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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 농민과 농촌 이미지

박영택

이종구-농민과 농촌 이미지

농민화가 이종구
작가마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소재가 있다. 이종구는 농민의 얼굴을 소재로 한다. 그는 농부들의 평범한 얼굴과 노동으로 단련되고 눌려버린 얇은 육체, 대지와 햇살에 의해 까맣게 연소된 피부, 남루한 살림이 처연하게 물든 의복, 노동복 등을 사실적으로 재현해온 작가다. 
흔히 그를 일컬어 ‘농민화가’라고 부른다. 그가 그린 그림은 한결같이 농촌사람들에 대한 꾸밈없는 초상이자 소상한 기록이고 충실한 다큐멘터리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80, 90년대 한국 농촌의 실상은 이종구의 그림에 고스란히 봉인되어 존재하기에, 그 기록성으로 말미암아 결국 박물관에 걸릴 것이다. 마치 박수근이 60년대 한국의 빈한한 근대화의 그늘, 뒷골목 풍경을 통해 당시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형상화 한 것처럼 이종구 역시 당대의 농촌 현실을 가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후세들은 그의 그림에서 지난 날 농부의 신체와 그의 연장을 흥미롭게 관찰할 것이다. 일종의 농촌도감이자 농촌에 관한 아카이브적 성격이 강하다. 
도시인의 시선에서 보자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있거나 일에 몰두하는가 하면 잠시 쉬고 있는 농부들의 못생기고 볼품없는 모습, 초라한 옷차림과 떡 진 머리, 모자와 장화, 그리고 고무신, 플라스틱 슬리퍼, 마른 땅거죽과 같은 구리 빛 피부 등이 사뭇 적나라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 모습이 한편으로는 다소 우스꽝스럽다가도 이내 형언하기 어려운 비애스러움이 마구 밀려온다. 그들의 몸이 너무 비루하고 슬프다. 그 남루하고 가난한 생애는 화면 속에 적막하게 얼어 붙어있다. 그래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침묵과 부동으로 자리한 농부의 신체와 소, 그리고 이 땅의 모습은 이종구의 그림 속에서 오래 살아남아 영원성을 지니고 불멸처럼 자리해 보는 자의 망막에 들러붙는 힘이 있다. 그의 묘사력은 정지와 압축으로 평면 위에 정박되어있다. 그림이 영상과 다른 점의 하나가 이 고정된 시선,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다. 사진과도 유사하지만 그의 그림은 사진의 단편적인 정보보다는 종합적인 구성을 통해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침묵 속에 응고시켜 보여준다. 그러니까 물기를 머금은 아크릴릭으로 장지를 바탕 삼아 꼼꼼히 그려나간 신체와 풍경은 주관적인 감정의 과잉이나 회화의 효과를 극대화하거나 하는 등의 과장된 연출을 누르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장면을 부감 시키는데 온전히 기여하는 편이다.

농부의 전형적인 상
이종구가 농민의 초상과 농촌현실을 그림 속에 사실적으로 담아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에 와서다. 당시 그는 거의 눈속임에 가까운 극사실적인 묘사를 축으로 삼고 그 주변에 실제 사물을 편입시키는가 하면 카메라 렌즈의 시점이나 몽타주 기법을 통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오는데 관심을 보여왔다. 무엇보다도 대상을 차분하게 재현하는데 충실했는데 여기에는 그림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재현적 묘사와 손의 노동과 수고스러움이 온전하게 드리워져있다. 아울러 자신이 그리는 대상에 대한 경건한 애정과 신뢰가 종교처럼 깃들어 있다. 80년대 어느 날,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한평생 농사일을 하며, 그 거대한 노동의 힘을 숙명적으로 감내하며 살아온 부친의 모습 속에서 자신과 농촌의 현실을 보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고단한 육신 속에서 새삼 자신의 정체성의 단서가 감촉된 것이다. 
그의 부친은 서산에서 농사짓다가 인천으로 흘러와 염부로 살다가 다시 귀농, 이후 농사를 짓다 죽었다. 아버지의 귀농 및 평생 농민으로, 노동자로 살다 간 그 이력과 생애는 그의 영혼과 육체 아래 침잠 되어 있던 ‘농민적 뿌리’를 다시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80년대 초부터 정부 양곡 쌀 부대종이 위에 자신의 아버지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새삼 아버지란 존재를 추억하고 기념하던 그림은 이후 ‘땅의 사람들’이라 제목을 달고 자신의 고향인 서산 오지리라는 장소에서 직접 농사짓고 살아가는 가난한 농사꾼들의 초상연작을 담아내면서 확장되었다. 현존하는 오지리 사람들의 낱낱 초상을 그려내는 과정을 통해 그 개별성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 이 시대 농민의 한 전형 또한 추출되리라는 믿음에서였다. 
그의 그림 속 농부들은 자신의 고향 땅에서 여전히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작가와 친숙한 이웃이고 동향사람들이다. 가난하고 어렵게 살면서도 여전히 농사를 짓고 그 일만을 천직으로 여기는 이들은 소를 닮아 착하고 꾸밈없게 생겼다. 그러나 한없이 피곤하고 슬픈 표정과 누추한 옷차림, 노동에 휜 허리, 자글자글한 주름, 구리 빛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간 피부, 마르고 쇠약한 몸에서 바트게 융기한 힘줄만이 햇빛을 받아 번득인다. 그는 항상 강한 조명과 그로 인해 드리워진 진한 그림자를 통해 실존성을 부각시키는 편이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환한 햇살이 내려 쪼이는 농촌의 어느 논둑 길 같은 데서 느닷없이 농부들의 육체와 직접적으로 맞닦뜨리는 그런 체험을 준다. 보는 이의 눈에 그 존재가 갑자기 던져지는 듯한 체험이다. 해서 결코 눈길을 뗄 수 없어 찬찬히 살핀다. 그들의 다소 처연한 육체와 깊은 주름이 하나의 두툼한 책처럼 무겁게 놓여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고은의 시 <만인보>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역정 마냥 자신이 그린 농부의 초상을 통해 보는 이들이 유장한 농경문화의 전통과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굴곡 심한 삶의 궤적을 읽어주길 바라며 아울러 농민의 전형성으로 보아주길 희구한다. 




고향 오지리
작가의 고향 땅, 충남 서산 오지리는 피폐해 가는 우리 나라 농촌의 한 표본이자 전형이다.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 현재 한국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을 총체적으로 안고있는 삶의 현장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그림 안에는 ‘농촌의 희생 위에 격렬하게 추진된 남한 자본주의 드라이브 아래 고개 숙인 농민의 고단한 삶’1)이 참혹하게 발설되어있다. 그들의 가난과 희생, 노동을 깔고 앉아있는 도시에 보내는 경고가 스며있고 동시에 현대도시문화의 농촌유입에 따른 농촌의 파괴, 외부의 힘에 의해 농촌이 끊임없이 수탈 당하고 피폐되어 가는 모습 또한 담겨 있다. 그 그림들은 암담하고 고통스러운 현재의 삶에 매몰된 농민의 모습을 반복해서, 객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고향 오지리를 통하여 근대화. 산업화 과정을 통해 급격히 와해되어 가는 이 시대 한국 농촌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자 한다. 반만년 역사의 농경문화 전통이 무너져가고 있으며 날로 농촌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자신의 가족과 오지리에 사는 이웃을 통해 목격하게 된 작가로서 당연히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농촌 현실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 농업의 절명을 기도하는 일련의 파상 공세 속에 적막강산으로 변해버린 농촌현실에 대한 우려와 분노를, 그 속에서도 농업노동의 존엄을 지켜나가는 농민들에 대한 간절한 연민과 연대의식’2)을 섬세하게 형상화하고자 한다. 마치 농부들이 고된 노동을 통해 작물을 길러내듯이, 그 역시 상당한 노동을 통해 그림을 그려낸다. 그림 그리는 행위를 농부들의 농사짓는 노동과 일치시키면서 농부들과의 유대감을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그림 그리는 일, 행위는 일종의 죄의식을 지니고 있고 그에 따라 농사짓는 노동의 미덕을 내재화해서 자신의 그림 그리는 일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차원으로 바짝 끌어당기고자 한다. 아마도 이런 동력이 그만의 일관된 그림을 지속시킨 유일한 힘일 것이다. 


쌀부대 위의 초상화
80년대 작품 대부분은 양곡부대에 극사실로 그려진 초상화다. 그 인물들은 마치 증명사진을 찍은 듯이 화면을 꽉 채우고 직립하고 있다. 모두 카메라의 시각, 카메라의 시점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기록적이고 객관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묘사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동과 침묵을 통해서 자신이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는 점차 직립포즈에서 벗어나 다양한 노동의 장면으로 펼쳐진다. 
결과적으로 그 그림들은 그것이 사진의 재현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현장에 가서 사진을 찍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그림을 그려 나간다. 그에게 그림은 삶의 기록과 증언에 충실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사진매체의 사용은 초상화적인 표현방법으로서 기념 사진적인 순간의 표현이나 현장 르뽀식의 이야기 그림에 적용된다. 아울러 눈속임에 가까운 기술적 사실주의는 모든 스타일이나 미술사의 변화와 유행에서 벗어나 있는 가장 소박한 형식일 수 있다. 동시에 시각적 외관을 충실하게 정복해 가는 솜씨와 손의 노동은 여전히 회화의 미덕이자 근원으로 자리한다. 눈으로 본 것을 눈으로 내보내는 회화는 가장 밀도 높은 두뇌운동이자 작가의 신체가 세계와 직접적으로 반응하고 교감하며 직접 마주치는 장3)이기도 하다. 영상이미지와 테크놀로지 시대에 그가 여전히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의 일단 역시 회화의 미덕과 역할에 대한 신뢰에 기인하는 것 같다. 
아울러 그러한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려진 초상은 쌀부대 위에 얹혀져있다. 그러니까 이종구는 우리시대의 농부의 전형을 담아내기 위해 기존의 고급한 재료를 벗어나 농촌사회의 실재감을 풍부하게 드러내주는 재료로서 정부미 부대나 양곡부대를 회화적 장으로, 자신의 그림의 바탕으로 선택한 것이다. 캔버스 대용으로 쓰여진 합성수지의 양곡부대나 종이포장지(부대)는 재료 자체가 이미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삶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바탕이다. 
작가에 의하면 캔버스나 고급종이 대신 헌 쌀부대를 화폭으로 사용한 것은, 노동하는 농부의 검게 그을린 초상을 화려한 재료에 함부로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아서라고 한다. 아울러 농부의 삶과 유기적인 재료이기에 다루는 한편 현대미술의 개념인 오브제(레디메이드) 4)로서의 상징성과 현실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 그 재료가 쓰였다는 것이다. 
농부의 운명은 결국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잉여가치에 의하여 경제적. 문화적 삶을 누리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생산물을 포장하고 저장하는 쌀부대야말로 가장 농부의 삶에 지대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 양곡부대의 질감이 때로는 너무 독자적이어서 중심이 되는 농민 초상을 압도한다는 지적도 있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절충’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양곡부대에는 정부양곡이라는 상표, 벼나 보리 같은 종자의 문양, 화살표나 문자 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고 이로 인하여 그 피부에 그려진 농민초상은 쉽게 이해되고 따라서 그 현재성과 사회성이 동시에 효과적으로 획득 5)된다. 여기에 포스터나 표어, 상품포장지들을 꼴라쥬 해 넣기도 하고 그려 넣기도 하면서 그 효과를 증대시켰다. 그에 따라 화면 밖으로 그 초상들이 돌출하는 강력한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이후 나무판(밥상)에 흙을 바르고 그림을 그리거나 문틀, 거울 틀 등에 직접 이미지를 그리는 경우로 나아간다. 그래서 그 그림들은 충실한 사실주의, 리얼리즘 기법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다분히 초현실주의적인 기법 또한 삽입되고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저마다 특정 동네 지명과 성으로 대변된다. 먼저 <조부상>,(1980)에서 출발해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속.농자천하지대본-연혁>,(1984) 그리고 동네에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명환아저씨>,(1986) 나아가 오지리에서 만난 사람들<오지리 안씨>,(1990) 등이 그렇다. 이후 장소를 지우고 사람이름만 들어가는데<이씨의 여름>,(1991), <은행동 류씨>,(1991)등이 그 예다. 그러다가 <수몰지의 늦가을>,(1992), <들길>,(1992) 등의 그림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등장하는데 여기서 이 둘은 다같이 동질의 의미, 균등한 존재로서 위치한다. 혹은 <들-배씨>,(1994), <오지리 사람들>,(1993), <김씨부부>,(1994) 등의 군상도 있다. 이후 소, 씨앗, 그릇 등의 정물이 단독으로 화면에 등장하면서 농촌과 농민의 삶을 압축적인 소재로 상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90년대에 와서는 작품에서 지시적인 요소들을 제거한다. 장지를 사용하고 원근법을 도입하면서 이야기 구조가 추가되었다. 이야기 전달을 위해 원근법이 채택되고 실재 사물의 편입은 자제되었으며 매체도 부대자루에서 장지로 변화한 것이다. 양곡부대의 질감, 피부가 차지하던 배경이 농촌의 구체적인 풍경으로 대체되었다. 이 원근은 묘사라기 보다는 화면에 이야기 구조를 설정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6)인 셈이다. 따라서 농민들의 삶이 이야기 구조 속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펼쳐지게 되고 그 안에는 농민들의 일상적인 시간들이 묘사된다. 
90년대 중반의 작업들은 낡은 밥상에 흙과 씨앗 혹은 낫과 삽, 고무신, 비닐신발 등을 평면에 그려 넣었다. 그 소나 씨앗, 농기구, 그릇과 신발은 의인화된 존재로 자존한다. 단순한 사물에 머물지 않고 애니미즘적으로 환생하면서 땅에 얽힌 사연들을 주문처럼 들려준다. 


다시 땅으로
2000년도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오지리 사람들과 소가 그려지기도 하지만 이제 물, 국토, 백두대간 등의 장엄하고 스펙타클 한 자연풍경이 그림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국토의 자연과 삶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백두대간>시리즈는 우리 국토의 자연과 인간, 역사와 문화, 생태 등 국토지리와 인문지리를 하나로 엮는 대하의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장엄하고 무겁고 스펙타클한 이 풍경은 따라서 아크릴릭 대신 중후한 유화로 다루어진다. 
한반도의 산야를 도상학적 구도를 응용하여 하나의 전체 상으로 구성한 이 작품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원대하게 전개되고, 덕유산, 지리산 등의 산세가 화면 가득히 전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 땅의 이 유장함과 경건함에 대해 거의 종교적 신앙심을 드러낸다. 혈관처럼 수많은 산들이 연결되어 결국 다들 바다에 처연하게 가닿는 우리네 산하풍경은 벅차면서도 뜨겁다. 또한 이 그림의 저변에는 자연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살아 숨쉬는 유기적 존재로 인식한 풍수사상에 대한 이해가 짙게 깔려있다. 대지는 살아있는 인간의 신체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결국 생태주의에 대한 이해로 연결된다.
아울러 이 그림은 동양화에서 엿볼 수 있는 전통적인 공간파악을 보여준다. 그것은 땅에 대한 우리의 부분적 지각과 전체적인 의식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성립한다. 동양화에서 고정된 하나의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고정되지 않는다. 세계는 정지태가 아니며 운동태이고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고정이 아니라 떨림과 흔들림이란 것이다. 그래서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다. 결국 그 응시법은 다원적 시점이고 움직이는 시점이 된다. 아울러 복판에 내재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시점은 결국 그림 안에서 움직이는 관점, 즉 ‘실존의 시선’에 다름아니다. 7)
이종구의 근작에서 그런 시점을 만나는 것은 앞으로 이 작가의 그림을 예감하게 하는 중요한 징후다. 그는 이제 농민의 초상, 농촌 현실의 기록적이고 즉각적인 보고에 가까운 그림에서 거리를 넓혀 좀더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시각으로 이 땅과 그곳에 사는 이들이 운명을 헤아려보고자 하는 것도 같다. 좀더 철저히 대지에 붙어, 수평적 인식을 넓혀나가면서 말이다. 

“최근 세계화에 따른 외래적 사고와 문화가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일반화할수록 나는 이 땅의 전통과 사소한 삶의 가치에 더욱 집착했다. 언제나 민족적 삶에 반하는 세계나 추상적인 세계를 경계했으며, 생래적으로 불우하고 상처난 세계에 주목해왔다. 서구의 자본주의적 삶과 우리의 삶 사이에 동일시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음을 늘 생각해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백두대간>과 같은 낡은 회화적 형식과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진부한 명제로 대응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러한 방법이 시대적 패러다임을 역행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앞으로도 확신 없는 세계화나 우리의 삶과 인간화가 배제된 유희적 외래양식의 아류에 편입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거듭 내가 살고있는 지역적 삶과 민족적 현실에 더 천착하고 싶다.”(작가노트, 2003) 


1) 최원석,≪땅의 사람들≫, 학고재, 1992, p.5

2) 최원석, 같은 책, p.5

3) 심광현, ‘영상시대의 근대적 시각체제비판, ≪이미지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생각의 나무, 1999. 참조

4)레디메이드(Ready-made)란 마르셀 뒤샹(Marcel Ducamp)에 의해 언급된 용어로서, 개념적으로는 원래 치수에 맞추어 생산된 기성복에서 유래하는 ‘준비된 것’의 뜻으로 산업 생산물에서 작품으로의 단순한 이동을 말한다. 본원적 기능이 박탈된 산업 생산물은 예술작품으로의 변신 후 새로운 미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재 탄생하게 되며, 순전히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서 산업 오브제가 예술 오브제로 승화되는 것이다. 

5) 유홍준, ‘죽어가는 농촌, 살아있는 농민, ≪땅의 사람들≫, 학고재, 1992, p.69

6) 정헌이, 이종구전시도록, 가나화랑,1996

7) 박영택, ≪식물성의 사유≫, 마음산책, 20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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