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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맞서다 전 / 그때 여기의 사람을 호명하다

이선영

그때 여기의 사람을 호명하다

  

이선영(미술평론가)

  


얼굴, 맞서다


  

34회를 맞는 성균관 대학교 박물관의 기획전 ‘얼굴, 맞서다’ 전은 진정한 리더의 부재라는 현시대의 상황을 통감한 작가들의 모색이 담겨있다. 이 전시에서 염두에 두는 지도자란 정치적 지도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리더는 지배적으로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집단의 등대 같았던 인물을 말한다. ‘2016년 현재 리더의 롤모델을 찾기 위한’ 모색은 단순한 반성과 관조를 넘어서 실천적 절박함마저 내포한다. 도구적 합리성의 발달로 인해 관료제가 더욱 공고화된 현재에 리더가 부재함은 역설적이다. 진정한 리더에 대한 목마름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진정한 리더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을 해석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들 대부분은 외세나 반민주 세력 등 적대적 세력에 의해 고초를 겪고 비극적 죽음을 맞았던 이들이 대다수다. 그들 중 제명에 죽은 사람들은 별로 없다. 이들의 비극적 말로는 살아생전에 우리 사회가 그들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탓이 크다. 



조환, [김창숙]


남아있는 위인들의 초상과 어록 등을 참고로 한 작품들과 데드마스크를 포함한 역사적 기록이 함께 하며, 주로 유물을 다루던 장소에서의 전시는 다소간 정적으로 보이지만, 작품들을 낳은 원동력과 작품의 촉수가 겨냥하는 방향은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예술은 지배적 현실에 대해 길항적으로 작용하며 겉으로 보이는 질서의 균열을 벌리고, 그 아래 꿈틀거리는 무질서를 드러낸다. 무질서는 착종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질서를 향한 여로이다. 때로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그들의 신비로운 풍모는 ‘맞서다’라는 전시의 키워드가 단순한 반대가 아님을 표현한다. 대화적 관계든 적대적 관계든, 권력이 편재하는 시대에 맞섬의 대상은 분명치 않다. 익명적인 규율화의 시대에 대안적 모델로 요구되는 것은 부정이 아닌 긍정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긍정의 대상을 호출했다. 지금 여기를 되비쳐 주는 그때 여기의 사람을 호명하는 것이다. 


존경할만한 리더 11인은 독립투사부터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14인의 참여 작가 역시 20대부터 70대까지에 걸쳐 있다. 수묵화부터 설치에 이르는 표현수단 역시 다양하다. 여기에 유물과 자료까지 더해져서, 보고 읽을거리가 많은 전시가 되었다. 구조나 체계의 힘이 점차 커지면서 인간은 사라진 듯했지만, 시대가 엄혹할수록 우리는 인간에게, 한 인간의 생애에 주목하게 된다. 인간은 구조에서 태어나지만 구조를 바꾸는 것 역시 인간이기에, 한 인간에 생애에 대한 탐구는 개인에 대한 소소한 관심사를 넘어 대안적인 모색이 된다. 그들은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떻게 헤쳐 나왔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겨나는 것이다. 위인과 예술가의 만남은 단순히 명망가들 간의 조합은 아니다. 치열한 사람만이 치열했던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작품 소재가 된 위인들은 대부분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지만, 카오스로부터 코스모스를 구축하고, 낡은 카오스를 해체하는 예술가들은 평화 시에도 전쟁을 치루는 사람들이다. 상시적인 전쟁을 치루는 그들은 수없이 쓰러지며 수없이 다시 일어선다. 


‘얼굴, 맞서다’라는 전시제목은 얼굴과 얼굴이 직접 맞대면함은 물론, 이러한 대면이 지금 여기의 엄혹한 시대 상황에 맞섬을 말한다. 이전 시대와 달리 지배적 권력은 적나라하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맞섬은 내재적이다. 맞섬의 대상은 자기 안의 타자일 수도 있다. 사실은 작업을 의미 있게 지속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맞서는 행위라 할만하다. 다양한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고, 이거다 싶으면 하나로 쏠리는 경향이 심한 한국사회의 풍토—(물질적)발전과 (정신적)마비라는 두 얼굴의 괴물을 낳은--에서 각자의 개성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성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을 예술가답게 하는 행위 자체가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수자의 것이 된 예술은 단순한 실행이나 실천을 넘어서 헌신과 희생의 속성을 가진다. 출품작의 면면을 볼 때 전시 키워드 중의 하나인 ‘맞섬’은 원대한 정치적 지향보다는 예술적인 자의식이 상당부분 차지한다. 따라서 이 작업들은 어떤 사상에서 사상으로의 번역이 아니다. 진정한 현실 참여와 발언은 대부분 각자 자신이 몰두 했던 일로부터 온다. 그리고 실천으로 더해진 깨달음은 자신이 해왔던 일에 다시 적용될 것이다. 그러한 실행만이 명분상의 진보가 아닌, 실질적 진보를 가져온다. 



황재형, [신채호]


작가들이 속한 미술계 역시 세태의 축소판으로 어떤 기준이 없이 출렁거리기는 마찬가지다. 유의미한 파장 대신에 그대로 삼켜지는 현실은 때로 소모적으로 다가온다. 작업이라는 목적보다는 그것을 위한 수단이 작업을 대신한다. 수단과 목적의 이러한 전도는 근대 내내 지속되어왔으며, 예술 또한 예외가 아니다. 수단과 목적의 전도는 그 사촌뻘인 형식주의나 예술을 위한 예술마저도 고색창연하게 보일정도로 강력하다.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출렁거리는 현실에 대한 멀미는 지금여기를 되비출 수 있는 그때여기에 주목하게 했다. 지금 여기의 작품들은 그때 그들을 호명한다. 우리에겐 어떤 지침이 필요하며 그것이 인간을 통해서라면 더욱 자연스럽다. 그들의 데드마스크를 비롯한 자료들과 함께 하는 미술작품들은 저편에 있는 희미한 흔적들을 살아 숨쉬듯 생생한 모습으로 전경화 한다. 전시의 성격상 작품들은 대개 초상을 기반으로 한다. 강렬한 인상과 해석을 낳는 밀도 높은 소우주로서의 얼굴이 없었다면, 살아생전 거의 만나본 적이 없었을 이들과의 대화는 피상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얼굴만큼 작은 면적 안에 많은 것이 담길 수 있는 소재도 없는 만큼, 대화와 해석은 끝이 없을 것이다. 얼굴은 어떤 기호로도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내재한다. 그래서 얼굴은 그림의 끝없는 소재이자 주제가 되었다. 물론 소재가 된 인물들의 무게로 인해 자칫 소재주의적인 전시가 될 위험도 없지 않으며, 그러한 인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해석의 시간이 길지도 않았다. 그러나 본질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따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덧붙여진 해석들과의 새로운 관계망이라고 할 때, 미술가들의 작업은 역사적이고 공적인 인물들에 주요한 해석을 추가하는 계기가 된다. 작가들이 활용한 자료들의 어떤 부분은 작품들이다. 그들이 남긴 빛나는 어록들이 그러하다. 이 전시를 통해 새롭게 제작된 예술작품도 언젠가는 자료가 될 것이다. 끝없이 이어질 대화에는 현실과 허구의 대화도 포함된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작가들은 이 시대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발언한다. 이 전시는 자아라는 아성에 칩거하고 타자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적 상상력을 고무한다. 그리고 이 대화를 다시금 사회에 돌려주고 또 다른 대화를 이어가고자 한다. 

    


타자의 얼굴, 얼굴의 미학


   

관객은 우선 11명의 리더를 소재로 한 14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바깥으로부터 보는 것이 필요하다. 타자와 일체가 되기 힘든 현실에서 바깥으로부터의 접근은 모든 만남과 대화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타자와 하나가 되는 것보다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작품 소재가 된 인문들과 작가의 만남에도 해당된다. 과거의 중요한 이들을 이 시대에 인정받는 중요한 작가들이 그렸다는 이중의 중요함 때문에 작품자체가 실종될 수 있다. 작가들은 주어진 미션을 위해 많은 연구를 했겠지만, 사진이 많이 남아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자동적으로 작업이 용이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그려진 얼굴은 육체의 여러 부위 중의 하나에 머물지 않는다. 막스 피카르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렇게 작은 공간에 그처럼 많고 다양한 것들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 사람의 얼굴 말고는 아무 곳에도 없을 것이라고 보면서, 우주만물은 사람의 얼굴 속에 그려져 있다고 말한다. 



이철주, [한용운]


우리는 얼굴에서 그 사람의 감정이나 오성 그리고 의지 같은 심오한 본성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와 마주치는 하나의 얼굴은 우리의 관심을 촉구하고 우리에게 호소하며 우리를 소환하고 우리에게 요구사항을 제시한다’(알폰소 링기스). 타자의 얼굴을 우리를 소환한다.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미래와의 관계, 즉 현재 속에서 미래의 현존은 타자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은 진정한 시간의 실현이다. 미래로 향한 현재의 침식은 홀로 있는 주체의 일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관계이다. 타자를 대화의 상대로 불러내고 작품화하는 것은 타인을 소유하고 장악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융합으로 보지 않는다. 융합은 이전시대의 마술적 세계관에서 유래한다. 타자와의 관계는 ‘타자의 부재’(레비나스)이다. 지금 여기에 없는 이들과의 대화는 그 누구와의 대화보다도 생생할 수 있다. 이 전시의 인간적인 얼굴들은  강직하면서도 취약해 보인다. 우리 역사라는 숲의 큰 나무들인 그들은 우선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들은 그들의 기록에 따스한 온기를 부여했다. 이철주의 한용운 상은 형형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며, 신영훈의 여운형 상은 웃는 듯 우는 듯 미묘한 표정이다. 이상봉의 이회영 상은 우리 옷 한번 입고 찍은 사진이 없는 그에게 새로운 초상을 만들어줬다. 밝고 화사한 배경을 뒤로한 고찬규의 백남준 상은 현대미술의 대표자라는 무거운 위상을 장난기 어린 소년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소재가 된 인물들은 도인이나 초인같은 면모를 띄기도 하며, 작가들은 자신들의 스타일대로 그러한 면모를 더욱 강조했다. 


박순철의 한용운 상은 작금의 현실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한 채 돌아앉은 옆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조환의 김창숙 상은 흩날리는 옷고름과 중심을 잡아주는 지팡이 사이에서 무엇인가에 맞서 서 있는 강직한 모습이다.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공성훈의 함석헌 상은 하얀 머리와 의상이 거친 배경과 어우러져 숭고한 느낌을 자아낸다. 정원철의 함석헌 상은 얼굴에 감돌고 있는 어떤 기운들을 살려냈다. 거기에는 초상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가 있다. 이 전시의 작품 속 위인들은 시대의 풍파 속에 대부분 제명대로 살지 못했다. 서원미의 김창숙 상은 죽어가는 정의와 독재자의 건재를 대조한다. 우종택의 장준하 상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의인의 죽음을 이질적인 두 화면을 대조한다. 철망으로 입체화한 후 빛을 배경으로 펼쳐낸 박성태의 김구 상은 해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해체 때문에 더욱 빛나는 모습이다. 



정원철, [함석헌]


황재형의 신채호 상은 빗금처진 채다. 수인이었을 때의 신채호를 담은 거대한 초상은 거꾸로 서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아직도 이루지 못한 민족의 과제를 상기시킨다. 검고 푸른 바탕을 하늘로 삼아 별을 흩뿌린 이종구의 윤동주 상은 순수한 서정시인의 죽음과 시대를 연결 짓는다. 이정웅의 기형도 상은 창작이 야기하는 고난과 고통을 형상화하며, 그것은 자신의 젊음을 짓밟고 지나갔던 죽음들과 창작의 고통에 소진된 채 곧 닥칠 죽음을 예견한다. 작가가 아닌 작품 소재가 되는 위인들의 생애에 주목하면 또 다른 분류가 가능하다. 필자는 편의상 근대와 지식인(이회영, 김창숙, 장준하), 정치적 이데올로기(김구, 여운형, 신채호), 주체와 타자 간의 종교적(한용운, 함석헌)이고 예술적(백남준, 기형도, 윤동주)인 대화 등으로 나누어 서술했다. 물론 이 범주들은 서로 교차한다. 지식인이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타자와의 대화는 작가와 위인 뿐 아니라, 당대의 위인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근대와 지식인; 이상봉, 서원미, 조환, 우종택


    

이상봉, 서원미, 조환, 우종택이 형상화한 이회영, 김창숙, 장준하는 격동기 근대에 지식인의 역할을 생각해 보게 한다. ‘얼굴, 맞서다’전이 문제 삼는 시대의 롤 모델의 부재는 무엇보다도 근대에 지식인이 해왔던 역할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어떤 지식인도 전체를 말할 수 없는 핵분열의 시대에 누가 전체를 말할 수 있는가. 누가 전체를 책임질 수 있는가. 그들의 작품 속 위인들은 각자의 영역에 충실할 뿐인 전문인 보다는 때로는 소임을 벗어나 전체를 비판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지식인이다. 현재 그러한 전체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면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현실 정치인들 대부분은 자신이나 그가 속한 파당의 이익에만 연연 할 뿐이다. 그러나 이 전시의 소재가 된 위인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달랐다. 그 때는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독재의 폐허 속에서 어느 때 보다도 보다 긴 안목을 지닌 지도자들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작품 속 의인들은 재건과 발전을 위한 장기적 비전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래서 눈먼 시대의 저항을 받았다.



이상봉, [이회영]


이상봉이 형상화한 우당 이회영(1867-1932)은 식민지 시대에 민중 계몽운동과 항일 의병 활동을 함께 펼치던 투사로, 활동하던 중국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했다. 신채호, 김구, 한용운, 김창숙 등 이 전시에도 등장하는 이들과 같은 반열에 서 있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농장을 운영하기도 하며,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투척했다. 그는 사회운동을 위해 이념이나 실천 뿐 아니라, 자본도 필요함을 예시한 선각자다. 작품 속 이회영 선생은 한복을 입고 있지만, 북경 등지서 조선무정부주의 연맹 등을 결성하여 찍었던 자료사진들에는 그렇지 않다.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낼 복장은 비밀리에 활동했던 그의 행보와 어긋나서였을 것이다. 이상봉은 이 활동가에게 깨끗한 한복을 입혀주었다. 희미한 흑백 사진에서는 볼 수 없는, 얼굴을 어루만지듯이 시원시원하게 그은 붓질은 따스한 안색을 복구시켰고, 거친 망점으로 뒤덮인 평면을 입체화했다. 한시도 다리 뻗고 잠 들 수 없었을 그에게 가혹한 현실원칙에 대항하는 예술 고유의 소원성취의 힘을 관철시켰다.


조환이 형상화한 김창숙(1879-1962)은 30세에 ‘나라를 구하려면 모든 구습을 개혁해야 하고 개혁은 계급타파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치면서 반독재 민권쟁취 운동을 전개해 왔다. 분단이후 계급이라는 용어는 금기시되었지만, 계층 간의 격차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여전한 주요 모순이며, 진정한 정치가라면 가장 먼저 풀어야하는 난제로 남아있다. 이승만 대통령 사퇴를 촉구한 김창숙 선생은, 이승만 퇴진 이후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었던 거물급 정치인으로 초대 성균관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조환이 금속판을 잘라내고 용접하여 형상화한 김창숙은 공간에 드로잉을 하는 듯한 힘찬 기법을 통해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인상을 전달한다. 흑과 백으로 분명히 구분되는 형태는 현실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적 속성과 대조된다. 그의 작품은 실제로 권력을 잡는 이와 원리원칙이 분명한 이들이 다를 수 있음을 증거 한다. 작품은 김창숙 선생의 일대기를 하나의 이미지에 압축적으로 요약한다. 그것은 한 순간을 포착한 한 장면에 얼마만큼의 힘과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서원미, [김창숙]


이 전시는 작가로 하여금 자유롭게 소재를 선택하게 하여 한 모델을 두 작가가 형상화한 경우가 있는데, 서원미가 형상화한 김창숙 선생도 그 예다. 그는 70대에도 반독재구국선언문 등을 발표하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였고, 그 때문에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당해 몸이 성치 못했다. 서원미의 작품 속 김창숙은 지팡이를 의지한 채이긴 하지만 똑바로 서있는 조환의 작품 속 김창숙과 달리, 시체로 변해가는 모습이다. 어떤 위인도 시간을 이기지 못하며 그것에 무력하다. 무채색 톤의 작품에서 이불로 보이는 하얀 덩어리는 실낱같이 남아있는 가느다란 생명을 뒤덮어 물질화한다. 검은 바탕에 서있는 인물은 마지막 길에서조차 남은 힘을 다해 거부해야만 했던 불의의 세력을 보여준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띈 채 서있는 자는 죽어가는 이의 얼굴에 묻어있는 죽음의 흔적을 공유한다. 검은 바탕의 인물은 흰 바탕의 인물에게 다가온 파국을 남의 일 처럼 구경하고 있지만, 그에게도 같은 운명이 닥칠 것이다. 애국지사는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많은 이를 고통과 죽음에 빠트린 독재자도 죽었다. 



우종택, [장준하]


우종택이 그린 장준하(1918-1975)는 언론부문에서 활동한 지식인이다. 1953년 그가 창간한 [사상계]는 중단과 복간을 거듭했지만, 어려운 시절을 버텨내면서 집권당의 거듭되는 파행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교두보였다. 1960년대 사상계 사무실에서 책이 가득 꽂힌 서가를 배경으로 펜을 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지식인상으로 각인된다. 오늘날 이렇게 보편을 아우르는 지식인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장준하 선생은 1962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10월 유신 등을 반대하며 민주주의 운동에 헌신한 그는 58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독재자에게 걸리적거리는 걸림돌이 제거된 것이다. 우종택은 희망찬 저편을 바라보는 초상 옆에 어떤 부호처럼 보이는 붓질을 병렬했다. 강한 힘이 가해진, 사람의 실루엣을 닮은 먹물 덩어리 가장자리로 줄줄 흐르는 먹물은 갑작스런(그러나 예견되는) 비극적 최후를 함축한다. 그의 작품은 지식인이 살아생전에 주장했던 바 뿐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던져줌을 알려준다.  

    


이데올로기의 격전장에서; 박성태, 신영훈, 황재형 


  

황재형, 신영훈, 박성태가 형상화한 신채호, 여운형, 김구는 자유와 평등 사이에 상충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갈등 속에 배치된다. 흐릿한 사진 속 그들은 머나먼 시절 속 인물들 같지만,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여전히 한반도는 분단 상황에 있으며, 지금 그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인물이 된다. 남과 북의 지배층은 설득과 위협 등을 통해서 이념을 관철시킨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항 역시 이념을 필요로 한다. 테리 이글튼은 [이데올로기 개론]에서 이념은 인간의 삶의 지표이며 간혹 그것을 위해 죽기까지 하는 무엇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신념과 정당화를 제공해준다. 테리 이글턴은 정치가 사회 질서가 유지되거나 도전 받는 권력의 과정이며, 반면에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권력 과정이 의미화의 영역에 연루되는 방식을 지칭한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예술은 정치는 아니지만, 의미화의 영역에 연루될 수 있다. 


황재형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고,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장의 주인공 신채호(1880-1936)에게서 ‘꺾일 수 없는 맑은 선생님의 곧은 눈초리의 방향’을 본다. 신채호 선생은 20세가 되기도 전에 독립협회와 만만공동회에서 활동한 이래, 57세에 옥중 순국하기까지 애국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조선의 역사를 연구한 역사가이기도 했던 그가 중시한 민족은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여 역사의 주체로서 상정되곤 하던 관념이다. 황재형이 형상화한 신채호 선생은 초췌한 수인이지만 눈빛만은 살아있다. 황재형은 작품의 규모를 통해서 이 역사의 거인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작가는 기념비적 스케일로 형상화된 초상을 거꾸로 설치한다. 거꾸로 있어도 여전히 형형한 신채호 선생의 눈빛은 민족이 왜곡되고 있는 상황을 꾸짖는 듯하다. 이 반(反) 기념비적인 작품은 독재정권의 유지에 탈색된 북한의 민족주의와 자본주의 세계화에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남한의 민족에 대한 관념을 풍자한다. 



박성태, [김구]



(참고) 김구의 데드마스크


박성태가 형상화한 김구(1876-1949)는 18세에 동학 농민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한 이래, 항일 투쟁의 선봉장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으며, [백범일지]를 통해 민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 정치인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김구 선생을 비롯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이 해방이후 지도자 및 정치인의 주류가 되었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남북을 아우를 수 있었던 이 큰 정치인의 열망은 여전히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아있다. 작가는 김구 선생의 초상을 부분부분 철망으로 모사하여 설치하고, [여명(黎明)-미완의 서사시]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의 초상은 한반도처럼 조각나 있지만, 곧 맞춰질 수도 있는 퍼즐처럼 그렇게 산재해 있다. 조각난 퍼즐 같은 방식은 후세가 이 미완의 기획을 완성해야 함을 암시한다. 망 뒷면의 빛은 해체를 강조하지만, 단편들은 또한 이어짐을 예기한다.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망으로 존재하는 김구 선생의 얼굴은 민족에 대한 메시지를 융통성 있는 현대적 언어로 계승해야 함을 말한다.    



신영훈, [여운형]



(참고) 여운형의 데드마스크


신영훈이 형상화한 여운형(1886-1947)은 35세인 1920년에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고, 37세에 모스크바에서 동방노농대회를 참석했으며,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등의 진보적 정치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60세가 넘어서도 평양을 방문하고,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며 조선인민당과 사회노동당을 결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지만, 그 열성적인 활동 때문에 많은 반대파를 낳았다. 살아생전 그의 모습은 창백한 지식인이 아니라 호남형이다. 강한 이념적 지향을 가진 그는 매우 활동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신영훈은 그의 몸은 제거한 채 화면 상단에 머리만 둥 띄워놓았다. 작품 속 여운형 선생은 웃는 듯, 찡그리는 듯 미묘한 표정이다. 그러나 얼굴을 가로질러 흐르는 얼룩들은 후자에 가까운 해석을 낳게 한다. 1947년 혜화 로타리에서 저격 당하지 않았더라도 남한이든 북한이든 그의 행보를 받아줄 수 있는 자리는 있었을까. 중력을 거스르는 듯이 여백 위에 풍선처럼 떠있는 작품 속 여운형의 초상은 진정한 현실을 담은 주장을 한갓된 이상주의로 파기하는 현 세태를 반영한다.


  

타자의 초상; 이철주, 박순철, 공성훈, 정원철


  

박순철, 이철주, 공성훈, 정원철이 형상화한 한용운과 함석헌은 절대적 타자(신)까지도 포함한 보다 넓은 정신적 폭을 가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작품에서 타자는 협소한 자신의 조망에 갇혀있지 않다.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타자 안에는 미지의 거대한 공간’(로렌스)이 있다. 작가들은 주로 타자의 얼굴을 재현하지만, ‘몸 전체가 얼굴로서 표현’(레비나스)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이 자리한 여백이나 자연풍광 또한 그들의 얼굴-몸이 될 수 있다. 한용운은 출가한 스님이었으며, 함석헌은 20대 중반부터 성서를 깊이 연구하여 무교회주의 신앙클럽 등을 결성한 종교적 이력이 있다. 펜실바니아 펜들힐 퀘이커 수련원에서 함께 노동하는 사진을 남기기도 했던 함석헌은 [성서 조선]의 창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불교나 기독교는 개인의 기복이나 자본과 영합한 시스템화와는 거리가 멀었고, 주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넉넉한 장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메시지를 초월이 아닌 내재적인 가치로 삼았다. 실천과 연결된 폭넓은 사상,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하다. 


이철주가 형상화한 한용운(1879-1944)은 1929년 서대문 형무소 수감 사진을 바탕으로 한다. 사진 속 ‘범죄자’인 ‘50살 남자’는 수감 번호를 단채 옆모습과 앞모습으로 찍혀 있다. 격동기에 뜻있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범죄’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관료제로 안착된 익명적 구조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힘이 더 큰 역할을 발휘하던 시대에 지금 여기를 반성적으로 되비출 수 있는 종교는 실천적 역할을 할 수 있다. 18세 때 이미 의병에 참가 했으며, 1919년 민족 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을 주도한 실천가 이면서 시집과 장편 소설도 출판한 예술가이기도 했던 한용운은 이철주의 작품에서 우리를 응시한다. 그의 응시는 조그만 물질적 풍요에 안주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옥고를 겪는 와중에 찍힌 한용운 선생의 눈매와 입매는 매우 단호하다. 흐린 먹으로 구현된 이철주의 작품은 원본인 흑백 사진에 비해 좀 더 부드럽다. 작가는 ‘나라와 민족이 고통 받고 있을 때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실 때의 모습,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형형하신 눈빛을 담아내고자’ 했다. 



박순철, [한용운]


박순철이 시원한 필획으로 형상화한 한용운은 수형기록으로 남은 자료에도 있는 옆모습이다. 그의 프로필은 ‘범죄인’의 명확한 각인을 위한 실증적 필요로 제작되었을 것이나, 박순철의 작품 속 옆모습은 다른 해석을 야기한다. 작가는 상반신의 몸통을 산처럼 안정적으로, 그리고 머리끝은 여백과 통하게 하여 무한한 정신세계를 암시했다. 일제는 몸을 가두었을지언정 정신마저 가둘 수는 없었다. 겉보기에 자유로운 오늘의 우리가 관료-소비주의가 지배하는 무의미한 일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래서 한용운 선생은 차마 지금의 여기를 직시하지 못한다. 작가는 등 뒤의 긴 여백에 ‘침묵’이라는 단어를 써 놓았다. 의병실패 이후 고향을 떠나서 26세에 출가한 한용운은 1925년 백담사에서 그 유명한 [님의 침묵]를 탈고한다. ‘침묵’은 많은 해석을 낳았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 그것은 과학혁명을 거치고 신의 사랑으로 충만한 이전의 상징적 우주가 기계적 진공으로 바뀌었을 때 ‘이 무한한 공간의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고 외쳤던 파스칼의 말이 떠오른다.


정원철의 작품은 1980년 대학 2학년 때 잡지 [씨알의 소리]를 통해 함석헌(1901-1989) 을 처음 만난 경험에 바탕 한다. [씨알의 소리]는 함석헌 선생이 나이 70세인 1970년에 창간한 시산평론 월간잡지이다. 그 전에도 그는 [성서조선], [말씀] 등 잡지의 창간에 관여했고, 50대에는 [사상계]의 논객으로 활동한 지식인이었다. 작가는 학창시절에 [씨알의 소리]를 통해 민중의 참뜻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민중은 민족과 함께 역사의 주체로 생각되었던 중요한 관념이었다. 1980년대 끝 무렵 89세로 사망한 함석헌 선생은 비교적 최근까지 우리 곁에 있었던 보편적 지식인이다. 함석헌의 ‘빈들에 외치는 소리’는 어두운 시대의 정치적 실천 뿐 아니라, 작업의 영감을 주기도 했다. 정원철의 작품 속 함석헌은 흑백의 대조 속에서 강건한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정원철의 작품에서 초상 안팎에 흐르는 선들은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펼쳤을 때 생생하게 되살아오는 소리 같은 메아리를 던져준다. 2016년 이번 전시의 참여로 작가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 



공성훈, [함석헌]


공성훈의 작품 [두 노인]은 일본 제국주의와 독재정권에 대항했던 재야 활동가 계훈제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함석헌 선생은 이미 새하얀 머리칼과 수염이 수북한 신선 같은 외모지만, 자신보다 스무 살 어린 동료와의 대화에 몰두한다. 두 노인의 대화는 대양의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에도 방해받지 않을 만큼 열정적이다. 그들은 단순한 노인이 아니라 질풍노도 속 청년 같은 면모가 있다. 즉 그들은 소소한 일상을 지배하는 코드에 연연하지 않고 땅부터 하늘까지 이어지는 순리를 치열하게 사고했던 실재계 속의 야성적 인간들인 것이다. 작가는 ‘항상 저항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세속에 초탈한 노도사(老道士)와도 같은 두 분의 풍모’를 인상 깊게 보았다. 태풍의 눈 같은 정적 속에서 역사의 회오리 속 세상을 움직였던 그들은 똑같이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다. 남루함이나 고리타분함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들의 하얀 신발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 즉 근본적이기에 혁명적인 상황을 상징하는 듯하다. 

  


예술적 대화; 고찬규, 이종구, 이정웅


    

전쟁과 혁명 속에서 근대를 일구어온 인물들 속에는 예술가들 또한 포함된다. 지배적 가치가 아닌 이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은 이전시대보다 더 주변화 되어 있기에 이러한 호명은 의미 있다. 지금 존경하는 인물로 예술가를 떠올리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구나 소수자의 것이 되어버린 미술계에서 그러한 기대를 하기는 힘들다. 대중들 속에 회자되는 역사 속 몇몇 미술가조차도 상투적 신화로 얼버무려진 물신적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얼굴, 맞서다’전에 호명된 위대한 지식인이나 혁명가들도 그들의 전기를 살펴보면, 자신 속에 내재한 예술가적 소양 덕분에 더 큰 힘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주장이 있다면 예술적 언어는 그것에 강한 호소력을 부여한다. 소수자의 언어인 예술은 곧 다수의 공감을 낳고 현실적 힘으로 전화된다. 한편 예술가는 자신이 예술을 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항적일 수 있고, 때로 시대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고찬규, 이정웅, 이종구가 호명한 예술가들은 예술이라는 같은 조각배를 탔던 이들과의 내재적 대화의 산물이다.



고찬규, [백남준]


고찬규가 형상화한 백남준(1932-2006) 하얀 셔츠를 입고 비디오 모양의 안경을 쓴 장난기 어린 표정이다. 파스텔 톤으로 화사하게 칠해진 배경 속 그는 한쪽 어깨에 지구 모형을 메고 있다. 지구모형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현대 미술가라는 의미 뿐 아니라, 위성을 통해서 최초로 전 지구를 잇는 광역 소통을 개시한 작가로서의 ‘전설’을 담는다. 제목이 [전설]인 것은 아직도 그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이다. 백남준의 초창기 이력은 미술가라기보다는 현대음악가—그는 유학 간 동경대에서 여러 분야를 섭렵했지만, 주로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고 독일에서도 쇤베르크나 존 케이지를 비롯한 현대음악의 실험에 깊이 심취했다--에 가까웠지만, 그러한 이색적 경력이야말로 현대 미술의 혁신을 가져온 기폭제였다. 예술은 언제나 경계 위에서 타자들 간의 대화에 귀 기울인 자들에 의해 그 영역이 확장되어왔고 깊어졌다. 어린 애같은 천진스러움은 실험을 놀이하듯이 가능케 했을 것이며, 고찬규의 작품은 그 지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종구, [윤동주]


이종구는 ‘시를 넘어서 우리의 민족정서와 역사를 상징하는 금언’을 만든 시인 윤동주(1917-1945)를 형상화한다. 어지러운 시대를 짧게 살다간 생애가 무색하게 작품 속 그는 단아하고 고요하다. 그가 살았던 엄혹한 시대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럼이 없기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노래한 아름다운 서정시인--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옥사 3년 후인 1948년에 출간되었다--을 사상범으로 가두었고, 서른도 되기 전에 어둡고 차가운 감옥에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하기야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더 이상 써질 수 없다고 한탄한 이가 있을 정도로 세상은 서정과 정반대로 돌진하고 있었다. 이종구는 [별이 된 시인]에서 윤동주 시인을 별로 만들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학생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의 검은 부분에 별을 뿌려 놓았다. 작가는 윤동주의 초상에 푸른색을 덧입혔다. 그것은 서른이 되기도 전에 스러진 푸르른 젊음을 상징하면서도 어둠이 지나면 새벽이 올 것임을 예시하는 듯하다.     



이정웅, [기형도]


이정웅이 형상화한 기형도(1960-1989)는 요절로 끝나는 굴곡진 생애를 살면서 짧고 강렬하게 세상과 소통했던 전형적인 예술가 상을 보여준다. 작품 속 그는 책을 잔뜩 쌓아놓고 삶의 알레고리처럼 보이는 두 촛불을 켠 채 창작에 골몰한다. 자기를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은 예술에 대한 상징이 될 수 있으리라. 생산지상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그만큼 소모적이어서 때로 작가는 그 과정을 더 가속화시키곤 한다. 예술이 긴 고통 끝에 짧은 희열을 안겨준다면, 작품 속 시인은 아직도(또는 영원히) 고통을 통과하는 중이다. 이정웅은 ‘그의 시에 등장하는 엄선된 시각적 재료들을 작업의 소스로 활용했다’고 밝힌다. 특히 배경의 수수께끼의 여인들은 짧기만 했던 작가의 생애를 짓눌렀던 악몽같은 기억을 떠올린다. 시인 역시 갑작스럽게 다가온 죽음에 쫒겼다. 부친의 병고와 누이의 불행한 죽음, 가난은 기본인 시인의 삶이 녹아난 비극적 작품들은 아직도 어두운 이 시대 젊은 예술가의 공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러한 밑도 끝도 없는 어둠은 예술을 가능케 하는 뮤즈이기도 하다.   

 

출전; 성균관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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