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나투스(conatus), 작가와 우리 모두의 삶, 그 삶의 의지와 항상성
하계훈 | 미술평론가
4년 전 필자는 이문주 작가의 개인전에 대해서 “앞으로 이문주가 작품 주제의 흐름에서 굵직하게 흘러가는 본류를 분명하게 유지하면서 주변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해간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공간에서도 더 많은 생명과 이야기를 발견할 것이고, 더 나아가 어느샌가 그 발견으로부터 우리 삶의 정수이자 진리(혹은 하늘의 뜻)를 파악하는 작가의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작가가 반드시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결과는 아니겠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관점과 태도는 어느 정도 그 예측을 실현해주는 듯하다. 아니, 이문주 작가가 아니더라도 창작의 열정을 반평생 정도 유지해 온 작가라면 자연스럽게 갖는 태도와 관점이 이문주 작가의 작품에서도 진정성 있게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은 이문주 작가의 공간 탐구에 이어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우연히 목격한 노인들의 야외공원 활동인 ‘건강백세교실’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춤추는 모습과 몸놀림에서 작가는 그들의 인생사와 삶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내어 작품으로 재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이문주 작가는 우리들의 삶의 아름다움과 함께 무상함과 허무함을 혼합적으로 떠올리는 복잡한 감정을 느낀 듯하다.
저 노인들의 나이를 추정해보면 그들의 어린 시절과 청장년 시절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식민지 시절의 공포와 결핍, 8.15 해방, 이어서 6.25 전쟁의 고통과 4.19 학생 의거, 5.16 군사 정변, 그리고 국내의 산업현장 뿐 아니라 베트남과 중동, 그리고 독일 등지에서 숨가쁘게 달려온 압축성장의 명암을 온몸으로 살아온 주인공들인 그들이 이제 노년의 엉성한 춤사위로 공원에서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 작가의 눈에 포착된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심에서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오면서 생산성 저하와 변화하는 시류에 뒤떨어지는 부적응의 세대로 치부되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작가 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어쩌면 자신의 부모와 친척, 친지의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다.
함께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에는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 작업중에 잠시 숨을 돌리는 인부들과 그 상황을 모른 채 아이스 바를 들고 걸어가는 어린 소녀도 화면에 담겼고 작가가 머물렀던 베를린의 장벽 앞을 지나가는 노부부와 젊은 커플 등의 모습이 담겨있다. 작가는 국내외에서 그 공간을 목격했고 이들 모두는 그들의 공간에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서 나름대로의 삶의 의미나 가치를 짐작하게 된다.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어느 사람에게서 그것을 떼어내면 그 존재가치가 사라져버리는 그 어떤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어떻게 드러내 주는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젊음을, 건강을, 전성기의 자신의 모습과 정신을 지킬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스피노자에 의하면 이러한 자기 존재가치를 보존하려는 항상성 추구경향이 곧 코나투스(conatus)인 것이다.
이문주 작가가 발견하는 우리 삶의 코나투스는 춤사위에 몰두하는 노인들, 재개발 지역의 휴식하는 인부들, 그리고 그 앞을 걷는 어린 소녀의 모습 뿐 아니라 외국의 노부부나 젊은 부부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작가의 창작 모티브가 된다. 이에 더하여 작가는 그 코나투스의 정신을 어떻게, 얼마만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자 자신의 코나투스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