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 행위미술의 태동과 전개
윤진섭
I. 들어가는 말
한국의 행위미술(1) (Performance:이하 ‘행위미술’로 통일함)은 불과 40여 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서양의 그것이 약 100여 년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연륜이다. 그러나 한국의 행위미술이 서양의 경우처럼 그 토대가 되는 전위예술(Avant-garde Art)의 오랜 전통에 깊이 뿌리박지 못하고 진행돼 온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경우 행위미술의 역사를 곧 전위의 역사로 대치해도 될 만큼 이 둘은 서로 겹을 이루며 진행돼 왔다. 이는 특히 1970년대에 활동했던 행위미술가들이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행위미술가’나 ‘이벤트(Event) 작가’보다는 ‘실험미술가’ 혹은 ‘전위작가’로 부르길 즐겨 했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2).
그러나 한국 행위미술사의 서장을 이루는, 1960년대 해프너들의 활동이 보여준 것처럼, 행위미술가들의 지속적이지 못한 활동은 행위미술의 역사를 단선적(斷線的)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97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공백기와 198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공백기는 특기할 만하다. 그래서 이 기간에는 설치나 오브제, 비디오 아트와 같은, 실험적 성격을 지닌 특정한 매체에 의한 작업들이 실험미술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3).
1980년대의 행위미술에 관한 기술이 주 목적인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된 내용만을 다루고자 한다. 80년대는 70년대와 달리 정치적 격변기였고, 그런 까닭에 미술도 다양한 가치와 이념들이 난무하면서 그룹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10. 26사태)과 ‘12, 12 사건’,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대변되는 신군부의 등장은 미술에도 영향을 미쳐 민중미술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II. 1980년대 ‘행위미술’ 태동의 배경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술계의 지형은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한다. 가장 큰 요인은 정치적 상황이었다. 유신헌법을 토대로 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과 이로 인해 비롯된 정국의 파행은 국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대변되는 재야 정치세력에 대한 탄압, 전태일의 분신과 YH사건으로 상징되는 노동자 투쟁 등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로 얼룩진 70년대의 암울한 상황은 민중미술이라는 정치적 아방가르드를 낳는 배경이 되었다(4).
1982년은 젊은 작가들이 기성화단의 아성에 도전한 해로 기록된다. 3일간의 신정 연휴가 끝난 벽두부터 안국동 소재 해영화랑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모색전>은 선언문을 통해 이 같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과거 20여 년간의 핵심적 구조가 과도한 헤게모니에의 추구로 인하여 상대적 파워의 구축을 초래하였고 급기야 구심세력의 분규를 노골화하기에 이르렀다. 젊은 세대의 입장은 불합리한 상태로의 함몰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20대 중후반의 작가들이 주축이 된 이 전시회의 선언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화단에는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렇게 결성된 40여 명의 작가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80년에 창립전을 갖고 태동된 ‘현실과 발언’ 그룹의 부상과 함께 이후에 태동하는 많은 그룹의 모태가 된다.
1982년에는 <젊은 의식전>, <임술년전>, <두렁동인전>이, 83년에는 <시대정신전>, <잡음, 혼선, 소란전>, <끓는 혼전>, <토해내기전>, <실천그룹전>이 결성되면서 현실 참여적인 성격이 미술계의 전반적인 흐름을 형성하였다. 84년에는 관훈미술관, 제3미술관, 아랍미술관 등 3개 화랑을 빌려 100여 명의 작가 및 단체가 참여한 대규모 전람회인 <삶의 미술전>이 열려 80년대 전반기 미술의 흐름을 이루게 된다.
한편, 모더니즘 진영에서는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듯한 기색이 농후했는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70년대 중반이후 실험미술에 주력하던 작가들 중 상당수가 현실참여적인 경향의 작업으로 전향한 사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가운데 몇몇을 들자면, 앞서 예로든 직접적인 원인 외에도 서구미술 전통에 기댄 현실과 작가의식 사이에서 배태된 정체성에 대한 문제, 그로 인한 괴리감에 대한 고뇌, 정치 현실에 대한 작가의식의 개안, 전통문화에 대한 재해석과 자생적 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소집단 문화운동의 태동 등을 들 수 있다.
서구미술 사조에 대한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경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더욱 심했다. 가령, 1983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린 <미국종이조형전>(5. 24-6. 13)이 당시 화단에 끼친 영향은 대표적인 경우다. 그 여파는 매우 심해서 같은 해에 열린 <앙데팡당전>에는 이의 아류가 상당수 출품되었고, 젊은 작가들은 물론 중진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이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엿보였다. 이는 70년대의 미술에서 이우환의 오브제 작품이 한국 화단에 미친 영향을 연상시킨다.
1980년대의 행위미술을 논하면서 화단의 분위기를 기술한 이유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8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왜 행위미술이 소강 국면을 맞이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원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벤트를 발표해 왔던 몇몇 작가들의 방향전환이나 평면에의 복귀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벤트와는 양상이 다른 행위미술이 이 무렵에 새로운 각도에서 시도되고 있었다. 81년에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던 <고상준행위그룹>과 김용문의 토우작업, 그리고 윤진섭의 작업이 그것으로 이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작업을 행하다 1986년에 동숭동 대학로에서 열린 <1986, 여기는 한국전> 행위미술 부문에서 만나게 된다. 회화, 조각, 섬유, 도조, 행위미술, 사진 등 140여 명의 작가가 모여 결성한 이 전시회는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작가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전국적인 규모의 대규모 미술제였다(5).
III. 1980년대 행위미술의 전개
1970년대 후반(1977-9), 서울에서 행해진 이벤트는 이건용, 성능경, 김용민, 장석원 등이 주도했다. 여기에 덧붙여 1977년 당시 견지화랑에서 열린 제6회 전(1977. 10. 25-10. 31)에서 강용대, 윤진섭, 김용민, 성능경, 장경호, 이건용의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는 윤진섭, 강용대, 장경호 등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윤진섭은 군에서 제대한 이듬해인 1982년에 당시 굴레방 다리에서 이대 쪽으로 올라가던 언덕길 중간쯤에 있던 화사랑에서 ‘시간자르기/숨쉬는 조각, 드로잉의 종언/갇혀진 선’이란 제하의 두 개의 행위미술 작품을 선보였다. <윤진섭행위드로잉전>(1982. 6. 20(일) 오후 2:00)이란 타이틀을 붙인 이 발표회에서 그는 블랙라이트를 이용한 작품을 선보였는데, 흰색 자루 속에서 검은 매직으로 드로잉을 하는 작품과 천정에 있는 사방 1미터 크기의 채광창에 검은 색 한지를 붙인 뒤에 나무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빛이 새 나오게 하는 드로잉 작업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이건용이 대전으로 내려간 탓인지 일종의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김용민, 성능경 역시 행위작업 보다는 평면이나 개념적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80년대 초반에는 서울보다는 오히려 지역에서 행위미술이 활성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81년 야외에서 자연과의 교감을 꾀하는 작업에 주력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를 결성, 공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작업현장을 사진으로 기록, 자료집을 발행하였다. 임동식을 비롯하여 고승현, 강희중, 이응우, 고현희, 김해심, 정장직, 이종협 등등 대전, 충남권 작가들이 중심이 된 이 그룹은 8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대중의 관심이 적었던 자연과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꾸준히 작업을 전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창설하는 중심이 되었다.
1981년은 공주에서 제1, 2회 <야투현장미술제>가 열린 해였다. 설치와 행위미술 분야에 약 2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그 중에서 안치인, 이두한, 나경자, 김정헌이 행위미술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보다 앞선 1980년에는 신탄강 변에서 안치인, 송일영, 최병규, 지석철, 김익규 등이 <대전78세대전> 현장 이벤트를 행했다. 또한 같은 해에 공주 금강에서 <금강현대미술제>가 창립되었는데 이 미술제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야외 설치미술제의 성격을 띠고 있어 야투, 대전78세대와 함께 충남, 대전권의 실험미술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 창립전에서 안치인, 송일영, 김영호, 김용익 등의 행위작업이 발표되었다. 1982년에는 <야투현장미술제>에서 안치인, 이두한의 2인 이벤트가 있었으며, 1981년에는 <대전78세대> 현장이벤트에서 안치인, 강정헌, 김영호, 김익규, 김철겸, 송일영, 신현태, 이두한, 지석철 등의 행위작업이 있었다.
1981년 대구에 거주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박현기는 ‘도시를 통과하며(Pass Through the City)’라는 행위미술을 행했는데, 이는 거대한 바위를 화랑까지 옮기는 과정을 통하여도시 전체를 퍼포밍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또한 낙동강 변에서 ‘번역자로서의 매체(Media as Translators)라는 제목의 행위미술술을 선보이기도 하였다(6).
대구는 70년대에 한국 미술계를 풍미했던 대규모 현대미술제의 맹아인 <대구현대미술제>가 열린 곳으로 미술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다. 1982년에 대구 낙동강에서 야외설치미술제가 열렸는데 그 이름을 <1982-현장에서의 논리적 비전전>이라고 붙였다. 이 행사에서 강용대, 김철겸, 박건, 안치인, 이두한, 이현재, 장금자, 홍현표 등의 행위작업이 펼쳐졌다. 1986에는 서울 남영동에 소재한 아르꼬스모미술관에서 <86행위설치미술제>가 열렸는데, 이 전시회는 설치와 입체작업 외에도 행위미술에 상당한 비중이 실린 전시였다. 이건용, 성능경, 윤진섭, 안치인, 강용대, 신영성, 이두한, 남순추, 고승현, 방효성, 김용문 등의 행위작가들이 초대를 받은 이 전시회는 이건용이 조직한 것으로 당시 매스컴의 대대적인 초점이 되었다. 이 전시회를 통해 전국의 행위미술 작가들이 서로 상면을 하게 되었으며, 그 뒤에 많은 행위미술제가 작가들에 의해 기획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신영성은 전기톱으로 나무 판재를 해체하는 작업을 행해 전시장이 온통 톱밥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 작업으로 주목을 받은 신영성은 백남준의 위성쇼 ‘바이 바이 키플링’을 통해 전 세계에 소개가 되었다. 이건용은 자신이 지난 소지품을 일렬로 들어놓은 뒤 전시장 바닥에 백묵으로 드로잉을 하고 발바닥으로 지워나가는 드로잉 행위를 행했으며, 안치인은 특유의 카드 작업을 선보였다. 윤진섭은 온몸에 청색 물감을 칠하고 검은 색 드로잉을 한 10여 명의 행위자들이 고정된 위치에 앉아 일정한 시간 동안 정지된 상태로 있는 <<숨쉬는 조각>>을 선보인 바 있다. 김용문은 흙으로 만든 탑을 중심으로 제의적 성격이 강한 굿 행위작업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IV. 1980년대 행위미술의 확산과 정착
80년대 행위미술의 특징은 장르의 크로스 오버와 퓨전 현상이다. 신디사이저와 같은 실험음악을 배경에 깐다든지 현란한 사이키 조명이 등장하기도 했다. 무용과 음악, 미술의 결합, 마임과 음악, ‘춤패 아홉’과 같은 집단적 실험이 나타났다. 미술을 전공한 행위미술가들이 수적으로는 가장 우세했지만,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 공동의 모색을 하기도 했다. <86행위설치미술제>가 미술전공자들이 모인 행사였던 반면, 1987년에 열린 <9일장>(바탕골예술관:7. 28-8. 5)은 죽음을 주제로 문학, 미술, 연국, 영화, 무용, 국악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인 행사였다. 동숭동에 있는 예술관의 건물을 흰색 광목으로 둘러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이 행사에 많은 행위예술가들이 초대되었다. 당시의 한 보도에 의하면(7), 이 행가의 기획 의도가 “서로 다른 장르의 벽을 헐고 현장성, 성징성, 상황성, 즉흥성, 축제성으로 요약되는 행동예술제를 열어보고자 하는 데”(박의순, 바탕골예술관 대표)에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이 행사에는 구상, 성찬경, 박희진, 조정권 등등 시인들이 ‘죽음’을 주제로 시낭송회를 갖는가 하면, 행사장 밖에는 ‘난지도’ 그룹의 설치작품이 전시되고,
“‘타의에 의해 파괴되는 생명’과 그 분노를 담은 기국서의 행위예술 <<방관Ⅴ>>와 이를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예술가 임경숙 씨의 <<우리의 아벨>>이 공연된다. 31일에는 행위미술과 무용이 어우러지는 신영성 씨의 ‘아굴의 기도’와 김기인 씨의 <<다스한 나라로Ⅱ>>가 발표된다”고 한다. 또한 한상근의 ‘춤패아홉’과 독일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통,막,살>>로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무세중이 <<통,피,살>>(통일을 위한 피의 살풀이)의 공연을 가진 바 있다. 바탕골예술관은 그 전 해에도 <<바탕. 흐름전>>을 기획하여 행위미술에 기여한 바 있다.
이 무렵의 분위기에 대해 한 신문은 “신선한 충격 전위미술 열풍”이란 표제어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8).
“기상천외한 해프닝과 이벤트를 주축으로 한 전위미술운동이 한창이다. 올 들어서는 음악, 연극, 무용 등을 미술 안으로 끌어들인 이른바 ‘행위미술’과 ‘총체미술’까지 등장, 신춘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신문은 올 들어 대규모 행위예술 관련 행사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고 전하면서 “지난 해 바탕골미술관의 <<바탕. 흐름전>>과 아르꼬미술관의 <<서울86행위설치미술제>>를 기폭제로 불붙기 시작한 젊은 신진들의 전위미술전은 올 들어서만도 10여 건. 1월의 <<겨울대성리전>>에 이어 <<서울요코하마현대미술전>>(2월 16-27일, 아르꼬스모), <<80년대퍼포먼스행위미술(9)>>(2월 20일-26일, 바탕골미술관).......<<대전87행위예술제>>(19-25일 대전쌍인미술관) 등이 실험성 짙은 전위작업으로 꼽히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신문은 또한 행위예술작가들을 언급하면서 현재 전국적으로 50여 명의 활동하고 있는데, 군산대 이건용 교수를 주축으로 윤진섭, 방효성, 문정규, 안병섭, 안치인, 이두한, 박창수, 한건준, 신영성, 이훈웅, 김준수, 김용문, 고상준, 조충연, 강정헌, 김정명, 심철종, 전일국 등과 신옥주, 임경숙, 이이자 등 여성작가들도 행위미술 작업에 투신, 폐쇄된 예술장르의 벽을 깨는데 앞장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해서 서로 교류를 트기 시작한 각 분야의 행위미술가들은 자구책으로 협회를 결성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하게 된다. 1987년 11월 22일 동숭동 소재 소금창고에서 발기위원 모임을 갖고 ‘한국행위예술가협회’ 총회 창립을 논의한 발기위원들(10)은 분과, 지부설치, 정관사항, 자문위원 추대, 행사 개최에 관한 건을 논의하였다. 제2차 발기위원 모임은 1988년 2월 29일 인사동 예전다방에서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는 분과의 증설, 정관확정, 자문위원 증원, 88년도 행사의 시기 및 규모, 이에 따른 구체적 내용을 토의하고 신임 발기위원으로 한상근(무용), 조충연(미술), 임경숙(의상), 김윤태(영화) 등을 위촉하였다.
몇 달을 끈 준비기간을 거쳐 1988년 한국행위예술가협회가 결성되었다. 회장에 윤진섭, 부회장에 이두한, 한상근 등이 선출되고 이건용, 무세중, 심우성, 이만방, 성능경, 김구림, 강국진 등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정식으로 출범을 보게 된 것이다.
한국행위예술가협회는 창립기념으로 독일문화원 강당에서 ‘전통연희와 퍼포먼스-그 접근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학술심포지엄(1988년 4월 30일)을 갖고 행위예술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모색을 꾀하였다. 또한 부대 기념행사로 안치인, 방효성, 박창수, 한상근, 이두한, 윤진섭의 행위미술 실연이 있었으며, <평화의 제(祭)-장벽을 넘어서>라는 타이틀로 컴퓨터 아트와 비디오 아트가 중심이 된 미술제를 개최한 바 있다.
“행위예술의 질적 향상과 저변확대, 행위예술의 국제교류, 행위예술에 관한 출판 및 세미나 개최, 행위예술 평론가 육성” 등을 모토로 출범한 동 협회는 한일행위예술페스티벌 개최를 비롯하여 협회 주최 정기 프로그램으로 퍼포먼스 발표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대입구에 있는 청파소극장에서 열린 발표회로는 성능경의 70년대 이벤트 재연(1988. 6. 27)을 비롯하여 임택준, 심홍재의 <행위예술발표회>(1988. 7. 25)가 있었다.
같은 해 6월 19일에서 26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는 <쿼터그룹전>이 열렸는데, 이 전시회에서는 이이자, 김준수, 임택준, 박춘희, 심홍재 등의 행위미술 작품이 발표되었다. 윤진섭은 아트포스트에 기고한 리뷰를 통해 이들의 작업이 “이이자와 박춘희를 제외한 나머지 세 작가의 경우 퍼포먼스의 주요 경향 가운데 하나인 정치성과 제의성이 강하게 부각된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오늘의 상황에서 퍼포먼스라는 장르가 갖는 기능, 효용, 한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11)고 썼다. 그는 특히 심홍재의 작업에 주목하여 “그 중에서도 신인으로 등장한 심홍재는 ‘죽음’이라는 흔하지만 여전히 묵직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 퍼포먼스가 지닌 실연의 의미를 여실히 드러내준 작가로 여겨진다.”고 평가하였다.
1987년 2월 20일부터 2월 26일까지 바탕골미술관에서 열린 <’80년대의 퍼포먼스-전환의 장>에는 이두한, 방효성, 신영성, 윤진섭, 남순추, 안치인, 문정규, 임경숙, 고상준, 조충연, 강용대, 박창수, 김영화 등이 참가하였다. 이 실연의 특징에 대해 미술세계에 기고한 윤진섭의 리뷰를 살펴보면,
1. 빛, 소리, 냄새, 연기 등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흔히 접하기 쉬운 물질을 이용하여 익숙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작업, 즉 환경예술(Environmental Art) 적인 요소를 도입한 작업: 이두한의 <<미술, 패션, 연극인의 공동작업에 의한 복합비타민(미술:이두한, 연극:김태수, 패션:권은순), 박창수 <<호흡 Ⅶ>
2. 기성의 사물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해 전혀 낯선 사물로 변화시키거나 조형적 신체실험을 꾀하는 작업 또는 다른 상황을 설정하는 이벤트적인 요소가 강한 작업:문정규 <신체성과 사각 그리고 공간성과 매체>, 조충연 <무제>
3. 연극, 미술, 무용, 음악 등 여러 장르 중 특히 어느 한 장르가 지배적으로 강조되면서 전체적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은유와 상징이 중시되는 작업, 고상준 <제4의 공간>, 안치인 <드로잉 퍼포먼스>, 윤진섭 <보호구역>, 방효성 <백일몽>
4. 관객을 참여시키거나 오브제로 이용하며, 자연스런 상태에서 전개해 나가는 작업: 남순추 <명제 미상>, 강용대 <미이라의 환생과 해방을 위하여>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12).
앞서 쿼터그룹의 심홍재를 언급하면서 기술한 바 있듯이, 80년대 행위미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제의성이다. 한국의 굿 내지는 무속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 주제에 지속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작가는 무세중이지만, 이러한 주제는 김용문과 김영화의 작업을 통해서 여러 차례 선보인 바 있다. 김용문은 토우를 이용한 행위미술가다. 1983년 지리산 고사목지대에서 가진 <매장, 그리고 발굴전>을 비롯하여 <수장제>, <방사, 방사, 방생>, <애장>을 통해서 여러 차례 보여준 바 있듯이, 그의 작업이 지닌 요체는 민중적 한에 대한 ‘풀이’다. 제주도 이호동 골왓마을에서 그는 항아리를 바다로 떠내 보내는 행위작업을 행하였다. 윤진섭은 그의 작업에 대해 “토우를 매장하거나 강물에 던지는 행위는 의도적이되, 어느 시기에 이를 발굴해 내는 자는 전혀 예기치 않은 우연한 만남”이라고 평한 바 있다(13).
김영화의 <죄다, 죄다>는 탯줄을 연상시키는 검은 색의 긴 줄을 굽이굽이 서려놓고 한복을 입은 행위자(김영화)가 벌이는 한판의 ‘한’풀이 같은 행위미술이었다. 대학로에서 가진 행위발표에서 김영화는 여성성이 강하게 부각된 작품을 보여주었다.
1987년은 유독 행위작업의 발표가 많았던 해였다. 이 해에 아르꼬스모미술관에서 <1987-서울. 요코하마 현대미술전>이 열려 이건용, 안치인, 이케다이치, 히그마 하루오의 행위작업이 발표되었다.
또한 이 해에 열린 <대전행위예술제>는 대규모 행위미술 발표회였는데, 이건용을 비롯하여 성능경, 안치인, 김용문, 강정헌, 윤진섭, 방효성, 문정규, 심철종, 박창수, 이두한, 한건준, 심홍재, 임택준, 고상준, 조충연, 전일국, 김정명, 김명순 등이 각기 독자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7년 10월 11일에는 동숭동 대학로에서 윤진섭퍼포먼스그룹의 창단실연이 열렸다. <거대한 눈>이란 타이틀로 열린 이 작품은 은색으로 전신을 분장한 행위자들과 경호원들이 등장, 정치 현실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80년대 후반에는 해외에서 활동하던 행위작가들이 귀국, 전시회를 통해 작품을 소개하였다. 1088년 동숭동 소재 두손갤러리에서 있었던 개인전 오픈 날에 박혜숙은 핵 문제를 주제로 한 행위미술술을 선보였으며, 독일에서 활동하던 이상현은 1988년 3월 2일 토탈미술관에서 5부작으로 구성된 <잊혀진 전사의 여행> 중 마지막 행위미술(안드로메다에서 운명의 여신과의 만남)을 행하였다. 박혜숙과 한 사람의 여자 더블베이스 연주자가 등장하는 이 실연에서 이상현은 물이 담긴 검은 색의 철제 관 속에서 도르레가 장치된 널빤지 위에 누워 물고기를 가슴에 품고 상상의 여행을 떠나 운명의 여신을 만난다는 줄거리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80년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1989년에는 네 개의 큰 행사가 있었다. 10월 26일부터 30일까지 5일간 서울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한일 퍼포먼스 페스티발>에 참가한 작가는 고상준, 김사하, 김해민, 무세중, 문정규, 박창수, 심우성, 심철종, 심홍재, 이불, 임경숙, 조충현 등이며, 일본 측 작가는 겐이치 다케다, 치에코 토리이, 유지 아키모토, 도키고 오야마, 고지 오구시, 노부키 야마모토, 마리코 스즈키, 미슈다카 이시이 등이다. 축제적 성격을 띤 이 행사는 한일 양국의 행위미술을 통해 문화적 교감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간의 행위미술을 통한 교류의 기회는 80년대 후반에 들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동숭아트센터에서 갤러리에서 열린 <동방으로부터의 제안전>은 그 일환이었다. 이 전시회에서 이건용과 방효성, 일본의 이케다 이치가 행위작업을 보여주었다. 이건용은 한국의 독을 이용하여 동경에서 가져온 물에 머리를 감고 비누물이 묻은 머리카락을 독의 언저리에 비비면서 ‘어머니’를 외치는 행위를 통해 가계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적 회고 시스템’을 주장하였다. 방효성은 동숭동의 거리에서 무작위로 선택한 오브제와 동경의 거리에서 가져온 오브제, 그리고 관객의 소지품을 석고로 혼합하는 행위를 보여주었다(14).
1989년 7월 7일에서 17일까지 나우갤러리가 기획한 행위미술제는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그리고 소통>이라는 긴 타이틀을 지닌 것이었다. 참여작가는 강용대, 김준수, 김재권, 남순추, 문정규, 방효성, 성능경, 신영성, 심홍재, 안치인, 이건용, 이두한, 이불, 이이자, 임경숙, 육근병, 윤진섭, 조충연 등이었다. 이 행사는 당시 열심히 활동하던 국내의 미술전공 행위작가들이 대거 참가한 것으로 매스컴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다. 첫 주의 금, 토, 일요일과 그 다음 주의 금, 토, 일요일에만 행위발표가 있었고, 나머지 기간에는 참여작가들의 기록사진, 드로잉, 작가의 발언, 작업계획서, 행위의 결과물 등이 전시되었다(15). 특기할 사항은 18명의 작가가 일주일동안 행한 작업의 기록을 미술평론가인 김영재가 전담, 자료로 남기는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현재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원로예술인들의 구술채록을 통해 기록 문화를 만들어가는 시도보다 훨씬 앞섰던 이 개인적인 노력이 기억에 남는다.
1989년 3월 26일부터 4월 2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89청년작가전>은 1981년 창설 이래 행위미술 작가를 초대한 첫 전시회이자 마지막 전시가 되었다. 이 전시는 <젊은 모색전>으로 개명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지만, 말썽은 이 해의 전시에서 터지고 말았다. 이 행사의 커미셔너인 미술평론가 윤우학은 안치인, 윤진섭, 이두한, 이불 등 네 명의 행위작가를 초대하였는데, 이 작가들은 엄숙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앙 전시장을 온통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이두한은 곤로에 꽁치를 굽거나 알몸을 석고로 뜬 뒤 국부에 경광등을 대고 돌아다니는 소동을 부렸는가 하면, 윤진섭은 중앙전시장의 정면에 난 대형 유리창을 향해 180개의 계란을 투척, 행위 드로잉을 행했다. 이불은 짐승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봉제 의상을 입고 전시장을 누비고 다녔고, 안치인은 요란한 음악에 맞춰 수 백 장의 카드를 뿌렸다. 당시 이 장면이 ‘문화가 산책’이란 텔레비전 프로를 통해 소개가 되었는데,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한 한 국회의원이 이경성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게 예술이냐”며 항의를 했다는 후일담이 있다(16).
V. 끝맺는 말
80년대의 행위미술은 시기적으로 볼 때 60-70년대와 90년대 이후의 허리 부분에 해당한다. 총칭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이 용어는 80년대를 통해 퍼포먼스라는 용어와 함께 혼용되다가 90년대 이후에는 퍼포먼스가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주최 측의 기획 의도에 따라 ‘행위미술’이란 말로 통일하였다. 오늘날 퍼포먼스라는 말이 보통명사가 돼 버렸지만, 정작 우리의 고민은 행위미술을 알파벳을 빌어 Haengwoimisul로 표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고유의 양식을 지닌 Taekwondo나 Kimchi와는 다르다. 중국인은 모든 외래어를 수입되는 즉시 한자로 바꿔 사용하고 있지만, art center를 藝術中心으로 표기하는 그 속내에는 중국인 특유의 세계중심주의적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행위미술을 한자로 표기한다면 적어도 한자문화권에서는 통용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한자와 영어(Performance Art)의 병행 사용도 가능할 것이다. “언어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명제를 생각한다면 용어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지만 정작 문제는 행위미술이 우리만의 고유한 예술형식이 아니라는데 있다.
행위미술은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하며, 형식이나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80년대의 행위미술은 90년대 행위미술의 전개를 위해 자리를 깐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으로 한 시대를 살아 온 작가들의 땀이 노력이 배어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는 이번 행사가 이들의 족적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
1) 80년대 당시에는 ‘행위예술’보다는 ‘행위미술’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많이 쓰였다. 퍼포먼스라는 용어는 80년대에 혼용되다가 90년대 이후에 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총칭적인 의미에서 ‘행위미술’이란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2) 1970년대 후반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3학년 학생의 신분으로 [S.T]그룹에 참여할 수 있었던 나는 대학의 대선배인 이건용, 성능경, 김용민 제씨와 친분을 맺으면서 행위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개념미술에 심취했던 나는 굴레방 다리 근처에 있던 ‘이건용 화실’에 출입하면서 이건용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 파리비엔날레에 <<신체항>>을 출품, 현지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유명인사가 돼 있었던 그에게는 전위미술에 관심이 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잦았다.
3)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 선보인 ‘무’동인과 ‘신전’동인에 의한 한국의 첫 해프닝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이후,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에 의한 해프닝과 김구림 등이 참여하는 ‘제4집단’의 해프닝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시기는 1968년에서 1970년이다. 이 공백기간에는 1975년에 김점선이 기획, 연출한 <홍씨상가>(1975년에 홍익대학교 졸업식장에서 행해진 장례식 해프닝)가 유일하며, 1976년 이건용의 이벤트 작품이 선보이면서 70년대 중후반의 이벤트 시대가 열리게 된다. 1980년대의 공백기는 이건용의 목원대 진출과도 무관치 않다. 서울에서 김용민, 성능경, 장석원 등과 함께 이벤트 활동을 벌이던 이건용이 목원대학의 강사가 되어 대전에 내려가게 되는데, 이때부터 서울에서의 행위예술 발표가 뜸하게 된다. 장석원은 군 제대 후에 ‘공간’지의 편집장으로 근무하면서 미술평론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한편, 대전으로 간 이건용은 목원대학 제자들에게 행위미술을 전파, 안치인 등 당시 20대 중반의 행위미술가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4)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155쪽.
5) 윤진섭, 한국 행위미술의 전개와 향방-60년대 해프닝에서 80년대 행위미술까지, 고상준행위그룹 창단공연 도록, 1986.
6) 문정규, 행위미술의 특성과 한국 행위미술의 위상, 한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1995, 85쪽.
7) 조선일보, 1987년 7월 18일자, 문화면, 정중헌 기자.
8) 경향신문, 1987년 3월 26일자, 문화면, 정철수 기자.
9) <<80년대 퍼포먼스-전환의 장>>의 오기임. 필자 주.
10) 제1차 발기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안치인, 고상준, 박창수, 윤진섭, 방효성, 심철종, 김윤태, 이두한, 남순추.
11) 윤진섭, ‘감성의 일깨움’과 퍼포먼스, 아트포스트, 제6호, 1988. 7. 1
12) 윤진섭, 문정규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89쪽.
13) 윤진섭, 김용문-‘흙’으로의 회귀의식을 주관하는 사제, 김용문 개인전 도록 서문.
14) 문정규, 앞의 논문, 91-2쪽.
15) 문정규, 앞의 논문, 91-2쪽.
16) 행위예술 달걀 투척싸고 미술관과 시비, 세계일보, 날짜미상.
참고문헌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대원, 2000
윤진섭, 감성의 일깨움과 퍼포먼스, 아트포스트, 제6호, 1988. 7. 1
윤진섭, 김용문-흙으로의 회기의식을 주관하는 사제, 김용문 개인전 도록.
윤진섭, 한국 행위미술의 전개와 향방-60년대 해프닝에서 80년대 행위미술까지, 고상준행위그룹 창단공연 도록, 1986
문정규, 행위미술의 특성과 한국 행위미술의 위상, 한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1995
조선일보, 1987년 7월 18일자
경향신문, 1987년 3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