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청계천을 거닐다展 2005.9.28-10.30 서울시립미술관
새로 복원된 청계천을 주제로 한 이 전시는 어쩐지 후기근대 담론에 묻어 있는 근대성 논쟁을 되새김질하게 한다. 청계천이야말로 한국 근대화의 과정과 역사, 그리고 그 현장성을 함축하고 있는 모델이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여기서 그 논쟁은 과연 한국에 근대라고 부를만한 자의식이나 자각현상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 현상을 관통해온 시절이 있었는가에 대한 자기반성적 질문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에도 근대화의 과정과 시기가 있기는 있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여러 이질적이고 이종적이고 이형적인 것들이 혼재하는 혼성적인 형태로서 출발했다. 그 자체 제3세계의 근대화의 과정을 고스란히 떠맡아서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미학적 특수성을 내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혼성의 이러한 흔적은 한국인의 삶의 풍경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며, 각자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북촌 한옥가옥과 빌딩 숲이 혼재해 있는가 하면, 달동네와 아파트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초호화 빌라의 옆에는 노숙자의 골판지로 지은 집이 공존하고 있다. 산아제한 정책이 언젠가부터 출산장려정책으로 바뀌었고, 학원이 학교를 밀어내고 있다.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로 귀결되고, 경제적인 문제인 양 여겨진다. 그 와중에 사실은 왜곡되고, 현실은 기형적이 된다. 사람들의 인격은 시간을 요리하는 능력에 의해 가늠되고, 자신의 몸값에 의해 가늠된다. 일상인의 언어 속에는 한글과 한자, 영어와 일어가 혼재해 있으며, 이는 그대로 한국, 중국, 미국, 일본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이해관계에 의해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근대는 처음에도 혼성이었으며 지금도 혼성이다. 새로 복원된 청계천은 혼성의 시대를 관통해온 한국 근대의 축소판이다.
이 전시는 지난 2003년 청계천 복원을 앞둔 시점에서 열린 <청계천 프로젝트 - 물위를 걷는 사람들>에 이어, 대략 2년간의 공사 끝에 지난 10월 1일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복원 이후에다 그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두 전시를 비교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2003년 전시가 청계천의 뚜껑이 열리기 이전이었던 만큼 작가들의 상상력(예컨대 역사적 상상력이나 정치 경제적 상상력, 그리고 도시공학적 상상력 등)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컸던 것 같다. 비가시적인 영역을 가시적인 영역 위로 끌어내야 하는데, 이때의 비가시적인 영역의 상당 부분이 작가들의 상상력으로 채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모르긴 해도 그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이 작용했었을 것이다. 즉 청계천은 단층구조가 아닌 복층구조다. 말하자면 여러 다양하고 이질적인 삶의 질이 중첩돼 있다. 이 가운데 어떤 단층, 어떤 지점을 복원해낸다 말인가. 그 복원이 향해 있을 청계천의 원형 같은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따라서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가 과거의 어떤 지점을 향해 소급되는 식으로 보기보다는, 기존의 청계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또 다른 프로젝트를 그 역사의 지층 위에 포개는 식으로 본 것이다. 그럼으로써 또 다른 혼성의 계기가 보태지는 식이 돼버리지 않을까. 아마도 대략 이와 같은 상황인식이 작가들로 하여금 현실적으로 주어진 조건에 구속받지 않게 했으며, 그만큼 작가들의 상상력이 활성을 얻었던 것 같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는 한눈에도 작가들의 상상력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아진 것 같다. 그건 아마도 그 동안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청사진이 현실로 실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시의 상당부분이 상상력 대신에 새로운 현실을 재확인하는 계기들로써 채워져 있다. 이를테면 전시장이 새로 복원된 청계천의 구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으며, 이로써 관객들이 마치 청계천을 실제로 거닐고 있는 듯한 추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더불어 그 구조물 여기저기에다가 사진과 영상물들을 설치해서 관객들의 이해와 체험을 돕고 있다. 이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달라진 청계천을 향유하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전시가 청계천으로 상징되는 한국 근대화의 과정에 대한(말하자면 다양한 레이어로 나타난 삶의 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나 자기 반성적 계기로서 작동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전시의 인상은 박람회장이나 홍보관, 박물관이나 모델하우스의 방식에서 오는 느낌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 매뉴얼들은 그 자체 장소 특정성 개념에 맞닿아 있으며, 헤테로토피아 개념에 맞닿아 있다. 즉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사회, 마치 고립된 섬처럼 사회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사회,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사회의 유형들이다. 이는 창작주체의 해석으로 인해 이질감을 극대화할 수 있을 때에만 미학적 가치를 얻게 된다. 말하자면 낯설게 하기를 통해 오히려 그것이 속해 있는 진정한 장소와 위치, 그리고 정치적인 맥락을 주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 즉 그 장소의 물적 형식만을 모방할 때 이는 단지 자본주의의 욕망을 재현해줄 수 있을 뿐이다.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작가들의 이러한 해석의 여지가 작동하는 곳으로부터 이 전시의 의의가 발생하고 있다. 주최 측은 전시를 가시적인 영역과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 가운데 가시적인 영역을 새로이 복원된 청계천의 현재와 연결시키고, 비가시적인 영역을 복원되기 이전의 청계천의 과거와 연결시킨다. 그럼으로써 청계천의 과거와 현재의 그 공간과 시간의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가운데 작가들의 해석이 작동하는 지점은 청계천에 대한 심리적인 풍경과, 청계천이 함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가치들에 초점을 맞춘 비가시적인 영역에서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우선 금중기의 FRP의 표면에 채색한 토끼는 일종의 역설로서 다가온다(그들이 돌아오다). 즉 그 토끼는 청계천의 복원과 생태환경의 복원(오히려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동일시하는 한편, 이렇게 환경이 복원된 이후에 청계천 변에 자리하게 될 각종 동식물을 상징한다. 그런데 정작 그 토끼는 사람의 등신대를 넘어서는 거대한 크기와 함께 짙은 군청색의 어두운 표면 채색(이는 아마도 청계천의 물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으로 인해 그로테스크하게조차 보인다. 따라서 과연 동식물들이 청계천 변으로 다시 돌아올까 하는, 그리고 과연 생태환경이 진정으로 복원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읽힌다.
그리고 이순주가 공사현장에서 수거해온 각종 철골구조물과 콘크리트 구조물에서는 삶의 문맥 속에서 그것들이 문명의 이기였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형질변경이 느껴진다(청계천 유적). 즉 전시장의 조명 아래 놓인 그것들에게서는 일종의 멜랑콜리한 감정과 함께, 종교적인 오브제를 모아놓은 제단을 보는 듯한 역설적인 상황마저 연출해낸 듯 보인다. 또한 C.L.P의 그룹 작업인 <청계천 기억보관소>는 청계천 자체를 직접 코멘트 하기보다는 청계천으로 상징되는 한국 근대사와 그 현상에 대해서 코멘트 한다. 그리고 이는 비닐주머니에 담겨져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국화빵들처럼 천편일률적인 교육과,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행정 착오 등의 숨가쁘게 내달려온 근대사의 그림자를 암시해준다. 남들과 똑같아야 한다는 자기 외부로부터 온 강요와, 이를 내재화한 현대인의 심리적 현실을 암시해준다.
그런가하면 임창민의 영상설치작업 <바람으로부터의 착시>는 거대한 환풍구가 불러일으킨 바람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사라지는 벌거벗은 신체를 보여준다. 여기서 아마도 바람의 진원지인 환풍구는 근대화를 견인해온 각종 이슈를 상징할 것이다. 개개인의 삶의 질이 마치 블랙홀과도 같은 그 거센 바람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미미한 흔적처럼 해체되고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현실인식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플라잉시티(청계천미니박람회)는 수년 동안 청계천이란 특정 장소에 대한 기록작업과 형식실험을 축적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이 낯설게 하기라는 전략적 장치를 통해서 천변의 다양한 삶의 결을 재조명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주제의식에 가장 일치하는 경우로 생각된다. 하나의 특정 장소를 선정하고, 이를 집중적이면서도 다각도로 해석해내는 이들의 태도와 작업방식은 근대화를 관통하는 핵심개념으로서의 도시공학적 상상력의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