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도의 그리기’, 회화의 출구
윤진섭 | 미술평론가
샌정의 그림은 ‘주저함’에 대한 진술처럼 보인다. 여기서 ‘보인다’고 한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주저함에 대한 진술이다’라고 쓸 경우, 그것은 너무 단정적이어서 만일 샌정이 어떤 그림을 그릴 때, 주저하지 않고 선을 죽죽 그었다면, 이 진술은 틀린 게 돼 버린다. 그렇다면 그것은 샌정의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독자가 볼 경우 그림의 전체 내용이나 의미를 잘 못 읽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정의 그림이 주저의 산물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림들의 도처에서 보이는 선들과 면, 붓질에 그러한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샌정의 그림 세계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모호함’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이 지닌 모호한 특징은 바로 이 ‘주저함’에서 나온다. 샌정의 그림은 ‘그림은 완성돼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저항내지는 거부처럼 보인다. 완성이란 무엇인가? 캔버스나 종이에 물감을 빼곡히 칠해 빈자리를 남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치 초등학교 선생님이 빈자리를 남기지 않고 다 칠한 학생의 그림을 ‘좋은 그림’으로 뽑아 교실 뒤에 걸어주듯이.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샌정의 그림은 얼핏 보기에 좋은 그림과는 무관해 보인다. 아니, 오히려 그런 그림들에 ‘저항하는’ 그림처럼 보인다. 색을 칠한 듯 만 듯, 선을 긋는 듯 만 듯한 가운데(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언뜻 보면 대충 그린 것처럼 보인다), 무성의하게 그림을 끝내기 때문이다(과연 그럴까?). 샌정의 그림은 대개 회색조인데, 저채도의 바탕색은 때로 ‘때가 탄 것처럼’ 오인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문제다.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인지 때가 탄 건지 모호한 이 경계(예술과 일상의 사이)가 거꾸로 그의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이 대단한 역설!
이것은 그림의 완성이란 개념에 대한 의도적인 ‘훼방’이 아닌가? 샌정의 그림이 어린이가 벌이는 놀이처럼 보이는 까닭도 실은 이 훼방을 통한 유희정신의 발현에서 온다. 아이들이 어떤 형상을 그린 뒤 크레파스로 벅벅 지운 것처럼, 샌정은 ‘무심히’ 붓질의 흔적을 캔버스에 남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린다’는 순수한 행위, 그 자체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샌정의 그림은 순수하다. 그의 그림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아름다움(美)’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는 ‘아름답다’는 그림의 미적 가치에 짐짓 어깃장을 놓는 가운데, 언뜻 ‘심심해’ 보이는 그림을 통해 “그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이 철학적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의 목적은 파리가 파리통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열어주는 데 있다는 의미의 명제를 제시했는데(철학적 탐구), 마찬가지로 샌정은 화가가 그림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모색하는 중인 듯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점, 선, 면, 색의 순수한 조형 요소만으로 근 20여 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그토록 많은 실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부암동에 위치한 프라이머리 프랙티스(Primary Practice)에서 열린 <Formidable Air>전(2024.4.6.-5.19)과 일우스페이스에서 열린 <경이로운 시각>전(2024.4.11.-5.12)을 둘러보면서 샌정의 이같은 회화적 실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샌정은 이보다 앞서 큰 전시를 가진 바 있다. OCI 미술관에서 열린 <VERY ART>란 타이틀의 전시가 그것이다. 이 전시에 출품한 작품들도 기조는 프라이머리 프렉티스와 일우스페이스의 출품작들과 유사했다.
이 전시 중에서 각별히 눈에 띄는 것은 프라이머리 프렉티스에 전시된 설치작업이었다. 꽤 넓은 벽면을 차지한 이 작품은 실로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투명 구슬을 꿰어 만든 길이가 서로 다른 세 개의 줄이 천정으로부터 드리워져 있고, 그 뒤의 흰 벽에 그어진 붉은색과 연녹색의 선들, 그리고 그 옆에 무심히 그은 듯한 청색의 빗금 다발, 그리고 그 아래 맨 밑 하단에 옆으로 길게 그은 갈색의 선의 뭉치가 전부였다. 나는 지금 ‘뭉치’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기실 그 앞에 쓴 ‘다발’이란 말처럼 평면이 아닌 입체를 표상하는 말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 단어들의 사용은 샌정이 이 설치작업을 통해 발언하고자 하는 의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투명한 구슬이 가리키는 입체와 그 옆의 붉은색과 연녹색의 선들이 표상하는 선은 단어의 사용에 있어서 개념의 적확성을 예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왜 ‘다발’이니 ‘뭉치’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 그것은 연상작용 때문일까? 가령, 배추 여러 개를 새끼 끈으로 묶어 다발을 만들었을 때, 배추 다발은 입체 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캔버스 위에 녹색의 물감을 써서 붓으로 마구 그어 추상적으로 표현했을 경우, 과연 그것을 가리켜 ‘다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입체에 사용되는 단어가 평면에도 그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일까?
투명 구슬로 된 세 개의 줄 옆에 그은 붉은색과 연녹색의 두 줄의 선들(똑같은 줄이긴 하되 하나는 붓으로 그은 ‘선’이고, 다른 하나는 입체인 ‘줄’인 점에 주목하자!)은 실재(투명구슬)와 이미지(붉은색과 연녹색의 선들)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면서, 한편으로는 주저와 어긋남에 대해 발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샌정의 사유가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에 맞닿아 있는 것과 같은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샌정의 그림을 ‘철학적 회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이처럼 도저한 그의 사유에서 비롯된다.
다시 모호함으로 돌아가자. 샌정은 한 작가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품에 놓이는 첫 번째 붓질은 작가의 상념과 사유 끝자락에서 무언가끼리 서로 만나 부딪치며 생성된 일종의 모호함이며, 이 모호함의 구체적 형상이 바로 추상이다.”
-샌정, <‘획’의 로맨티시즘>, 아트인컬쳐, 2021년 9월호, 141쪽-
샌정이 자신의 작업세계를 가리켜 ‘추상’으로 정의한 근거가 되는 대목이다.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이러한 사유방식은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있다. 뭔가 애매하고, 주저하며, 말끝을 흐리는, 그리고 때로는 “그런데 말이야.”하며 앞의 말을 뒤집는 대화의 관행은 바로 샌정의 그림을 닮은 듯 한데, 이를 비트겐슈타인적으로 말하면, “사고는 표현과 분리돼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유를 행위로 이끄는 생각의 속도는 어떠한가. “머리 속에서 번개처럼 지나가는”(비트겐슈타인) 생각을 샌정은 과연 어떻게 캔버스 위에 표현하는가? 이에 대한 사유의 기나 긴 과정과 그 안에서 벌어졌을 주저와 망서림, 고뇌에 대한 흔적의 기록이 바로 샌정의 근작인 것이다. 그것은 회화의 0도에 다가가려는 지난한 몸짓이다. 그 몸짓 속에는 무수한 자기부정을 통해 회화의 모든 것을 선, 면, 점으로 수렴하는 가운데 회화를 ‘파리병’ 속에서 구출하려는 샌정의 의지가 담겨있다.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일상언어의 분석을 통해 고상한 전통철학의 한계로부터 철학을 해방시켰듯이 말이다.
나는 장대처럼 큰 키에 비쩍 마른 근육질의 샌정을 볼 때마다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이 연상되곤 한다. 샌정은 말이 없는 편이다. 침묵의 남자인 샌정의 어투는 모호하며, 때로는 어눌하여 깊은 생각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독일에 오래 거주한 사실도 비트겐슈타인을 연상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샌정의 그림에 흐르는 분절의 이미지들은 우주의 공간에 유비된 캔버스 위에서 유영하는 잿빛 그림자들과도 같다. 그것들은 재탄생을 머금은 회화적 시신들이다. 새 생명은 죽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이 묵시록적인 메시지를 샌정의 그림에서 느낀 것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동양과 서양의 미학이 혼효를 이룬 그 묵시적 공간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당대의 회화가 종언에 이르렀다는 ‘침묵의 외침’은 아닐는지? 그리하여 샌정은 자신의 그림처럼 황량해 보이는 침묵의 벌판에서 다시 ‘0도의 그리기’를 시도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림에 서툰 아이처럼 머뭇거리면서 유창과 번지름함,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점철된 회화의 옆구리를 내지르는 샌정의 회화적 제스처는 두고두고 음미해 볼 만 하다. 그것은 과연 회화의 출구인가, 아닌가.
아트인컬처, 2024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