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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위기에 관한 소고

박영택

회화의 위기에 관한 소고



들어가는 말

회화는 20세기 이후 지속해서 죽음이 선고되었지만 여전히 죽지 않고 있다. 최근 증진하고 있는 가상성의 시대에서 질료와 이미지 사이에 깃든 회화의 강점, 매력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동시대에 회화의 임무는 “가상성에 함몰되지 않고 현실세계의 리얼리티를 지키는 일” 유일한 일이라고도 말해진다.
수 백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서구회화에 있어서 표현의 방법과 기법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변화를 거쳤고, 극단적으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회화적 표현을 통해 찾는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작가들에게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빠르고 다양하게 전개되어온 현대미술의 한 가운데서 작가들은 왜 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며 그 이유를 찾아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여전히 회화에 대해 말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회화야말로 미술의 정수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미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허망하거나 가능치 않다고 여겨서일까? 그럼, 과연 회화의 새로운 출구는 있기나 한 걸까?
따라서 이 ‘회화의 위기’담론은 지금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새삼 회화의 위기가 거듭 논의되는 배경은 우선 현재 미술 창조환경이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다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회화’에 관한 공유할 수 있는 통일된 개념, 회화에 관한 관점이 재현회화, 모더니즘회화 이후에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디지털이미지와 테크놀로지, 설치와 영상매체가 더욱 번성하고 있는데 따른 상대적인 위축감이 위기의식을 공공연히 불러오고 있다는 생각이다. 동시에 회화뿐만 아니라 미술 전반이 처해있는 위기상황이 보다 큰 문제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최근 전시문화의 추이에 따른 것인데 오늘날 대규모전시나 기획전시의 일반적인 흐름이 보다 이벤트적이고 스펙타클하며 공간을 장악해나가는 연출력과 작품의 명료한 컨셉이 강조되는 상황이다 보니 회화는 그에 적절히 부응하지 못하는 매체라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깔려있다는 생각이다.
사실 오늘날 회화의 죽음은 일정 기간 동안 미술의 중심역할을 해왔던 모더니즘 회화의 죽음일 뿐, 근본적인 회화의 죽음은 아닐 것이다. 이제 회화는 새로운 영역 속에서, 새로운 회화의 패러다임을 통해 미지의 길을 떠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지와 물성, 평면성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 시간성을 도입하고 공간 속으로 진입하는가 하면 설치와 회화가 접목되고 사진. 비디오. 인터넷과 회화가 만나기도 한다. 그런 가운에서도 화가의 손과 촉각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오늘날 회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회화에 고정적인 재료도 없으며 화가라는 고정적 지위 또한 무의미해졌다. 모든 것이 회화의 재료이며 모든 영역에서 화가는 전방위적인 예술가로 거듭나기를 요구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회화의 위기

1) 모더니즘과 회화의 위기
‘‘회화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을 재현한 표면’이라는 것은 현대 미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널리 수용된 정의’1)이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회화는 여러 미술 분야 가운데 거의 특권적 위치를 향유했다. 그러나 19세기중반 이후 사진과 영화가 등장하고 새로운 산업적 인쇄, 복제기술이 광범위하고 빠른 속도로 유포되면서 회화의 위상은 의문스럽게 되었으며 이전의 재현회화의 기능과 역할은 철저히 붕괴되었다. 이들 새로운 기술적 수단들은 이미지 생산이라는 사회적인 기능을 회화보다 더 완벽하고 객관적으로, 더 빠르고 값싸게 수행하였다. 주지하다시피 현대 회화가 2차원의 평면을 자기 정체성의 유일한 기반으로 강조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기계복제적 이미지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확보해나갔다. 회화가 3차원의 깊이와 일루젼을 포기하고 2차원의 평면으로 차원이동 한 것은 사진적 복제기술의 발달과 대중화, 동영상이 일반화에 따라 3차원의 현실의 재현이라는 오래된 지반을 사진과 영화에 넘겨주고, 회화의 자기정체성을 새롭게 탐구 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지형적 변동의 산물이다. 이와 함께 회화의 종말론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회화의 위기’ 문제는 무엇보다 회화가 더 이상 미술의 중심으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라는 당시 회화 작가들이 지닌 위기의식을 반영한다.2)

회화는 이제 역사적ㆍ사회적으로 이미 끝난, 죽은 장르라는 것이다. ‘회화의 위기’는 회화가 사적 생활공간과 공적 생활공간에서 문화적 상징기구로서의 위상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회화가 지녔던 주거공간에서의 기념비적 물신의 기능을 대중문화의 우상 혹은 그 밖의 다른 사물들이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술의 종말을 주장한 아서 단토(A.Danto)는 서구에서 미술(예술)의 개념이 출현한 이래 1960년대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미술사를 진보적인 거대한 내러티브로 파악, 이 내러티브가 종말에 이르렀고, 이제는 역사 이후(post-history)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는 종말 이후 시기의 미술은 더 이상 가야할 특정한 내적인 방향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라고 진단하면서 한마디로 무엇이든지 미술이 될 수 있는 시기, 즉 다원주의시기가 도래했다고 본다.
단토는 서구미술의 역사는 두 개의 주된 에피소드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바사리의 에피소드고 다른 하나는 그린버그의 에피소드라고 말한다. 바사리(Giorgio Vasari,-1574)는 미술을 재현적인 것으로 보고 시간이 지나면서 “시각적 외관”의 정복에 더 능숙해진다고 하면서 이는 원근법, 명암법, 단축법 등을 통해서 세계의 회화적 재현에서 진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적인 재현은 활동사진의 등장과 기존 문화적 신념의 상실에 따라 모더니즘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실재를 묘사하는 데 활동사진이 회화보다 훨씬 더 낫다는 점이 증명되었고, 이때 전통적 회화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모더니즘이며 이는 회화(미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질문함으로써 시작한다.
모더니즘 미술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모더니즘 내러티브의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는 무엇이 회화 예술을 다른 예술과 구분시키는가의 관점에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매체의 물리적인 조건에서 미술의 고유한 특징을 찾는 일이고 그것이 미술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면서 마네에서부터 시작하여 색면회화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더니즘 내러티브를 구성하였다.

회화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신념과 그 정체를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에 의해 추진된 것이 서구모더니즘미술이다. 형식주의 미술사가와 비평가들에 의하면, 회화에서 매체의 한계를 인정하고 평면성을 드러내어 완전한 추상미술을 형성하는 것이 모더니즘의 동인이 추구했던 결과이자 목표이다. 이러한 결정론적 사고는 회화에서 주제나 이야기를 제거하고, 어떠한 환영적 요소의 개입도 불허하는 태도를 생산하여, 구상화 대 추상화의 대결 구도를 만들고 회화의 담론을 양식에 국한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추상이 진보적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었는데 그 진보가 역설적으로 회화의 종말을 초래했다고 볼 수도 있다. 모더니즘 논쟁에서 허구와 환영의 거부는 관념적 전환의 여지가 언제나 남아 있는 평면작업을 완전히 벗어나게 하거나 회화의 미적 취향을 배제하면서, 결국 회화의 종말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회화 자체가 낡은 것, 옛 것, 전통적인 것, 또는 단순히 심미적인 대상으로 취급되었고, 과거의 관념적, 물적 주제나 이야기,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다양한 기호생산의 절대 주체가 평면이 아닌 다양한 매체로 확대되어, 오히려 다른 매체에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적극 수용한 내러티브를 펼쳐 보임으로 인해 회화의 설자리가 더욱 없어지게 되었다. 이제 평면작업은 문자 그대로 장식적 패널 이상이 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모더니즘 회화는 당시의 ‘사진, 상품’등에 의해 역사적으로 결정된 양식이므로 특정한 역사적 상황의 특정한 산물이지 미술의 역사와 운명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그 ‘모더니즘 회화’놀이가 완결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회화게임’이 완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미술에서 회화의 가능성을 담보해줄 것은 이런 보수적 형식주의에의 향수가 아니라 바로 그 모더니즘 논쟁의 허점을 지적함으로써 회화의 다른 가능성을 회복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모더니스트들의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을 부정4) 하고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린버그로 대표되던 보수적 형식주의 관점을 해체하는 것, 거기에 바로 회화의 잠재력은 다시 움틀 수 있으며 진정한 회화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20세기 모더니즘과 연결되었던 추상미술의 정당성에 편승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해체하는 작업들 또한 지속적으로 있어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 뒤샹과 회화의 위기
1910년대에 마르셀 뒤샹 역시 ‘회화의 종말’을 선언했다. 뒤샹의 복제품은 사실 회화라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복제와 차용을 통해 ‘미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뒤샹이 보여준 지향점을 확대 계승한 설치미술은 오늘날 미술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 생산이기보다는 ‘물질적 질료와 공간’의 세계로 이행하고 있다. 이런 과정은 시각문화를 확장시킨 반면에 순수미술이라고 여겨지던 영역의 위상을 상당히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회화의 위기가 또한 공공연히 주장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현대미술은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 그 매체를 미술계라는 영역으로 끌어들여 이름을 달아줌으로써 미술을 유지시켜나갔다. 이렇게 새로운 매체와 접목되면서 삶을 연장시키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미술의 생존전략으로 즐겨 사용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니까 미술의 타 영역에의 수용은 그 동안 꾸준히 진행되었는데 그 결과는 스스로 존재기반을 와해시킬 위험을 담보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미술이 독자적 전통과 관습을 하나씩 해체했을 때, 그것은 이미 미술이 아닌 일상, 또는 제3의 영역으로 전환되는 과정이자 미술의 종말을 단지 연장선에 놓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그리고 이는 미술계라는 제도의 비호 아래 미술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3) 후기모더니즘과 회화의 위기
1960년대 후반부터 서구에서는 회화에 대한 전반적인 해체와 반격이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평면은 단순히 재료의 한계를 넘어 역사적 한계에 봉착한 듯이 보였다. 후기모더니즘의 대표적 사조인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의 틈바구니에서 회화는 주로 관습적 회화의 위상, 다시말해 미적 대상, 틀과 지지대의 보호, 영원성, 그려진 결과로서 그 무엇을 모두 거부하고 반회화적. 반미학적 태도를 갖게 된다. 미니멀리즘이나 개념미술은 미술을 타 분야의 것으로 확대시키면서 미술자체의 존재성에 의문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았다. 존재의 부정만이 후기모더니즘에서 회화가 겪었던 생존전략이 된 셈이다.
오늘날 미술작품은 어떠해야 한다는 특수한 방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단토에 따르면 이때 미술의 내러티브는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은 예술작품이다” 혹은 “누구나 예술가이다”와 같은 슬로건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것이 역사이후의 미술의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제 미술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추구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따라서 이제는 미술사의 어떤 특별한 방향도 없고 어떠한 양식도 동등한 권리 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단토는 오늘날의 미술 상황을 ‘다원주의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단토는 다원주의시대에 미술교육, 감상, 미술제도, 미술관 등은 이 시대에 적합한 형태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오늘의 미술은 단지 회화의 부재뿐 아니라 미술의 영역을 어떻게 확보해 가는가라는 점에서 더욱 절실한 고민과 고충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서도 새로운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모더니즘적 전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채, 또한 극복되었다고 여겨지던 미술로 돌아갈 수도 없는 딜레마가 회화 앞에 놓여 있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 있는 21세기 관객들에게 회화가 단순히 대중미술이나 기타 장르의 표현과 대동소이할 경우, 회화(미술)의 존립이유는 매우 위태로워질 것이다.


한국에서의 회화의 위기논의

조선조 말에 서양화가 도입된 이래 전파되고 계승되었던 미술개념이 그것이 일제시대의 선전과 정부수립 후의 국전을 통해 전개됨에 따라 구상회화의 양상과 그 전형이 형성되었다.
지배적인 세력으로 존립해오던 일제식민잔재의 화풍이나 국전의 진부한 조형적 사고는 1950년대 말에 이르러 강한 반발을 사게 되는데 그것이 앵포르멜 운동이다. 구체적으로 회화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에서 해방된다는 식의 재현성의 거부와 함께 정신적이며 내적인 세계에서 미적 인식기능이 행해진다는 논리가 있어왔다. 그리고 어떠한 것에도 제약받지 아니하는 순수한 정서의 자유로운 표현이라는 형식의 우위 등으로 주장되는 이들은 추상을 구상에 대한 자기 방어적이고 헤게모니투쟁과 결부된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논리가 우선한 게임의 법칙에 따른 인식이었다고 여겨진다. 이런 인식은 결코 구상화에 대한 반성과 결부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전 중시의 독선적 아집과 추상미술만을 전위로 착각했던 지적 오만도 들어있다. 또한 우리의 근대화 체험이 그랬던 것처럼 장구한 서구미술의 험난했던 도정을 단 1세기 동안에 압축적으로 재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문화적 상황의 소산이기도 했다. 70년대 미술, 소위 탈이미지회화는 이 땅의 구상미술을 낡은 방식으로 파기시켰고, 회화에 대한 모색과 즐거움을 상실시켰으며 우리 화단의 풍경을 지나치게 평면화 시켜버렸다. 우리의 추상미술은 모더니즘이라는 미명하에 그것이 고집해왔던 평면이니 구조니 환원이니 하는 절대강령에 스스로 제한되어 미술의 문제를 지나치게 미술 내적인 문제로만 한정하고 규정지어 왔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한국적 미니멀리즘, 이른바 모노크롬 회화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향상될 수 없는 지루한 동어반복의 늪에 빠져 그 형식적 기조를 잃어버렸다.
70년 대말 극사실주의의 유행 역시 사실 그것 자체의 맥락에 대한 이해, 수용의 차원이 아니라 가장 적응하기 쉽다는 점에서 받아들여졌다. 부담없이 화단에 정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화단 구도 속에서 그것이 나름대로 형식과 내용, 모두를 충족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점그리고 종래의 아카데미즘화 된 구상회화와 형상적인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호응이 빠르다는 점, 아울러 리얼리즘과의 근친성 그리고 미니멀리즘과 같은 형식주의 미술과도 서구현대미술의 계보적 위치에 있어 회화라고 하는 ‘동일 염색체’라는 점에 있었다. 한국에서의 80년대 형상미술은 우선 하이퍼리얼리즘 혹은 포토리얼리즘, 즉 극사실계열이 있었고 아울러 계급적 삶과 현실의 반영 및 인식의 원리로서의 현실주의적 경향 및 민중미술 그리고 삶과 미술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내면적 형상언어를 토로하는 신표현주의적 경향, 종래의 형상을 새로운 감수성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시키는 포스트 모던적 경향이 공존했다. 결과적으로 80년대는 형상과 표현이 회복된 시대이고 이를 바탕으로, 매개로 해서 상이한 양식의 변모가 반영되었고 회화에 대한 다양한 자각과 종래의 모더니즘 일변도의 미술관행과 어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형상을 통해서 인간의 실존상황 내지는 존재의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우리의 보편적인 삶이나 민족적 현실 나아가서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황과의 다양한 관련성을 문제삼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사회적, 정치적 갈등의 긴급한 사태에 대한 예술과 개인의 비판적 의식을 드러내기도 하며 구체적, 역사적인 상황을 통한 개인의식을 실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상회화에서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모사의 의미와 그것을 통해 외부세계가 반영된다는 의미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으며 본질적인 그림, 회화에 대한 치밀한 실험과 모색은 상대적으로 약했고 단지 소재를 묘사하거나 형식적으로, 방법론적으로 접근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거나 직설적인 메시지를 드러내는 수단으로만 도구화했다는 아쉬움을 준다.
90년대 들어와서는 대중문화와 멀티미디어의 확산에 따른 문화 지형의 전반적인 변화에 따라 80년대의 저항적 문화지형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미술(특히 회화)의 위상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소비문화와 대중문화의 확산과 영상매체와 정보 네트웍의 급증에 따른 문화지형 변화의 결과이다. 새로운 매체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낡은 매체의 잠재력은 소진되기보다는 새롭게 변형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싹텄다.
오늘날 영상매체들이 모든 이미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전히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이 그것이다.
한편으로는 회화는 죽었다는 말도 다시 무성했다. 9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중문화 등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되고 이에 걸맞는 첨단 매체들이 미술계에 스타로 부상할 때, 성급한 사람들은 회화가 고급한 예술이라는 죄목으로 그리고 보수적인 매체라는 이유로 회화는 죽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한국 근. 현대 미술사는 서구에서와 같은 자기해체 과정 없이 너무 간편하게 회화의 위기 담론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회화의 위기 담론은 7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 현대미술 담론의 중요한 논점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진정한 논의는 부재했다고 여겨진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있는 그림, 구조가 산출되는 그림, 순간을 포착하는 역사가 스며든 그림, 보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게 하는 그림, 욕망의 틀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그림 등 일체의 회화적 가능성을 미리 폐쇄시켜버린 그런 회화관에서 출발한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더 회화의 의미층은 납작해지고 활동의 기운은 소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6)이 아마도 큰 문제였다는 생각이다.

이곳에서의 회화

“설령 조각과 벽면 드로잉을 활용한다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이유로 나는 회화를 최고의 형식으로 생각한다. 회화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행동에 전혀 제한을 받지 않는, 예술최초의 조건에 가장 유연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회화는 회화에서 디스플레이 될 수 있다. 회화활동은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회화는 또한 가장 오래된 기록형태이며 기록형태를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회화는 존재하기 위한 외적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며, 유지하기 위한 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형식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회화야말로 환상과 세속을 결합하는 데 있어 마음의 내적 작동에 가장 닮은 형식이라고 생각한다.”(매튜리치)7)

21세기 영상. 정보. 지식 사회에서도 회화가 필요하며 활성화되어야 하는가? 신체성과 수공성을 지닌 회화가 시각환경이 급속하게 변화한 이 상황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까?
오늘날과 같은 이미지와 영상의 홍수 시대에 ‘왜 회화여야 하는가?’
이미지가 지배하는 현대사화에서 디지털 복제기술과 카메라의 등장으로 이미지와 동영상은 자기 복제를 계속하여 빠르게 전파되고 있고 시각이미지는 더 이상 일부 계층의 향유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개념과 테크놀로지와 결합해 종국에 이르러 이미지 향유가 아닌 이미지의 폭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같은 이미지의 과잉이 역설적으로 그림에 대한 향수를 낳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1초에 30컷 이상이 돌아가는 동영상이 줄 수 없는 ‘느림의 미학’이 회화에 있다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에 회화는 단순한 수공예품에 머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매체의 등장 속에서도 회화는 ‘의미로서의 움직임과 판이 만나는 회화’는 여전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견된다. 회화의 형태는 특별한 장비, 도구 및 기자재 없이도 접할 수 있는 간편성이 있고,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감상 속도의 조절이 가능하고 한 번 죽 훑어보면 개인의 미감과 능력에 따라 내용을 한 분에 알 수 있게 하는 일람성 등의 장점이 많다.
사실 회화는 그 어느 장르보다 탁월한 ‘감각의 예술’이다. 감각은 세계와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으로 접근하는 삶의 방식이다. 회화란 엄청난 신체적 사건이며 야생적 사고의 회복에 관여한다. 그러니까 회화란 감각을 자극하는 생의 에너지와 리듬을 포착하여 보는 이의 감각에 그 힘을 돌려주려는 것이라면, 그리기 작업이야말로 뛰어난 장르이다. 여기서 회화의 정당성이 새삼 거론된다.
오늘날 회화가 대중적 인기를 잃은 것은 지적이기를 포기한 때문이요 지적인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눈으로 본 것을 눈으로 내보내는 회화는 가장 밀도높은 두뇌운동이며 이 두뇌노동의 새로운 차원, 즉 동시대 문화의 차원을 이야기할 때 회화는 그 중심에 서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8)

회화는 영상매체의 확산 과정에서 점증하는 탈신체화 경향에 대한 효과적인 시각적 비판과 대안적 시각문화 구성의 창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가정, 그리고 시각(매체)문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요구되는 생태론적 삶의 양식을 창출하는데 있어서 대안적 행위모델임과 동시에 새로운 인식론과 존재론의 탐구에 능동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복합감각에 기초한 회화의 새로운 활성화가 영상매체에서 나타나는 이미지의 탈신체화 경향의 극단적인 추구에 대해 상대적으로 치유효과나 균형을 유지해주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9)

오늘날 탈신체화되는 상황에 따라 신체화된 시각경험의 활성화는 새삼 요구된다. 그에 따른 대안으로 심광현은 ‘개념적 회화’를 주장한다. 이는 세잔이 시도했던 바와 같은 방식으로 신체적 복합감각을 활성화시키는 회화적 작업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프레임의 규범에 얽매이는 대신 다양한 재료와 프레임이 변환, 그림이 걸리는 공간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사고하면서 사회문화적. 정치적 콘텍스트에 개입할 수 있도록 회화의 존재방식과 패러다임 자체에 대해 개념적 성찰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작업방식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미술가들은 전통적 매체를 택하든 첨단의 매체를 택하든 미술의 개념과 패러다임을 크게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있다. 회화는 개념적인 것과 지각적인 것이 직접 마주치는 장이자 신체-자연의 비개념적인 운동을 동시에 포괄살 수 있는 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보면 회화의 본질은 한때 모더니즘에서 강조되었던 것처럼 단순히 평면성이라든가 형상성, 색채, 개념성 등의 어느 한 측면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마주치고 겹쳐지는 형국 속에서 형성되는 특이점들이 역사적 변환에 따라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회화의 본성은 다중성과 복수성,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긴장관계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회화는 영상매체의 확산과정에서 점진하는 탈신체화 경향에 대해 효과적인 시각적 비판과 대안의 시각문화를 구성하는데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한편 여전히 인간 육체와 환경간의 생태적 관련 속에서의 회화야말로 인류가 지속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무한한 문화적 행위이자 인간적 삶의 실천을 매개하는 거의 유일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나온다. 그런 인식이 오늘날 회화를 새롭게 부흥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가하면 21세기 멀티미디어시대의 달라진 생활양식은 문화향수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가 직접 문화에 참여하기를 원하게 만든다. 이제 문화창조자와 문화향수자의 구분은 무척 모호해져간다. 그리고 예술은 곧 정보가 되었다. 이는 모든 그림이 정보가치를 지닌다는 뜻이 아니라 정보가치가 없는 그림은 그만큼 난감해졌다는 얘기다. 멀티미디어시대에 움직이는 화면과 경쟁해 고정된 타블로로서 회화가 살아남고 설득력과 호소력을 가지려면 파격적인 변신이 요구되는데 우선 제도미술의 축소판 같은 추상. 구상. 서양화. 동양화 등의 구태의연한 작업 시스템에서 벗어나 ‘주제적’작업 시스템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회화는 더 이상 구상ㆍ추상ㆍ초상ㆍ풍경 등의 전통적인 카테고리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며, 캔버스 위의 물감이라는 매체에 대한 철학적 정의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시대에 그림의 생존전략은 그림이 그림다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림의 핵심기능이 주제의 묘사이기에 독자적인 소재를 취하고 아울러 차별화시키는 방법론의 개발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10)

사실 그간 우리미술계에서 회화의 변화는 근본적으로 생활의 변화에서 온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작가나 전시기획자, 평론가 등 미술문화 담당자들이 미술과 생활의 변화된 관계를 지각, 수용하고 이런 변화를 다시 문화적으로 실천하면서 가시화 된 것이다. 지금 우리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과제가 ‘회화의 위기’라는 의식이 지닌 공론(空論)이 제대로 읽혀지지 않는 것은 이론과 큐레이팅의 부재가 원인이다. 그러니까 우리 근?현대 미술사는 작가와 대중들이 실제로 사물을 보고 지각하는 문화의 현실로서 미술문화가 읽히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념과 사조의 역사로만 읽어왔다. 따라서 ‘회화의 위기’ 뿐만 아니라 미술문화의 위기 전체는 현단계에서는 올바른 이론과 큐레이팅 문화의 부재 때문이라는 좀더 근원적인 것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11)

1990년대 후반 이후 회화는 극단의 경계적 위치에서 다양체를 지향하며, 촉각적 직감과 시간성의 개념을 중요시하고 있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늘의 회화가 설치작업을 비롯한 새로운 미디어의 확장에 대응하여 자신의 영역을 재중심화 한다거나, 시장ㆍ비평ㆍ미술관의 제도적 보호를 통해 자신의 역할을 회복시키려는 전략적 구상과는 다른 모색을 뜻한다. 이들의 작업이 회화에 대한 여러 구멍과 틈을 만들고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는 참신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동시에 이 같은 모색과 실험이 새삼 신선해 보이지 않을 수 도 있다. 그것이 여전히 모더니즘의 미완의 구멍을 찾아나가는 형식주의적 발상 내지 새로움의 갈망, 결국 권태로움의 한 징후들일 수 도 있을 것이다. 한편 더 이상 미술에서 주류와 중심권의 영향력은 사라졌기에 미술에 대한 복수적 사고가 가능해졌고 그만큼 예술, 미술과 회화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지역, 성, 인종, 그리고 역사적 계보의 정당성을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좀더 자유롭게 자르고, 통행할 때 새로운 회화의 영감이 살아날 수 있다. 아울러 서구에서 강조되던 역사적 중심시각의 와해가 매우 중요하다. 이들로부터의 해방은 우리가 받아들이던 미감이 익숙함과 관념의 강조점들로부터(독창성, 창조성, 새로움 등) 회화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서구 엘리트 미술을 벗어난 패턴화(pattern painting), 사회적 내용을 담아내는 사실주의 구상화, 여성들의 수공예적 회화, 또는 지역적, 고전적 매체를 이용한 평면 작업 등 회화는 아직도 얼마든지 열려있다. 미술 진화론적 발달을 뒷받침했던 이론의 위상을 넘어서, 회화는 다시 실질적인 환경을 반영하는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12) 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다원주의적 관점, 이종생성을 환영하는 시각에 머물 위험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우리가 회화에 대해 이만큼이라도 다양하게 사고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 와서라고 여겨진다. 미술의 개념이 모방론 혹은 표현론의 차원에서만 해석되고 수용되어 대부분의 그림들이 재료와 과정을 강조한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운 것이 대부분이라면 그와 다른 맥락에서 회화를 개념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지적 개입 및 게임이 가능해진, 즉 회화의 존재방식과 패러다임 자체에 대해 개념적으로 적극적인 성찰도 최근에서야 가능하게 되었다고 본다.





회화관련 주요기획전시

1. 그리기 그리기전(한림미술관, 1999.3.17-6.13)

“회화를 그린다는 주제로 한ㆍ불 작가초대전, 모두가 회화에 관한 확고한 질문을 던지며, 회화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명석한 의식을 나타내준다...20세기의 마지막 해에 회화의 상황..첫 번째 요소인 사진의 발명이 회화의 업무에 가해온 충격, 사실 이것은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수세기 동안 회화와 회화를 확산시킬 수 있게 해주었던 판화들은 이미지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빈약한 세상 속에서 이미지의 유일한 원천들이었다. 사진의 발명과 함께, 회화는 점차적으로<이미지의 시녀>가 되기를 중단하고, 동시에 그의 이미지물로서의 사회적 기능 대부분을 상실해버렸다. 회화는 오랫동안 르포르타쥬 작업과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담당하였다. 사진의 발명 이후에, 회화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 즉 화가에게 제기된 문제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 문제는 <이러한 것 대신에 왜 저러한 것을 그리는가>에 대한 질문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즉 화가들이 자신들의 선택 이유에 대해서, 또는 자신들의 선택 이유에 대해서, 또는 자신들의 실천 그 자체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것이 불가피해진다(회화를 그리기)..두 번째 요소는 20세기에 고유한 것이다...모던 전통에 비해 구상적인 회화는 불편함을 느꼈다. <사실주의자들>이 20세기 예술의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음을 확인, 90년대 들어와서는, 이제는 형식주의적 예술의 역사가 약간은 그 힘을 상실하였고 또한 이제는 우리가 창조적 실천들의 복수성에 대해서 새로 눈을 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스톨레이션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디오는 형식주의 미술사의 잘 조직된 선전 도식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운동들과 형태들의 전개 도식들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는데 역설적으로 큰 공헌을 하였다...세 번째 요소는, 사진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이미지들의 침범이다.,,오늘날 이미지들은 귀하고 마술적인 힘을 가진 진귀한 물건으로부터 우리 세계의 평범한 요소들로 되었다. 즉 필수 불가결한 그 무엇임과 동시에 이제 더 이상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는 그 무엇이 되었다. 우리는 이미지들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이미지들에게는 지나는 길에,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가면서 눈이나 한 번 던지는 정도이다. 여러 면에 있어서, 구상적인 회화의 역설은, 그것이 다른 매체 위에서 제시된다면 자기 자신조차도 쳐다보지 않을 뭔가를 우리에게 주며, 나아가서는 우리에게 보라고 강요한다.
80년대부터 우리는 포스트 모던적이고 후기식민지적인 재현의 틀 속에서 살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제 더 이상 오로지 서구적인 전거 규범의 관점 속에서만 살거나 생각하지 않고, 동시대적이면서 지역적이라고 주장하는 지역적인 정체성들을 탄생케 한 복수주의 속에서 살고 생각한다. 이제는 전적으로 따로 떨어진한국 회화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번역된다. 예술가들은, <지배적인 흐름>이어야 할 것을 정의하기 위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상위적인 어떠한 참조도 나타나지 않는 콘텍스트 속에서, 회화를 하기를 그리고 회화를 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다.
한국 예술가들의 경우는 그려진 대상과 내용에 더 직접적인 관계를 자기고 있는 것 같다...한국의 예술가들에서는 회화의 시각적인 것에 대한 강한 관심이 있다. 시각적이라는 말로 나는 회화가 작동시키는 시각적인 효과를 의미한다.“(이브 미쇼)
(배준성, 최진욱, 고낙범, 김동유, 전용석)





2. 한국미술2001;회화의 복권(국립현대미술관 2001.3.15-5.6)

“사진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회화는 곧 소멸될 것이라고 보았다. 자연의 모방이라는 오랜 회화의 관념으로 보았을 때 당연히 회화가 누려왔던 자리는 사진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이 같은 기우에도 불구하고 회화는 소멸되지 않았다. 소멸되기 보다 오히려 회화 고유의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상파에서 후기인상파로 전개되면서 회화는 단순히 자연의 모방이 아닌 회화는 회화일 뿐이라는 자립성을 비로소 획득한, 오랜 회화의 길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80년대로 진행하면서 회화는 또 다른 위기의 국면을 맞았다. 다양한 매체의 예술은 회화의 존립을 부단히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 비디오 아티스트는 21세기엔 회화는 소멸되고 영상과 같은 매체예술만이 남을 것이라고 공언했다...매체예술의 등장은 일종의 영역 파괴현상과 맞물리면서 미술의 재편에 박차를 가한 것이 되었다. 70년대부터 거론되던 이른바 탈 회화, 탈 조각의 현상은 80년대로 오면서 더욱 확대되어 영역간의 침투는 말할 나위도 없고 미술과 생활의 경계영역까지 타파하는 사태로 진전되었다..매체예술에 의한 극도의 확산주의는 예술이 지닌 각각 고유한 위계Hierarchy 무화시킴으로써 혼란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매체예술만이 남을 것이라는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선 먼저 회화의 존재와 그 자립성에 대한 새로운 검증과 모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사진이 등장하면서 회화가 새로운 자신의 길을 모색했듯이, 매체예술이 등장함으로써 회화는 다시금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검증과 자립의 방향을 모색해야 할 국면에 이르렀다...회화의 존재성과 그 방향에 대한 모색이야말로 회화의 복권의 명제가 될 수 있다..회화의 존재성의 확인은 과거의 회화로 되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회화의 본질에 대한 또 한번의 규명을 의미한다. ..시대에 따라 회화에 대한 접근과 해석의 방법도 다양함을 얻었다.”(오광수)

① 닮은 것과 닮지 않은 것 사이 | 김대원, 왕형열, 이재복
② 매재의 회화화 또는 회화의 매재화 | 강미선, 김선두, 정종미
③ 숲-생명의 유희 | 강경구, 김병종, 조순호
④ 손길을 따라서 | 김태호, 김호득, 황창배
⑤ 일상의 이미지 | 김원숙, 유연희, 황주리
⑥ 인간, 마르지 않는 샘 | 서용선, 오원배, 정복수
⑦ 그린 글 읽기 | 안창홍, 임옥상, 홍성담
⑧ 물성과 시간성 | 김택상, 석철주, 차명희
⑨ 실재와 이미지 | 강성원, 정장직, 한운성
⑩ 환영의 힘 | 고영훈, 류재하, 이석주
⑪ ‘심상’ 그리기?읽기 | 김지원, 이상남, 최인선
⑫ 다시보기:추상의 형상화 | 박관욱, 엄정순, 이지은
⑬ 회화의 깊이 | 문 범, 이인현, 홍승혜
⑭ 그리지 않은 그림 | 남춘모, 장승택, 최선호


3. Neo Painting - 韓ㆍ美 젊은 회화전 (영은미술관, 2002.3.21-4.30)

“레오나르도 다빈치, 반 고흐, 세잔느, 바스키아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의 주축을 이루어왔던 회화는 현재 영상?설치에 밀려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기록적ㆍ사실적 표현에서 감성의 표현, 물상적 표현까지 시대정신을 대변한 회화는 사진과 새로운 매체에 밀려 소수자의 입장이 된 현실입니다. 이 전시는 현재, 설치, 영상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 해석된 회화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회화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기 위해 마련된 전시입니다. 여기에는 팝아트, 추상, 표현적 경향 등의 회화장르를 시대정신과 새로운 테크닉으로 재해석하고 현대화한 네오 팝, 네오 표현주의, 네오 추상, 네오 사실주의적 계열의 작품들이 주로 선보입니다.”(김미진)
(김지원, 김희석, 박미나, 서혜영, 성낙희. 이순주, 정수진, 함연주, 홍순명, 황성준 등 참여)


4. Painter Paint PaintingsⅠ- 미술은 있고, 회화는 없다 -(갤러리 상 2003.5.3-6.1)

“지상최대의 가치로서 회화의 깃발을 올릴 필요는 없지만, 회화로만 획득되어지는 예술적 성취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요구하고 싶다. 흔히 사진술의 발달과 회화의 쇠락을 연결짓는다. 이미지를 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시각 예술의 민주화와 대중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막연한 예측은 영화와 TV, 광고, 컴퓨터와 시뮬레이션에 이르기까지 풍요로운 시각적 자극으로 증명되었다. 만들어진 이미지는 더 이상 희소하지 않다. 화가의 손과 물감과 천이나 종이가 질척이며 엉겨 만들어지는, 오랜 시간동안 연마하고 실패하여 얻게되는 소묘력, 그리고 소묘적 감각은 우리의 눈을 붙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세련되지 못함에 비해 유일성을 내세워 회화작품의 가격은 얼마나 고가(高價)인지! 이미지 생산에 많은 시간을 들이도록 놓아두지 않는 빠른 스피드와 변화무쌍한 문화 속에서 젊은 예술가들에게 회화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현상의 반복으로 점점 멋진 회화를 만들어내고 누릴 수 있는 경우도 줄어간다.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데 있어 회화가 가진 품성은 이미 20세기까지의 미학으로 마감된 것 같다. 이제 미술은 있으나 회화는 없다.
회화의 특성상 美를 추구하면서 얻는 또 다른 쾌감이 있다. 그것은 선의 궤적이 이루어내는 미와 색의 조화로움이 함께 하는 아름다움이다. 또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발견은 개별 작가들의 고유한 감성을 드러나게 한다. 회화를 통한 공감은 시각이라는 감각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또한 감각을 넘어 심리적, 감정적, 때로는 영혼의 만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basic nature)이 발현되는 것이다. 이 공감의 세계 안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쾌감이, 시대에 대한 통찰이, 박애가, 존재의 고양(高揚)이 모두 가능해진다.
투기대상으로서 받들어지는 슈퍼스타급 회화작품은 열외로 하고 미술, 회화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에서 밀려난 이유는 그만큼 회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보의 시대, 자본의 시대이다. 현대미술이 어떻게 자리매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회화의 논리는 이 정보와 자본의 논리로부터 가장 멀리 위치하고 있다. 이때 회화는 차가운 이성과 경제 논리의 정반대인 ‘회화적 감수성’을 개발하고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삶에 관여해야한다. 이성의 회화, 감각의 회화가 아닌 바로 ‘마음’을 흔들 수 있는 ‘마음의 회화’이다. 이성과 감각과 감성,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추어야함은 물론이지만, 총체적으로는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회화가 절실하다.
작품은 회화로서 존재하기 위해 작가의 부단한 노동을 필요로 한다.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림이 필요하다. 얄팍한 아이디어는 장구한 노동으로 빚어지는 힘과 겨룰 수 없다. 생각과 느낌과 열정은 손의 노동을 통해 회화라는 물질로 화하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노동한다는 것의 경건함은 예술분야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창작도, 교감도, 한시대의 문화도 결국은 일-성실한 노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소묘적 감각은 예술적 노동의 결과물이며, 더 나아가 회화의 완성도 또한 장인적인 노동 없이는 빈약할 뿐이다. 회화는 정보가 아니다. 회화 한 점은 인간의 감수성과 노력의 집결로 이루어진 소중한 열매인 것이다. 작품만 보아서는 기존의 동서양화의 구분은 없다. 재현적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기도 한다. 형식을 실험하기도 하고, 감성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회화를, 자기 작업세계를 만들어내는데 분주한 젊음을 느낄 수 있다.“
(한은선, 박재웅, 정정엽, 조상근, 김희석, 이강화, 민재영, 윤영섭, 함명수, 이성현, 고찬규, 안성하 참여)



5. 그리는 회화-혼성회화의 제시 전 (영은미술관, 2003.5.29-7.20)

“20세기까지 미술사에 있어 회화가 차지해온 부분은 너무나 중요하였다. 회화는 2차원 평면 안에서 3차원세계에 대한 재현과 그에 따른 시각적 환영을 위해 수 백년간 연구되었고, 추상을 통해 정신과 내면적 세계가 표현되었으며, 모더니즘의 해체 후 질료로만 남아 타 장르로까지 확장되었다. 이후 회화는 비디오, 영상, 설치뿐만 아니라 장르의 혼성으로 인해 아이러니컬하게 그 영역이 축소되었다. 이것은 과거의 전통을 전복하고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면서 미술사를 주도해온 회화가 더 이상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번 ‘그리는 회화-혼성회화의 제시’전은 회화만이 가지는 ‘그리는’부분에 중점을 둔 회화성을 다루는 전시라 할 수 있다. 회화는 2차원의 평면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화가의 직관, 이성, 감성이 제스처를 통해 캔버스, 붓, 물감이라는 고유 매체로 표현되고 매체 스스로의 우연성이 개입되어 결국 하나의 총체적 우주가 표현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리는’ 회화는 회화만이 가지는 화가의 손과 제스처를 통해 그려지는 형상이라는 가장 기초적이며 근원적인 특징인 회화성을 제시함으로써 형상과 비형상이라는 틀을 뛰어넘어 형상 속에서 비 형상적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리는 회화-혼성회화의 제시’는 의도적 그리기보다는 물성과 심성이 함께 녹아 들어간 혼성적 개념으로 사실적으로 보여지는 형태 안에 개념과 회화 스스로의 자율성이 공존하는 회화를 보여준다... 이번 혼성회화의 제시전은 형상과 비형상, 정신과 물질, 이성과 감성이라는 이분법과 부분에 의해 발전된 회화가 아니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문명과 우주라는 자연스러운 환경과 일치된 회화의 본질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 사라져 가는 역사의 산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 회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미진)
(박한진, 안창홍, 김지원, 정수진 등 참여)




1) 줄리언 벨, 원형준 옮김, 《회화란 무엇인가》, 한길아트, 2002, p.59
2) 박정기, 회화의 종말 이후의 회화, 《월간미술》, p.66
3) A. Danto, 《After the End of Art》,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 이성훈ㆍ김광우 옮김,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문화, 2004
4) 정영목,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쟁점에서 살펴본 추상미술의 변이, 《미술평단》, 1991.가을
5) 이성훈, <브릴로 박스>는 예술의 종말을 선호하는가? - 앤디워홀과 단토의 헤겔주의, 《미학ㆍ예술학 연구》16, 2002.12
6) 백지숙, 《아트 인 컬쳐》, 2001.1, p.91
7) 캐롤라인 존스, 살기 위해선 죽어야 한다, 《아트 인 컬쳐》, 2003.3, p.97
8) 최진욱, 회화는 정당한가?, 《포럼A》, 1998.4, p.15
9) 심광현, 영상시대와 근대적 시각체제비판, 《이미지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생각의 나무, 1999, p.374
10) 김병수, 회화에 있어서 주제의 의미와 그 표현가능성, 《미술세계》, 1996.12, p.121
11) 강성원, 회화의 위기-실제인가 공론인가 혹은 이론의 위기인가?, 《Visual》, 2002.2, p.59-60
12) 진휘연, 회화의 미래를 위한 이론적 출구: 구상과 잡종의 공간, 환영을 넘어서고, 문제를 넘어서고, 《Visual》, 2002.2,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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