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타자의 살로 살찌워지는 문명
이선영(미술평론가)
알록달록 화려하고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은 안효찬의 작업은 상품이나 상품의 형식을 차용한다. 그가 선택하는 상품(적 형식)은 대중에게 소(유)통되는 것을 겨냥한다. 그것은 현대미술의 소통 방식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된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20대의 젊은 작가인 그는 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점 몇 개 찍거나 돌멩이 몇 개 가져다 놓고, 때로는 알아보기 힘든 문장 같은 것을 몇 자 휘갈겨놓고 그 배후에 관객이 깨달아야 할 엄청난 사상(그리고 그것이 물신적 체계 속에서 인정되었다면 엄청난 가격)이 있다는 점은 부조리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예술은 그렇게도 무의미, 부조리, 역설 등을 주요 테마로 삼는지도 모른다. 대중매체에서 예술작품은 위작이나 천문학적인 가격 등 가십거리로 등장하며, 이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그들만의 리그’를 탓하는 경우가 많다. 참을 수 없는 현대미술의 무거움과 난해함에 거리를 두고 싶은 작가는 ‘가볍고도 예쁜, 아름다움 속에 날카로운 시선이 녹아있는 작품으로 세상에 다가갈 것’이라고 말한다.
Remembrance_Nothing is Impossible, 450 x 700 x 1500, Glasses, Object, 2014
물론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기에 작가의 고민은 크다. 대중문화 또는 상품을 소재로 사용한다고 해서 대중적 작품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안효찬이 곧잘 선택하곤 하는 대중적 도상들은 관객들과 최소한의 접점이 되어준다. 접점이 없는 작품은 꼬리에 무는 탐색과 대화를 낳는 이후의 단계들을 불가능하게 한다. 신화나 종교, 또는 역사의 일부로서 사회의 상징적 우주 속에 자리하던 예술이 분업화된 사회에서 고립된 천재예술가의 창조의 산물로 간주된 이후, 소통은 가장 큰 문제꺼리였다. 내용이 아니라, 언어(형식)가 문제시 된 현대예술 또한 여전히 그렇다. 소통에 대한 서사는 근대예술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였을 것이다. 물론 예술 아닌 다른 분야도 그 문제는 중요하다. 흥행에 성공하는 상품(또는 작품)은 대중과 통했음을 알려주며, 시스템의 참여자들은 모두 그러한 대박의 신화를 노린다. 골방에서의 고립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순수 예술의 조건인 자율성마저도 불가능하게 할 고립을 피하기 위해 안효찬이 선택한 소재는 장난감이나 돼지 같은 인공적, 자연적 산물이다. 근 2-3년 사이의 그의 작품은 다양한 유리병 안에 오브제들을 모아놓은 작품군과 돼지가 등장하는 설치작품으로 나뉜다. [Remembrance_Fruits], [Remembranc,walt Disney Desy], [Remembranc, hero series _ hulk] 등으로 이름 붙여진 작품에는 그가 좋아했던 과일, 장난감, 캐릭터, 운동용구 등의 플라스틱 모형 또는 실물이 액체 안에 담겨있다. 다양한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농사의 결과물을 포함하여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생산된 상품이며, 작가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들이다. 오브제들을 담은 술병을 비롯한 음료수 병들은 작가가 어른이 된 후에 새로운 장난감이 된 사물이다. 내용도 형식도 같은 선택의 원칙을 따른다. 특정 형식에 담겨지는 내용들도 나노 블록 등, 작가의 관심을 끌만한 새로운 장난감이 계속 나오는 만큼 항목이 늘어나고 있으며, 없는 것은 구입하기도 한다.
Remembranc,walt Disney Desy, 6cm x 6cm x 21cm Glasses, Object 2015
Remembranc, Nothing is impossible, Dragonball, 8cm x 8cm x 24cm Glasses, Object 2015
그것들은 일종의 수집품으로, 유리병 안에 넣은 것은 수집된 것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항목별로 나뉘어 있는 안효찬의 경우, 시리즈 형식을 지닌 총체적 서술이다. 밀봉한 것을 또 한번 밀봉하는 방식은 포장이 중요한 상품의 형식이다. 그리고 겹겹의 그물망을 통해 궁극의 의미와 해석을 지연시키는 예술의 방식이기도 하다. 안효찬은 수집된 것들을 마치 사진이나 타임캡슐처럼 시간을 동결시킨다. 병들은 임의적으로 보일만큼의 잡다한 사물들에 공통의 문법을 제공한다. 부패와 부식을 막기 위한 밀봉처리, 그리고 자신만의 규칙으로 배열되어 있는 나름의 질서 감각은 전형적인 수집의 방식이다. 그래서 수집은 ‘혼돈의 바다 위에 떠있는 질서’(벤야민)으로 정의되곤 한다. 수집벽은 세상의 무질서와 임의성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질서를 관철시킨다. 수집과 분류는 골동품적인 취향을 넘어서 과학에도 관철된다. 필립 블롬은 [수집]에서 노아의 방주 이래 수집의 역사를 다루면서, 근대에 와서 합리주의적 분류법과 자연에 대한 총체적 서술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고 말한다.
필립 블롬은 근대 식물 분류학을 창시한 식물학자 린네의 예를 들면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천지만물을 포괄할 수 있는 총체적 체계 안에서 합당된 자리에 각각의 종을 배치함으로서 과학정신은 자연의 질서를 다스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전시대의 박물학이나 고고학에서 보이는 자의성에 비해 좀 더 체계적이고 합리화된 과학의 방식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불투명성을 드러낸다. 물신숭배처럼 시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고정화하려는 것 역시 시간 화 되는 것이다. 가령 안효찬의 작품에서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容器)는 중성적이지 않다. 이 용기들은 내용물보다 좀 더 안정적이고 일관적이며 투명하지만, 그 역시 그 안의 사물 같은 상대성을 가진다. 질서는 시스템에 의해 가능하다. 얼마 전 중국의 레지던시에서의 작업을 비롯하여, 요즘 몰두하고 있는 설치작품에서 그는 특정 시스템이 낳는 질서를 전면화한다. 투명 용기에 담긴 수집품들에 체계의 문제는 암시적이었던 반면, 요즘의 작품은 명시적이다.
Long for freedom, 20cm x 20cm x 50cm 혼합재료 2014
發展, 48cm x 120cm x 33cm 혼합재료 2014
가창스튜디오에서의 전시작품
수집이 사물에 대한 명명과 배열을 통해 지배의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면, 요즘 작품에는 권력의 가시화에 방점이 찍혀있다. ‘Remembrance’ 시리즈에서 병에 저장된 기억들이 오래된 사진처럼 하나의 장면으로 응결되어 있다면, 돼지를 중심으로 그 위에 여러 세트가 세워져 있는 요즘 작품들은 이야기가 있다. 돼지는 시스템의 대표적인 산물이자 작품의 이야기를 추동하는 몸, 즉 예술작품이라는 ‘상징의 장을 가득 채우는 몸’(바르트)을 대변한다. 안효찬의 작품에서 돼지들은 하나의 상징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풍자와 연민 등 다양한 의미와 감정이 있다. 대중친화적인 그의 작품은 작가를 발신인으로 하는 독백적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그에게 작품은 대중과의 대화이다. 각기 고립된 채 코드를 유통시키는 사이비 대화가 아니라, 몸을 사이에 두고 하는 대화이다. 대화는 상호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현대문명에서 점차 늘어가는 힘의 불균형은 이러한 상호성을 점점 더 불가능하게 한다.
만약 그의 작품에서 돼지를 음식으로 본다면, 이러한 상호성은 인류학적인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 인류학에서 음식이나 몸은 힘과 소통의 상호성을 가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이다. 돼지는 음식이며 그 음식의 결과물을 상징한다. 안효찬의 작품에서 구조물들 아래에 있지만, 단번에 그것들을 무너지게 할 정도의 강한 물질적 존재감을 가지는 돼지는 대화적 상상력에 있어 몸의 무의식적 힘을 표현한다. 그의 작품에서 몸과 무의식은 이성과 의식의 산물인 건축적 구조의 심층에 자리한다. 가창 스튜디오에서 전시될 최근 작품들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의 장면으로 응결시키는 물신적 시선 대신에, 몸을 매개로한 상호적 친밀감을 회복시킨다. 그의 작품 속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색색의 돼지는 카니발처럼 ‘흥겨운 몸canne/vale의 구체화’(정화열)이다. 카니발은 ‘사회질서를 포함한 기존의 질서를 절대화, 독단화하는 일방적이고 우울하고 공식적이고 심각한 관점’(바흐친)과는 대치된다. 안효찬의 작품에서 색색으로 칠해진 돼지들은 문명의 희생양같은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축제적 흥겨움을 잃지 않는다.
가창스튜디오에서의 전시작품
제의나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음식이다. 안효찬의 작품에서 술병을 비롯한 투명 용기에 담겨있는 색색의 사물들이나 요리(또는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 대상으로서의 돼지는 음식과 관련된 상상력을 활성화시킨다. 캐롤 M. 코니한은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서 요리가 자연과 문화를 중재한다고 말한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를 인용하면서, 야생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변환시키는 과정에는 자연의 문화화가 수반된다고 강조한다. 요리는 변환의 수단이기 때문에 적어도 비유적으로나마 모든 변환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제의나 축제에서 음식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인간과 신, 이웃과 친족, 그리고 가족 구성원을 서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음식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인간과 신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간의 의사소통에 중요한 것이다. 개인주의화된 현대에는 많은 이들이 홀로 먹지만, 함께 먹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소통 방식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제의나 축제가 사라지는 것은 함께 먹을 것을 누리는 소통 방식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물론 이전 사회에도 모든 생명이 감내해야할 생존 경쟁이 없지 않았지만,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근현대에서 (상대적)불평등의 증가는 상호적 소통을 약화시킨다. 물질-권력의 흐름이 점차 소수에게 결정화되고 있는 디스토피아에서 소통은 형식적이거나 심지어는 위협적이다. 이러한 지배적 질서의 방향에 대안성을 가지는 예술은 독백이 아닌 대화적 상상력을 중시한다. 대화적 상상력에서, 의미는 한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가령 안효찬의 작품에서 돼지들은 과잉과 결핍 모두를 의미한다. 돼지와 연관되는 욕망 자체가 그렇다. 현대인의 건강을 좀먹는 패스트푸드로 가장 많이 가공되는 동물 중의 하나가 바로 돼지일 것이다. 캐롤 M. 코니한은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서 물질자본주의 문화에서 정크 푸드의 만연은 과식을 하면서도 몸에서 요구하는 영양을 만족시키지 못 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현대인의 체중이 늘어날 때조차도 생명에 위험할 만큼 영양이 모자란다는 연구를 인용한다.
전우, 60cm x 40cm , 디아섹 2013
이러한 과잉과 부족의 결합은 정보는 많고 의미는 적은 미디어 사회의 상황과 유사하다. 안효찬의 작품에서 돼지는 인간과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인 타자로서, 대화를 위해 호출된다. 쌍방향 소통은 작가, 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상징적 우주에 균열을 낸다. 오랫동안 인간에게 단백질의 제공자였으며, 이제는 생명공학적인 처치를 거쳐서 장기까지 제공할 이 친숙한 동물은 감정이입을 자아내는 우화적 동물이다. 인간에게 살을 제공하기 위해 그자체가 살덩어리로 만들어지는 돼지에게서 작가는 자유롭지 못한 인간을 본다. 그는 대지처럼 누워있는 돼지와 그 위에 건설되고 있는 가설 무대같은 문명을 통해 자연을 착취하며 건설되어온 문명을 풍자한다. [發展], [Long for freedom] 등으로 붙여진 제목은 발전을 위해 누군가의 자유가 희생되었음을 암시한다. 제사에도 잘 사용되는 돼지는 이러한 희생을 상징한다. 유쾌하면서도 서글픈 안효찬의 작품은 희생양의 신화처럼 문명이 폭력을 통해 탄생했고 유지되고 있음을 말한다. 동물에게 일어난 것은 인간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출전; 가창 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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