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때로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의 대역을 맡아서 연기하기도 한다. 

 

좀 더 최근 작업에는 고색창연한 화려함에 현대적 화려함이 가세한다. 붉은 드레스와 하이힐을 걸친 늘씬한 여성들이 보좌와 왕관처럼 내용물은 부재한 채 화려한 기표로 전시되어 있다. 화면을 베일처럼 뒤덮는 문자는 분절화 된 현대의 리듬감각에 맞춰져 있고, 그것들에 대한 고양이들의 시선도 여전하다. 그녀들은 얼굴 부분이 완전히 삭제된 채 그림자같은 실루엣만으로 몸에 걸친 보물들을 전시하는 살아있는 좌대이다. 유행에 민감한 모던 걸 주변의 고양이들은 그녀들을 가상적 풍경으로 만든다. 조광필의 작품 기조는 상징과 알레고리가 있는 극사실주의 회화지만, 그림 표면을 한 겹 덧씌우고 있는 문자들은 이질적이다. 연필이나 오일 색연필 같은 필기구로 깨알같이 씌여진 것들은 국어도 외국어도 아닌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다. 작가 말로는 ‘심상의 언어’들이다. 그것들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쓰는 글자지만, 궁극적으로는 잡다한 생각을 비워내는 행위의 흔적들이다. 

 

 

Story Paradox, 91x65, Oil on canvas, 2015.

 


Story Paradox, 72.7cm x 50cm, Oil on canvas, 2015.


이미지와 상호반응하면서 물질도 정신도 아닌 또 다른 공간이 탄생한다. 유화가 물질의 표면을 정교하게 베껴낸다면, 덧씌워진 글자들은 아래의 물질/이미지를 말소 하에 놓는다. 그리기만큼이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쓰기는 도상으로 드러난 상징주의를 방법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각인하는 효과를 준다. 그것은 발흥하는 상업자본주의에서 탄생한 정물화의 주제이기도 했던 물질/욕망에 대한 허무감이다. 공력이 많이 들어간 화려함일수록 허무함도 클 것이다. 조광필의 작품에서 화려함은 세세한 형태를 채우는 색에서 두드러진다. 붉은색, 황금색 등이 검은 바탕에서 빛을 발한다. 금관이 놓인 보좌와 여성의 의상 등을 장식하는 붉은 색은 피와 권력. 유혹 같은 상징과 관련된다. 붉은 색은 주어진 대상을 확실하게 눈에 띄게 한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빨강을 색중의 색으로 친다. 저자는 태초에 빨강이 있었다고까지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빨강은 사람이 이름 붙인 첫 번째 색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색 이름이다. 색과 빨강이 같은 단어인 언어도 드물지 않다. 스페인어로 ‘colorado’는 색인 동시에 빨강을 뜻한다. [색의 유혹]에 의하면, 빨강이 ‘색’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색이 된 것은 사람들이 빨강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 속에 빨강과 색이 같은 의미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조광필의 작품에서 빨강은 권력을 향한 열정, 그 열정이 구현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불과 피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영광의 자리는 많지 않고 추구 자는 많은 ‘레드’ 오션의 정점에 있다. 왕관이 놓인 그 옥좌를 물들이는 것은 남성적 색이다. 에바 헬러는 괴테가 빨강을 ‘색의 여왕’이 아닌 ‘색의 왕’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빨강은 힘과 적극성, 공격성의 색으로 남성적이라고 본다. 저자에 의하면 빨강이 여성의 색으로 된 것은 베이비 컬러인 하늘색과 분홍색 때문이다. 

 

 

Story Paradox, 259cm x 162cm, Oil on canvas, 2014.

 


Dream of Cat, 72.7cm x 50cm, Oil on canvas, 2014.

 

여자아이가 입는 분홍색은 빨강에서 나온 색이기에 빨강을 여성적인 색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색과 분홍색의 베이비 컬러는 1930년대에나 처음 생긴 유행이다. 아담은 ‘빨간 흙으로 빚은 사람’을 뜻했고, 빨강은 그리스도의 색이며 파랑은 마리아의 색이었다. 빨강/파랑에 대한 성적 대조는 불이 남성적이고 물이 여성적 이미지라는 인류의 상징적 상상력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빨강의 근본적인 경험인 피는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남성의 빨강은 고기의 광채가 도는 빨간 피이고, 여성의 빨강은 월경을 상징하는 어두운 빨강이다. 선명한 빨강은 심장을 상징하고 어두운 빨강은 배를 상징한다. 조광필의 작품에서 붉은 보좌는 권력의 심장을, 붉은 드레스는 육체를 상징하는 등, 색에 내재된 상징성에 충실하다. 상징은 언어와 같은 관념 뿐 아니라, 몸과 물질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나온다. 

 

저 멀리에 있는 정신의 색인 파랑과 대조적인 빨강은 물질적이다. 그것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인다. 에바 헬러는 마돈나가 자신의 히트곡 ‘물질적인 여자(material girl)’를 부를 때 빨간 드레스를 입었음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색중의 색’인 붉은 색을 통해 권력을 향한 경쟁과 전쟁, 희귀함과 금지를 표현한다. 조광필의 또 다른 주조색은 금색이다. 그것은 붉은색과 어울리는 색이며 붉은색과 함께 나타나지만, 금장미, 금닭같은 도상을 통해 단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가에 의하면 금장미는 실제로 백화점에서 파는 상품이다. 돈처럼 교환가치를 가지는 황금은 복이나 행운과 관련된 전통적 상징물인 돼지나 두꺼비를 넘어서 꽃같은 심미적 대상으로도 상품화되고 있는 것이다. 꽃을 그리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조광필은 살아있는 장미에 금가루를 입히고 사진을 찍어 그림으로 남겼다. 실제의 금장미가 비쌀지, 금장미를 그린 그림이 비쌀지에 대해서는 의문에 붙여있다. 

 

 


Story Paradox,117x72.7,Oil on canvas, 2014.

 


 Story Paradox, 112cm x 162cm, Oil on canvas, 2015.

 


 Story Paradox, 16.8cm x 50cm, Oil on canvas, 2014.

 

미술계에서 현금이 확보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에 참여하기보다는, 그러한 자리를 풍자하는 고독한 화가의 자리를 택한 것처럼 말이다. 실제보다 실제를 재현한 그림에 더 놀라워하는 우리의 관습 때문인지 조광필의 금장미는 실제 금장미보다 더 신기해 보인다. 금장미 주변의 고양이들이 관객의 표정을 대신한다. 이런 저런 사물과 인물 사이에 배치된 고양이들은 그림이라는 연출무대에서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이다. 야옹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관객의 시선을 현혹시키는 금빛 화면은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이 작품이 어떠한 물신의 체계에 속하느냐에 따라 주문의 내용 또한 정 반대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있을 중국과 미국에서의 전시 제목을 ‘Paradox Story’라 정한 이유라 생각된다. 이전 시대와 같이 신화적, 종교적 원형에 호소하는 것을 넘어서, 작품이자 상품인 현대미술은 무엇인가를 풍자하면서 그자체도 풍자의 대상이 되는 운명을 가진다. 

 

황금 알을 낳는 황금 닭의 이미지가 성스럽게 고양된 물질의 광휘를 드높인다. 금은 희소한 것이기에 밀도 높은 장식이나 상징에 사용된다. 금은보화의 이미지는 희소성과 세밀함과 관련되어 있다. 조광필의 작품에서 황금색은 붉은 색과 더불어 호화로운 물질성과 그 과도함에서 야기되는 천박성을 표현한다. 그의 황금꽃과 황금닭에는 연금술적인 이미지가 있다. [색채의 마술]에 의하면, 일상적인 물질이 금으로 변화하는 비밀스런 과정을 원했던 연금술사들은 ‘같은 것은 같은 것으로’의 원칙에 따라 주로 금색의 재료를 가지고 실험했다. 그러나 일어난 것은 원소의 변형이 아니라, 모조이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라는 오래된 경구처럼, 그것들은 우리를 현혹시키는 가짜다. 연금술만큼이나 그림 또한 매혹적인 허구로 간주된다. 조광필의 작품에서 물질주의에 대한 풍자라는 메시지만을 읽는 것은 일면적이다. 

 

Story Paradox, 259cm x 162cm, Oil on canvas, 2014.

 


Story Paradox, 91cm x 65.1cm, Oil on canvas, 2014.


화려한 사치품에 많이 사용되는 전형적인 색으로 호출된 붉은 색과 황금색이 주조색인 작품에는 소재의 선택부터 정밀한 묘사, 또 거기에 더해진 필사과정까지, 물질주의에 내재된 많은 과정이 중첩되는 자기언급이 있다. 이러한 자기언급성은 재현주의를 넘어서는 현대적 측면이다. 참조대상과 상징성이 비교적 확실한 이미지와 달리, 그 위를 얇게 뒤덮는 문자들은 무의식의 흐름을 보여준다. 작가는 문자들을 드러내기 위해 어두운 배경을 택했다. 문자들 아래의 이미지가 광고처럼 선명하다면, 문자들은 꿈처럼 모호하다. 그것을 소리로 치환하면 알 수 없는 언어로 읊어대는 경전이나 옹아리같을 것이다. 명확한 물질적 형태와 색채를 통해 일련의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에 끼어든 이 특이한 변수를 그의 작업실이 있는 파주 출판단지라는 맥락—작가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한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실제로 책과 그림은 매우 친해서 파주에는 많은 전시공간과 출판사, 레지던시, 작업실이 산재해 있다. 

 

대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바탕으로 하는 조광필의 작품은 문자의 세계와 어울린다. 비록 그가 그린 이미지와 문자가 기호처럼 일대일로 조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가 겹쳐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듣고 기억할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서 폭주하는 인류의 정보를 정확하게 저장할 수 있게 한 것은 문자였다. 마샬 맥루한이나 월터 옹같은 미디어 이론가들은 문자성과 (과학을 포함한) 사실주의를 연결시킨다. 문자성이 듣고 말하고 기억하기 좋은 구술성을 대신하고 현실을 세세하게 반영하고 재현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2차원 평면 속에서 3차원을 담는 기술과 문자성은 같은 패러다임에 속한다. 재현적 회화 위에 써진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은 사실주의와 문자성의 관계를 알려준다. 허망한 권력이나 물질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정교한 사실주의는 그 위를 덮은 난수표같은 문자들처럼 허구임을 말한다. 사물의 물질적 사용가치를 기호화하는 돈이 그러하듯, 허구는 허구에 그치지 않는다. 

 

 

Story Paradox,162x112,Oil on canvas, 2014.


 

조광필이 구사하는 사실주의 기법은 계몽주의 이래의 표상적 인식론과 관련된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재현이라는 말의 어원 ‘repraesentatio’이라는 말은 ‘존재하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repraesentatio’는 또한 현금으로 지불하는 것을 뜻한다. 현금이 교환될 상품에 직접적으로 등가인 것처럼, 상상력을 통해 대등한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재현은 대체나 유사에서 대등한 가치, 곧 등가로 넘어간다. 기호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인쇄술, 화폐, 리얼리즘은 같은 계열에 속해있다, 조광필의 작품에는 현실과 대등한 무엇이 현실과 헷갈린다는 오래된 주제가 있다. 하루에 10시간 가까이 그림만 그리는 전업 작가에게 그림은 세계이고 세계는 그림일 것이다. 중국과 미국에서 큰 전시를 앞둔 그는 자기만의 세계가 아니라 보편적인 세계 속에 자신의 그림이 속하기를 희망하면서 작업할 것이다. 재현에 몰두하는 화가의 길에 더해진 문자성은 언어라는 허구를 다루는 문인들의 운명 또한 생각하게 한다.

 

오랫동안 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픽션들]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작품에 관한 안내서, 선집, 요약본, 직역본, 공인된 사본, 해적판들’에 둘러 싸여서, ‘중언부언하기 마련인 책이라는 불완전한 대상’을 초월하기 위해 ‘가상의 책 위에 주석을 쓰는 편’을 택했다. [픽션들] 속의 주인공은 무한하게 복잡한 작업, 즉 무엇보다도 쓸모없는 작업에 전념했다. 그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책을 다른 언어로 다시 쓰기 위해 모든 주의를 기울이면서 수없이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냈던 것이다. 조광필의 작품에 내재된 이중, 다중의 환영적 속성은 환영에 대한 또 다른 환영들의 증식을 통해 무엇이 현실인지를 묻는다. 세상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넘어 욕망을 위한 욕망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현실과 허구는 더더욱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조광필의 작품은 그러한 현실/허구의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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