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권이 뮤지엄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다. 학교와 멀지 않은 간송미술관에서 봄가을이면 열리던 정기 전시회를 빠짐없이 관람하면서다. 안견, 공민왕, 김창규, 겸재, 혜원, 단원, 오원 등의 작품과 우리 민족의 예격을 묵묵히 말해주던 수많은 공예품은 그에게 묵언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미술관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한 개인의 헌신으로 수집된 우리 민족 정체성의 정수를 근간으로 조성되었음을 선생님을 통해 듣고부터는 보화각(葆華閣, 간송미술관의 별칭)과 작품이 더욱 또렷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더해 미술관의 설립자가 김용권이 다니던 보성고등학교를 있게 한 장본인이고 그의 아들 전성우가 교장 선생님이라는 사실은 동질의식과 함께 자긍심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보성고등학교 재학 시절_상단 우측 김용권 관장
김용권이 학업을 마친 후 작가의 길을 걷고부터 줄곧 ‘전통에서 오는 소리’를 명제로, 초기 한복 입은 여인상과 아리랑에 매료되었던 것과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석탑, 삼국시대 토기 등을 연상케 하는 최근 작품은 이때 받은 감흥과 무관치 않다고 말한다. 전형필 선생에 의해 이어온 학교와 미술관인 만큼 당시, 학교와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혜화동과 성북동의 분위기는 특별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이후 교육자와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범대에 진학해 서양화를 전공했다. 대학원에 가서는 경희대중앙박물관에서 조교와 서 화류를 담당하는 학예사로도 일했다. 그러다 같은 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세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아 민화를 테마로 한 첫 번째 박사학위자가 되었다. 이후 작품활동과 대학에서 강의했다.
김용권은 추후, 겸재정선미술관이 개관(2009)해서부터 관장직을 맡아 오다 재임 중에 유명을 달리한 스승, 미술사학자이자 전 경희대 교수 이석우 관장(1941-2017)의 뒤를 이어 제2대 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특히, 뮤지엄은 해당 역사와 콘텐츠를 발굴하여 현양함이 결코 변해서는 안 될 문법임에도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려는 어리석은 사례가 은근히 있어 왔다.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는 알량한 셈법에서다. 그의 작품이 전통에 뿌리를 박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던 김 관장은 먼저 선대 관장이 추진해 온 ‘내일의 작가상’, ‘명사특강’과 같은 유업부터 공고히 하는데 진력했다. 이를 위해 미술의 모든 장르까지 포용했으며, 김형석, 이어령, 유홍준, 유인촌, 최광식, 배기동 등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을 강사로 초빙하는데 성심을 다했다. 일개 구립미술관으로서는 결코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행보다.

겸재정선미술관 구성원_하단 우측 두번째 김병희 원장, 네번째 김용권 관장
한편, 미술관은 개관할 때 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다. 뒤늦게 출범한 데다 겸재의 원화를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책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이유야 어떻든 기념관의 지엽적인 인식과 제한적인 활동은 시민들에게 큰 매력을 갖지 못하게 했고 그만큼 기억의 휘발성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경희대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을뿐더러 영국에서 유학하며 현대 뮤지엄 체계를 잘 꿰뚫고 있던 이석우 관장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이 관장의 염원이 결실을 본 것은 문을 연 지 5년이 되어서다.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담당 관서를 찾아 변경등록을 통해 명칭을 미술관으로 바꾸는데 이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책과 예산이 뒷받침되지 못해, 조직이나 내부 환경까지는 개선하지 못하고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김 관장은 하드웨어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미술관에 맞는 소프트웨어부터 다져 나가기로 했다. 먼저 국제전에 주목했다. 한국, 중국, 대만 3개국 작가전을 열었고, 해외에서 주목받는 우리나라 작가들을 초청한 전시는 큰 호평을 얻기도 했다. 미술관의 문호를 현대 민화로까지 확장했다.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가장 잘 살아있는 민화에 겸재의 성리학적 사상과 진경의 세계관을 습합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민화는 모방과 답습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주목받지 못해왔다. 그것이 민화인데도 말이다. 정신과 철학이 필요했다. 민화 작가들과 관람객의 반응은 뜨거웠고 미술관의 포용적 기능이 고무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아울러 겸재를 추앙하는 작가들로 결성한 겸재 작가회는 한강을 중심으로 겸재가 구현해 낸 진경 정신을 지금도 오마주(hommage)해 가고 있다.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해서는 겸재 연구회를 조직했다. 겸재를 중심으로, 동시대 작가들의 예술론과 작품세계를 연구해 논문과 학술지를 발표하고 있으며, 이를 종합한 연구서도 발간할 계획에 있다.
미술관이 가장 중점을 두었던 또 하나는 자원봉사자그룹이다. 이들은 오전 오후 스스로 봉사에 참여함으로써 미술관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일반인과 학생을 구분하여 정기적인 교육을 통해 양성되고 있는 해설사는 시민들에게 큰 호평을 얻고 있다. 미술관의 파워는 소장품의 양과 수준에서 나온다. 6-7점에 불과했던 겸재의 원화는 김 관장이 재임하는 동안 직접 소장과 기탁자료를 합쳐 30여 점까지 늘었다. 이중 겸재의 〈사문탈사도〉(寺門脫蓑, 절문에서 도롱이를 벗다) 등 7점의 작품을 비롯해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남리 김두량 등 조선 후기 대표 화가와 명나라 오위(吳偉, 1459-1508)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10점 등 42점이 수록된 〈10폭 백납병풍〉은 문화재급으로 평가된다.

겸재의 진경의 길 답사 ⓒ 2018
2020년에는 미술관 입구에 겸재 공덕비와 겸재 상(像)을 세웠으며 겸재의 중요작품을 망라해 재정리한 도록도 발간(2023)했다. 이렇게 축적한 결실로, 2022년에 와서야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명실공히 미술관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지금의 미술관이 있기까지 많은 분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특히, 김병희 강서문화원 명예 원장님의 후원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고 이석우 관장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관장님이 세워주신 초석 위를 저는 그저 빗자루질 몇 번 하다 만 게 고작입니다.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8년 가까운 시간을 봉직하다 겸재를 떠나며 가졌던 마음을 그는 다시 끄집어냈다.
필자가 아는 김용권은 낭만 가이(Guy)다. 자작시(自作詩)가 여러 편이나 되며, 그 시어로 40여 곡의 노래도 작곡했다. 여흥이 있는 자리에서는 기타를 메고 자작곡을 거침없이 불러대곤 한다.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가졌던 개인전(2008) 때는 축하객들까지 바닥에 앉아 막걸리에 파전을 놓고 질펀하게 시 낭송과 노래로 격식을 깼던 오프닝 세레모니를 선보이기도 했다. 김 관장은 미술관도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미술관론이다.
- 김용권(金容權, 1958- ) 미술사학자이자 화가. 경희대 사범대 미술교육학 학사, 동 대학원 석·박사(문학박사). 경희대중앙박물관 학예사·경희대현대미술연구소 연구원·한국조형교육학회 이사·한국박물관협회 국고보조금 사업 평가단장·경희대교육대학원 교육자과정 주임교수·겸재정선미술관 관장 역임. 한국현대민화연구소 대표, 월간민화 편집고문. 『신개념미술교육론』, 『민화의 원류, 조선시대 세화』, 『우리 관화·민화 101가지 뜻풀이』 등의 저서와 「겸재정선의 산천재도연구」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으며, 27회(해외전 16회)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