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AL](3)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미술사 무엇을 남겼나
글, 사진. 김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

제1회 국전포스터 1949, 디자인코리아뮤지엄 박암종관장 소장
※ 제1회 국전이 포스터는 11월 15일부터 12월 14일이지만 실제 전시는 11월 21일부터 12월 11일까지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가 폐지된 지도 42년이다. 1982년 1월 16일, 당시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은 신인 공모 위주의 대한민국미술대전을 창설하여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하고, 재야작가를 포함해 국전에서 배출된 기존 추천 초대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현대미술초대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게 한다는 국전 폐지 이후 운영 요지를 발표했다.
이로써 1949년 1회를 시작하여 한국 전쟁으로 3년을 중단되었다가, 1953년 2회부터 1981년까지 30회를 마지막으로 국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많은 화제와 잡음을 불러일으켰으나 미술가의 등용문으로 한국 미술사를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제도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현대미술초대전은 1982년에서 1991년까지 이루어졌고 대한민국미술대전은신인 공모전의 위상은 사라지고 올해 43회 전시가 여러 부문으로 나누어 서울을 떠나 성남아트센터 갤러리 808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5월 제13회 국전작가협회 회원전이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에서 사단법인 국전작가협회(이사장 양태석) 주최로 열렸으며 140여 명이 출품하여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국전은 당시 1년 중 미술계의 가장 큰 행사로 수상 결과는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대통령상 수상자는 화제의 인물로 부상했다. 개막식에는 이승만대통령, 박정희대통령이 참석했고 중고등학교 학생 단체관람이 줄을 이었다. 국전 시대에 규정된 특선, 입선 횟수로 정해졌던 추천작가, 초대작가를 사회적으로 작가 평가의 바로미터로 삼았던 시대 또한 길었다. 수상작가는 교수, 교사 채용에도 높은 점수를 얻고 일반적으로 유명작가로 통용되었다.

제1회 국전좌담회 부분, 문예 1950, 신년특대호
국전 제도의 변화 / 사건
1949년 9월 문교부 고시 제1호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규정’이 공포되었다. 대상은 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 서예 5개 부문으로 11월 21일부터 12월 11일까지 경복궁 국립미술관에서 국전이 시작되었다. 1955년 국전에선 제6부로 건축을, 1964년 제7부로 사진을 신설했다. 1961년 국전 운영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미술평론가 이경성과 방근택이 심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참여했고 60세 이상의 대가급을 고문으로 추대하여 말썽 많던 심사위원을 중임 대상으로 배제하고 대통령상 수상자에게 해외여행의 특전을 주었다.
1968년 정부 기구 개편에 따라 국전은 문교부에서 문화공보부로 이관되었다. 1969년 신인 대통령상에게 주던 해외여행 특전이 신설된 초대작가상 추천작가상 2명에게 주어지는 부상으로 바뀌었다. 특히 대통령상과 국회의장상을 서양화와 조각 비구상 작품이 차지하여 한국미술계 주류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1970년 국전제도연구위원회가 구성되어 건축·사진부는 별도의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74년에는 국전 운영규칙을 개정하여 봄과 가을 두 번 국전을 운영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봄 국전에서는 제2부: 조형적 추상적 경향의 동양화, 서양화, 조각, 제4부: 공예, 건축, 사진을 선보였고, 가을 국전에서는 제1부: 구상적 사실적 경향의 동양화, 서양화, 조각, 제3부: 서예부문 전시를 가졌다. 1977년 국전은 봄 국전에서 3부와 4부를, 가을 국전에서 1부와 4부를 전시했다.
1979년 11월 국전 운영업무가 문화공보부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다시 이양되었다. 1980년 문예진흥원은 과도기적인 국전 개최 요강을 발표하여 종전의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문공부장관상을 없애고 각 부문에 대상을 시상하는 형태로 바꾸었다.
국전은 크고 작은 사건, 논란이 많았다. 1949년 1회 국전에서는 김흥수의 <나부군상>이 여러 사람의 나체를 한 화면에 그리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작품이 철거되었다. 심사에 반발하여 열린 낙선작가전이 1954년 동양화부, 1967년동양화부, 1971년 서예부에서 있었다. 1956년심사위원 선정과 관련 대한미협측이 국전을 거부했고 이는 서울대와 홍익대 출신 갈등으로 비춰지며 세력다툼으로 비화되었다. 1978년 대전여상 체육관에서 열린 국전 수상작 순회전에서 58점이 도난당한 큰 사건이 있었고 범인을 끝내 잡지 못했다. 1981년 국전 건축 부문 대상이 일본 대학생작품의 표절로 3년 후 밝혀지며 수상 기록이 말소되었다.

가칭 대한민국미술제 규칙,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0
국전 폐지를 앞두고 가칭 대외비 문서 ‘대한민국미술제’ 규칙
연재, 이규일 <사건 국전 30년> 『주간중앙』, 1981.10-12
이러한 국전을 둘러싼 문제점을 가장 심도 있게 다룬 자료는 중앙일보 기자 언론인 이규일(1939-2007)의 증언과 통계를 통해 특별 연재한 <사건 국전 30년>으로, 1981년 10월 4일부터 12월 20일까지 12회를 통해 비리를 파헤쳤다. ① 주도권을 놓고 싹트는 화단의 반복 '친일'명분을 내세워 헤게모니 다툼, ② 심사에 반기를든 낙선작품전, ③ 서울대와 홍대가 낳은 미협 분규, ④ 입상작 시비, ⑤ 심사소요, ⑥ 부조리 사례, ⑦ 장외 국전, ⑧ 작품 도난, 파괴, ⑨ 작가들의 비판 관전의 획일전 주제 탈피, 전위 수용 등, ⑩ 추천작가 영입 공적 조항 적용 10회 23회때 무더기 영입, ⑪ 단골 심사위원과 특선작가 (상), ⑫ 단골심사위원과 특선작가 (하). 이 연재물은 1993년 이규일 <화단야사 – 뒤집어 본 한국미술> 단행본에 수록되었다.

제6회 대통령상, 임직순, 좌상 1957
좌담, 『문예』, 1950년 신년호, 171-179쪽
건국 이래 처음 개최된 국전을 평가한 <제1회 국전을 말하는 미술 좌담회>가 1950년 『문예』 신년 호에 9쪽에 걸쳐 게재되었다. 1949년 11월 27일 명천장에서 화단 측 참석자는 장발, 배운성, 남관, 최재덕, 이쾌대, 박영선이 서양화, 이응노가 동양화, 강창원이 공예 부문이었고 문단 측 에선 김동리, 조지훈, 본사 측에선 조연현, 이종산 12명이 참석했다. 이러한 모임을 계기로 문학과 미술과의 깊은 교류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생 각하여 소설가 김동리, 시인 조지훈을 특별히 초청 참석케 한 것으로 밝혔으며 사회는 김동리가 맡았다. 좌담 내용은 양화부에 대하여 / 개별적인 작품 인상 / 특선과 입선작에 대하여 / 심사에 대하여 /기타의 인상 깊은 작품 / 공예에 대하여/ 조각에 대하여/ 서도에 대하여 / 제2회 국전에 대한 요망으로 당시 오고 간 발언들이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에는 미인화가 너무 많다, 국전 성격의 양식, 부문별 심사위원 숫자, 나전칠기의 아쉬움, 자수의 창작력 부족, 윤효중 작품에 대한 평가 격차, 서예를 공예 장르에 포함하자는 의견 제시, 전시장 채광 문제 등이 언급되었다.

제7회 국전개막식, 1958 조무하 기증
중앙 이승만 대통령, 우측부터 고희동, 이종우, 이상범, 송병돈, 이병규, 김인승, 노수현, 김종영, 배렴, 장우성, 윤효중, 이마동, 박득순, 이병직, 최석우, 이순석, 문교부장관 최재유 (이대통령 좌측)
국전의 방향, 김병기, 『사상계』, 1961년 12월호, 320~325쪽
미술평론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 미술 비평가 직함으로 김병기(1916-2022)는 국전 운영제도가 단행된 1961년 「국전의 방향- 아카데미즘과 아방가르드의 양립을 위하여」를 남겼다.
1년에 한 번쯤 국전과 같은 축제 분위기도 좋지만, 예술의 전관에 있어 첨예한 외침, 타협 없는 주장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축제의 분위기에선 절충과 중용 적당한 선이 자리 잡게 된다. 치열한 예술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미술문화 정책은 의식·무의식중에 보수에 치우쳤고 신진 세대의 실험은 백안시되거나 몰이해에 처했다. 하지만 국전은 보수와 전위를 얼버무림으로써 양화부의 구상과 추상과 반추상을 삼과제로 분류하여 빈약한 점을 꼽았다.

제19회 대통령상 김형근 상장 1970
국전의 검은 백서, 박서보, 『월간중앙』, 1968년 10월호, 304~315쪽
박서보(1931-2023)는 우리 현대미술 운동에 앞장섰던 작가로 1968년은 국전이 문교부에서 문화공보부로 이관된 해였다. 용감했던 박서보가 기고한 12쪽의 내용은 발표되지 않은 항목 / 예술원의 판정승 / 사문화의 부활제다 / 몰염치한 사실의 폭거 / 추상은 예술이 아니다 / 돈키호테의 시행 / 공개된 비밀들 / 60년대식 뒷거래 / 정상수업할 수 없는 국전 계절 / 문공부는 보았을 것이다 / 수구와 전위를 나누라 / 작품심사를 공개하라 로 서술했다.
고착화된 국전의 풍토가 출품하려는 작가, 그 가운데 젊은 세대에게는 평소의 작업을 버리고 출품용 작업을 하게 만든다. 이는 국전이 미술 문화 진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버섯을 따게 하는 현상이라고 비판했다. 또 추상계의 부상으로 기존의 구상작가들 또한 추상으로 작품 전향이 일어나고 있으며 추상 작품의 출품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추상 작품들이 아카데미즘의 기치 아래 구상 작품의 시녀 노릇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전에서 추상 부문 국전은 관전으로 아카데미즘, 사실상 구상계열이 우세하여 추상미술의 진입이 늦어지며 반발에 부딪혔다. 1956년 5월에 동방문화회관에서 열린 4인전에는 홍익대 출신의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박서보 4인이 참여하여 전시장 앞에 ‘반국전선언’을 공표했다. 당시 한국 미술 화단이 국전 중심으로 아카데미즘 답습에 대한 신진 작가들의 저항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국전에서 성행한 사실적인 경향에 반대하였으며 새로운 소재, 기법의 개척, 대담한 미학 모색, 국전의 낡은 가치관에 반항하여 열기를 더해갔다. 1957년 본격적인 괄목할 활동을 보여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창작미술협회, 신조형파, 백양회가 창립되고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이 시작된 현대미술이 출발한 해이다.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타려면 인물 좌상을 그려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전에서는 아카데믹한 사실적인 그림이 대우받았다. 이러한 냉대 속에서 1965년 14회 국전에서 조각 박종배 추상<역사의 원>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69년 18회 서양화 박길웅 <흔적 백 F-75>와 1972년 21회 서양화 표승현 <적>이 수상했다. 1974년 구성과 비구상이 국전에서 분리되며 그간 재야작가로 있던 동양화가 송영방, 전영화, 정탁영, 서양화가 박서보, 정영렬, 조용익, 하인두, 윤형근, 전성우, 하종현, 조각가 이종각 등이 비구상 추천작가로 국전에 대거 영입되었다. 1975년에도 서양화가 김종학, 윤명로, 정점식, 조각가 김영중, 김영학 등이 영입되었다.
1974년부터 국전을 봄가을로 분리하고 23회 서양화 유희영 <부활>, 1975년 24회 서양화 강정완 <회고>, 1977년 26회 서양화 이반 <팽창력-겨울>, 1978년 27회 동양화 황창배 <비 51>, 1979년 28회 조각 한창조 <역사의 문>이 각각 대통령상 영예를 차지했다. 1980년 29회부터 대통령 시상제는 폐지되고 부문별 대상으로 동양화 이석구 <잔영>, 서양화 김진석 <그림자802>, 조각 이상갑 <간 80>, 1981년 30회는 동양화 오숙환 <휴식>, 서양화 박재호 <사변의시>, 조각 전국광 <매스의 비> 수상을 끝으로 국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18회 대통령상, 박길웅, 흔적 백 F-75, 1969
국전의 관련 자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국전 자료로 도록 전권, 팸플릿 33종, 상장, 메달 14종, 위촉장, 입장권, 사진, 문서 다수와 스크랩북 3권 외에 『역대국전수상작품도록과 역대 국전자료집』 국립현대미술관, 1977년, 바른손, 『국전30년』 한국근대미술연구소, 1981년, 수문서관, 『국전의 내력과 문제점』, 이경성, 사상계 1968.7. 『국전 34년의 시말서』 김광협, 신동아 1982.5. 등이 소장되어 있다.
국전의 연구와 출품작품을 찾을 때 입선 이상 작품이 실린 국전 도록은 제1회에서 제5회까지는 발행되지 않았다. 제6회 도록 뒤에 1~5회 입상작품 목록이 실려있다. 7회 도록은 발행되지 않았고 8회부터 30회까지 24권이 발행되었으며 모두 소장했다. 도록이 발행되지 않은 작품 도판의 경우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잡지에서 국전 1회는 『국제보도』 22호 1950년, 3회는 『국제보도』, 1955년 1월호, 5회는 『신미술』 1956년 12월호, 6회는 『국제보도』 39호 1957년, 7회 수상작은 『신미술』 1958년 10월호에서 상당 부분 살펴볼 수 있으며 신문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