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신미정, 〈식민지/추억〉, 2015, 싱글채널비디오, 12분 17초 ⓒ 부산현대미술관 소장
냉전 이후 민주화를 통해 각 개인의 기억과 구술도 역사 기술로서 인정받고, 국민국가 시대인 20세기를 지나, 트랜스내셔널 시대로 전환되는 21세기에 개인의 기억은 모국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했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문화유산학자 김현재는 일제 강점기라는 식민-제국주의와 태평양 전쟁을 함께 겪었지만 역할은 달랐던 한국과 일본을 비교한다. 민족주의를 벗으면 개인의 기억은 어디에 속하기 애매한 지대에 놓이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폭력적 역사에 관하여 나 자신, 가족, 또는 공동체는 그 서사에 대해 각기 다른 기억을 기술한다. 반일과 친일로만 이분될 수 없는 식민지 주체에 대한 회색 지대적 관점이나, 일본 히로시마에 관한 전지구적 기억 문화와 상징성에 대한 모호함과 갈등은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대중문화에서 자연재해, 침공, 방사능 오염, 거대 괴물 로봇 등 모든 파괴적 힘의 희생양으로 묘사되거나 디스토피아로 상징된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일본의 아포칼립스적 상상은 히로시마 원폭의 정신적 외상을 반영한다. 주류사회에서 논의될 수 없는 역사, 전쟁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이중으로 겪은 폭력의 억압된 기억에 대한 성찰은 애니메이터, SF작가 등 창작자를 통해 표출된다. 전쟁 후 벌어진 폭력에 대한 기억을 억누르고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간신히 수용된 역사는 ‘과거에 대한 마비된 감각과 현실로부터 도피해 역사적 기억상실증에 갇힌 시간’이다.
일제강점기 전라도 미곡과 자원을 수탈하는 전략항으로 세워진 신흥도시 이리(현 익산)의 지도를 그린 일본인 여성 타무라 요시코의 회상을 담은 신미정 작가의 〈식민지/추억>은 식민지에서 태어난 착취자이자 고향을 추억하는 한 개인의 그리움을 담았다. 동양척식회사 간부였던 아버지를 둔 타무라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일본으로 퇴거 당했다. 하지만 어린시절 고향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상세히 그린 지도 속 거리와 추억을, 신미정은 이제 90대가 된 타무라의 기억에 의존해 당시 풍경을 재구성하고 철저히 개인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끌어 나갔다. 고향에서 내쫓긴 조선인의 착취로 얼룩진 기억과 가해자의 그리움 가득한 순수한 추억이 같은 시공에서 국적을 경계로 교차된다.
채준은 두 살에 이주한 재일조선인으로 독학으로 배워 1945년에 창간된 조총련 기관지에 삽화를 그린 만화가이다. 그의 정치 풍자만화는 차별이 심한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위치를 실감케 하고, 날카로운 풍자는 동포들의 울분에 시원한 소화제 같았다. 그가 게재한 〈서춘보 일가〉는 신민자격으로 본국에 강제동원된 식민지 조선인들을 패전 후 그 자격을 박탈하고 지문등록과 함께 외국인으로 강제 관리한 일본정부를 비판했다. 당시 일본에서 지문등록은 범죄자에게만 국한된 관리행위로,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고 억압당한 재일조선인의 설움을 담았다.
관동대학살의 진실을 알리는 데 평생 힘써온 재일조선인 오충공 감독은 1955년 도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민족교육을 받았으며 영화를 통해 일본 역사 왜곡 문제를 지적해왔다. 관동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후체험 세대인 그가 생존했던 재일조선인 피해자와 일본 시민의 증언을 채록해 담은 기록이다. 한일 과거사 문제로 의제화되지 못했던 조선인 학살 사건을 조명하여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고 국가 일본의 책임을 제기했다 .
역사에 대한 개인의 기억에 있어, 우리는 인류가 공동으로 노력하며 지켜온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 식민지나 전쟁과 같이 갈등의 역사를 일으킨 주체는 비판의 대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를 주도한 집단과 거리가 있는 회색지대 혹은 역사적 교차점 위 개인의 역사는 국가라는 틀을 벗어나 인식될 필요가 있다. 무조건적인 가해자인 일본, 희생자인 한국이라는 이분법 틀에서 벗어나 사람 대 사람으로 각자의 다양한 입장에 귀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
- 김수정(1982- ) 2016 제3회 창원조각비엔날레 큐레이터, 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원 객원연구원 역임. 2014 아마도전시기획상 수상.
FAMILY SITE
copyright © 2012 KIM 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는 서울아트가이드에서 제공됩니다. This page provided by Seoul Art Guide.
다음 브라우져 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This page optimized for these browsers. over IE 8, Chrome, FireFox,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