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몸의 표정을 한 도시 거주자들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네모와 육면체의 도시 공간
이슬아의 작업이 선보이는 주제 의식은 최근 개인전인 《네모 안의 너와 나(You and I in the Square)》 (이길이구 갤러리, 2023.11. 4 - 30)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피상적으로는 네모로 표상되고 실제로는 육면체인 ‘도시 빌딩 안의 너와 나’와 연동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육면체의 ‘도시 빌딩’을 미적 대상으로 삼아 캔버스나 종이라는 평면에 네모의 형태로 남기는 회화와 관계한다. 즉 그녀의 작업에서 ‘네모’란 3차원의 현실계를 2차원의 평면 회화에 담아내는 자신의 작업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네모란 간략히 말해 “네 개의 모를 지닌 도형”이자 “네 개의 선분으로 둘러싸인 평면 도형”을 지칭한다. 그것은 캔버스가 상기하게 만드는 ‘네 개의 모를 지닌 프레임’을 연상하게 한다. 르네상스 이래 화가들이 사각의 프레임 안에 풍경을 절단하여 가두고 프레임 안의 회화에 주목했듯이, 그녀 또한 이러한 네모의 공간 안에 도시 풍경을 절단하여 담아내는 일에 집중한다.
그곳에는 온통 X축과 Y축이 만나는 격자무늬의 빌딩과 네모로 된 멀티플 윈도우로 가득하다. 아서라! 그곳에는 마천루로 통칭되는 밀집한 빌딩 숲만 있지 않다. 빌딩들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나 뭉게구름 그리고 노을 진 하늘이나 어두움이 자리하며, 간혹 도심의 푸르른 공원 숲이 보이기도 한다. 그뿐인가? 빌딩들 옥상이나 도로에는 각색의 사람들이 쉬거나 이동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 안에는, 때론 빌딩의 외관을 수평으로 대면하되 지척으로 닿게 하는 클로즈업의 시선이 있는가 하면 때론 높은 곳을 올려다보는 '앙시(仰視, worm’s-eyeview)'의 시선이 있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동양화론에서 자주 사용되곤 하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풍경을 그린 부감(俯瞰)의 시선 또한 존재한다. 그것은 서구의 언어로 풀이하면 조감(鳥瞰) 혹은 '하이 앵글(high angle)'의 시선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을 다음처럼 정리해 볼 수 있다. 작가 이슬아는 주체의 물리적 공간 속 시점(視點)에 따라 각기 다른 소실점을 만드는 투시 원근법의 재현 언어를 고스란히 작업에 적용하면서도 단지 육안의 위치와 함께 보기라는 행위가 지향하는 방위적 개념의 방향성만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 관찰자의 관심을 은유하는 태도와 관점이라는 의미의 시점 또한 견지한다. 그것은 사물의 외관을 내 망막에 포착하는 것 이상으로 사물에 내재한 이야기를 추출하거나 덧씌우는 사건을 대면하는 태도와 관점을 의미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II. 요나 컴플렉스의 멀티플 하우스
이슬아의 네모와 입방체에 기초한 도시 풍경은 이야기를 담은 공간이 된다. 네모로부터 확장하는 육면체, 즉 6개의 네모로 이루어진 입방체는 흔히 ‘건물’로 표상되고 이 글에서 ‘집, 집들’로 은유된다. ‘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매끄러운 공간’을 활주했던 유목 시대를 청산하고 ‘홈이 팬 공간’을 만들어 벽을 쌓고 수로를 만들기 시작했던 정주 시대 이후의 문명 소산이다. 주체와 타자를 분리하고 하나의 공동체와 또 다른 공동체를 변별하게 했던 ‘집’ 그것은 점차 ‘마을’, ‘국가’로 확장하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계적 위치를 공고하게 만들었던 문명의 상징이 되기에 이르렀다. 정주의 시대 이후 홈이 팬 공간 속 ‘박스’처럼 생긴 3차원 입방체인 ‘집’은 ‘거주 장소’에 관한 유형론(Typology)적 모델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집’을 의미하는 ‘입방체 혹은 박스’가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해석하는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의 공간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여기서 요나 콤플렉스는 부정의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바슐라르가 ‘서랍, 박스, 장롱, 구석, 집’과 같은 ‘감쌈의 공간’이 전하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즉 박스, 집으로 대별되는 ‘감쌈의 공간’이란 구약성서의 등장인물인 ‘요나가 거주했던 고래 안’처럼 안온함으로 둘러싸인 어떠한 공간이다. 마치 우리가 태아로 있었던 ‘어머니의 자궁 속 모습’처럼 말이다.
고래 안의 ‘감쌈의 공간’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우리의 무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로서, 우리가 어떤 공간에 감싸이듯이 들어 있을 때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본능과 연계한다. 그런 면에서 어머니 속 ‘태반이 양수를 둘러싸고 있는 자궁’과 같은 ‘감쌈의 공간’은 우리가 안온함과 행복함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최초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박스와 입방체’로 대별되는 ‘집’은 그것을 이성과 감성을 통해 인지하는 최초의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요나 콤플렉스’에서 드러나는 ‘안온한 감쌈’은 바로 집이 우리에게 전하는 일차적인 심리학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슬아의 도시 풍경 속에 등장하는 아파트먼트 혹은 빌딩으로 표상되는 ‘집들’이란 ‘요나 컴플렉스의 안온한 공간이 되기에 족하다. 높은 빌딩에 오르내리기 위해 만든 엘리베이터, 강력한 펌프로 물을 끌어 올리고 내리는 시스템을 갖춘 상, 하수 시설, 그리고 냉난방이 조정되는 통제 시스템과 재해, 재난, 범죄를 예방하는 관리 시스템을 갖춘 안온한 도시의 마천루! 우리는 그것을 가히 ‘요나 컴플렉스의 멀티플 하우스’라고 할 만하다.
Walking into the patterns
III. 네모 안의 너와 나 - 천태만상의 도시 거주자들
이슬아는 도시의 마천루, 즉 이 글에서 언급한 ‘요나 컴플렉스의 멀티플 하우스’를 통해서 무엇을 선보이려고 한 것일까? 그 멀티플 하우스 자체가 아니라 그 속의 거주자가 아닐까? 어떤 빌딩에 ‘근무’ 혹은 ‘방문’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거주하는 사람들, 어떤 건물에서 ‘회합’이라는 이름으로 즐거움을 나누거나, 열띤 논쟁을 나누는 사람들, 어떤 집에서 ‘안식’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거주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이슬아의 작업은 피상적으로 멀티플 하우스라 부를 만한 도시의 마천루 풍경을 선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도시의 거주자에 관한 이야기를 선보이려는 것이다. 작품을 보자. 고층 빌딩을 가득 담은 풍경을 작품 〈Walking into the Patterns〉에는 핸드폰을 보면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급한 메시지를 확인하려는 것일까?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부터 영상 통화를 했던 것일까? 횡단보도를 건너면서까지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남자의 자초지종을 알 수 없으나 이러한 풍경은 도시 속에서 흔히 만나던 사람들의 모습이자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화면을 가득 채운 빌딩 사이에 살짝 드러난 횡단보도에 자그마한 크기로 그려져 있는 이러한 인물상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도시의 풍경이 결국 사람의 풍경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공감하는 까닭이리라
rectangle city
콘크리트 가든
또 다른 작품 〈Rectangle City〉에서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또 다른 사람들의 풍경을 담고 있다.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터덜거리듯 건너거나 핸드폰을 들고 건너는 사람들, 꽃단장을 한 여러 마리의 애완견을 데리고 건너는 횡단보도 주변의 풍경은 제목처럼 네모의 풍경이자 그 네모 속 사람들의 풍경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도시의 거주자들이다. 잠시 혹은 오랫동안 그 속에 있으면서 자신의 삶을 지속해 가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도시 거주자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슬아의 도시 풍경 속에서 도시 거주자들의 얼굴에서 표정을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지만 다양한 몸의 표정을 한 도시 거주자들을 발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작품 〈concrete garden〉에서 우리는 고층 빌딩 숲이 둘러싸고 있는 한 빌딩의 옥상에 비치췌어를 펴고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분주한 근무 시간에 잠시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려 옥상으로 나온 것일까? 아니면 간만에 휴가를 맞아 거주하는 오피스텔 위 옥상에 나와 휴식을 취하는 것일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등장 인물에게는 작품명처럼 잠시나마 콘크리트 가든 속 휴식을 만끽하는 순간으로 보인다. 또 다른 작품 〈WHY NOT?〉을 보자. 이 작품은 ‘WHY NOT’이라는 그래피티가 벽면에 커다랗게 쓰인 한 빌딩의 옥상에서 한 여인이 체조인지 발레인지 사뿐하고도 우아하게 몸을 움직이는 순간을 담고 있다. 발레 공연을 앞두고 홀로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주인공일까? 아니면 공연에서 자그마한 역할이라도 따기 위해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는 뮤지컬 배우 지망생일까?
작품 〈Tiny cities〉과 또 다른 작품 〈Traffic orchestra〉에서는 야경이 펼쳐진 빌딩 위 옥상에 올라와 도시의 밤 풍경을 내려다보는 인물을 담고 있다. 또 다른 작품 〈City runner〉은 일몰인지 일출인지 불명료한 시간 속에 도시의 조명을 가득 받은 한 남자가 달리기하다가 허리를 굽혀 숨 고르기를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마라톤을 연습하는 것일까? 아니면 조깅을 하던 것일까? 작품 〈Wednesday〉에서 발견되는 인물은 빌딩에서 일을 하다가 창문을 열고 도시 풍경을 조망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환기를 위해서 문을 열어젖힌 것일까?
이처럼 이슬아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얼굴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천태만상의 몸의 표정을 한 다양한 도시 거주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작품 부제처럼 그들은 ‘네모 안의 너와 나’인 셈이다.
rectangles go round
IV. 네모 안의 사건들과 중성성의 주체
이슬아의 작품 속에서 각기 사건을 만들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집단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한두 명의 소수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작은 인물들이 네모 혹은 육면체로 상징되는 도시 빌딩의 안팎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연동한다면, 화면 속 커다란 비율로 자리한 인물들은 대개 도시 빌딩의 안에서 일어나 사건들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물론 캔버스 속에 커다란 비율로 담아낸 인물 중에는 실외 공간에서 포착한 인물 또한 없지는 않다. 작품 〈Street Runway〉에서처럼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도시의 거리를 바쁘게 혹은 유유자적하게 거닐거나 〈Under the dancing Shadow〉에서처럼 도심의 공원 잔디에 누워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그러한 예들이라 할 것이다.
이슬아의 작품 속에서 화면 속 큰 비율의 인물은 많은 부분 도시의 실내 공간에서 발견된다. 가히 ‘네모 안의 사건들’이라고 할 만하다. 이 네모 안의 사건은 마치 시뮬라크르처럼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그저 소소한 것들일 따름이다. 그녀의 작품 속, 사건으로서의 시뮬라크르는 우리 주변 도처에서 발견되는 실내 풍경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실내 공간에서 커피나 맥주를 마시면서 잔잔히 생각에 잠겨 있거나, 창밖으로 마천루 빌딩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노트북을 펴고 일을 하다 잠시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고 있거나, 디저트를 먹으면서 핸드폰을 받고 있거나,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등 소소하고도 지극히 단순한 사건으로서 말이다.
이 사건은 마치 바람 앞에서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출현했다가 이내 사라지는 무엇과도 같이 소소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건은 ‘A나 B’가 아니라 ‘A에서 B로’ 넘어가는 변화의 운동을 닮아 있는 주요한 존재 양태이기도 하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숨 쉬는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삶 속에서 지속하는 소소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슬아의 작품은 우리가 차를 마시거나 노트북 혹은 핸드폰을 보는 등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벌이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을 재연한다. 〈City girl〉에서처럼 햇볕이 들어오는 창을 등지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Connection〉에서처럼 관객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누워서 핸드폰에 골몰하고 있기도 하다. 작품 〈Hang (out) over〉는 어떠한가? 이 작품은 한 여인이 칵테일 한잔을 마시다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관객은 이슬아의 작품 속에서 망중한과 같은 휴식으로 보이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사건’을 만나게 된다.
주목할 것은, 이슬아가 등장인물의 모습을 보편화, 익명화하는 중성성 혹은 중성화(neutralization)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성화 전략은 인물의 특성을 개성화, 특수화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도시민 개개인을 일반화하고 익명화한다. 이러한 중성화는 등장인물을 도시의 풍경 속에 작은 크기로 배치하는 데서 극대화된다. 화면 속에 비교적 큰 비율로 인물을 배치할 때는 주로 뒷모습을 포착하여 표정을 숨기는 방식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최근에는 얼굴 앞면을 드러내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인물의 얼굴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지우고 조용하고도 무심한 듯한 표정을 가시화함으로써 중성성을 강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개개의 등장인물을 도시민 일반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만드는 이러한 중성성 혹은 중성화 전략은 도시민이 공통으로 느끼는 군중 속 소외의 감정을 부추기는 데 일조한다. 현대 도시인이 공통으로 지닌 중성성의 주체를 잘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달리기
V. 에필로그
작가 이슬아는, 때로는 네모로 때로는 육면의 입방체로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도시 풍경을 구축하고 그 안에 중성성의 ‘도시 거주자’를 살게 함으로써,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의 공간을 완성한다.
주지하듯이, 다른(hétéros)과 장소(topos)가 결합한 용어인 헤테로토피아는 푸코(M. Foucault)에 따르면 분명히 현실에 있지만, 실재하는 장소의 바깥에 있는 ‘또 다른 공간’ 혹은 ‘반-공간(contre-espace)’으로 표상된다. 모든 과거의 시간을 한 장소에 축적하여 아카이브를 만든 박물관이나 도서관, 삶과 죽음 사이 경계에 얹힌 채 도시로부터 외곽으로 밀려가는 공동묘지, 여행자를 위해 안과 밖이 지속적으로 열리고 닫히는 미국식 모텔, 그리고 일시적으로 형성되어 실존적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유토피아로서의 휴양촌 등이 그것이다. 푸코의 언급대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셈이다. 그렇다. 헤테로토피아에 관한 강력한 비유는, 푸코가 직접 언급했듯이, ‘외출한 부모의 침대를 어린아이가 놀이터로 변모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헤테로토피아는 개별 도시인마다 각자의 삶에서 특수한 경험으로 달리 구축된다.
글을 정리하자. 작가 이슬아는 익명화, 보편화, 탈 개성화된 도시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네모 혹은 육면의 입방체로 지시하면서 마천루가 즐비한 도시의 멀티플 풍경과 그 안의 도시민의 모습을 대비하여 선보인다. 문명의 도시민은 천태만상의 모습들이다. 이슬아는 이러한 도시민의 다양한 표정을 얼굴이 아닌 몸의 표정으로 드러낸다. 도시 풍경 속 작은 비율의 크기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거리에서 조깅하거나 창문을 열고 창밖의 풍경을 보는 등 저마다의 사건 속 이야기를 몸의 표정으로 드러낸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등장하고 있는 화면 속 커다란 비율의 인물상은 뒷모습을 선보이거나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심한 듯한 표정의 중성성 특징을 드러냄으로써 군중 속 고독이라는 현대인의 심리 기제를 드러낸다. 몸의 표정을 통해 도시 풍경을 만들고 도시 속 ‘현실화된 유토피아’ 즉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을 구축해 나가는 이슬아의 작업이 향후 어떻게 변모해 나갈지 자못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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