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자(父子) 그림쟁이의 삶-류해윤과 류장복
박영택
아버지와 아들
류해윤은 화가 류장복의 아버지다. 그는 미아리 길음동에서 세탁소와 복덕방을 동시에 운영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가게 한 귀퉁이에 놓인 책상 위에 작은 화판을 세워두고 그려나갔다고 한다. 다림질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혹은 월세나 전세 문의에 응답하거나 함께 집을 둘러보고 온 후에 그 자리에 앉아서 이런 저런 그림들을 그렸다. 미아초등학교 정문 앞에 위치한 그 세탁소를 찾아가 바로 그 장소를 보았다. 다소 감격적이었다. 작고 허름한, 그러나 이 세상의 어느 곳보다 안락하고 편안 했을 오랜 집/직장에서 그는 일과 그림그리기를 아무렇지 않게 끌어안으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3층 집으로 올라가 그곳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의 하루 동안의 행동 반경은 1층 세탁소와 윗층의 집과 ‘그림 방’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에게 그림그리기와 삶은 분리되지 않았다. 이 자발적인 그리기, 재미와 위안, 향수를 주는 작업에 몰두한지도 어언 10여년이 되간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 잡념과 고민이 없어지고 만사형통이라 정신 건강에 더없이 좋다고 말한다. 늙어서 건강에 도움이 되고 심신이 더없이 편안해지는 방편이 그림 그리기인 셈이다. 건강한 노후를 그림 속에서 찾고 있으니 행복해보였다. 사실 상당수 작가들에게 작업이란 너무 어렵고 힘든 일에 속한다. 더러 재미와 유희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무엇을 그릴지, 어떻게 그려야 할지,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인지에 대해 늘상 조급해하는가 하면 동시대 미술의 흐름과 경향에 초조해하기도 하고 작품 판매와 화단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가쁜 저울질로 부산한 이들이다. 그러니 그림 그리는 일이 고역이고 힘겨운 일일 것이다. 작업을 하는 것도 먹고 살자는 일이자 인정받고자 하는 일이며 욕망과 권력의 시스템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으려는 안간힘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제도와 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오로지 재미와 즐거움, 자기 치유와 건강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황홀한 일일 것이다. 류해윤은 전문 화가도 아니고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살아야 하거나 화단에서 인정받고자 할 하등이 이유가 없는 이다. 그렇게 되면 좋기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의 인생에 큰 문제가 발생 하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이 주는 감동의 근원이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의 요청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내부에서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한편 자신의 추억, 소망, 건강과 유희를 위한 작업말이다.
류해윤의 그림이야기
그는 지금도 일주일에 최소 1, 2점씩 그려낸다. 대단한 작업량이 아닐 수 없다. 작년에는 그렇게 해서 모은 그림들을 가지고 인사동 쌈지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다. 생애 첫 개인전이었다. 우연히 나는 그 전시를 보았다. 보고 나서 그 전시를 지난 한 해 보았던 전시 중 최고의 전시로 손꼽았고 틈나는 대로 수업과 방송, 글쓰기를 통해 그의 작업을 즐거이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에 그의 세탁소도 찾고 작업공간도 둘러보고 그의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류장복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류해윤은 귀가 좋지 않아서 대화하기가 약간 불편했다. 대신 아들 류장복이 소상히 아버지의 그림에 대해 말해주었다. 사실 보는 일이 직업이라 수많은 전시를 보고 다녔고 따라서 웬만한 작업 앞에서 감동을 맛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무덤덤해지고 이른바 충격에 내성이 생긴 나에게 류해윤의 그 그림들은 놀라움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가 류장복의 아버지임을 알았다. 내 기억에 류장복은 드로잉이 뛰어난 작가였고 그가 철저히 보고 느끼고 그려낸 인물과 철암풍경은 매우 끈끈하고 강렬한 그림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지난 한 해도 그의 개인전을 보았고 그가 무슨 그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기억 하고 있던 터라 더없이 반가웠다. 그래서 류해윤의 집/작업실 방문은 류장복과 함께 하게 되었다. 류장복의 미술에 대한 재능은 상당 부분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류장복의 기억에 어린 시절뿐만 아이라 그 이후로도 아버지가 그림을 그렸던 것을 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정규 미술 교육을 한 번도 받아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서울로 상경해 어렵게 살아온 실향민이자 서울의 변두리 미아리에서만 40여년을 살아온 이다. 그러던 그가 9년 전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70이 다된 나이에 말이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다가 죽은 부친의 영정사진을 그림으로 그려본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지속해서 여러 그림을 많이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그림들은 모두 류해윤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던 여러 이미지들이었고 그의 그림은 그 이미지들이 조합과 합성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류해윤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결정적 동기는 바로 한 장의 사진의 모방이었다. 그러니까 1999년 류해윤의 노부가 돌아가시자 제사상에 올려놓기 위해 고인의 작은 사진을 보고 그대로 그려본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원래는 화가 아들인 류장복에게 부탁을 했고 그래서 그려 받았는데 그것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 자기 스스로 그려보고자 한 데서 시작한 것이다. 화가 아들의 그림 솜씨가 못내 미덥지 못한 그는 정성을 다해 자신의 노부의 얼굴을, 사진을 베껴 그렸다. 그에 의하면 한 10번 이상 사진을 보고 베끼다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과 비슷한 모습이 나오더라고 한다. 죽은 아버지의 얼굴(사진)을 안쓰럽게 모방하고 닮게 그리려고 무던히 애를 쓰다가 숨겨진 재능이 발아한 것이다. 사실 류해윤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는 초등학교 당시 군 교육청에서 미술상을 받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서울로 가서 그림공부를 하려고 가출을 시도하기 까지 했다고 하니 나름대로 화가가 되고자 한 열정이 꽤나 컸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이내 좌절하고 한국현대사의 격동 속에 온전히 내맡겨진 상태에서 살아 남은 것이 기적인 그런 시대를 관통해왔다. 자신의 고향 땅을 떠나 낯선 서울의 미아리에 자리 잡은 후 먹고 살기 위해 세탁소와 복덕방을 하면서 40여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아들 3형제를 낳고 길렀다. 그러다보니 그림에 대한 열정이나 꿈도 다 스러지고 먹고 사는 일에 쫓기다가 문득 죽은 부친이 영정사진을 그리다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잊고 지냈던 재능과 열정이 환생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쨌든 그는 자신이 주어진 상황, 조건 아래서 열심히 그렸다. 세탁소와 복덕방 한구석에 그림 도구를 갖다 놓고 그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어느덧 10여년을 헤아린다. 그동안 500여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모두 아들 류장복이 사진으로 찍고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인터넷 전시를 하기도 하는 등 작품 관리를 해준다. 그리고 가끔씩 들려 재료를 갖다 주기고 하고 그림에 관한 얘기도 나누고 한다. 그 블로그에 올라온 그림을 본 화가 이진경이 그 그림에 매료되어 주선한 것이 류해윤의 첫 전시가 된 것이다. 나는 잠시 이진경의 포천작업실과 홍천 작업실에 갔었던 기억과 그녀의 여러 그림들이 떠올랐다. 그녀의 그림 역시 소박하고 아마츄어적인 내음을 짙게 풍기는 키치풍의 그림이었다.
유토피아를 그리다
류해윤은 독학의 작가다. 아니 정규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이다. 그러나 그림에 관한 지식이란 학교라는 제도에서만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만나고 체득한 모든 이미지들을 참고 삼아 그렸다. 그것 모두가 그에게는 학교이자 미술관이고 책이자 스승인 셈이다. 류해윤의 그림을 보면 그 안에 한국의 전통회화, 그러니까 산수화와 민화풍의 그림들이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변형되어 등장하는가 하면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일컫는 그림들의 소재 또한 빈번하게 차용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텔레비전이나 신문과 잡지에 등장하는 사진을 참조로 해서 이를 모방해 그리거나 기억해 두었다고 그려낸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모방해가면서 자신이 본 이미지 위에 자신의 기억과 소망을 겹쳐 올려놓는다. 그가 보았고 이른바 미술이라고 여겼던 그래서 아름다움과 멋있는 장면, 미술의 주된 소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들을 따르거나 재구성해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그리는 그림 안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미술의 역사와 흐름, 전통미술과 서구 근. 현대미술, 생활 속에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는 미술에 대한 일반인들이 상식이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그 안에 한국 사회에서대중들이 간직하고 이해하고 있는 미술의 정체랄까, 그 모든 것들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그림들이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미술이자 한국인들에게 지난 시간 동안 진정한 향수와 위안을 주었던 미술이었을 것이다.
류해윤의 그림 안에는 전통산수와 민화, 이발소 그림과 성화, 상업미술과 대중적인 장식미술, 그 모두가 재현되고 있다. 그는 그것들의 모방과 재현을 추구하는데 여기에는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지 않은(못한) 것에서 기인하는, 부득이한 변형과 왜곡, 자신의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 다소 어색한 표현이 자리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력으로 가시화되면서 그만의 독특한 조형적 언어로 표출되는 편이다. 그가 가장 많이 그리는 것은 이른바 산수화와 풍경화(이발소 그림)가 접목된 경우다. 사실 한국에서의 이발소 그림(풍경화)이 이 땅위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불가피하게 한국적인 서구풍경화로 변질된 경우가 우리의 이발소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의 전형이다. 예를 들어 그림 안쪽으로는 뾰족하게 솟구친 알프스 산과 같은 만년설의 산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침엽수림 지대와 단풍이 우거진 숲이 자리하고 있으며 아래쪽으로는 계곡과 다리, 초가집과 물레방아, 고추를 말리고 있는 마당, 지게를 진 농부와 아기를 업고 있는 아낙네와 강아지가 있는 풍경이 그것이다. 정신분열증적 풍경이라고나 할까? 네덜란드로부터 연유한 그 풍경화가 일본을 거쳐 이 땅에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산수화와 만나고 다시 근대화의 급격한 파고 속에서 상실해 가던 농촌풍경과 고향의 추억이 다시 그 안으로 투사되면서 형성된 한국적 풍경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그림은 결국 류해윤 세대가 지닌 생의 경험과 상실을 정확히 반영해준다. 위무해준다. 그래서 그 같은 그림이 대중성을 띄면서 삶 속으로 들어왔고 이는 류해윤의 미술관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의 산수 풍경화, 풍속 풍경화는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추억을 기초로 하거나 경험이나 개념적으로 아는 사실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풍경이다. 대부분 자신의 고향과 관련된 추억을 즐겁게, 낙원으로 그려낸다. 고향은 유토피아이자 파라다이스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노는 장면이 다수다. 그러니까 단오절에 어부들하고 농민들이 어울려서 잔치를 하는 장면이나 야외에 나와서 음식을 끓이는 장면, 그러니까 상투를 튼 어민들과 머리에 띠를 두른 농민들이 야외에서 잔치를 벌이는 <조선시대 어민과 농민이 함께 모여 5월 단오절을 마자 흥겨운 놀이잔치>(2005) 등이 그 대표적인 그림이다. 다분히 풍속화와 산수풍경화가 결합된 그림이다. 그 풍속 풍경화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일화를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경험적으로 또는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결합해서 형상화한 것이다. 아득한 시간대를 선명하게 떠올리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림그리기로 인해서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추억을 환기하고 상실한 농촌공동체 삶의 건강하고 낙천적인 측면을 환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도화경이고 그의 소망이자 옛 기억의 호출이며 잃어버린 시간의 보상이다. 그에게 그림은 위안을 준다. 이렇듯 그에게 정신건강과 추억과 향수를 자아내기도 하고 즐거움을 주는 그림 그리기에서 그래도 불만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림이 실제와 닮지 않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림 그리기 전에 몸이 동작표현이나 여러 상황을 여러 번 그려보면서 연습을 한다. 원근법, 명암법과 같은 기초적 모방 기술을 배우지 못한 그로서는 당연한 불만이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독학 화가가 갖고 있는 개성적 표현력과 순진무구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 모방의 기술을 터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어지는 변형과 왜곡, 그만의 고유한 조형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그는 모방을 추구한다. 그의 최대 목표는 모방적 재현이다. 그러나 인물이나 풍경 등 실제 대상을 놓고 그리기에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탓인지 그는 대부분 이미 재현된 이미지를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주로 참조하는 이미지 원천은 그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신문사진이나 텔레비전 화면이다. 그렇게 해서 본 것들을 모방하거나 잘 기억하고 있다가 자신의 기억과 환상,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특유의 상상력의 소산인 셈이다. 기억에 의존하고 상상력과 환상을 첨가해서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상상력이란 예술적 영감 같은 것이 아니라 기억과 추억에 기반 한 개인적 정서의 소산이다. 그는 그림그리기를 통해 꿈을 꾸고 이상향을 떠올리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환생시키면서 그만의 독특한 내러티브를 만들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화이자 신몽유도원도나 낙원화, 무릉도원화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어렵게 살았던 서울생활의 편린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고향 땅과 관련된 추억만 있으니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과거에 어렵고 힘들었던 장면들은 하나도 없고 가보고 싶은 곳, 가장 아름다운 곳, 특히 금강산이 지속해서 등장하고 그 다음으로는 고향과 관련된 기억들이 그려진다. 그림 마다 비교적 긴 제목이 적혀있다. 류장복이 그린 그림에는 그림을 그렸던 날짜와 시간이 기록되어있다면 아버지의 그림에는 나름의 사연, 이야기가 적혀있다.
철암을 그리다
류해윤이 고향땅과 기억 속의 추억을 그리고 금강산을 꿈꾼다면 류장복은 철암이란 강원도의 탄광도시를 찾아 거닐고 이를 그린다. 그가 철암에 간 것은 2001년도부터다. 그때부터 매월 셋째 주말이면 어김없이 멀고 먼 철암으로 달려가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이 모습을 사생한다. 그는 자신이 보고 접한 것을 그 자리에서 그린다. 자기 몸의 반응에 우선한다. 아버지가 기억과 상상, 환상에 입각해 그린다면 그의 그리기는 정반대인 셈이다. 그는 기억과 상상, 환상을 거부하고 오로지 현재 자신의 몸과 대상의 만남 속에서만 그림을 그린다. 류해윤의 작업이 기억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류장복은 기억이란 것이 다분히 조작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가 왜 그토록 철암그리기에 몰두하는 가가 궁금했다. 강원도의 탄광지대가 있는 장소를 그린 그림으로는 이전에 황재형과 오치균의 회화에서 접한 기억이 난다. 그러나 특정 장소를 집요하게 반복해서 탐사하듯이 그리고 있는 이 경우는 처음이다. 그에 의하면 철암에 왔을때 자신이 어린 시절 동네 풍경이 자연스레 떠올랐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 60년대 초 서울 변두리 풍경이란 거의 한결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황량하고 스산한 가난이 곳곳에 가득 배어있는 장소, 개천이 있고 산비탈까지 들어선 판자 집들과 공동묘지가 있었던 미아리 풍경이 그것이다. 류장복은 철암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그곳을 다시 만났다. 서울의 근대화 초기 풍경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것이다. 마치 흑백사진에 들어와 박힌 유년이 풍경이 세트장처럼 자기 눈앞에 자리한 것이 철암의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살던 미아리 풍경을 다시 만난 듯도 하고 이제는 모두들 떠나 덩그러니 남은 철암이란 장소가 풍기는 기묘한 부재와 황량함, 광부들이 어려운 삶이 곳곳에 녹아있는 그 풍경이 문득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왜 철암에서 사생을 하는지 물어보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철암에서’라는 질문 자체에 이미 가치와 판단이 개입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철암에서 자기 앞의 풍경을 사생 하다 보면 대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어느덧 그리고 있고, 그리고 있는 것 같았는데 보고 있는, 그런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고 말한다. “눈앞의 대상이 나를 본다. 나는 그를 마중하려 하지만 목탄을 긋는 순간 그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나와 대상과의 거리가 사라진다. 목탄이 짓이겨져 부서진다. 목탄의 알갱이만이 감각할 수 있는 실제로 매순간 다가온다....최초의 자유가 거기 있다.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시작의 자유다.”(류장복)
처음에는 철암의 풍경만을 그리다가 이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단다. 대부분 뜨내기들인 철암사람들은 석탄 경기가 좋았던 시절 구름처럼 몰려왔다가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석유에너지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하나씩 둘씩 떠나 지금은 이미 탄광도시로서의 의미가 사리진 이곳에 여전히,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그들의 삶, 느낌을 그리고자 한다. 풍경이나 인물이나 그는 철저한 사생을 중시한다. 풍경이나 인체 모두 동일한 생물체로서 접근하고 그린다. 그는 비나 눈이 올 때도 춥거나 더워도 항상 밖에서 그림을 그린다.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대상 앞에 실제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선다. 극심한 신체적 고통 속에서 이른바 이성의 개입은 줄어들고 대신 신체의 감응, 감각에 더욱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류장복은 자신의 화판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마저 철암의 대기에 내어 던진다...미술가는 사유나 기억과 같은 삶의 영역들을 등 뒤에 잠시 내버려 둔다.”(이희영) 그러니까 그는 대상 앞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야 다른 생각을 못한다고 한다. 아니 다른 생각, 잡념이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가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본 대로의 신체적 반응만 허용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끼어들 틈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철암은 기존의 관습적 시각에 기대어 본다면 미술적 소재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고 또한 밋밋한 풍경을 반복해서 그리면서 매번 새로운 모습, 새로운 측면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가 철암을 사시사철 그리는 이유는 기존의 회화적 행위와는 거리가 있다. 상투적인 풍경에 대한 시각과 접근을 가로질러가는 동시에 그림이란 것을 대상에 대한 인상이나 이미지를 파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좀 더 밀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실천적 지식과 행동, 주어진 대상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에 해당한다. 류장복은 철암이란 장소를 이해하고 그 속성을 파악하고 그 분위기와 체취, 시간과 세월의 흔적, 나아가 그 대상으로 인해 파생되는 자신의 신체와 감각의 변화 및 인식과 호흡 등을 그리려고 한다. 그러한 제작 행위, 그림 그리는 태도를 그는 ‘생물’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생물적이란 말은 ‘대상에 대한 그리는 사람의 주관과 작위적인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며 이는 주제가 객체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식의 그리기가 아니라 대상 속에서 본질적인 것들을 일구어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류장복이 그린 철암풍경은 자신의 신체적인 체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풍경이 지시하는 장소의 특수성과 작가의 신체가 결합‘되어야 비로소 작품이 된다. 그런 면에서 그의 그림은 시각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통감각적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신체적 회화, 생물적 그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의 드로잉은 바깥에서, 현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작품의 크기 역시 제한을 받는다. 대략 56과 76센티미터 정도의 크기, 자신이 지니고 다닐 수 있는 화면의 크기 안에서 그려진다. 그것은 자신이 신체와 세상과의 만남이 가능한 공간인 셈이다. 그 위에 가장 전통적인 소묘재료인 목탄을 주로 사용하고 더러 먹과 붓 등으로 그린다. 그가 인체를 그릴 때도 역시 모델을 앞에 놓고 작업하는데 지장이 없는 전지 크기 아내에서 이루어진다. 사실 풍경과 인물이나 그의 관심은 동일하다. 그것은 현장에서 살아 있는 느낌, 대상의 생명력과 기운을 어떻게 작업실, 작업으로 끌고 올 것인가이다. 자신의 내부, 안을 거쳐서 뱉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내부에서 이른바 삭힘의 과정이 있어야 하고 그 삭힘의 과정이 다름 아니라 앞서 언급한 ‘생물성’에 해당할 것이다.
다시 류해윤과 류장복
류해윤과 류장복의 그림은 모두 잘 그려진 그림이다. 세련되고 현학적인 현대미술과는 동떨어져 보이지만 그림의 진정한 힘과 매력을 지니고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과도한 장식이나 인위성이나 의도적인 멋을 부리는 것도 없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대상을 사랑하면서 그린다. 추억과 기억을 그리는 한편 이상적인 세계상을 희구하는 그리기와 자기가 속한 세계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진정하고 보듬고 알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 이들 부자의 그림이다. 상실과 회한을 그림을 통해 극복하고 위안 받고자 하는가 하면 단순한 재현이나 관습적인 그리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림에의 열망은 매우 멀어 보이면서도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들이 그림에서 보이는 덕목은 사실 기존의 미술수업을 통해 습득되긴 어려운 가치들이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성에서 연유한다. 아울러 세계와 삶에 대한 이해와 애정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오늘날 미술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희박하고 망실된 이 같은 가치와 덕목이 이 부자 그림쟁이에게 온전히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