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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 / 기억을 담은 몸, 그리고 장소

이선영

기억을 담은 몸, 그리고 장소

 

이선영(미술평론가)

 


2000년대 초반 작가를 처음 만난 이래, 20여년 직간접적으로 접해본 이연숙의 작품에서 기억이 선호되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과 비현실의 자연스러운 접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 그자체, 비현실 그자체에서 의미를 길어내기 힘들다. 현실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고, 비현실은 그러한 삶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한다. 특히 비현실이 단순한 환상일 때, 지배적인 대중문화의 방식들이 그렇듯이, 단순히 소비되는 것에 머문다. 롤랑 바르트가 ‘텍스트 이론’을 통해 주장하듯이, 단지 읽는 것(소비)이 아니라 쓰는 것(생산)이 요구된다. 생산을 위해서는 양자 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이연숙에게 비현실은 현실로 가기 위한 문턱이 된다. 현실은 자명하게 접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장치의 매개를 통해서 도달해야 하는 미지의 세계다. 이연숙의 초기 작업 중 2003년에 발표된 작품을 보면, 점과 점을 선으로 이어 얼굴이나 여러 자세를 한 몸을 재구성하는 작품들이 있는데, 그것은 관계 그자체가 실체가 되는 모습이다. 


조각의 기준이었던 인체는 조각가로서 훈련받는 작가에게 흔적으로만 남는다. 관계망으로 이루어진 인간 이미지들은 공간적 구성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구성은 점차 시간에도 적용된다. 지각이 공간적 범주라면, 기억은 시간적 범주다. 물론 현대물리학이 예시하듯이 시간과 공간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시각예술은 문학이나 영상 같이 시간을 매개로 한 형식과 차이가 있으며, 이를 극대화할 필요도 있다. 현대문화의 지배적 형식이 된 영상에서도 한 장면이 주는 힘은 크며, 서사 또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할 때 효과적이다. 하지만 모더니즘 미학에서 극단적으로 시도되었던 매체의 자기 정체성과 순수성을 확보하려는 전략 또한 융복합이 대세인 현대의 방식과 괴리가 있다. 현대미술가는 시간과 공간 그 틈 사이에서 작업한다. 이연숙의 초기 작업부터 분명한 관계성의 추구는 작가의 컨셉이나 수행적 행위를 시각적 방식으로 구체화하는 기술로 전개된다.


요컨대 이연숙에게는 조각적 기념비도 무형의 서사도 아닌, 작가의 행위와 결합 된 사물이 중요하며, 대개 그 사물은 현실에서 발견되거나 수공적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시간 그자체를 본 사람은 없다. 시계로 표시될 수 있는 시간은 인간 사회의 규약이다. 이연숙은 시간의 더께를 둘러쓴 사물이나 시간이 고여있는 공간을 선호한다. 마치 뭉쳐있는 염색체를 풀어서 해독하듯이 스며있거나 고여있는 잠재적 시간을 현실화한다. 2011년 고양 스튜디오에서 발표한 작품처럼, 작가는 비닐봉지들을 실처럼 만들어 짜고 압착하는 등을 작업을 통해 기억을 담았다. 같은 공장에서 한날한시에 생산됨 봉지였어도 그 안에 담겨진 것들은 달랐을 것이다. 그것을 작품화 함으로서 개별성은 더욱 극대화된다. 기억을 담기 위해 물건을 담는 실용적 대상은 변형된다. 공예적 기법은 이연숙의 작품에 많이 등장한다. 공예 자체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오래된 상징이다. 


그렇게 관객의 해석학적 상상력까지 포함된, 작품을 통해 펼쳐진 시간이 서사이다. 펼쳐지는 시간에 대한 감수성을 통해 시간의 단면으로 나타나곤 하는 추상적 공간의 일면성을 완화하고자 한다. 현대미술이 시각성을 점차 중시하면서 서사적 요소는 억압되곤 했다. 시각적 충격은 순간을 겨냥하며, 그러한 결과물이 스펙터클이다. 이에 비한다면 이연숙이 다루는 소재나 주제는 일견 작은 이야기들 같다. 쉼 없이 달려온 수십 년간의 작품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연숙은 아직도 예술가라는 말을 버거워한다. 작가는 자신이 소소한 것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야심들도 꾸준히 그리고 철저히 수행하다 보면 결코 작지 않게 다가온다. 작가는 2020년 경기문화재단의 우수작가 선정을 계기로 이루어진 정일주(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와의 대담에서,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나’에 대한 질문에 대해, ‘사적 내러티브로 우리들의 삶과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작가이고 싶다’고 대답한 바 있다. 


작가는 이전의 개인전 제목 [작은 것은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의 예를 들면서, ‘소소하고 별것 아닌 사물이나 경험, 이야기의 소중함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이연숙에게 작업은 ‘나의 삶을 기록하는’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삶이 기록될 수 있는 것도 그럴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기억된 것이 중요하다. 또는 기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적 지각만을 중시한 인상파의 일면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뭉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고 하면서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자체가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을 제외한다면, 무언가 기억하게 하는 힘은 바로 예술적 형식의 역량이다. 기억이 아니더라도 예술은 그저 지나가는 것들을 의미있는 형식으로 담아내는 유력한 방식이다. 이연숙에게 예술은 시간적 맥락을 가지는 기억을 가장 밀도 있고 강도 있게 보여주는 분야다. 그에 버금가는 것으로 꿈이 있을 수 있는데, 꿈 또한 바닥이 없는 기억의 저수지다. 


어떤 꿈은 매우 실감 나서, 그 자체가 체험처럼 굳고 기억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냥 지나가는 기계적 일상과 비교한다면 강렬한 꿈은 오히려 현실적이다. 하지만 꿈을 비롯해서 무의식적 요소가 그자체로 예술은 아니다. 그것은 출발점일 따름이다. 최초의 경험과 그것의 의식까지에 시간적 간격이 있는 기억은 완벽하게 재현되기 힘들다. 거기에는 빈칸이 더 많고 이러한 빈칸을 채우기 위한 반복적인 해석학적 노력에 의해 서사는 더욱 풍부해진다. 이연숙의 작품에 이야기가 많은 이유다. 하지만 기억을 이루는 요소들은 하나씩 바꿔치기 되어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무엇으로 생성될 수 있다. 마치 우리의 몸을 이루는 세포들이 우리도 모르는 새에 낱낱이 갱신되듯이 말이다. 기억은 정체성이나 예술처럼 변화하는 동일성이다. 작가는 최근 작업 노트에서 자신의 주된 관심사를 ‘기억 속 이미지가 현재의 특정 시공간의 영향을 받아 변형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분절과 재조합에 대한 내러티브’라고 밝힌 바 있다. 


재조합의 과정 중에 상상이 끼어들 여지는 많다. 물론 망각도 있다. 하지만 심연에 가라앉아있던 망각조차도 어떤 요인에 의해 수면으로 떠오르는 순간을 맞는다. 프루스트의 기억에 대한 사유처럼, 기억은 우연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무의지적으로 활성화된다. 이때 후각적 요소는 결정적이다. 이연숙의 작업에서도 기억과 후각적 요소는 밀접하다. 최근 작업 중 2020년 매향리에서의 작업은 상징적이다. 매화 향기 가득했다던 오래된 마을이 화약 냄새 진동하는 위험한 전쟁 연습장으로 전락한 우리의 역사적 상황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다가오는 신냉전의 시대는 그러한 역사적 상황을 단지 지나간 과거에 머물지 않게 한다. 작가는 냄새를 통해 치유를 도모한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에서 플라타너스 나무와 하얀 흙을 재료로 후각적 기억을 활성화한 공간을 연출했다.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민들이 향기 워크숍 때 만들어진 매향리의 향을 맡으면서 나무 벽 뒤의 풍경이 나오는 것을 본다. 


화약 냄새 진동하는 현재를 넘어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 작가는 ‘공간은 기억을 통해 장소가 된다’면서, 매향리라는 역사적 장소와 기억의 관계를 말한다. 공간은 추상적이지만 장소는 구체적이다. 현대사회는 코드화를 통해서 장소를 공간으로 만들곤 한다. 시스템은 좌표적으로 투명하게 정의되는 공간을 선호한다. 그것은 군사적, 상업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파악하고 정복하고 착취하기 위해 일의적으로 정의되는 좌표이다. 자리를 공간화하는 것은 근대의 중요한 프로젝트다. 반면 예술가가 기억을 통해 호출하는 공간은 개인적이다. 구체적인 장소이며 자리이다. 2019년의 개인전 [Burning Ghat](성북문화재단, 성북예술창작터 주관)은 노란 개나리로 기억되는 성북동을 소재로 작업한 것인데,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서도 ‘공간은 수많은 이야기들로 우리들에게 기억되고 의미를 가진 장소가 된다’고 요약한다. 


섣부른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획일화된 공간이 아닌, ‘갠지즈 강의 화장터처럼 어떻게 사는 것이 좀 더 나은지 잠시 멍하게 머무르는 멈춤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재)개발공화국인 한국에서 멈춤은 갈등과 지체의 상징일 뿐이었다. 기억되는 공간에서 시간의 감각 또한 현실과 달라진다. 성북동의 오래된 정원같은 장소에서 작가는 숲 냄새와 새참 냄새를 상상한다. 유발된 냄새는 기억이 살아 꿈틀거리는 공간으로 들어서게 한다. 작가는 프루스트의 예를 들면서, 냄새와 기억의 관계를 언급한다. 시각 예술가는 가장 고등한 감각으로 평가되는 시각을 주로 다루지만, 기억과 무의식의 심층에 닿아있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인 후각을 무시할 수 없다. 레이첼 허즈는 [욕망을 부르는 향기]에서, 후각은 우리가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후각 상실증(anosmia)은 자신과 남들을 알아보는 능력에 장애가 생기고, 정서적 삶이 교란되며 음식을 즐기지도 못하고 건강이 나빠질뿐더러 성욕마저 잃게 한다. 


저자가 예를 든 후각 상실증 환자는 남들과 격리된 듯한 기분이라고 하며, 심지어는 자신과도 소원해진 듯하다고 말했다. 기억 또한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드는 것’(레이첼 허즈)라는 점에서, 후각에 상응한다. 레이첼 허즈는 냄새가 우리 삶에 풍부한 결과 깊이 있는 감정을 가능하게 한다고 결론 내린다. 이연숙은 최근 아트 스페이스 루프와 문화비축기지에서 발표된 작품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감각인 후각을 통해서 호주 원주민의 수 만 년 이어온 과거를 감각적으로 추체험하는 여러 장치를 선보인 바 있다. 기억이든 꿈이든 그것으로부터 출발한, 또는 추동되는 예술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게 한다. 그에 상응하는 집단적 무의식으로는 신화나 원형(칼 융이 설계한 관념)이 있을 수 있다. 무의식이 집단적 차원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의 정신에서 검증받아야 하지 않을까. 개인들에게 설득력을 얻은 항목만이 집단적인 것으로 굳어질 수 있다. 


가령 무의식적 습관은 현대사회에서의 마케팅 전략의 중요한 목표다. 이연숙은 비닐봉지 한 장부터 할머니의 옷장까지, 우연히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익명의 사진들, 그리고 최근 작품에서는 한 부족의 서사까지 실로 다양한 소재를 다룬다. 작가가 어떤 사물이나 인물, 상황 등으로 인상 깊게 접할 때,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궁리가 온통 머릿속을 가득 채울 것 같은 전방위적인 소재가 발견된다. 작가는 그러한 소재들을 단서 삼아서 기억을 활성화하고, 끊어진 이야기를 잇고 새로운 서사를 발생시킨다. 침해될 수 없는 사실로서의 원본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서사이다. 작가가 그렇게 했듯이 관객/독자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작업 이력을 보면, 평소에도 작업 생각으로 가득한 작가에게 재미있는 소재는 많이 발굴되고 있지만, 그것들이 자칫 소재주의나 장식으로 굳어질 수 있으며, 작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사에 집중한다. 


현대미술가로서의 이연숙은 단독의 조각보다는 공간 연출로 나타난 작품이 많다. 조각의 현대적 형식인 설치예술의 방식이다. 기억에 관련된 작업이 많기에 화이트 큐브 보다는 오래된 집을 비롯하여 터의 무늬가 남아있는 곳에서의 장소특정적 작업을 즐겨한다. 사물 또한 주재료다. 사물은 철학적 의미의 주체에 대응한 대상이 아니다. 미학적으로 명료한 형식을 갖춘 예술도 아니다. 소비자의 취향과 요구에 맞춰진 코드에 의해 대량 생산된 상품도 아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인 사물은 물론 자연도 아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시간이라는 변수를 입히면 사물화될 수 있다. 가령 한날 한시에 같은 기계 라인에서 생산된 상품도 몇 십 년의 시간이 흐른다면 말이다. 대량생산의 시대가 개막된 지도 꽤 되었기 때문에 상품 또한 수수께끼 같은 유물의 위상을 가지곤 한다. 이에 대한 감각을 미학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문예사조가 초현실주의이다. 하지만 이연숙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낯선 충격보다는 시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자연에 빈 곳이 없듯이 문명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없다면 그것은 있었던 것이 사라지거나 변형된 것이다. 이연숙은 이 간격에 민감하다. 간격은 의미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선적 연속성을 가정하는 재현주의와 달리, 단편들 간의 도약이 있는 몽타주나 꼴라주 같은 현대적 기법, 그리고 지금은 일상화된 사진이나 영상의 소비는 시공간적 간격과 서사의 관계를 알려준다. 눈코입의 구멍과 그 간격이 누구도 똑같은 얼굴을 불가능하게 하듯이, 시공간적 간격은 차이를 낳는다. 차이가 바로 의미이고 서사다. 비록 그것이 기승전결의 합리적 구성이 아니더라도 할지라도 말이다. 사물과 장소는 기억을 담고 있다. 좋은 기억이든 아니든 시간의 관련된 기억은 멜랑콜리를 자아낸다. 좋은 것이라면 그것이 사라져 버려서, 나쁜 것이라면 트라우마로 남게 되어서 말이다. 특히 얼마 전 작업실에서 난 화재로 이전의 작품들과 자료들, 재료 등이 전소된 작가에게 기억은 이제 낭만적 추억같은 것이 아니라, 처절한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아직도 극복 중인 이 재난에서 작가는 어떤 영화의 제목처럼 ‘토탈 리콜’을 요구받고 있다. 작가는 충격적인 현실에 맞딱뜨려 불이 난 작업실로 가는 몇 십 분 간을 아무 생각 없이 운전했다고 한다. 그때의 기억이 없었다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머릿속이 하예지고 온몸이 굳어버렸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익숙한 무엇에 집중했을 것이다. 자신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는 것들이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슬픔은 그 이후의 일이다. 망실(忘失)된 작품들 수만큼 그것이 다시 쌓일 먼 훗날에야 그 충격적인 순간에 대한 잃어버린 퍼즐을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은 작가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자체의 자율성을 또한 가지고 시간의 두께를 축적해 나간다. 그래서 그것이 망실되었다는 것은 물리적인 사라짐을 넘어선 문제다. 이연숙의 작품들이 과거 기억의 재현이 아니었듯이, 똑같이 재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사라짐은 죽음일 것이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죽어서 털끝 하나로 복제를 한다 해도 같이 했던 시간의 기억을 복구하거나 공유할 수 없다. 유명한 SF 영화에서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구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기억이다. 물론 기억 자체도 복제될 수 있다는 점이 암시되긴 하지만 말이다. 기억을 다룬다는 것은 생물체를 다루는 것처럼 민감한 것이고, 그만큼 어렵고 그만큼 만족스럽다. 고문이나 폭력부터 기쁨과 열락에 이르기까지 기억은 몸에 새겨진다. 그것은 동시에 몸에 내재 된 시간성을 말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 하는 몸 그자체가 바로 시간이다. 이연숙의 작품은 공간에 연출된 사물을 느끼는 몸의 감각이 중시된다. 그렇게 기억은 장소와 사물을 통해 몸으로 느껴지고, 느껴지는 만큼 서사가 의미 있어진다. 그러나 퍼포먼스나 수행적 작업은 관객과의 접촉 및 소통에 한계가 있기에 공간에 설치하는 것이 중요하고, 기억과 공간은 기억이 몸과 무의식에 대해 가지는 관계처럼 밀접하게 다루어진다. 


집은 몸을 담는 몸의 연장으로. 오래된 집에서의 프로젝트는 기억 극장같은 면모를 보인다. 가령 [2015 Memory in..._하우스 워밍 프로젝트] 선정 개인전(오래된 집 캔파운데이션)에서의 무대인 ‘오래된 집’(성북동 62-10, 11번지)은 외할머니 집을 떠올렸고, 자연스럽게 작가의 유년기와 접속하게 했다. 작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 공간을 기다려왔다’고 밝혔다. 작가는 하우스 워밍 프로젝트에 대해 ‘기억이라는 공간 내에서 축적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다시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나는 원래의 사실과 조금씩 변화되어 사실처럼 믿는 아이러니를 인정한다’고 말한다. 사실과 허구의 관계가 교란되는 것이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꿈을 꾸었을 때 그 꿈 또한 그 장소의 물리적 현실성과 관계되는 것 아닐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어떤 꿈(허구)을 담았던 공간(실제)이다. 그의 꿈이 달라졌다면 그 장소는 같은 곳일 수가 없다. 작가는 ‘오래된 집을 방문할 때마다 다닥다닥 붙은 작은 공간들 속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즐거웠고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고 했다. 


시각성이 침묵 속에서 개인으로 떨어져 나올 것을 요구한다면, 소리는 공동체의 특성이다. 시각은 하나의 관점을 중시하지만, 소리는 여러 곳으로부터 들려온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또 그 누군가는 이곳에서 또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용도가 바뀐 건물을 활용하는 전시가 대표적이다. 도심 개발 아래 폐업한 막걸리 주조장이 문화공간으로 바뀐 해동문화 공간과 미용실을 선정하여 작업을 진행한 2018년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작가는 ‘특정 공간을 선택하고 그 속에 있는 사회적, 역사적 사실을 수집하고 개인의 기억으로 재구성하여 시놉시스를 만든다. 그것을 바탕으로 공간 설치와 퍼포먼스로 표현한다’. 공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몸과 시시각각 접속하는 역동적인 무대가 된다. 이연숙의 작품에서 공간과 몸은 모두 이야기의 재료가 되는 기억을 담는다. [2020 Running stage_공간 그리고 그 장소]는 분단의 역사 속에서 폭격 실험장으로 전락한 매향리의 한 교회에서 진행한 전시로, 이 프로젝트에서는 분단의 역사 속 공간의 기억을 다룬다. 


주된 형식인 ‘오브제와 이야기의 수집을 통한 조각, 재해석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장소 특정적 설치 및 사진과 영상 도큐멘테이션’은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는 방식이다. 기억의 장소는 대개 양가적이다. 기억의 장소는 기쁨이자 트라우마다. 2016년 봄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의 바다는 설렘의 장이었을 것이고, 2022년 가을의 끝자락을 즐기려던 젊은이들에게 서울의 한 골목길은 축제의 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장소에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한 집단적 희생이 일어났다. 2016년 세월호의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특정 장소는 애도의 공간으로 계속 기억될 것이다. 사회적 원인을 가지는 사건에 대한 기억은 정치적인 행위가 되기도 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들을 대신해서 엔트로피처럼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기억을 애써 재구축한다. 장소와 기억의 관계는 현실 속에서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수많은 기념비나 기념장소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2022년 가을 문화비축기지 T2에서 열린 공간 설치와 퍼포먼스 공연 [샐러드 볼(Salad bowl)]은 작가의 10여 년 전 호주 사막에서의 기억을 소환한 작업으로, 작품 속 원주민들의 기억까지 더한다면 수많은 가닥의 기억들이 다루어진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전시장이자 공연장에 들어가는 입구에 투사된 오래된 만화영화 이미지다. 작품을 보기도 전에 관객들의 기억은 활성화된다. 70년대에 제작된 만화라서 지금의 기술적 기준으로 본다면 허술하기 그지없지만, 이후 대중문화의 근간이 되는 주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상한 나라의 빼삐]는 나쁜 마법을 부리는 마왕과 소년의 대결을 다룬 일본 만화로, 자료를 찾아보니 한국에서는 1977년에 수입되어 지금은 사라진 동양 방송에서 방영되었고, 이후 1984년, 1996년에도 수입되어 다른 더빙으로 방영되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만화영화 주제곡이 기억날 정도인데,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만화 좋아하는 필자의 경우 아마 70년대도 80년대에도 봤을 것이다. 작가의 경우 1976년생이니 그가 본 것은 80년대 상영본이었을 것이다. 여러 번 더빙된 이 만화가 어떤 판본인지는 특정할 수 없지만, 텔레비전 외에 별로 볼 것이 없었던 당시의 어린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을 마법의 세계는 2022년에 다시 호출될 만하다. 각자의 타임라인을 타고 또 다른 마법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에서 특정 기억과 관련된 감성을 자극한다. 작가는 ‘이상한 나라의 삐삐(또는 폴)’을 통해 마법의 관문을 통과하길 바란다. 마법의 문(정확히는 천) 안으로 들어서면 어둑한 가운데 다양한 바위 모양의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고, 그 내부에서 발하는 빛이 마치 공연 중인 타악기에 반응하는 듯 총체적 효과를 자아낸다. 연주가 무르익을 즈음 연주자들은 악기를 포함한 다양한 물건을 관객에게 나눠주고 함께 두들기기를 제안한다. 이전에 기름 저장 탱크였던 원형 무대에 여기저기 놓인 빛을 발하는 덩어리인 [현자의 돌]이라는 고풍스러운 제목을 달고 있지만, 센서로 작동하는 화려한 LED 빛은 타악 연주처럼 원시와 현대를 접목한다. 


호주뿐 아니라 많은 원시인이나 원주민들에게 돌은 그냥 돌이 아니다. 만물에는 영혼이 있다. 조각가로서 훈련받은 작가에게 마법적인 변형을 꾀하는 연금술사에 대한 비전이 ‘현자의 돌’에 겹쳐질 수 있다. 종교의 원시적 형태인 애니미즘은 인간보다 사물(또는 상품)이 더 활기찬 현대문화에도 스며있다. 몇 만 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와 인터넷 같은 현대 문화가 공존하는 시대가 중첩된 곳에서 작가는 현재의 원주민 거처에서 받은 인상(지각)과 언제부터일지 모를 먼 기억과의 조우를 꾀한다. 장소는 기억과 밀접하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장소에 내재되어 있는 기억의 힘은 위대하다’라는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면서, 키케로는 역사적인 현장에서 받게 되는 인상들이 ‘기억의 장소’에서 ‘회상의 장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평가한다. 원주민의 역사가 담긴 의식을 작품화하는 이연숙에게 장소에 얽힌 기억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뿌리 뽑힘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화는 장소와 더불어 기억 또한 사라지게 했다. 그것은 원주민에게 가해진 수많은 폭력의 일부일 따름이다. 얼마 전 캐나다의 원주민 자녀들을 백인 시민으로 교화시키기 위한 어떤 교육기관이자 종교기관에서 훈육을 빌미로 원주민 아이들의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훈육 및 계몽과 죽음에 이르는 폭력과의 관계는 근대사 자체가 비극인 한국에서도 적지 않으며, 그러한 기록이나 기억은 철저히 억압되곤 한다. 그것을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것은 정의로운 역사가들의 과제이겠지만, 사건의 사건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극적, 즉 예술적일 수 있다.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은 세대 간 장소에서 한 가족의 구성원들은 끊임없는 세대들의 고리 속에서 태어나서 무덤 속으로 가는 것임을 강조한다. 유동성에 대한 현대적 요구는 토착민의 기억과 갈등한다. 현대는 마법이나 전통을 경시한다. 


근대화는 장소와 연관된 위력과 마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신축성 있는 의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 사고에서 조상들의 혼백은 유동적이지 않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당신네들이 나를 이 땅에서 내쫓는다면 내가 자식들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따지는 인디언의 말을 인용한다. [기억의 공간]에 의하면 신들의 현재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들은 성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성스러운 장소는 신과 인간의 접촉지역을 말한다. 이연숙이 총연출을 맡은 이 프로젝트는 원시적인 리듬과 모여든 군중의 유희본능을 자극하는 공연 현장에서 조용히 빛을 발하는 ‘현자의 돌’을 침묵 속에서 말하게 한다. 또는 노래하게 한다. 그것은 ‘선조에 의해 문자로 새겨지지는 않았지만 표시된 곳’으로, ‘읽히지도 해설되지도 않고 다만 기억되고 음송 될 뿐인 일종의 성스러운 텍스트’(알라이다 아스만)가 되는 셈이다. 무대 중간에 리듬에 맞춰 번쩍이든 듯한 ‘현자의 돌’이 여기저기 박혀있다면, 무대 저편에는 갈대밭이 연출된다. 


실내에 연출된 갈대밭은 멀리서 보면 그냥 갈대밭처럼 고요하다. 하지만 돌멩이에 금속 줄기로 이루어진 갈대밭이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아름다움]은 센서 장치가 관객이 거닐 때마다 반응하면서 향기를 내뿜는 역동적 작품이다. 기억의 소환에 가장 내밀한 감각인 후각을 자극한다. 작가는 6 만 년 전의 문화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호주 원주민 마을에서 받은 영감에 대해 ‘살짝만 발을 내딛어도 부드러운 흙먼지가 날리는 사막의 붉은 땅, 녹이 슨 철처럼 붉고 결이 고운 흙과 각종 허브, 그리고 사람들의 체취는 그 땅, 내가 서 있었던 장소를’ 떠올린다. 그곳을 기억한다는 것은 ‘마치 나의 온몸에 저장된 모든 감각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 같다’고 한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기억의 서사가 아닌 기억의 감각을 소환하고 싶다’고 말한다. 원주민에게 장소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기억이지만, 대개 그들의 현재는 초라하다. 


세계화 시대에 다문화는 대세가 되었지만, 그것이 상호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진정한 공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한 해 전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2021 프로토타입_기억공간_몸 소리 문 PROTOTYPE_Memory Space_Body Sound Door] 전을 더 구체화 시킨 것이다. 루프에서의 전시는 호주 원주민 여성들의 춤을 재해석한 무용수의 퍼포먼스 영상 작업 [드림 타임]과 흔들리는 깃털 등으로 연극적 풍경을 구성한 설치작업을 공개했다. 작가는 호주 사막의 붉은 땅과 대조적인 인공 이식 식물 모양의 풍선을 만들어 설치했다. 특정 식물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식물의 여러 요소들이 결합한 괴물같은 형태는 붉은 땅 위에 여럿 배치되어 구물구물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이 작품에 대한 원주민 작가들의 답례가 [Women’s dance]다. 원주민들은 가족이 아닌 이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신성한 깃털을 깊숙한 곳에서 꺼내 그것을 이용한 노래와 춤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노래와 춤은 그저 개인적 오락이 아니라, 공동체의 의식(儀式)의 일부다. 집단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킨 후 풀어헤친다는 점은 오락과 의식의 공통점이지만, 의식에는 상징성이 있다. 이연숙이 주목하는 상징은 원주민의 땅을 점령한 백인의 동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온 문화다. 그들에게 늘 상 위협받는 정체성 곧 기억이다. 기억은 문자가 아닌, 꿈과 노래, 그리고 몸짓을 통해 수 만 년을 이어 내려왔다. 꺽이는 대신에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들판의 풀처럼 강인한 부분도 있는 자생적인 문화다. 작가는 여기에 현대의 테크놀로지를 적용하여 현대의 관객에게도 오래된 기억들을 전달하고자 한다. 손으로 직접 만들고 공간과 몸을 활성화하는 식으로 아나로그적 문법을 활용해온 이연숙의 작품은 몇 년 전부터 과학기술자들과의 협업이 필수적인 테크놀로지가 가세한다. 이제 기억이든 소통이든 기술이 중요한 변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출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가연구비평프로젝트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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