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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놀이 展

이선영

인간과 인형

갤러리 나요에서 열리는 기획전에 참여한 권재홍, 김다영, 장선아, 안두진 등 4명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동시대의 대중문화나 하위문화subculture에서 발췌하거나, 또는 그 눈높이에 맞추어 창안된 캐릭터나 인형을 모티브로 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캐릭터나 인형은 단순히 유아적이고 장식적인 소재로 체택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을 묻는 비유적 오브제이다. 인형은 작가별로 조금씩 다르게 변형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각 작가가 고안한 서사적 장치 속에 배치된 캐릭터 또는 인형을 통해 인간에 대한 또 다른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 이 전시의 목적이다. 이들 작품에서 인형은 여러 소재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서사의 핵심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놓는 것은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무의식 속에 잠겨있는 진실, 즉 인간 자신을 이루고 있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락과 놀이의 기구이기도 한 인형은 생명이 없는 유사(類似) 인간적 형태를 가지며,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전제로 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인간 주체와 비교되는 그림자나 분신, 타자 등으로 간주되어 왔다. 유사 인간으로서의 인형은 근대의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완성되기 시작한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휴머니즘과 역학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장엄한 시계장치의 지배로 우주를 해석한 뉴턴 이래, 인간도 기계적 원리로 작동한다고 본 데카르트의 사고는 근대적 인간관의 기초가 되었다. 게이비 우드는 [살아있는 인형]에서 1774년에 만들어진 자동인형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 한다’라는 글을 썼다고 전한다. 근대적 인간관을 정립한 데카르트의 언설은 시계태엽과 금속 조각으로 만들어진 타율적인 존재인 인형과 묘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신체가 기계 역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라는 비유를 사용한 데카르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간 18세기의 의사 라 메트리는 인간을 스스로 태엽을 감는 기계라고 간주했다. 그에 의하면 신체의 각 부분은 그 안에 각각의 욕구와 균형을 이루는 힘을 지닌 스프링을 포함하고 있었다. 18세기의 자동인형automata이래, 인형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 결집되는 매개물이었다. 인형은 주체보다는 분신에 가까우며, 자율성 보다는 자동성을 예시하고, 예술보다는 놀이의 영역과 관련된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오늘날의 인간과 문화가 그러하듯, 주체-자율성-예술이라는 범주보다 분신-자동성-놀이라는 범주와 더욱 가까운 듯하다. 이 전시에서 인형은 인간을 구조화하는 권력(권재홍), 인간 사회에 대한 풍자적 무대(김다영), 인간성에 내재한 기괴함과 공포(장선아),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분신(안두진)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권재홍 조립식 플라 모델 속의 소년 인형

권재홍은 조립식 플라 모델(plastic model)의 형식 속에 배열된 인형이나 로봇을 통해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플라 모델 속에는 폭력이나 억압 등을 연상시키는 은유적인 사물들과 소년의 이미지가 공존한다. 주근깨가 있는 불량소년을 중심으로 배열된 분절된 사물들은 주인공 소년의 도구이기도 하고, 그를 에워싼 환경이기도 하다. 인형과 사물을 연결시켜주는 사각형 뼈대는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의 조합을 통해 놀이적 특징을 극대화시킨다. 주제에 따른 다양한 변주들 가운데에서도 엄격하게 지켜지는 규칙은 일상적 세계 한가운데 있는 일시적 세계들이며, 폐쇄적인 총체를 구성한다. 놀이가 펼쳐지는 한정된 장인 하얀색 플라스틱 사각형은 바둑판이나 장기판처럼 무한대의 조합이 가능한 틀이 된다.

권재홍은 자신의 취향에 의해 선택된 사물과 인물을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배열한다. 불경스런 자세를 취한 학사모 소년은 학벌중심사회를 풍자한다. 권투장갑, 터진 샌드백 등으로 나타나는 폭력은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소년의 이미지로 집약된다. 태극기의 태극을 붉은 색이나 스마일 형태로 바꾸어 놓거나, ‘뷁!’ ‘존나 잘했어요’ 같은 신조어와 비속어의 남발은 아름다움이나 영원함 따위의 순수 예술적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품은 예술보다는 놀이적 특징, 즉 열려있는 구조를 지향하는 엄격한 규칙의 준수에 가깝다. 특히 플라 모델 속에 인형과 함께 등장하는 엉성한 로봇들은 사회적 규율의 내면화와 자동화를 암시하는 캐릭터이다. 최근작 [감옥 철인 22호]에는 감옥 문, 깡통 로봇, 권총, 우주선에 실린 동물 등의 요소가 배치된 것인데, 궁극적으로 근대의 기획이 완성하려는 순종적 인간상과 로봇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귀족의 오락을 위한 자동인형의 제작자들은 19세기로 넘어가면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의 고안자로 변신했다.

사회적으로 볼 때, 인간과 기계의 연결은 신체 중심의 규율의 확립과 연관된다. 권재홍의 작품에서 공부방의 문과 감옥의 문은 크게 구별되지 않으며, 공부하는 기계는 처음에는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다가, 나중에는 타인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폭력의 재생산자가 되는 연쇄적 순환 고리를 이룬다. 인형이나 로봇은 구조와 체제가 요구하는 임무에 순종하는 신체로 권력이 축약된 모델이기도 하다. [감옥의 역사]의 저자 미셀 푸코자 지적하듯이, 신체와 그것에 의해서 조작되는 물체가 맞닿는 모든 면에 권력이 스며들어 양자를 서로 묶어놓는다. 권력은 신체-병기, 신체-도구, 신체-기계라는 복합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복종의 기술을 통해 새로운 객체가 만들어지는데, 그 객체는 서서히 기계적인 신체의 외양을 갖춘다. 푸코는 이 책에서 인간에 대한 통제와 그 활용을 위한 세부의 세심한 관찰, 그리고 동시에 사소한 것에 대한 정치적 파악으로부터 근대적 휴머니즘의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김다영 소우주적 무대 속의 인형들

김다영은 크고 작은 전구 안에 인형들을 넣는다. 전구 안의 인형들은 피노키오, 백설 공주, 피터 팬처럼 널리 알려진 동화의 캐릭터들인데, 이들은 전해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각색 되며 비판적인 패로디의 대상이 된다. 여성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발휘하여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주와 왕자, 미녀와 영웅이 등장하는 동화들은 고정화된 성역할 모델의 전형으로, 깊숙이 내면화되어 불평등한 질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가령 작품 [남자란 이름의 불쌍한 족속들]에는 성기 모양의 석유 주유기와 알전구의 결합을 통해 가부장적 남근주의를 풍자적으로 표현한다. 알전구 안에는 아톰이나 뽀빠이 같이 남성성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들어있다. 그러나 왜곡된 성역할 모델 속에서 가부장적 남성성의 반대 항이 대안적 정체성이 될 수도 없다.

작품 [perfect flower]에서 거대한 꽃으로 상징화된 여성은 가시를 품고 있는 암술에서 자기를 보호 본능만이 남은 불모의 꽃으로 표현된다. 김다영의 작품에서 동화나 그것에 대한 비판적 독해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독특한 소우주로서 꾸며진 무대이다. 전구 안을 또 다른 동화의 무대로 삼아 펼쳐지는 세계는 상징적인 소우주를 형성한다. 알전구 안팎에서 펼쳐지는 무대는 원초적 자연이나 무차별적으로 강요되는 사회적 법칙을 넘어서 놀이하는 자가 정한 일관성 있는 규칙의 체계에 진입한다. 놀이는 그것이 펼쳐지는 특수한 시공간을 가진다. 놀이의 영역은 ‘닫혀 지고 보호받고 따로 잡아둔 세계, 즉 순수 공간’(카이유와)이며, ‘일정한 규칙이 지켜지고 있는 신성하고 분리된 영역’(호이징가)을 말한다. 놀이는 일상의 세계의 한복판에 있는 일시적인 세계인 것이다. 알전구는 우주 속에서 빛나는 하나의 행성으로 설정된 일종의 섬이자 무대가 된다.

그러나 급격한 생산 소비의 주기에 의해 이미 김다영이 사용하는 알전구는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활용하는 구식 동화의 주인공들도 곧 잊혀 질 것이다. 놀이를 위해 구획된 안정된 장소는 삶에 의해 침해될 수 있다. 카이유와에 따르면 유희는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단번에 유희를 부서뜨리거나 일소해 버리기 때문이다. 깨지기 쉬운 알전구는 놀이의 경계선 밖, 즉 삶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알전구처럼 김다영이 연출한 또 다른 세계는 놀이가 가지는 환상(illusion; 이 말은 놀이에 들어가는 것 in-lusio를 뜻한다고 한다)적 특성을 가진다. 허구적인 세계 속에서 인형들은 흉내 내기 놀이를 통해 세상의 질서를 풍자한다. 여기에는 모형으로 축소된 삶이 있다. 닫혀진 소우주를 형성하면서도 이동성을 가지는 작은 무대들과 배우들, 세상에 대한 비유를 담은 인형과 그 투명한 용기(容器)로서의 알전구에는 꿈 또는 환각, 그리고 사실이 얽혀있다. 환상적 내용물의 서사적 사실성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포함한 상호텍스트적인 독해를 전제한다.




장선아 괴기함과 공포를 낳는 인형

장선아의 인형들은 권재홍이나 김다영의 경우처럼 안전한 보호막이나 완충장치가 없다. 거기에는 심리학자들이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잠재적 공간이 희박하다. 주체의 영역도 객체의 영역도 아닌 모호한 잠재적 공간 속에서 주체는 적대적인 환경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다. 동물과 달리, 아동기가 긴 인간에게 특유한 이 잠재적 공간에서 놀이나 예술 같은 상징적 우주가 구축되곤 한다. 그 잠재적 공간 속에 가시들이 박혀있다. 때로는 체액의 이미지로 채워진다. 작은 인형들은 외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상처받거나 상처를 줄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신체의 구멍들에서 돋아난 가시나 흘러내리는 체액의 이미지는 경계가 소멸된 영역에서 발생하는 기괴함을 보여준다. 작품 [백설 공주의 분홍가시]는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발레리나 인형에 엄나무 가시를 붙인 것인데, 가늘고 섬세한 선을 가진 하얀 발레리나와 눈에 박힌 붉은 가시의 대조가 섬뜩하다.

작품 [동쪽 달빛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엄마와 아이 셋이 손에 꽃을 들고 함께 서있는 가족 인형이다. 형광 핑크색으로 칠해진 작은 인형들에는 눈구멍에서 빠져 나온 붉은 실이 늘어져 있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모든 오염의 상징체계의 초점이 육체라고 말한다. 육체의 경계는 모든 위험하거나 불안정한 경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신체는 나 자신과 그 밖의 모든 것과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데, 장선아의 인형들에 꽂혀있거나 돋아난 가시들은 그 경계를 의문시한다. 경계가 와해될 때 기괴함이 발생한다. 기괴한 것은 금기위반의 환상을 나타낸다. 페미니스트들은 기괴함이 재현자체의 구조 속에 내장된 남성성의 부호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기괴한 것은 오랫동안 친근했던 것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야기 시키는 것이다. 그는 [기괴함the uncanny]이란 에세이에서 자동인형의 예를 들면서, 생명 없는 것과 생명 있는 것 사이의 경계에 관해 지적인 불확실성을 느낄 때 생기는 감정을 언급한다.

겉보기에는 살아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 의심스러울 때 기괴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인형은 기계와 마찬가지로 두려워하는 자신의 일부를 상징한다. 인형은 우리 내부에 깊이 잠재한 낯선 타자를 불러들인다. 또한 장선아의 인형은 여성성이 극대화되어 있다. 인간의 욕망이 투사되는 유사 인간의 세계에서 육체적 심리적 성차는 강화된다. 과장된 성징은 자연적 규범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에서 성적 차이의 우선적인 표식이 되기 때문이다. 발레리나의 눈에서 돋아난 가시는 과장된 여성성의 괴물같은 특성을 강조한다. 자기 안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는 모성이 종종 괴물처럼 표현되듯이 말이다. 오랜 신체적 훈련으로 다져진 발레리나의 자세는 기계적인 정확성을 가진다. 기계적인 것과 여성이 결합되면 불안과 기괴함은 증폭된다. 또 다른 작품인 인형가족에는 아버지가 부재하다. 어머니와 같은 색으로 칠해진 아이들은 모체에서 무성 생식으로 돋아난 분체처럼 보인다. 인형가족이 보여주는 것은 유성 생식에 기초한 유기체적인 가족 모델의 해체이다. 자아와 타자의 구별이 사라지고 자식을 혹처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여성은 나머지 반쪽으로서의 성을 초월한다.

안두진 분신으로서의 낭만적 영웅

안두진은 동서고금의 성소를 화려한 색채 입자들의 이합집산과 오브제들의 설치 형식으로 보여준 바 있지만, 근래의 작품으로 하위만화의 이미지가 도입된 회화가 있다. 두 색조의 대비로 이루어진 블랙 시리즈가 그것인데, 그 주인공들은 성전에 참여하는 기사처럼 강렬한 파토스에 젖은 영웅적 인물이다. 강한 그림자가 특징인 블랙시리즈는 빛과 어둠을 대비가 강한 바로크와 낭만주의 회화와 프랭크 밀러의 만화 [씬 시티 sin city]의 기법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빛과 어둠의 대조는 종교적 상징주의 및 느와르 풍의 하위문화와 결합된다. 자연의, 또는 사회의 재앙을 헤쳐 나가는 영웅들은 원초적 혼돈에서 탄생한 괴물이다. 그들은 낭만주의 이래로 상상력과 창조력의 증거였다. 과거 또는 현재의 숭고한 장면들에서 취해진 상황과 그 안에 배치된 캐릭터들은 가공(架空)의 인물이며, 가공의 상황에 어울리게 행동한다.

기괴한 복장을 한 영웅은 변장을 한 인물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캐릭터들은 그림자가 그렇듯이 분신의 테마와 연결된다. 그들은 환상적인 변장과 환각적인 상황에 사로잡혀있다. 큰 대조를 이루는 빛과 그림자는 주변의 만화경적인 색채 못지않게 변화무쌍한 자아를 표출한다. 여기에서 자아에 대한 고정된 상은 붕괴되고, 거울처럼 수많은 투사와 상상적 동일시의 자리를 제공한다.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상은 고정되지 않고 변하는 투사이며 순간의 칼날이 고정시키는 정교한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상은 고정된 정체성이지만, 실제의 나는 흩어져있다. 동일한 자신을 잡을 수 없으며, 정체성이 확인되기 보다는 낯선 분신으로 구현된다. 안두진의 캐릭터를 이루고 있는 강렬한 명암의 대조는 인간과 그 반사상 사이의 균열을 강조한다.



보네에 의하면 심리적 억압을 벗어나고 좌절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분신은 원래의 주체를 희미하게 만들고, 결국은 주체를 벗어난다. 자아의 분열을 드러내는 그림자와 반사상은 분신이 되어 주체의 책임감을 덜어주면서 금지된 충동을 이용하고 해방시킨다. 그러나 반사상은 단일성 보다는 상의 일그러짐이나 심리적 해체로 귀결된다. 안두진의 캐릭터에서 발견되는 이타성은 분신의 특징이다. 분신은 주체를 배제하면서 주체로부터 동일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앗아간다. 이렇게 해서 내부세계와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약한 고리가 끊어지게 된다. 자유를 얻은 반사상은 또 다른 괴물이 되어 주체보다 더욱 강력해진다. 반사상 앞에서 그가 느끼는 현기증과 기반 없고 맹목적인 자유는 거대한 공허를 낳는다. 한편으로 공허는 열정이나 신념으로 채워져야 하는 거대한 빈자리라는 점에서, 무한한 잠재성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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