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떠도는 자의 희망과 현실
정연두 전 (2023. 9. 6—2024. 2. 2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원더랜드Wonderland 전 (1.11—2.24, 리만머핀 서울)
이선영(미술평론가)
인간은 늘 여기에서 저기를 꿈꾸어왔다. 그 희망은 비록 허구일지라도 강도에 따라 현실에 영향을 주기에 현실에서 비현실의 몫은 적지 않다. 신화와 종교의 시대 이후 대량생산의 시대가 도래하자 인간사회는 이러한 희망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끄 아탈리가 [21세기 사전]에서 예견하듯, 21세기는 유목의 시대이며, 사회적 약자에게는 강제된 유목도 있다. 대부분 고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통의 시대가 깊은 뿌리의 체계인 ‘수목의 모델’을 따른다면, 상대적으로 이동이 잦아진 현대는 ‘뿌리줄기의 모델’(질 들뢰즈)을 따른다. 정체성 또한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 자발적 타발적 유목은 ‘유목적 주체’(로지 브라이도티)을 낳거나 전제한다. 예술에서 변화의 요구는 더욱 강하기에, 유목은 예술가의 정체성이 되었다. 유목은 예술의 길과도 겹쳐지며, 예술가는 떠도는 인간의 운명에 보다 깊이 반응한다. 정연두의 [백년여행기] 전과 [원더랜드] 전에 공통 키워드인 ‘디아스포라(diaspora)’는 오늘날 보편화된 이동을 반영한다. 원더랜드의 작가들은 유학이나 작업을 위해 이동한 경우이고, 정연두는 120년 전 멕시코의 농장으로 간 한인들을 소재로 한다. 이주는 생물학적 종(種)이 진화하는 조건이며, 선사가 역사로 바뀐 이후에 민족도 그렇다. 민족의 서사에는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왔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으며, 이는 한 공동체가 유지되는 근간이 된다. 세계화 시대에 이동은 더욱 자유로워졌지만, 결정적 순간에 나와 타자를 나누는 경계는 민감하게 작동된다. 사회관계 속에 인력만큼이나 척력이 작용하기에 유목은 결코 느슨하지 않다. 누구보다도 경계를 보다 첨예하게 인식하는 이들이 유목민이다. 이곳의 진부함과 가혹함이 그곳에서 해소되리라는 기대가 비관적인 이유이다. 이주를 통해 특정 사회적 자연적 생태계에 던져진 자는 생존이라는 근본 조건을 피할 수 없다.
백년의 여행
큼직하고 색이 진한 이국적 식물 형태가 높은 천정에서 내려오는 정연두 전의 작품은 그중 일부가 스피커로, 그 아래에 서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의 희망과 고통, 그리움 등이 담겨 있는 말이다. 사운드 설치 작품 [Imaginary Song]은 아랍어나 인도네시아어 등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의 낯선 언어와 다른 효과음이 뒤섞여 말보다는 소리로 들린다. [백년여행기]의 소재인 이주민들에 대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동병상련은 그들의 삶을 일일이 재현하려는 불가능하고도 장황한 선택을 피했다. 작가는 목소리, 노래, 연주같은 형식을 동원해 그들을 현존하게 한다. [백년여행기]의 주요 배경인 남미 식물은 이번 전시에서 여러 방식으로 편재한다. 포스터, 작은 드로잉, 그리고 영상작품이 상영되는 주 전시장 곳곳에 세워놓고, 천정에서도 내려온다. 작품 속 인물이 베일까봐 걱정됐다는 날카로운 선인장은 건조하고 뜨거운 기후에 맞게 진화된 형태가 이국적이다. 영상 곳곳에서 드러나는 햇빛 가득한 풍경들은 초현실적이다. 하지만 잠시 여행하면서 경험하는 이국성과 달리, 그 토양에 적응해야만 하는 장기지속의 압박 속에서, 내리쬐는 햇빛과 날카로운 식물들은 결코 심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영상들은 작가가 한인 이민 후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주축으로 서사를 펼친다. 멕시코의 농장에 도착하여 아이를 낳기 위해 여러 번 결혼한 이주여성 이야기는 개인사를 넘어서는 집단의 생존기가 반영된다. 매울 수 없는 서사의 빈자리는 이미지나 소리 등으로 보충한다. 작가는 [세대 초상]에서 거의 사진처럼 보이는 느릿한 영상으로 20세기 초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들이 몇 세대를 거친 후 피가 섞이고 조금씩 달라져 온 후세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춘다. 작품에 이주 한인 4세 여성 ‘마리아’의 모습에는 한국, 러시아, 마야, 노르웨이, 스페인 등 다섯 민족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한다. 최초 이주민의 낯섦은 서서히 융화와 공존의 길로 들어선다.
이들의 초상에는 아파트 등 일상 공간 속의 실제의 삶의 단면을 곧잘 재현해온 정연두의 작품 이력이 반영되어 있다. 마주 보는 구조로 설치된 2채널 영상의 정지화면에 가까운 느릿한 동작은 작품 속 인물들인 한인 후손 2~5세대들의 고정된 일상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변해온 세대의 차이를 말한다. 영상 설치 작품 [백년여행기]에서 한국, 멕시코, 일본의 전통 연주와 소리가 중앙에 영화적 스케일로 상영되는 영상의 서사를 돌아가며 들려준다. 이국성의 주요 코드로 기후와 생태계가 있지만, 문화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말이다. 작가가 선택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멕시코의 전통음악은 언어와 음악이 얽혀 있다. 세 나라가 선택된 이유는 작품 속 주인공들이 1905년 멕시코로 떠난 계기가 멕시코 대농장주들의 대리인과 일본 이민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大陸殖民合資會社)의 결탁이기 때문이다. 무대극처럼 연출된 작품의 전시장은 부대행사를 통해 한일 전통음악의 공연장이 되기도 했다. 작품 [날의 벽]에서는 어릴 적 하교길에서 봤던 신기한 설탕 뽑기가 거대한 공간에 빼곡이 박혀 기념비적 차원을 획득한다. 12미터 높이로 설치된 작품들은 마치 수많은 수집물이 천장까지 쟁여진, 미술관의 선조격인 수집의 방을 떠올린다. 전 세계 농민들의 농기구인 날은 그들의 피와 눈물, 땀에 의해 생산된 산물을 건축적 스케일로 기념한다. 설탕은 향신료 등과 더불어 이주노동 및 노예 시장을 야기시킨 대표적인 상품으로, 일찍이 세계 시장화를 추동시켜왔던 고전적 항목이다. 설탕은 이후 상호적 교환에 내재 된 불평등성을 상징한다. 온도와 습도에 민감해서 줄줄 녹아내리기도 하는 설탕 농기구들은 비극의 역사를 재연하는 듯하다. 작은 무대처럼 꾸며놓은 [백년 여행기-프롤로그](2022)는 100년이라는 거의 한 인생을 차지하는 세월을 일장춘몽의 무대와 비교한다. 누군가의 고난에 찬 인생역정 또한 즐길만한 서사로 변모시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숭고한 진실은 아름다움이 될 수 있으며, 이 전시의 프롤로그가 되기에 충분하다.
원더랜드에서의 유목
Ken Gun Min-LM36503 2022-1988 hr
한국과 한국계 작가 4인의 그룹전 [Wonderland](기획 엄태근)의 주 무대는 남미가 아니라 북미다. 전 세계의 부러움을 받는 최강 국가와 관련된 유토피아/디스토피아, 또는 헤테로피아에 얽힌 환상은 시선을 끄는 강렬함이라는 공통된 분위기를 낳았다. 작품 다수가 튀는 색과 형태들로, 그룹전이라는 형식에서 서로의 영역을 구별해 주는 캔버스라는 틀 만이 넘치는 에너지를 그 안에 잡아 둘 수 있었다. 일상에서 유령 취급을 받는 아웃사이더가 예술계에서 살아남는 방식은 눈에 띄는 것이다. 고국이든 이국이든 무관하게 보다 많은 이들이 타자화되는 양극화의 세계에서 이들이 펼치는 강한 존재감의 전략은 의미있다. 그들은 떠나온 자리에 대해서도 예술적 거리감을 가지고 표현한다. 유귀미의 작품에는 여기에서 저기를 바라보는 시점이 있다. 등을 보이는 미지의 인물은 안내자 역할을 한다.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은 흐릿한 외곽선들로 인해 부드럽게 녹아든다. 이민자의 미래를 향한 여정은 추억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웠다. 경험했어도 정확히 재현하기 힘든 기억은 현실과 허구의 편집이다. 영감을 받은 아들의 그림책처럼 세상은 상상력이라는 필터로 한꺼풀 덮인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왔던 아이의 시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작가에게 축복이다. 외국에서 아이까지 키우는 상황은 고립무원의 세계에 들어서게 했지만, 난관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이가 바로 작가이다. 변화무쌍한 형태들과 화려한 색감으로 가득한 임미애의 그림은 고정된 대상에서 탈주하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있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화면의 모든 층위들이 꿈틀거린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다가오고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그림은 유동적 정체성을 전제한다, 종과 비유하자면 돌연변이다. 한 유기체가 또다른 생태계에 적응하며 진화하는 돌연변이는 예술작품의 유력한 모델이 된다. 10대에 하와이로의 이민 이후 지속적 이동은 팬데믹이라는 정지기간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상황은 제자리에서 떠나는 유목민에게 도약과 비약의 발판이 된다. 신비의 이면은 공포, 유동의 이면은 불안정이다. 그것은 삶의 이면이 죽음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진실의 변주이다. 켄건민의 작품 속 유화에 합체된 자수를 비롯한 대중, 민속, 하위 문화적 기표들의 난데없는 어울림은 전시장이 있는 이태원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축제와 죽음, 시스템과 무정부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이것저것이 그때마다의 맥락에 따라 뒤섞이는 방식은 지역뿐 아니라 시대와 세대 또한 마찬가지다. 유년기의 경험은 물론 회화의 순수성을 위해 배제되었던 신화와 종교, 역사는 내용뿐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병렬되고 덧씌워지곤 한다. 밖으로 드러난 호랑이의 창자를 자수로 아름답게 수놓은 작품은 충격적이다. 썩어가고 죽어가는 것 또한 빛나는 태양 아래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예술이란 작가가 마주하게 된 세상에 관련된 모든 것들, 그것의 필연성과 우연성을 품기에 충분한 탄력 있는 주머니 또는 보자기와 같다. 현남은 기념비로부터 출발했던 조각의 기본 틀을 내부로부터 해체한다. 조각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취약한 재료로 세워놓은 작품은 내부는 강정처럼 비어있고, 물에 뜰 듯 가볍게 보인다. 황폐한 폐허가 담긴 사진을 가운데 배치하고 종횡으로 화면을 짜내려간 작품은 위험을 알리는 기표와도 중첩된다. 폴리스티렌, 에폭시, 시멘트 등 그가 자주 사용하는 산업 재료들은 비록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조각이 아니라 건축이나 도시와 더 가까이 있다. 조각치고 지나치게 회화적인 처리가 돼 있는가 하면, 지상에 굳게 서 있는 견고한 모양새와도 거리가 있다. 재료나 형태 면에서 불안정해 보이는 구조물들은 임박한 붕괴와 종말의 징후를 내재한다. ‘광대한 자연경을 하나의 사물로써 구현하는 축경(縮景)’을 추구하는 그의 방식은 완성이 아닌 구축/해체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출전; 아트인컬쳐 202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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