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차정숙/작가의 정서를 담아내는 색채로 빚은 추상적 화면

하계훈




작가의 정서를 담아내는 색채로 빚은 추상적 화면


하계훈 | 미술평론가

예술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보다도 창의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창의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음악 공연자는 연주에 몰두하고 화가는 그리기에 집중한다. 화가는 기본적으로 형태 묘사에 능하면서 색채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재능이 화면 속에서 재현과 상징으로 잘 전달될 때 관람객들은 그의 작품에 깊이 감동하게 된다.

차정숙은 소묘와 채색에 재능을 두루 갖춘 작가다. 초기작에서 주로 수채화를 통해 자신이 가진 묘사력과 색채 감각을 증명해 보인 작가는 한때 판화로까지 조형 탐구의 범위를 확장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서 유화와 아크릴로 재료를 바꾸면서 작가의 작품 안에서는 묘사를 단순화해 가며 이미지의 요체(essence)만을 걸러내는 추상화 작업으로 향해가고 있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상(abstract)이라는 것이 원래 생선 살을 발라내듯이 먹을 수 있는 것, 본질적인 것만을 남기고 부수적인 것들을 걷어내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결국 예술 활동의 경력이 길어지고 조형적 사유의 깊이가 깊어지면서 작가의 작품이 이러한 추상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회화에 있어서 추상화 과정은 형태의 단순화와 색채의 평면화로 수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실적 재현에서 시작하여 점차 변화 과정을 진행해 온 차정숙도 작품의 추상화 과정에서 묘사의 단순화와 색채의 단일화, 그리고 때로는 그리기가 아닌 뿌리기나 실크스크린 기법의 전사(轉寫) 등의 다양한 표현 기법을 실험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고 나서 차정숙의 최근 작품에서는 다른 조형 요소보다도 화면 가득 색채의 향연이 벌어진다. 

차정숙에게 색은 감정을 전달하는 기본적인 도구이자 비문자적 시각 언어다. 구상과 추상적 색상의 결합을 통한 색채의 변주, 색상의 심포니는 예술을 포함한 우리 삶의 핵심적 사유와 체험에 관한 불필요한 수사학을 없애고 직관적 깨달음으로 주제의 핵심에 다다르게 해준다. 그러므로 캔버스를 마주하는 작가의 색에 대한 감각은 대단히 예민할 수밖에 없으며 그 어떤 표현 재료보다도 공들여 작품 속에 자신의 감각을 적용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오로지 색(면)에 의해서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고 명상과 사유로 인도하는 작품을 구사하던 대표적인 작가들 가운데에는 1950년대 미국의 색면추상회화(colorfield painting) 작가들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가로 꼽을 수 있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는 “색상은 표현의 언어이며 심리적, 종교적 경험으로서, 보는 이가 울음을 터뜨릴 수 있게 만들어준다”라고 했다. 이처럼 회화에 있어서 색채는 상징적 언어이자 정서적 흡인력(吸引力)이 강한 도구인 것이다.

먼 산을 배경으로 숲과 나무가 전경을 장식하고 그 배경에 하늘이 상부의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의 캔버스를 멀리서 바라보면 몇 개의 색면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화면이 읽힌다. 그리고 다시 화면에 한 발 더 다가가면 그 안에는 작가가 원색의 변주를 통해 조색(調色)해낸 색면을 배경으로 수많은 색의 파편이 공명하는 색상의 장이 펼쳐진다. 앞줄에 선 간략한 나무 형상들이 조금씩 크기를 줄이며 색점이 되어 뒤로 물러서는 형태 원근법적 표현을 제외하면 간략한 점묘법 형식으로 숲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대형 화면은 붓놀림이 힘차면서도 대담하다. 

색상 면에서 동일 계열의 미묘한 색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채로 병치 됨으로써 나타나는 효과를 통해서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의 망막에는 전체 이미지가 깊숙이 스며들면서 마음의 눈을 자극하고 감수성을 잔잔하게 피어오르게 해준다. 사실 작가는 물리적 공간으로서 전면(前面)을 암시하는 화면 하단부의 나무들이 원근법적 깊이감을 느끼기보다는 화면 중심부의 색면에서 하단으로 파생되는 경계를 좀 더 부드럽게 해주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차정숙의 산은 세잔(Cezanne)이 바라보고 연구하여 자신의 작품에 담은 산과 조금 다르게, 입체감이나 색온도에 따른 원근법적 표현과는 거리를 유지하며 보다 평면화되고 추상화된 상징성을 띤다.

작품에서 작가가 산을 모티브로 삼게 된 계기는 여행 중에 우연히 바라본 작가의 시선이 산그늘의 이미지와 만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마주치게 된 우연한 인상은 작가의 어린 시절 고향의 산들을 떠올리게 해주고 그곳의 나무들에 얽힌 추억을 소환해 주게 된 것이다. 창작자에게 묘사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감정이입이 주는 표현의 깊이와 설득력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체험이 세련된 조형 어법을 통해 관람자와 성공적으로 공유될 때 작품은 더 소중한 가치를 지니게 되고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차정숙 작가의 화면에서는 넓은 색면을 배경으로 간략화된 수많은 나무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작가에게서 이와 같은 반복은 무엇일까? 작가는 나무의 형상 하나하나를 표현하면서 삶과 예술에 대한 다양한 화두를 사유했을 수도 있고 때로는 무념무상의 경지를 경험했을 수도 있다. 나무를 통해서 자연에 내재한 정신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대상의 몰형식성이 시각적 표현뿐 아니라 우리의 정서와 추억 등 각종 정념(情念)을 촉발하게 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차정숙의 산은 작가에게 예술의 시작이자 전부인 존재가 되는 셈이다.

작가는 다시 산의 이미지에서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나무의 잎들까지 좀 더 근접 관찰하는 태도로서 새로운 모티브를 도입함으로써 화면에 변화를 주며 새로운 질감을 도입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작품의 기본은 색채에 있고 그러한 색채의 추상적 상징성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차정숙의 작품에서는 작가가 숭고미를 의식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면적으로 물든 색채와 작가의 정서의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칸딘스키가 말한 것처럼 “회화에서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재현이 아니라 추상”이라는 말은 마크 로스코가 말한 것과 같이 (예술가가 사용하는) “색은 객관적 맥락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주제가 된다”라는 말과 함께 차정숙의 작품 읽기에 길잡이가 되는 참고 발언으로서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