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만 회고전
검은 들에 피운 생명의 꽃들
김영호 미술사가, 중앙대 명예교수
I. 미술사는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다. 과거의 미술품이나 사건 그리고 인물을 현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고 기록한 것이 미술사다. 이 때 현재라는 시간대가 중요한데, 그 이유는 현재의 시선이 사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관점에서 보고 적은 미술사는 그래서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유기적 실체가 된다. 빈센트 반 고흐처럼 어제의 무명작가가 오늘의 유명작가가 되기도 하고 알렉상드르 카바넬처럼 어제의 대가가 역사 속의 잊혀진 인물로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번 제주도립미술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고영만 화백의 회고전은 제주 미술사의 지평을 넓히는 하나의 변곡점으로 보인다. 구순을 앞둔 화백이 묵묵히 걸어온 시공간은 제주를 포함한 한국 근현대사의 궤적과 함께 하고 있다. ‘제주미술의 역사와 발전 방향을 조망하는 기획전’이라는 미술관의 전시사업 취지를 고려해 보면 이번 회고전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영만 화백의 작품 세계를 제주미술의 역사적 층위로 올리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고영만 화백이 나고 자란 제주의 시공간은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격정의 시기였다. 4⋅3과 한국전쟁을 전후해 부모를 모두 여의고 고아의 신분으로 어린 동생과 삶을 살아 내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드라마와 같은 서사가 주어진다. 고난의 시기를 겪은 것이 그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작가에게 주어진 사회적 조건만으로 화백의 성취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영만은 아직 제주 화단이 제모습을 갖추기 이전부터 화가의 길을 선택하고 이 험난한 외길을 걸어왔다. 척박한 시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에 이어 중등학교 교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교육자로서 일상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자신의 예술적 언어로 표상해 왔다. 우리는 화백이 남긴 다양한 작품 시리즈와 독자적인 조형 방식에서 고난한 세태를 극복하고 마침내 자신의 세계를 일구어낸 한 인간의 실존적 성취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II. 이번 고영만 화백의 회고전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모두 75점으로 1980년대 이후에 제작된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화백이 일구어낸 예술적 성취에 주목하고 전시 자체의 격을 높이려는 기획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미술관이 정한 여섯 개의 섹션을 구분해 보면 전시 동선을 따라 <작가의 방>, <자연 시리즈>, <어머니 시리즈>, <본풀이 시리즈>, <생명⋅공존 시리즈>로 정리된다. 그리고 전시장의 마지막 섹션에는 <화우> 3인의 작품들을 소개해 동시대 작가들과의 우정과 연대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고영만 화백의 아우 고재만 화백과 죽마고우로 지내었던 김택화 화백, 그리고 중학교 교사 연수 과정에서 만남이 시작된 부현일 화백이 그들이다.
고영만 화백이 남긴 1960년대의 몇몇 작품은 작가의 행보에 중요점을 시사하고 있다. 작가의 방에 설치된 이들 작품은 표현주의적 경향을 지닌 것들로 화백의 그림에 첫발을 디딜 당시 작가가 품었던 예술의욕(Kunstwollen)의 일면을 보여준다. 1963년에 제작된 <달과 소녀>, <닭>, 1964년에 제작된 <나팔꽃>, <태권도>는 형태의 왜곡과 어두운 색조 그리고 즉자적인 표현 방식으로 작가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실존적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아쉬운 점은 독학으로 미술 세계에 입문했던 섬소년에게 서구에서 유입된 표현주의적 경향을 지속하는 일은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1950-60년에 나로서는 신문에 소개된 미술에 관한 정보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는 회고는 이러한 한계 상황을 전하고 있다.
1970년대에 이르면 그의 작품 세계는 한차례 변화를 보인다. 국가검정고시에 응시하여 미술과 중등교사 자격을 획득하고 중학교에 부임하며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변화다. 작품의 소재로 국자, 다리미, 구덕, 물레, 등잔과 같은 일상적 생활 도구들이 정물 오브제로 채택되었고 기법적으로는 대상의 충실한 묘사에 기반한 고전주의적 화풍을 선택하게 된다. 미술 교사로서 고수했던 대상 재현적 사실주의 작품 경향은 이후 가족과 농부 그리고 자화상에 이르는 인물화에도 예외 없이 지속되고 있다.

고영만, 농부, 116.8x91, 캔버스에 유채, 1982
III.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백의 독자적인 조형적 성취를 거두게 된다. 이번 회고전의 두 번째 섹션에 소개되는 <자연 시리즈>로 제주도의 바다와 포구 그리고 섬을 바라보는 작가의 진솔한 시선을 다양한 화법으로 그린 것들이다. 평론가 김원민은 이 시기의 그림 전반에 대해 ‘사실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과 색채를 중시하는 인상주의의 절충형’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른바 현실적 경험을 중시하는 리얼리즘의 원칙을 따르면서도 빛의 변화와 생동성을 드러내는 선명한 색조를 함께 담아내는 경향이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절충적 조형 방식은 20세기 초반 동경미술학교에서 유화를 배웠던 고희동을 시조로 삼는 한국 구상회화의 특성이자 이후 국전을 중심으로 옹호되었던 서양화 계열의 화풍이기도 했다.
고영만 화백의 자연 시리즈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버전으로 확대된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절충형 화법을 극복하며 독자적인 성취를 거두게 되었다. 화백이 제주풍경 시리즈에서 얻은 독자적인 성취란 시각적 대상에 자신의 주관적 예술의욕을 덧붙이는 방식을 말한다. 이른바 사실풍경의 방식을 넘어 의사풍경(疑似風景)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 방법의 면면을 보면 낟가리를 단으로 묶어 쌓아놓은 눌을 화면에 도입해 지역 특유의 향토성을 드러내는 방식과, 쓰레기로 오염되어 가는 제주의 해변과 포구를 소재로 채택해 환경과 생태의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바람 타는 눌의 다채로운 형상을 비롯해, 뼈를 드러낸 몸뚱아리로 유영하는 물고기, 폭풍에 의해 해체되는 바위산과 초가지붕 풍경도 이 시기에 얻은 성취들이다.

고영만, 훗날 이야기 4, 73x91cm, 캔버스에 유채, 1991
IV. 이번 회고전의 세 번째 섹션에 소개되는 <어머니 시리즈>는 2000년대 이후에 제작된 작품들로 어릴 적에 사별한 어머니를 회고하며 그린 것이다. 넓게 보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제주 여인들의 일상적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화백이 어머니 시리즈를 그리게 된 동기도 소박하기만 하다. “나이가 들어가니 한동안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자꾸 떠올라 그 기억이 나와 함께 사라지기 전에 옛날 어머님들의 생활 모습을 기록처럼 남기고 싶어서”였다. 어머니 시리즈는 육아와 가사를 돌보는 여인들이며 물질하고 밭일을 하고 장터에서 장사를 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2005년 초기의 작품은 앙상한 신체와 몰골의 노인 모습을 묘사한 것들도 있으나 점차 기록성에 중점을 둔 삽화적 성격의 여인상으로 수렴되고 있다. 이들 작품은 2006년과 2007년 탐라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개최한 개인전에 소개되었다.

고영만, 도새기 삽서, 85x118cm, 캔버스에 유채, 2006
V. 이번 회고전의 네 번째 섹션에 소개되는 <본풀이 시리즈>(혹은 <신화 시리즈>)는 어머니 시리즈에 이어 고영만 화백이 말년에 일구어낸 새로운 성취였다. 2005년에서 2016년까지 제작된 50호에서 80호에 이르는 대작 12점이 출품되었는데, 본풀이 시리즈는 화가로서 소명을 가장 열성적으로 실천했던 장르라 할 수 있다. 화백의 작업실 서가에 꽂힌 신화 관련 도서들과 작업 노트들은 이러한 열정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다. 화백은 단상록를 통해 신화 시리즈의 제작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주도 신화는 옛날 제주 어머니들의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힘이었다. 제주인들의 희노애락이 담겨있고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매우 재미있고 상상력을 부추기는 소재다.” “제주 여인들의 생활 모습을 그리면서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무속신을 믿고 의지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고 제주대학박물관에 소장된 소품 10점 밖에 없는 현실이 외국에 비해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신화책을 탐독하고 그리게 되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정형이 없고 무상한 존재로서 신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일은 쉽지 않다. 제주 신화는 무속과 관련이 깊고 제주 신화도라 부를 수 있는 통일된 도상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절 오백 당 오백’으로 소개되는 제주 지역의 전통 문화에 대한 전문적 이해를 전제하고 있어 신화도를 제작하는 일은 고난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영만 화백의 신화도는 제주 신화와 관련된 문헌 연구와 해석에 따라 제작된 예술작품으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화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 정신은 신들의 노예이자 주인’이라는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1904~1987)의 지적은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있는 신화도와 무속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
고영만 화백이 제시한 ‘제주 신화의 신상 표현의 방침’도 흥미롭다. ‘여신의 얼굴은 아름답게, 남신은 근엄하게, 의상은 고풍이 서린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그린다는 등의 기준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화백의 신화도에서 특별히 강조된 부분은 신들의 눈이다. 천수천안(千手千眼)을 지닌 관세음보살처럼 이중 이미지로 그려낸 신들의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듯한 영험한 신력을 전해주고 있다. 눈은 안과 밖을 경계하고 동시에 연결하는 창문과 같다. 눈이 밖으로 향해 열려 있을 때 세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눈이 안으로 향해 있을 때 인물의 심연에 자리잡은 영적 세계를 접하게 될 것이다. 안과 밖의 경계인 눈의 도상이 강조된 고영만 화백의 신화도는 생노병사와 희노애락의 서사를 담아내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고영만, 구삼승할망, 136×95cm, 캔버스에 유채, 2007
VI. 이번 회고전의 다섯 번째 섹션에 소개되는 <생명⋅공존 시리즈>는 고영만 화백의 일구어낸 침선화 기법과 더불어 또 하나의 개성적 성취라 할 수 있다. 침선화란 화백 자신이 명명한 기법으로, 튜브 물감의 주둥이에 주사기 바늘과 같은 니들펜의 펜촉을 장착해 물감을 짜내며 그린 선묘화다. 주사기 바늘을 이용한 드로잉은 현대미술의 몇몇 작가들의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법이지만 고영만 화백의 경우 형상을 나타내는 선묘에서 시작해 선의 자율성 차원으로 확대되며 얻은 조형 방식이라는 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화백의 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과 생명 그리고 생태의 본성적 구성 요소가 선이라는 점을 자각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한다. 이후 그의 작업에서 선은 신체의 신경망이거나 실핏줄 그리고 근육 조직이 되기도 하고 곤충의 날개 혹은 나뭇잎의 잎맥 구조를 나타내는 이른바 존재의 원형적 요소로 다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그의 선은 타오르는 촛불 주변에 퍼지는 빛으로, 혹은 향로에서 피어나는 연기의 표상으로 확대되었고 그의 화가 노정에서 가장 독창적인 성취라 할 수 있는 알 작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고영만 화백의 알 작업은 생명⋅공존 시리즈의 백미라 할 수 있는데, 문자 그대로 생명과 공존의 원형적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침선으로 짜여진 꽃잎과 깃털들은 알의 형상과 어우러지면서 초현실적 세계로 보는 이들을 안내해 준다. 그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새로운 차원으로 재편되고 나비와 꽃이 하나가 되며 흙과 나무가 뒤엉켜 있는 영역이다. 작가는 이를 생명의 공간으로 부른다. 그리고 화백은 이들 작품에 접속하는 키워드로 묵시, 조화, 생기, 감응, 대화, 재생, 신비, 온기, 관계, 기운, 연속성, 정중동, 상처, 기쁨 등의 제명을 붙여 놓았다. 내가 구름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나무가 되는 그의 작품 세계는 무상과 무아 사상에 기반한 불교의 공철학을 떠오르게 한다.
고영만 화백의 침선화 기법은 이후 다시 변화되며 나이프 터치를 이용한 작은 면의 조형 방식으로 이어진다. 육체적 노동의 한계에 따른 변화라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그의 화면 공간에 또 다른 미학적 의미를 선사해 주고 있다. 침선 기법이 나이프 터치 기법으로 바뀌면서 고영만 화백의 실험적 노정은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예감케 해 준다.

고영만, 생명의 보금자리-공간, 45.5×60.6cm, 캔버스에 유채, 1994
VII. 이상에서 보듯 고영만 화백의 예술 노정은 자신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 정리된다. 제주라는 특수한 지역을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이자 그와 함께해 온 제주 문화에 대한 서사가 다양한 시리즈 작업에 오롯이 담겨있다.
최근 필자와의 대담에서 화백은 자신을 ‘검은 들’에 비유한 바 있다. 자신의 아호를 나현(羅玄)이라 하고 (한자의 원 뜻과는 달리) 검은 들이라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해 왔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과 자신의 화업 인생을 스스로를 규정하려 하는, 겸손하면서도 진지한 심사가 담겨있다. 들은 마을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는 장소이고 산이나 언덕과는 달리 식물이 자라기에 알맞은 공간이다. 하지만 화백은 이 들에 ‘검은’ 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그 의미를 변주해 놓았다. 검은 들은 거칠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벌판의 의미로 다가온다. ‘만주 시베리아 벌판’과 같이 식물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며, 사람의 발길이 뜸하거나 아예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을 일컫는다.
고영만 화백이 자신을 들과 벌판의 경계에 위치시키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들의 풍요로움과 벌판의 척박함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화백의 인생 노정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그는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살아온 화가였으므로 그가 남긴 작품들은 시대의 자식으로 우리들 앞에 놓여 있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거슬러 그의 인생 노정을 추적해 내고 그가 살았던 제주의 아름답고도 고난한 시공간을 반추해 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작품들은 제주 미술사에 핀 꽃이라 할 수 있다. 그 생명의 꽃은 오늘 우리가 정주하고 있는 터의 생명과 생태와 환경 그리고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는 열매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이다.
2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